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번 산 고양이 비룡소의 그림동화 83
사노 요코 글 그림, 김난주 옮김 / 비룡소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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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멋진 얼룩 고양이가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력이 무려 백만 번이나 되는 대단한 고양이지요.  이 고양이는 임금님의 고양이인 적도 있었고, 뱃사공의 고양이인 적도 있었으며, 서커스단 마술사의 고양이이기도 했고, 도둑의 고양이, 홀로 사는 할머니의 고양이, 어린 여자 아이의 고양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고양이는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죠.  주인들은 이 고양이를 좋아했고 고양이가 숨졌을 땐 슬피 엉엉 울었지만, 이 고양이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이 얼룩 고양이의 주인들이 하나같이 고양이를 배려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임금님은 전쟁터를 싫어하는 고양이를 바구니에 담아 전쟁터로 나갔고, 뱃사공은 바다를 싫어하는 고양이를 데리고 온 세계의 바다와 항구를 다녔죠.  고양이는 서커스도 싫었고, 도둑질도 싫었습니다.  온종일 자기 무릎에 고양이를 올려놓고는 꼬박꼬박 졸기만 하는 할머니도 싫었죠. 자기 멋대로 고양이를 인형삼아 가지고 노는 여자 아이도 물론 싫었어요.

얼룩 고양이에 대한 그들의 애정은 폭력이었고 군림이었고 강요였어요. 그러니 얼룩 고양이가 행복하지 않을 수밖에요.  고양이의 삶을 생각해보세요.  백만 번이나 되는 삶과 죽음이 모두 그런 식이었다면 고양이는 무척 괴로운 나날을 보냈을 것이고, 그 덕에 아주 냉소적인 고양이가 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삶이 얼마나 지겹고 시시할까요.

그러던 고양이가 누구의 고양이도 아닌 도둑고양이의 삶을 살게 됩니다.  얼룩 고양이는 “처음으로 자기만의 고양이”가 된 게 무척 기쁘고 좋았지요.  이 멋진 얼룩 고양이는 백만 번이나 되는 삶과 죽음의 경력 때문에 모든 게 시시할 뿐입니다. 다른 고양이들의 애정공세와 호의까지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애정공세와 호의쯤은 이미 백만 번이나 받아봤을 테니까요.  그저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좋아”할 뿐입니다. 얼마나 신날까요? 자유, 자유, 자유... 억지로 옭죄는 사랑 따위 받지 않아도 되는 그 자유.

그런데 이 얼룩 고양이 앞에 매력적인 하얀 고양이가 나타납니다.  어쩐지 이 흰 고양이 앞에서는 백만 번의 삶과 죽음의 위대한 경력이 시시하게 느껴집니다.  드디어 자유 속에서 얼룩 고양이는 사랑을 만난 것이지요.  백만 번의 삶을 자랑해도 이 매력적인 흰 고양이는 시큰둥합니다.  도도한 흰 고양이는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잘난 척하고 뻐기는 남자, 재미없다는 걸요. 사랑에 빠지는 데는 그런 경력이나 자랑거리들이 하나도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아주 똑똑한 고양이었던 것 같습니다.

 

 



얼룩 고양이도 그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백만 번이나 살고 죽어봤다는 자랑 따위 안 하게 되지요.  그리고 하얀 고양이와 결혼해서 예쁜 새끼 고양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던 고양이,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랑했던 이 얼룩 고양이가 이제 하얀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를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곤 어느덧 할머니가 되어버린 하얀 고양이를 바라보며 오래오래 함께 살고 싶다는 소원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어느 날 하얀 고양이가 죽었습니다.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를 끌어안고는 처음으로 목 놓아 웁니다.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백만 번이나 서럽게 울다가 얼룩 고양이는 조용히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지요.

 



얼룩 고양이의 삶은 그 반복을 끝마쳤다, 라기 보다 자기의 삶을 이제야 완성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습니다.  더 이상의 다른 어떤 삶도 필요하지 않았겠지요.  백만 번의 삶과 죽음보다 하얀 고양이와 사랑을 나누며 자기가 주인인 삶을 살았던 단 한 번의 삶이 얼룩 고양이에겐 더없이 소중하고 의미가 있었을 겁니다.

그림책 속의 얼룩 고양이를 보며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사랑을 앞세워 상대에게 뭔가를 강요한 적은 없었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좋아하는 거니까 상대방도 좋아해주길 강요한 적은 없었나, 내가 원하는 거니까 상대방도 함께 원해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 특히 아이들에게 다 너희를 사랑하니까 이러는 거라며 싫다는 걸 억지로 하게 한 적은 없었나..  사랑도 반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두 번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을 만큼 의미 있고 사랑 가득한 삶을 살고 싶다는 욕심을 부려 봅니다.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고양이 한 마리가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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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7-08-08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이 책을 이토록 좋게 보지 못했었거든요.
집에가서 책장에 꽂혀있는 이 책을 다시 꺼내봐야겠네요. 찬찬히.
:)

섬사이 2007-08-09 08:01   좋아요 0 | URL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니까요. 저에게 좋은 것이 님에게는 안 좋을 수도 있지요, 뭐. ^^

비로그인 2007-08-08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쁘지 않아 정말 좋습니다. 이 글을 찬찬히 읽어볼 수 있어서요..

섬사이 2007-08-09 08:02   좋아요 0 | URL
다시 찾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쩐지 민서님의 시선이 느껴져 부끄럽네요. ^^

프레이야 2007-08-08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마나, 고양이들도 그림도 리뷰도 너무 사랑스러워요^^

섬사이 2007-08-09 08:02   좋아요 0 | URL
예, 참 사랑스런 고양이들이죠?

miony 2007-08-08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었던 책인데 님의 시선으로 다시 보니 참 좋습니다.

섬사이 2007-08-09 08:03   좋아요 0 | URL
milny님, 반갑습니다. 이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저도 소문으로만 듣다가 한 일주일 전에서야 손에 넣었는데요, 소문보다 더 좋던걸요. ^^

마노아 2007-08-08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리뷰를 클릭하는 순간부터 벌써 기분이 좋아졌어요^^

섬사이 2007-08-09 08:05   좋아요 0 | URL
정말요? 갑자기 사진에서 보았던 마노아님의 맑은 웃음이 떠올라요. ^^

2007-08-09 16: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10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학은 재밌어1 네모토끼의 생일
(이소라 글/이혜리 그림/김용운 감수/비룡소)

모양에 관한 동화책. 네모토끼,세모 여우, 넓적한 네모 돼지, 큰 동그라미 부엉이, 작은 동그라미 다람쥐가 등장.. 그런데 다람쥐라고 되어 있는 동물이 그림으로는 아무리봐도 고양이다. 어린이 책 출판사로 유명한 비룡소가 어찌 이런 실수를!! 비니는 재밌어하면서 읽어달라는데 자꾸 다람쥐인지 고양이인지가 마음에 걸려서 찝찝했던 책.

꾸미의 생활동화 아빠처럼 하고 싶어요 (캐슬린 애먼트 글,그림/큰나)

유아용 변기를 사용하던 아이가 화장실의 큰 변기를 사용하며 뿌듯해하고 칭찬받는 이야기. 화장실을 이용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재밌게 표현되어 있다.  엄마 몰래 큰 변기에 앉아 볼일을 보는 아이의 조마조마한 마음도 전해져 오고.. 비니는 변기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는 아빠 그림의 다리털을 무척 재밌어 했다.

아빠는 어디쯤 왔을까 (고우리 지음/문학동네 어린이)

비니를 황홀하게 만든 책.  글도 그림도 너무너무 좋다.  이 그림책을 읽으며 황홀함에 젖지 않을 아이들이 있을까?  글과 그림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그림책의 본분에 충실한 책이다.  아빠와 아이, 그리고 엄마의 따뜻한 정이 느껴지는 참 좋은 그림책.

초록양은 어디 갔을까? (멤 폭스 지음/정해왕 옮김/영교)

이 그림책도 비니에게 인기 있는 그림책.  단순한 글, 귀여운 그림, 슬쩍슬쩍 보이는 초록양의 모습, 다양한 일을 하는 가지각색의 양들이 비니의 눈길을 끌었다.  굳이 30개월이 되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구리와 구라의 빵만들기
(니카가와  리에코 지음/야마와키 유리코 그림/한림출판사)

지니와 뽀가 어릴 때에도 구리와 구라를 좋아하더니 비니도 예외가 아니다.  먹을 것을 좋아하고, 먹을 것을 친구들과 나눠먹는 것은 더 좋아하는 구리와 구라의 착한 심성 때문일까?  다소 과장되고 엉뚱한 요리재료들과 설정때문일까?  아무튼 비니도 구리,구라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30개월이 지나면서 스토리가 좀 긴 이야기에도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구리와 구라의 소풍>, <구리랑 구라랑 꽃님이>도 재밌게 읽었다.

 

 

야, 우리기차에서 내려 (존버닝햄 지음/박상희 옮김/비룡소)

설명이 따로 필요없는 그림책이다.  이 책에 담겨진 환경보호의 메세지를 비니가 이해할리는 없지만, 그래도 읽어달라고 뽑아오는 거 보면 신기하다. 

옛날에 오리 한 마리가 살았는데
(헬렌 옥슨버리 그림/마틴 워델 글/임봉경 옮김/시공주니어)

이 그림책도 무척 심오한 그림책. 게으르고 욕심많은 농장주 밑에서 착취당하는 오리 이야기.  게다가 동물들의 봉기로 쫓겨나는 농장주와 동물들의 사회주의 이념스러운(?) 노동으로 이어지는 결말.  비니야 "일은 잘 돼가나?" 하는 농장주의 물음에 "꽥!"하고 대답하는 오리가 재미있을 뿐이지만.  이후로 "일은 잘 돼가나?"하면 비니는 "꽥!"하고 대답한다. 

곰 사냥을 떠나자
(헬린 옥슨버리 그림/ 마이클 로젠 글/공경희 옮김/시공주니어)

이 책이 지금 검색해 보니까 표지가 칼라판도 있고 팝업북으로도 나왔다.  우리집에 있는 이 책은 지니가 어릴 때 사준 거라서 표지도 흑백인데다 출판사도 네버랜드로 되어 있다.  오랜만에 꺼내서 비니에게 읽어주었는데 재밌어라 한다.  예전에 지니와 뽀는 이 책을 무섭다고 했는데..  지니는 오랜만에 이 책을 보더니 곰이 불쌍하다나? 많이 컸구나..^^

구름빵 (백희나 글그림/ 김향수 빛그림/ 한솔수북)

독특한 분위기의 그림이 매력적인 책이다.  시커멓게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은  비오는 날의 아침 풍경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구름빵을 먹고 훨훨 날아서 아침도 못 먹고 출근한 아빠에게 빵을 가져다 주는 고양이 형제의 따뜻한 마음이 예쁘다.  그림책이 참 예쁜데, 비니의 반응은 좋은 것 같기도 하다가 시큰둥한 것 같기도 하고 종잡을 수가 없다.

왱왱 꼬마 불자동차 (로이스 렌스키 글,그림/노은정 옮김/비룡소)

조그만 소방관의 하루를 담은 작은 그림책.  그래도 내용은 만만치 않다.  흡입관이니 관창이니, 펌프, 소화전과 같은, 아이에게는 어려울 듯한 낱말이 나오고 내용도 길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염려와는 다르게 비니는 이 책을 좋아하는 편이다.  참 아이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내 짐작으로는 아마도 소방차와 소방관이라는 관심끄는 소재와 인물이 등장하고 화재 사건이 귀여운 그림들 때문에 무섭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읽은 책들이 더 많을텐데, 기억나는 책이 여기까지다.  나중에 기억이 떠오르는대로 더 보충해야 겠다.  비니의 독서기록만은 잘 해두리라 다짐했었는데, 내가 너무 소홀했던 것 같다. 
아, 그리고 도서관에서 프뢰벨 자연관찰이라는 전집책 너댓 권씩을 대출해와서 읽었다.  그런데 아직은 자연관찰 책보다 그림책을 더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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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세종 - 마음을 지배하니 세상이 나를 따른다
백기복 지음 / 크레듀(credu)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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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종의 하루하루가 어땠을까, 어떤 생각을 하고, 신하들과 무슨 대화를 나누고, 세종의 습관과 버릇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사소한 궁금증들로 탄생되었다는 이 책은 세종대왕의 위대함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그것이 세종의 탁월한 ‘마음의 다스림’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고, 세종 이도(저자는 대왕으로서의 위대함보다 인간 이도로서의 인간적 갈등과 고뇌의 극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와 집현전 학사 열 명과의 일화를 통해 세종이 가지고 있던 비범한 ‘마음의 힘’을 정리해 놓았다.  ‘마음경영법’이라고 소개된 열  가지의 목록들은 시대를 뛰어넘어 현대인들에게도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가다듬는 데 유용하리라 생각된다.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첫 장의 최만리와의 일화다.  최만리는 집현전 부제학으로서 보수파였으며 성리학 원칙주의자였던 까닭에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에 격렬히 항의한다.  그 항의의 수위가 꽤 높아서 책을 읽는 내가 '그 옛날 하늘같은 왕에게 이렇게까지 말을 해도 괜찮았을까?‘하고 걱정이 될 정도였다. 최만리에 따르면 훈민정음은 ’야비하고 상스럽고 무익한 글자‘라서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에 지나지 못한 것‘이며 ’학문에 방해되고 유익함이 없으므로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 옳은 점을 찾아 볼 수 없다‘(p.20)는 것이다.  아무리 맘에 안 들기로 그래도 왕이 몇 년에 걸쳐 만들어낸 것을 두고 저리 막말을 해댈 수 있나 싶은데 절대 권력자 세종은 괘씸죄를 걸어 유배를 보내든가 그것도 아니면 벼슬을 빼앗아버릴 수도 있으련만 최만리를 설득하기 위해 애를 쓴다.  결국 최만리가 그 해 낙향하고 이듬해 목숨을 다하는 것으로 사건은 끝났지만 세종은 여전히 최만리를 아껴 그가 떠나 비어버린 부제학 자리를 3년이나 그대로 두었다 한다. 

이 일화를 소개하며 저자는 진정한 안티에 대해 이야기 한다.  진정한 안티란 서로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이 깔려 있으며 각자가 치밀한 논리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만리는 세종의 진정한 안티였고, 세종은 안티와 더불어 토론하고 설득할 수 있는 탁월한 역량과 자세를 가진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경영에 성공하려면 비판받지 않고 결정된 사항들에 대해 쉽게 신뢰를 보내지 말 것이며 더 나아가 자청해서라도 비판과 안티를 끌어들여야 한다.‘(p,.26)면서 ’안티 사랑‘을 주장한다. 충분히 공감하지만 실천하기엔 참 어려운 사항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형식으로 술이 과하여 문제를 일으키곤 했던 윤회와의 일화를 통해 ‘자기 절제’를, 출신의 빈약함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하는 능력을 보였으나 인간성면에선 문제가 있었던 김문과의 일화에서는 ‘마음의 균형(밸러스트)’를, 출세와 벼슬에 뜻이 없었던 강희안과의 일화를 통해서는 ‘자기적합화’를, ‘집대성’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던 박팽년과의 일화를 통해서는 ‘자기계발’과 ‘몰입’의 중요성을, 세종의 믿을만한 의논대상이었던 정인지와의 일화를 통해서는 ‘전문성’을, 강직한 성품과 절개로 공동선을 위한 직언을 아끼지 않았던 하위지와의 일화를 통해 ‘공동선을 위한 자기변화’를, 세종이 이개 등을 시켜 만든 <명황계감>을 이야기 하면서 ‘타산지석과 자기 경계’를, 책을 읽다 잠이 든 신숙주에게 갖옷을 덮어주었다던 유명한 일화를 통해 ‘아낌과 위함, 배려와 이해’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절세의 문장가이자 당대의 지성이었으나 도량이 좁고 사생활에 문제가 많았던 변계량과의 일화를 통해 ‘공정성 확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얼마 전부터 우리 옛사람과 옛글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이 즐겁고 읽고 난 후의 만족감도 크다. 그건 아마도 내가 존재하는 근원, 뿌리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고 마치 잘라놓은 통나무처럼 하나의 사물과 다를 바가 없던 역사적 인물들에게서 살아 있는 숨결을 느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책도 예외는 아니어서 세종대왕에 대한 단편적이고 교과서적이었던 나의 통나무같은 지식 위로 가지가 뻗고 잎이 돋는 듯한 즐거움을 맛보게 해주었다.  ‘자기계발’과 ‘마음 경영’이라는 주제로 뽑아낸 세종대왕과 열 명의 신하에 대한 이야기는 위인전을 읽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의 독서가 되었다. 대왕 세종으로서의 위엄과 근엄 뿐 아니라 인간 이도로서의 번민과 갈등이 함께 느껴졌던 것이다. 

특히 선왕의 실록에 집착하며 보게 해 달라 조르는 부분이나 자신의 왕권을 보위하기 위해 선왕에 의해 몰살을 당한 처가 심온의 집안을 생각하며 중전인 소헌왕후에 애틋한 마음을 품었다는 이야기 등은 인간 이도로서의 연약하고 감성에 치우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굳이 ‘자기계발’을 목적으로 삼지 않더라도 ‘동방의 요순’이라 일컬어졌던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에 대한 살아있는 일화를 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독서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책의 뒷부분에 실린 이 책에 언급된 세종을 비롯한 열 명의 신하들에 대한 간략한 인물설명과 집현전에 대한 글은 책을 읽은 후 내용을 다시 돌아보는 데 도움이 되었다.  다만 본문에 나오는 당시의 여러 책들과 벼슬 명칭과 용어들에 대해 미주를 달아놓아 책을 읽다가 번번이 뒤를 펼쳐 찾아보는 불편함이 있었다.  페이지 아래에 각주를 달아놓았다면 읽기가 더 편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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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름왕자 2007-08-06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읽고 추천 하고 갑니다... ^^

섬사이 2007-08-07 23:45   좋아요 0 | URL
어름왕자님, 반갑습니다. 모자란 글인데도 관심을 갖고 읽어주셔서 감사하구요. 꾸벅~

프레이야 2007-08-06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입니다.^^ 님, 글을 읽으니 세종의 덕목을 우리시대의 최고의 경영자 자질로
꼽는 이유를 더욱 잘 알겠습니다. 자신의 안티팬과도 손잡을 수 있는.. 아주
어려운 일이지요.

섬사이 2007-08-07 23:4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나의 반대편에 선 사람을, 그것도 내맘대로 처단할 수도 있는 사람에게 애정과 신뢰를 보낸다는 것 참 어려운 일일텐데 세종대왕은 그렇게 하셨더라구요.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대목이었어요.

비로그인 2007-08-07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잘 봤어요.

섬사이 2007-08-07 23:47   좋아요 0 | URL
민서님도 처음 뵙네요. 반갑습니다. 관심을 갖고 읽어주셔서 더욱 고맙습니다. 꾸벅~^^

비로그인 2007-08-08 07:56   좋아요 0 | URL
저는 전부터 자주 들어왔었고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앞으로 자주 만나요.

섬사이 2007-08-09 08:08   좋아요 0 | URL
어머나, 그러셨어요? 고맙습니다. 앞으로 자주 뵈어요. ^^
 
세상이 끝나기 전 꼭 해야 할 12가지 풀빛 청소년 문학 4
비외른 소르틀란 지음, 김라합 옮김 / 풀빛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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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을 경험해 보았는지..  어떤 일 때문에 내 삶이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누어지는 그런 일. 그 일 때문에 내가 여지껏 살아오던 세계가 문을 닫으며 종말을 고하고 새롭고 낯선 세계가 열리는 그런 일말이다.  사랑이기도 하고 배신이기도 한 그런 일.  이 책의 주인공 테레제가 느꼈던 것처럼 ‘번쩌어어억!’하며 내 삶을 갈라버리는.

 열네 살 소녀 테레제는 엄마가 '이혼'을 통보하는 순간이 그랬다.  그 순간 테레제는 자기가 살았던 소녀의 세계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종말은 지구의 멸망이나 신이 내리는 최후의 심판 같은 게 아니다.  테레제가 이야기하는 세계의 종말은, 맑고 순진했던 '소녀의 세계'가 종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의 이혼을 알게 되는 순간 테레제는 응석받이 소녀에서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자신의 인생에 불어올 크고 작은 폭풍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나가야 하는 어른으로 성장해야 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따라서 테레제가 작성한 12가지의 목록들은 사라져 가는 세계와의 작별을 위한 목록과 다름 아니다. 

자기 삶의 기둥 하나가 우지끈 부러지는 듯한 (물론 그건 '부모의 이혼'이 주는 충격파이다.) 느낌에 당황하고 있는 테레제에게 작가는 테레제의 언니 이레네의 입을 빌려 "배고픈 물고기만이 건강한 물고기거든."(p.22)하고 말한다.  그 말은 '결핍'과 '욕구'가 오히려 우리의 삶을 건강하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는 메세지로 들린다.  작가의 이 충고는 책의 맨 마지막 구절이기도 하다.  테레제에게 '배고픔'은 '부모의 이혼'으로 드러났지만 혼란과 상처를 준 '부모의 이혼'은 테레제의 삶을 흔들고 망쳐버릴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강인하고 현명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이다. 

테레제와 대조적인 인물인 언니 이레네는 나이로 보면 성인이지만 아직 무너지지 않은 유아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자폐 증상을 가졌다.  문제가 생기면 괴성과 공격적 행동으로 해결하고 모카봉봉 한 봉지가 최고의 행복이라 여기는 이레네의 삶은 그래서 종말이 없다.  비행기 안이든 로마의 해변이든, 먹구름이 밀려오든, 화창하게 개이든 상관이 없는 멈춰버린 세계, 부숴지지 않는 견고한 세계 속에 사는 이레네의 삶을 우리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건 세계의 종말이 비극이 아니라는 반증일 것이다. 

테레제도 이레네, 얀과 함께 한 로마여행에서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건 아닐까.  로마의 해변에서 얀에게 '노아의 방주'이야기를 읽어달라는 대목은 그래서 의미가 깊다.  구약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한 세계의 멸망 끝에 도달하는 희망의 새로운 세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로마의 해변에서 테레제는 노아가 날려보낸 비둘기가 물고 돌아온 올리브 이파리 같은 희망의 증표로 '번개의 화석'을 얻는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함께 할  '얀'이라는 남자친구까지 얻음으로써 테레제는 세계의 종말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일 용기를 갖게 된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왔고, 얀은 나에게 입을 맞췄으며 나는 하느님한테 받은 번개 화석을 주머니에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한 번에 여러 가지를 얻은 셈이다. 
진실하다는 건 아주 좋은 것이다.  그 반대일 때는 모든 것이 거꾸로였다.  이제 모든 것이 도로 전과 같아졌다.  단지 새로울 뿐.
한순간 나는 내가 깨어 있고 준비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그것도 좋은 시작."(p.179)

세상의 종말을 두려워했던 테레제는 그 종말이 새롭고 좋은 시작의 다른 이름이라는 걸 깨달았고 그 순간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종말을 고한 세계는 얼마나 될까.  세계의 종말은 청소년만이 겪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두고 싶다.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세계가 멸망하고 다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경험을 수없이 반복하게 된다는 걸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럴 때마다 이미 다 자라버린, 심지어 지긋한 나이의 어른들까지도 불안과 두려움을 맛보게 된다는 것도. 

스칸디나비아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해서 무척 궁금했다.  목사의 아들 '얀'과 세상의 종말이라는 소재 때문인지 종교적 냄새가 다소 진하다는 게 책읽기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혼자 투덜거리는 듯한 테레제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열네 살 사춘기 소녀의 방황과 갈등을 만나게 될 것이다.  또 테레제가 점잖은 소년 얀에게 접근하는 작업을 지켜보는 즐거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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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8-04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말을 고하고 새롭게 세우는 크고 작은 세계들... 그 세계들이 우리를 키우는 것이겠죠.
섬사이님, 굿모닝! 추천이에요^^

섬사이 2007-08-04 08:36   좋아요 0 | URL
새벽에 비가 요란하게 쏟아지더니 좀 시원해진 것 같아요. 태풍이 가까이 오고 있다죠? 태풍이 오더라도 즐거운 하루가 되시길 바래요. 추천, 고맙습니다. 용기를 얻어요.

네꼬 2007-08-07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문장부터 고개를 끄덕이면서 읽었어요. 이 책의 내용도 궁금하지만, 섬사이님이 섬세하게 짚어내신 감상이 더 좋아요. 아- 좋아요. 추천추천!

섬사이 2007-08-08 01:01   좋아요 0 | URL
네꼬님, 감사합니다. 맛깔나는 글을 쓰고 계시는 네꼬님의 칭찬을 들으니 힘이 불끈불끈 솟아나요. ^^
 
왕의 빨래를 훔친 엄마 트롤 - 스웨덴 편 세계의 전래동화 (상상박물관) 2
안나 발렌베리 지음, 욘 바우어 그림, 박인순 옮김, 엄해영 감수 / 상상박물관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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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림에 반했다.  유럽 서북부의 나라 스웨덴의 전래동화를 모아 놓은 이 책의 페이지를 20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일러스트레이터로 손꼽힌다는 욘 바우어(1882-1918)가 그린 그림들이 장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색의 색조로 섬세하게 그려진, 고전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그림은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나를 오래된 옛이야기의 세계 속으로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얼마 전에 <안인희의 북유럽신화>라는 책을 구입했었는데 그 책 속에는 아서 래컴이라는 사람의 그림이 많이 담겨 있었다.  욘 바우어와 아서 래컴의 그림은 분위기가 상당히 비슷한데, 욘 바우어의 그림이 훨씬 유머 있고 동화적이라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이 그림들을 원화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책의 가로 길이가 일반적인 책의 길이에 비해 2cm 긴 편인데 그 덕에 책을 펼쳤을 때 시원해보이는 느낌이 들고, 욘 바우어의 그림도 아래 위 여백을 적당히 남겨두고 인쇄되어 그림보기에 답답하지 않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북유럽권의 국가 스웨덴의 동화답게 북유럽신화에 등장하는 괴물 ‘트롤’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이 트롤이라는 괴물이, 심술궂고 못생겼지만 익살맞기도 하고, 간혹 사람과 친구가 되어 도움을 주기도 하고, 못된 사람을 혼내주기도 하는 우리나라의 도깨비와 비슷해서 정감있다. 게다가 심술궂고 못된 짓을 많이 하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면 그 사람에겐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는 순박한 원칙을 지키는 모습은 귀엽기까지 하다. 

동화, 그것도 오래된 옛 동화이다 보니 권선징악이라든가 착한 사람은 예쁘고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못생겼다는 왜곡된 통념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신데렐라나 백설 공주동화에 비하면 그 왜곡의 정도가 심하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예를 들면 ‘뒤바뀐 아이’라는 이야기에서 비앙카 마리아라는 아리따운 공주와 트롤 아이가 갓난아기 때 뒤바뀌는데 예쁘고 착한 / 못생기고 나쁜 이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공주는 공주의 자리에 트롤은 트롤의 자리에 있어야 모든 것이 조화롭고 평화롭고 행복해진다는 메시지가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 외에 전통적인 미덕들, 선행, 성실, 노력, 친절, 정직, 용기, 겸손, 절제, 보은, 신의, 양심, 지혜 등이 재미있는 이야기와 아름다운 그림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어  교훈적이라는 무게감 없이 유쾌하고 즐겁다. 

요즘 영화에서나 게임에서나 물리쳐야할 악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트롤이 심술궂긴 하지만 익살스럽고 최소한의 순박한 양심(도움을 준 사람에겐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는)을 가진 북유럽 전래 동화 속 등장인물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그것도 욘 바우어의 아름다운 그림을 통해~!!!) 좋은 경험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게임 속 흉악한 트롤의 모습 위로 욘 바우어가 그린 트롤의 친근한 모습이 겹쳐지기를!)

'상상박물관의 세계의 전래동화'라는 시리즈가 궁금해졌다.  중국, 필리핀, 미국, 일본, 노르웨이 편이 나와있는 것 같은데 다른 책들도 이 책처럼 그림과 내용이 모두 좋은 지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아울러 세계 각국의 보석 같은 전래동화들을 아이들에게 들려줌으로써 그들의 내적 억압과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줄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옛이야기들을 소홀히 대한 듯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이야기의 원천, 상징과 은유가 가득한 세계, 잊고 있었던 할머니의 무릎베개와 다정하게 이마를 어루만지는 따스한 손길에 대한 기억 속으로 나를 데려다준 책이었다.  소중한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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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8-04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리뷰는 다정하면서 조근조근 할말을 다 해요. 그래서 좋아요. ^^

섬사이 2007-08-04 07:56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같은 분 때문에 모자라는 제가 서재꾸릴 용기를 얻어요. 고맙습니다.

네꼬 2007-08-07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서 래컴 그림을 좋아해요. 근데 욘 바우어는 처음인 거 있죠. 확 궁금.

섬사이 2007-08-07 23:51   좋아요 0 | URL
어머나, 네꼬님 아서 래컴을 아시는군요. 저는 <안인희의 북유럽신화>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눈여겨 본 게 전부예요. 제 개인적으로는 욘 바우어의 그림이 더 따뜻하고 정감있어요. 이 책 미리보기가 되던데, 관심있으면 한 번 보세요. 제 서재 이미지도 이 책에서 따왔어요. 저작권이네 뭐네 하는 거에 안걸리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