카스테라,라고 쓰면 카스텔라,라고 바꾸라고 나온다. 나는 카스테라다. 카스텔라는 싫다. 나처럼 소심한 사람이 '싫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카스테라는 카스텔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카스테라가 나의 삶에 부드럽고 뻑뻑하게 들어왔지 카스텔라는 머나먼 나라의 금발의 미네르바처럼 생소하기만 하다.


카스테라를 처음 맛본 그날, 그날이 확실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대단한 일이었다고 기억된다. 카스테라가 가진 그 촉촉한 감촉이라든가 입천장에 달라붙는 느낌이라든가. 왠지 처음에는 텁텁해서 우유와 궁합이 잘 맞다, 라든가.


카스테라를 처음 먹어보기 전의 빵에서 봐왔던 모양에서 벗어난 사각형의 모양에 어린 마음을 몽땅 빼앗겨버렸다. 그동안 카스테라를 모르고 잘도 어린 삶을 헤쳐 왔는지 모를 정도였다. 처음으로 카스테라를 맛 본 그날 루벤스의 그림이 머리 위에 떠오르고 어린 나의 작은 혼이 뭉크의 그림처럼 빠져나갔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그 못지않은 경험이었다.


카스테라라는 이름도 그때 처음 들어서 생소했지만 어느샌가 입으로 카스테라, 카스테라,라고 되네 이다 보면 어느 순간 친구처럼 가까이 와 있었다. 묘한데 자꾸 말하게 되는 미지의 친구 이름 같았다. 이후로 집 앞 구멍가게에 가면 카스테라를 슬쩍 집어 들고 동전을 내밀고 볕이 드는 따뜻한 대문 밑에 앉아서 그것을 제대로 뜯어먹곤 했다.


카스테라는 어쩐지 겨울에 많이 먹었다. 그늘이 아닌 따뜻한 곳에 앉아서 뜯어서 먹고 있노라면 추운 겨울이라도 왠지 따뜻했다. 집에서 먹는다면 우유를 뜨겁게 난로 위에 데워서 같이 먹었다. 그러면 카스테라는 ‘겨울은 말이야, 카스테라와 함께 보낸다면 따뜻할 거야’ 하고 말해주었다. 그 보이지 않는 말에 기대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카스테라는 기억 속에서 점점 멀어지듯이 곁에서 사라졌다. 지금은 손만 뻗으면 카스테라보다 열 배는 맛있고 백배는 예쁜 카스텔라가 세계를 점령했다. 이후로 겨울은 그렇게 따뜻하지 않았다. 덥덥하거나 춥거나. 그런 겨울이었다. 그래서 겨울은 더 이상 기다리는 계절이 아니게 되었다.


겨울을 싫어한다고 해서 마음으로 밀어낸다고 해서 뒤늦게 온다든가, 오지 않거나 하지 않는다. 겨울은 낙엽 지고 비가 오고 나면 어김없이 입에서 입김이 후후 나오면서 옆에 와 있다.


크리스마스가 20여 일 앞으로 다가온 겨울의 밤은 어느 곳이나 반짝반짝 전구와 트리가 빛을 발한다. 언제부터인지 그 반짝거리는 불빛들 앞을 지나칠 때면 빛나는 전구들은 조금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넌 행복하니? 그래서 넌 만족하냐? 네가 있는 곳은 어디냐?’라고 자꾸 물어온다. 그 대면이 껄끄러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반짝이는 전구를 피해서 다녔다.


카스테라 같은 여자가 있었다. 부드럽고 가만히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부서져 없어져버릴 것 같은 여자. 그녀는 느릿하게 움직이는 나를 달리게 만들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언젠가 그녀의 긴 속눈썹을 본 적이 있다. 달빛이 긴 속눈썹에 내려앉았을 때를 기억한다. 아름다운 모습.


세계는 묘해서 눈앞에 있는 것에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어서 빨리 그녀에게서 졸업하고 싶었다. 카스테라와 같은 그녀는 멀리 떠나가 버렸다.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예고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겨울비에 카스테라는 구멍이 나고 씻겨 비 비린내와 함께 없어졌다.


그녀에게서 졸업을 해버리고 나면 그동안 그녀를 좋아하고, 너무 좋아해서 미워했던 그 마음까지 모두 거짓말이 될까 봐 두려웠다. 가끔 생각한다. 요즘은 카스테라가 어디에 있을까. 다시 카스테라를 손에 움켜쥘 수 있을까. 입으로 다시 카스테라, 카스테라라고 한 없이 불러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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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12-01 14: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맞아요. 예전엔 카스테라라고 했는데 어느 때부턴가 카스텔라라고 하는데
뭔지 모르게 불만스럽더군요.
요즘엔 그거 먹을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특별히 좋아하지 않아서.
그래도 예전에 저 어렸을 때 전기 오븐을 처음 사고 엄마가 계란
잔뜩 넣고 해 주시던 다소 투박한 카스테라가 문득 생각이나기도 합니다.
정말 우유와 함께 먹으면 속이 든든할 텐데.
초등학교 때 점심 도시락 대신 사 가져가기도 했었죠.^^

교관 2021-12-02 12:10   좋아요 1 | 수정 | 삭제 | URL
도시락으로 엄마가 만들ㅇ어주신 카스테라를 들고 가서 점심도시락으로 앉아서 먹으면 얼마나 맛있었을까요. 그 상상만으로도 400자 원고지 10장 정도의 이야기가 나올 것만 같습니다. 오늘 날이 추워서 더 따뜻하게 느껴져요 ㅎㅎ 감사합니다.

교관 2021-12-02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그인 하기 전에 댓글을 달았더니 이렇게나 ㅋㅋㅋ
 

아주 멋지다고 생각해.

이런 마력적인 색을 본 적이 있어?

키위는 아주 냉소적이야.


오래된 멍이 든 것 같은 얼굴로 껍질에 가려져 이 마력적인 색을 전혀 나타내지 않는다. 얄밉게도.

키위의 이 컬러, 이 색, 이 색감을 만나려면 껍질을 까야한다.


이 지정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이 녹색은 흔히 볼 수 있는 색이 아니야.

러브 크래프트의 소설에 나오는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굉장한 힘을 가진 미지의 존재가 뿜어내는 빛처럼 보여.

정말 대단하지.

우리가 눈으로 보는 모든 색에서 벗어난 색이야.

키위를 처음 봤을 때 먹기 전, 이 키위의 색에 빠져서 얼마나 쳐다봤는지 몰라.

이 색감 때문에 말이야.


초록 초록한 색감에 물감 번지듯 퍼져 있는 씨앗의 검은색이 마치 피처럼 흘러내렸다.

키위가 아니면, 키위를 까 보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색이다.


니나가와 미카를 데리고 와도 이런 색감의 사진을 담아내지는 못할 걸.

테리 리차드슨도 마찬가지야.

녹색과 검은색이 이렇게도 퇴폐미를 뿜어내다니.


그 퇴폐미를 씹어 먹는 맛 또한 퇴폐적이다.

그래서 너무 아름답다.


이 세상의 모든 '미' 중에서 퇴폐미를 이길 수 있는 아름다움은 없을 걸.

붉은 립스틱의 입술은 자두를 먹을 때보다 키위를 씹어 먹을 때 더 퇴폐적이다.

아라키 노부요시 영감님 이리 와서 이 키위의 퇴폐를 담아주세요.


껍질을 벗겨보지 않으면 그 안을 전혀 알 수 없다. 키위가 도대체 이렇게 퇴폐적으로 예쁜 색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껍데기만 보고서는 전혀 짐작할 수가 없지. 배우로 치자면 꼭 배두나 같다. 배두나는 퇴폐미를 장착한 몇 안 되는 배우라고 생각된다. 배두나를 보고 앗! 한 영화가 배구 출신의 배두나가 하루 밤 동안에 남편 구하기 우당탕탕 이야기였다.


공기인형을 지나 아이엠 히어까지. 도대체 배두나는 얼굴을 보고 그 속에 어떤 컬러가 있는지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아.

이거다 싶으면 어김없이 빗나가고 저거다 싶으면 더 멀리 가 있다.

표정 없이 있으면 그 거기서 퇴폐미가 키위의 씨앗 색처럼 흘러나오지.


키위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70년대 지어진 골목의 뒤편 그림자에서 길게, 더 길게 퇴폐적으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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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은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이 세상에 내려준 축복 같은 음식이다. 나 같은 인간이란 음식을 먹을 때 귀찮은 음식을 몹시 싫어하는 인간을 말한다. 상 위에서 지지고 볶고 끓이고 굽고. 이 힘든 일을 하면서 음식을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누군가와, 다 같이 가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먹지만 내가 먼저 저런 귀찮은 음식을 먹으러 가자고 하지는 않는다. 집에서 해 먹는 것도 귀찮고 힘든데 밖에서까지 잡고 뜯고 해야 한다니 맙소사다.


그런 나에게 김밥은 세상의 빛과 같은 음식이다. 나는 오이를 좋아한다. 그리고 김밥을 좋아한다. 그래서 김밥에 오이가 들어가면 소고기가 들어간 김밥보다 더 좋다. 김밥에 오이가 들어가 있단 말이야,라고 임금님 귀처럼 어딘가에 대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을 지경이다. 김밥이라는 음식이 좋은 이유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귀찮지 않다. 일일이 굽고 뒤집어야 하는 삼겹살보다, 쌈을 싸서 먹어야 하는 쌈밥보다, 자르고 살을 발라서 양손을 다 써야 하는 홍게, 대게 같은 갑각류보다 귀찮지 않아서 훨씬 좋다.


김밥이 눈앞에 나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을 갖추었기에 그저 손으로 하나씩 들고 입으로 넣으면 된다. 김밥은 멀티를 가능케 하는 음식이다. 김밥을 먹으면서 책을 읽을 수 있고 아이패드 따위를 만지작 거리는데도 어설프지 않다.


그 김밥 할머니는 나의 그런 점을 알고 있다. 80대로 보이지만 팔십 몇 살인지는 알 수 없는 김밥 할머니가 있다. 김밥 할머니는 김밥을 손수 만들어, 손수 만든 것 같은 묘한 짐 꾸러미에 담아서 사무실마다, 상점마다 돌며 김밥을 판다. 김밥 할머니는 늘 무방비 상태에 있을 때 불쑥 문을 열고 들이닥친다.


이봐요, 할머니 막 그렇게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라고 해야 하지만 할머니는 유순한 눈동자와 굽은 등을 무기로 나에게 다가와 짐 꾸러미 속 김밥을 보여준다. 으앗 참기름의 향이 비어져 나온다. 김밥 할머니의 김밥은 달랑 두 종류다. 야채김밥과 참치김밥. 김밥 전문점처럼 다양한 종류의 김밥이 있지 않다. 에게, 고작 야채김밥과 참치김밥이다. 잘라주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주로 참치김밥을 사 먹는 모양이다. 나에게 느닷없이 왔을 때는 늘 야채김밥이 많이 남아있다. 사실 나는 참치김밥보다 야채김밥을 선호하는 편이다. 좋아하는 오이가 들어간 김밥을 원하지만 오이는 금방 상하기 때문에 할머니는 오이를 넣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겨울이 다가오면 오이를 넣는다. 오이가 들어가지 않으면 나는 김밥을 사 먹지 않겠노라며 다짐을 하고 또 다짐했다.


김밥 할머니가 문을 열고 어김없이 다가온다. 할머니가 다가오면 애써 사지 않겠다는 표정을 하고 시선을 피하지만 김밥 할머니는 김밥을 들어 보이며 나에게 권한다. 순간 공기 중으로 퍼지는 꼬숩은 냄새와 금방 말아서 왔는지 탱글탱글한 김밥의 자태가 눈에 들어온다. 게다가 확대기처럼 확대된 채로 눈에 들어온 오이의 뒤 꽁무니.


하지만 나는 이미 결심을 했다. 입안에 아무것도 없지만 마치 입안에 무엇인가를 먹고 있다는 시늉을 하며 턱과 입을 마구 움직였다. 놀랄 정도로 나의 연기는 수준급이다. 진즉에 연기 쪽으로 나가지 않았을까. 너무 놀랍다. 배우가 되어도 손색이 없다. 바로 이런 게 생활연기라는 거다. 배우 놈들아.


이 정도면 김밥 할머니는 그냥 나를 지나쳐 갈 것이다. 깜빡 속을 것이다. 그때 김밥 할머니는 김밥을 내 얼굴 앞에 내민다. 오이가 눈에 들어왔다. 김밥 할머니의 머리는 나보다 한 수 위다. 이 참을 수 없는 욕망.


김밥 할머니는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김밥과 함께 된장국을 보온병에 담아 와서 종이컵에 부어서 건네주었다. 된장국에는 시래기가 두드려 맞고 죽은 듯 푹 데쳐져서 된장과 어우러져 있다. 다른 것이 들어가 있지 않음에도 마시면 몸이 녹아내린다. 푸슈.


겨울에는 달랑 종이컵 하나에 마시는 된장국은 정말 사람을 애간장 태운다. 얄미운 된장국이다. 그리고 얄미운 김밥 할머니다. 그렇다고 김밥 할머니에게 한 컵 더 부어 달라는 말을 할 수는 없다. 물론 더 달라고 하면 김밥 할머니가 부어주겠지만 그런 말을 쉽게 꺼낼 수 없게 하는 분위기를 김밥 할머니는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런 된장국, 냄새나고 주면 누가 좋아할 것 같은가 보군, 김밥은 원래 된장국 없이도 잘 먹었어. 흥.


나는 김밥을 먹겠다는 말도 안 했는데 이미 종이컵을 코앞에 내민다. 아아 거부할 수 없는 된장국 냄새. 아아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오이가 들어간 김밥. 된장국 한 컵. 아아.


김밥 할머니가 만 야채김밥은 참 맛있다. 김밥 안의 야채들은 김밥 안에 돌돌 말려 들어가기 전에 미리 무슨 짓을 해 놓은 모양이다. 야채 각각의 맛이 살아있으면서 서로가 잘 어울렸다. 부딪히지 않고 입안에서 조화를 이룬다. 앙상블이 입으로 느껴진다면 바로 그것이다. 김밥 주제에 그것이 가능하다니 욕이 나올 것 같다.


김밥 안에는 김밥에 딱 필요한 야채만 들어있다. 난 본디부터 김밥이라는 음식을 좋아하는 인간인 것이다. 어떤 음식이든 김에 돌돌 말아 싸 놓으면 맛있어했다고 전해 들었다. 김밥 안에 단무지만 들어있어도 난 잘 먹는 그런 인간이다. 이런 인간의 특징은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김밥 할머니가 파는 김밥에는 남들이 싫어하는, 잘 먹지 않는, 내가 좋아하는 오이가 들어있는 김밥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오이를 넣으면 그날 만든 김밥은 빨리 다 팔아치우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에 처해진다. 하지만 할머니는 머리가 비상한 건지 오이가 들어간 김밥이 팔리지 않으면 내 앞으로 와서 무기를 드러내고 김밥을 내민다.


문제가 있는데 김밥 할머니에게 한 번 김밥을 사면 김밥 할머니는 매일 그 비슷한 시간에 느닷없이 밀어닥쳐서 김밥을 내밀기 때문에 김밥을 구입하는 행동을 끊어야 할 땐 끊어야 하는데 이 머리가 좋은 김밥 할머니는 오이가 잘 보이게 내 앞에 내민다는 것이다.


맛있는 김밥이라도 매일매일 먹는다는 건 힘든 일이다. 누구나 알고 있고 모두가 그걸 피하고 있다. 게다가 나는 천오백 원 하는 김밥을 한 줄만 사지는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난 항상 두 줄을 구입한다는 것이다. 남들은 한 줄만으로 모자라서 내가 두 줄을 구입하는지 알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김밥이란 딱 한 줄만 먹으면 포만감이 몰려온다. 나는 그렇다는 말이다. 김밥도 칼로리가 놓아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한 줄만 먹으면 적당함을 넘어서는 상태가 된다. 그런데 어쩌다 누군가와 야외에 갔을 때 그 누군가가 김밥을 싸오면 참 난처하고 난감하다. 그날 저녁은 집으로 가서 소화제를 먹어야 할 지경에 이른다. 그런데도 그 누군가는 김밥을 그렇게나 많이 먹이고(어째서 자기는 먹지 않을까), 그렇게나 사육하는 개처럼 먹이고는 저녁에 스파게티를 먹기를 강요한다. 게다가 야외에서 먹은 김밥은 맛도 지지리도 없는 김밥이다. 소화제가 세상에 개발되지 않았다면 난 정말 배가 펑하고 터져 죽었을지도 모른다.


김밥은 정말 기기묘묘하여 집에서 김밥을 만들라 치면 한 줄이나 두 줄만 만들 수는 없다. 김밥이란 그렇게 생겨먹었다. 김밥이란 태생부터 그런 식인 것이다. 김밥은 어째서 한 줄, 두 줄로 불리는 것일까. 음식만의 고유 조사 격인 한 그릇, 두 그릇도 아니고 한 단, 두 단도 아니고 한 포기, 두 포기도 아니다. 한 줄, 두 줄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물 같지만 고요하고 평화로운 평일에 먹는 한 줄짜리 야채김밥은 정말 맛있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지만 소풍날 찬합을 가득 채운 김밥이나 산더미처럼 쌓인 뷔페의 김밥은 오 분만 쳐다봐도 소화가 안 된다. 그 자리에서 토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두 줄을 김밥 할머니에게 구입하는 이유는 한 줄만 구입하기 미안해서 한 줄을 더 구입하는 단순한 이유다. 김밥 할머니는 고단수다. 내가 그리 구입한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용의주도하게 행동을 해도 알아차렸다. 낭패다.


김밥 할머니 할머니가 다가온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책상 위에 약을 늘어트려 놓는다. 그리고 나는 아픈 척 눈을 감고 으으 소리를 내며 의자에 기대어 있다. 큭큭 이건 완벽에 가깝지 않은가. 연극 배우는 저리 가라다. 지난번과는 다르다. 누가 봐도 김밥 같은 건 먹지 못할 정도로 아픈 것이다. 김밥 할머니는 아무런 말도 없이 김밥을 내 앞에 내밀었다.


꼬숩은 냄새, 그리고 된장국. 눈에 보이는 싱싱한 오이. 나는 배우는 절대 되지 못한다.


아니 장사를 이렇게 무례하게 하다니. 아무리 김밥 할머니가 나이가 많지만 “김밥 사세요”라든가 “김밥이 오늘 잘 말렸어”라든가, 암튼 아무 말이나 해야 했다. 하지만 김밥 할머니는 방치된 시골집 마당 같은 얼굴을 하고 내 앞에 김밥을 쓱 내밀었다. 나는 김밥 따위는 이제 먹지 않아요!라고 말해야 했지만 야채 김밥 두 줄이요,라고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친절하게 그렸다. 게다가 시답잖은 말까지 해버렸다. 야채김밥 말고 채소 김밥은 없나요?


결국 오늘도 김밥 할머니의 김밥을 사고 말았다. 실은, 이건 비밀이지만 나는 김밥을 매일 사 먹는다. 무슨 음식이든지 매일 같은 걸 먹을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김밥 할머니가 내미는 김밥을 매일매일 먹는다. 탱글탱글한 밥알이 입안에서 룰루랄라 한다. 김도 분명 싸구려 중국산일 것이다. 입안에서 오이가 씹힌다. 아 상쾌하다. 정말 맛있다. 내 입맛은 참.


무슨 재료를 썼든 간에 그 재료들은 싸구려 저질 중국산이지 싶다. 김밥이 입안에서 노래를 부르듯 움직였다. 그런 움직임이 온몸으로 퍼지면 나는 전자랜드 앞의 인형처럼 양 팔을 옆으로 죽 뻗어 춤을 추었다.


오늘은 김밥 할머니가 단무지를 덤으로 주고 갔다. 젓가락도 주지 않고 단무지를 어떻게 먹으라는 건지. 이런 건 주지 않아도 된다. 나는 김밥을 입에 넣고 단무지를 씹어 먹는다. 단무지가 김밥에 비해 양이 너무 적어서 앞니로 조금씩 배어 물었다. 톡톡 끊어서 먹는 단무지의 맛은 김밥의 맛을 극상시킨다.


김밥 따위는 집에서든 편의점에서든 어디서든 사 먹을 수 있단 말이다. 굳이 표정 없는 김밥 할머니에게 사 먹지 않아도 된단 말이다. 하지만 어쩌다 어딘가에서 사 먹는 김밥은 ‘어쩌다’ 맛이다. 어쩌다, 맛이 뭔가? 그건 나도 모른다. 골목에 밟히는 작은 그루터기의 맛, 해안가 모래 속에 숨어있는 돌멩이의 맛. 뭐 그 정도로 해 두자.


배고플 때 맛없는 음식으로 배 채우는 것만큼 기분이 나쁜 건 없다. 배가 불러도 김밥 할머니의 김밥은, 그러니까 야채김밥은, 오이가 들어간 김밥 할머니의 김밥은 인정하기 싫지만 맛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기분이 나쁘다.


난 지금 한숨을 쉬며 김밥 할머니에게서 구입한 야채김밥을 의자의 등받이에 푹 파묻혀 먹고 있다. 주지 않아도 되는 단무지를 아껴가며 한 손에는 김밥을, 한 손에는 단무지를 들고 야무지게 먹는다. 김밥을 베어 물었다. 내 표정이 조금 밝아졌나? 단무지를 살짝 베어 물었다. 아아 이 기분 좋은 만남. 남아있는 단무지의 양과 김밥의 길이를 재가며 먹는 맛이 있다.


그리고 어비 게일이 나온 ‘리틀 미스 선샤인'을 볼 것이다. 영화 속 데보츠카 노래를 들으며 나는 여행을 떠난다. 김밥 여행을. 무려 오이가 들어간 야채김밥을 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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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21-11-29 15: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하도 많이 먹어서 요즘 안 먹고 있는데 오늘은 한 줄 사 먹어야겠네요. 오이 들어간 김밥은 찾기 어려울 것 같지만요. 생생한 김밥 이야기 재밌게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교관 2021-11-30 12:03   좋아요 0 | URL
오늘은 김밥으로 대동단결 ㅋㅋㅋ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이 글은 재미있는 내용의 이야기가 아님을 미리 밝힙니다.


이맘때가 되면 공터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의 마당에서는 어머니들이 모여 김장에 열을 올렸다. 마당이 있고 여러 집이 모여 살다 보면 김장을 하면 대체로 같이 해서 노나 먹거나, 따로 김장을 하더라도 옆집에 나눠 주었다.


김치는 이탈리아로 치면 파스타와 흡사하다. 파스타는 파스타 굵기, 모양, 들어가는 집집마다의 재료, 시간 등, 이런 요건 때문에 가정마다 맛이 다 다르다. 우리가 머릿속에 나열하는 파스타 종류는 아주, 너무나, 지극히 일부다. 우리가 먹는 김치도 그렇다. 김치는 정말 집집마다 맛이 다 다르다. 그러니 어디 외국에 나가서 몇 년 살면서 먹어본 그 나라 음식을 다 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살면서도 김치의 종류도 맛도 다 보지 않고 소멸하는 게 인간인데. 김치가 집집마다 맛이 다르다는 건 정말 신기한 일이다. 또 같은 집에서 담근 김치라도 일주일, 한 달, 여섯 달 묵혀 둔 기간에 따라 또 맛이 다르다. 너무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김장을 하면 이렇게 돼지고기를 삶아 김치에 싸서 먹는 맛 또한 김장의 묘미다. 어린이 때에는 김치가 맛있는지, 삶은 고기가 맛있는지, 김치에 싸서 먹는 고기의 맛이 어떤지 사실 모른다. 그냥 우르르 그 분위기가 좋다. 마당 한 편에서 놀면서 새 새끼처럼 어머니들이 김치에 고기를 싸서 입에 넣어주면 낼름 낼름 받아먹는 재미가 있었다.


내가 어린이였고, 달동네라 불리는 동네에 살았고, 그 동네는 마당이 있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마당에서 여럿이 모여 김장을 할 때 큰 빨간 고무통에 김치를 담아서 양념을 버무리고 속을 채웠다. 이 빨간 고무통은 일종의 김장 공정에 빠져서는 안 되는 김장도구였다.


이 빨간 고무통이라는 건 만능이었다. 여름에는 물을 받아 물놀이도 했고, 김장을 담글 때에는 김치를 재우고, 씻고, 버무리고.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 빨간 고무통을 그렇게 사용하면 안 된다는 걸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무지했던 것이다. 열심히 일주일 동안 석탄을 캐느라 먼지 때문에 목이 칼칼한 서민들이여, 삼겹살을 구워 먹어라, 그러면 고기 기름이 먼지를 싹 내려줄 것이다.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들은 그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주말이 되면 집집마다 삼겹살을 구워댔다. 석탄의 먼지는 코로 들어가 폐로 가고, 고기는 입으로 들어가 위장으로 가는 것임을. 우리는 그 뻔한 이치를 모르거나 망각한 채 삼겹살의 기름이 몸속의 먼지를 씻겨 줄거라 믿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군이 돌아와서 고엽제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다. 이는 성석제 소설 ‘투명인간’에 잘 나와 있다. 미군이 던져준 고엽제가 소독이 잘 된다며 머리에 뿌리고 얼굴에 크림처럼 발랐다. 이렇게 하면 베트남에 널려 있는 병균이 죽겠지. 이 철석같은 믿음은 후에 사람을 이유 없이 병균처럼 사망케 했다. 가끔 살균제의 겉면에 살균 100%라고 적혀 있으면 균을 100%로 죽인다는 말인데 그것이 인간에게도 좋을 리는 없다.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가지만 종이가 들어갈 그 좁은 틈으로 무지는 들어와서 우리의 삶을 조금씩 망가트린다.


십여 년 전에 친구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폐암 말기였다. 가족력도 없고, 주위에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없고, 뭔가를 태우는 곳 근처에 살지도 않았다. 느닷없는 죽음이었다. 폐가 암으로 공격받아 검게 점령당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할 텐데. 생각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의심은 김장을 담글 때 등장하는 빨간 고무통이었다. 긴 세월 동안 어머니는 빨간 고무통에 김치를 재워놓고 양념을 무치고, 물김치도, 동치미도, 음식의 대량화는 전부 빨간 고무통을 사용했다. 뜨거운 양념도 거기서 버무리고. 그 시간이 몇십 년이었다.


https://youtu.be/d_on5jI_PDM


이 영상은 KBS 다큐 3일이며 불과 일 년 전, 2020년에 방송된 영상이다. 전통시장 5일장에서의 순대국밥의 3일을 다루고 있다. 거두절미하고 뜨거운 순대를 삶아서 속을 버무리는 작업을 빨간 고무통, 이 붉은 고무대야에서 하고 있다. 이 빨간 고무통은 지구 상에서 가장 안 좋은, 암을 유발하는 성분이 들어있어서 식품을 담거나, 담그거나 하는 용도로 사용하지 못하게 식품 관련 정부 산하기관에서 관리하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방송에서 이렇게도 버젓이 여봐란듯이 보여줄 일일까. 1: 43초 부분부터 보면 이 빨간 고무통에서 뜨거운 순대 속 양념을 버무리고 있다. 이런 건 옳지 않다. 화면에 나오는 저분들을 나무라기는 싫다. 이런 교양 프로그램 만드는 방송국을 비판하고 싶다. 일하는 사람들이 몇 명인데 이런 걸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은 비판받아야 한다. 골목식당만 보더라도 뜨거운 음식을 담거나 씻을 때 플라스틱 용기를 사용하면 백종원이 출격해서 식당 주인을 나무란다. 이 방송이 80년대나 90년대의 방송이 아니다. 작년 방송이라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빨간 고무통에서 뜨거운 순대 양념을 비비며 음식의 철학을 논한다는 건 어떻게 봐도 이상하다.


빨간 양념의 김치를 대동해서 붉은 대야의 습격이 반 세기 동안 한국을 덮쳤다. 여기에 신파를 붙이면 빈익빈 부익부가 된다. 부자들은 이 죽일 놈의 빨간 고무통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제 시간이 흘러 2021년이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우리가 올바름이라고,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은 2021년을 계기로 해서 한 번씩 리셋을 해주는 것도 좋다.


그간 수분 부족으로 인해 해갈하는 방법은 물이었다. 수분 부족으로 인해 눈이 건조해지고 손이 건조해져서 물을 많이도 마셨다. 하지만 물을 많이 마신다고 해서 눈이 덜 건조해지고 손이 촉촉해지지는 않는다고 한다. 눈에는 인공눈물을 넣고, 손에는 핸드크림을 바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그리고 정재훈 약사의 말로는 외국에서 실험을 했는데 같은 양의 물과 탄산음료를 성인 몇 명에게 주기적으로 마시게 한 다음 수분 흡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놀라운 결과가 근래에 공개되었다. 궁금하면 한 번 찾아보기 바람.


편의점 음식을 자주 사 먹으면 사람들은 어떻든 걱정을 한다. 넓게 보면 편의점 음식이 세상에 도래한 후, 인스턴트식품이 인간 세상에 나온 이후 인간의 수명은 늘어났다.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는 어쩌면 편의점 음식이 패스트푸드라서 좋지 않다는 생각에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 라면을 많이 먹어서 몸에 좋지 않은 영향과 유명한 식당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식재료를 사용해서 식중독에 걸려서 믿음에 대해서 공격받는 영향에 대해서 한 번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 이면에는 내가 지금까지 진리라고 믿었던 것에 금이 가면 빨리 환기하고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영원한 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고 시간이 좀 지나 내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리셋을 해야 한다. 만약 그것이 되지 않으면 내가 믿는 진리가 깨지면 나 자신까지 깨지게 된다. 같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이 죽일 놈의 빨간 고무통은 음식과 분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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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시멘트에 박힌 못 하나를 발견했다. 녹슬어 못쓰게 된 못이 구부러져 있었다. 못이 녹슬어 있는 꼴이 꼭 사람이 나이가 든 것처럼 보였다. 시간의 개입을 인간은 받는다. 그 개입을 거부하거나 뿌리치지 못한다. 운명보다는 숙명에 가깝고 '신'적이다. 이 세상의 순수한 것들은 전부 무섭다. 그래서 시간은 무섭다. 시간은 순수의 가장 꼭대기에 있다.


순백의 검은 순수. 그게 시간이다.


시간이 개입을 하면 모든 것이 그렇게 된다. 못의 허리가 구부러지는 것 또한 시간이 개입을 했기 때문이다. 못은 어쩌자고 공기와 수분으로 녹이 슬어 가고, 인간은 어째서 늙어가는 것일까.


그랬더니 저 앞에서 사르트르가 나타나서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을 했다. 흥, 돌아가신 양반이 잘도 일어나서 참 말 많으시네. 하지만 프랑스어라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모든 못이 비슷하게 녹슬지는 않는다. 역시 사람도 모두가 똑같이 늙어가지는 않는다. 인간은 다양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라고 사르트르가 블란서어로 말했다. 인간은 한 가족이라도 전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못의 모양과 크기가 다르고 사용되는 곳이 다르듯 인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못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요. 구부러진 못을 보고 인간을 형상화할 수는 있어서 못에는 메타포가 있지요? 하지만 이데아는 없다고요. 존재와 인식의 근거가 되는 이데아, 이상은 인간에게만 있습니다.


나는 쏘아붙였지. 부쳤지, 가 맞는 말인가. 암튼 그렇게 톡 쏘았지. 장 폴 사르트르, 흥. 이름이 멋져서 자꾸 맗하게 되는 이상한 이름의 양반.  


아주 아름다운 못이 있다고 치자.

몹시 비싸 보이고 세상에 몇 없는 못이다.

부르는 게 값인 이 못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는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부러움을 받는 것이 못이 아니라 그 아름다운 못을 가진 사람이다.

이 못의 본질은 인간이다.

그 아름다운 못도 못생기도 울퉁불퉁한 손을 가진 사람이 만들었다.


요컨대 아름다운 곳으로 가면 그 풍경과 경치에 마음을 빼앗긴다. 하지만 진정 아름다운 건 그 경치를 보고 있는 당신이다. 주체와 주체아에서 우리는 대부분 주체는 보지만 주체아는 인식하지 않는다. 주체아가 존재하기에 주체를 본다. 주체아가 되는 당신, 당신이 병들고 아프다면 경치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내 말에 사르트르는 안경을 한 번 올리고 미소를 지었다. 묘한 사람 같으니라고.

좡 풜 사르틔르의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를 애무하면 육체는 살이 된다’를 나는 사랑한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애무는 애무에서 벗어난 애무였다. 피부를 살갗이라 부를 수 있는 애무.

사르트르 아저씨가 노벨 문학상을 거절하면서 철학가들에게 노벨 문학상의 영예가 돌아가지 않고 있지만 장 풜 사르트르 아저씨, 뭐 어쩌라고 다. 정말 너무나무 미치도록 좋다.

장 폴 사르트르가 비스듬히, 몸에 녹이 슬어 시간의 개입을 무시하고 있다.

녹슨 못이 머리에 박힌다.





녹슨 못


못은 서서히 허리를 구부려 세월을 박는다

그렇게 굽은 등에 슬픔이 내려앉는다

더 이상 펴지지 않아도 못은 울지 않는다

못은 그렇게 슬픔을 박는다

단단하게 박힐수록 못은 녹물 색으로 물들어간다

못은 우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구름이 눈물을 흘릴 때 기대어 잠시 울고 녹슬어 간다

구부러진 못의 등으로 기쁨이 흐른다

못은 그렇게 기쁨도 박는다

또 조금 허리가 구부러진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도 못은

세월을 박는 일에 소홀하지 않는다

못은 허리를 구부려가며

못 쓰게 된 마음에 못 쓸 관계를 연결해 박는다

못은 늘 함묵하고 시간을 박는다

못은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허리가 구부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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