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것은 가짜다 - 연암 박지원의 예술론과 산문미학
정민 지음 / 태학사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다보면 누군가 앞서 저만큼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때가 있다.  여러 영역에서 깊이를 더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무척 다행스러울 때가 있다.  게다가 그런 분들이 평범한 가정주부에 지나지 않는 내가 읽고 이해하고 감동할 정도의 쉬운 글로 자신의 전문 영역을 설명해줄 때에는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

연암 박지원은 그런 분들이 없었다면 만날 수 없었던 사람이다.  내가 무슨 재주로 한문투성이의 원문을 읽을 수 있을 것이며, 설사 자전을 찾아 펼쳐가며 읽는다 해도 글 속에 인용된 중국 고사들과 인물들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랬더라면 연암의 글은 자전이 너덜거리도록 뒤져내며 한문을 찾아낸 나의 애쓴 보람도 없이 300년의 시간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낙엽처럼 떨어져 구르며 썩어갔을 것이다. 

처음엔 <책만 읽는 바보>라는 책 속에서 연암의 향기가 코끝을 스쳐갔다. 어쩐지 그 향기가 잊혀지지 않아서 고미숙 님이 쓴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란 책을 찾아 읽었다.  ‘열하일기’라는 말이 주는 느낌이 너무 무거워서 일부러 중고생 대상으로 나온 책을 골라 들었던 것이다.  그 책을 읽고는 뭔가 완전히 채워지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같은 저자의 <열하일기, 유쾌한 웃음과 역설의 시공간>이란 책을 더했다. 연암의 열하일기 여정을 따라가면서 연암이라는 인물에 대해 탐구한 책이었는데 이를 통해 비로소 연암이 내게 의미를 주기 시작했다.  그 다음 책으로 골라 든 책이 바로 이 <비슷한 것은 가짜다>였다.

연암의 철학적 사유가 빛나는 코끼리 이야기와 까마귀 이야기로 시작되는 글은 심사心似와 형사刑似, 법고이지변法古而知變 창신이능전創新而能典 등을 논하는 연암의 작문론으로 치닫고 그러다가 연암이 지기들과 나눈 정, 누나를 떠나보내는 마음, 너무 일찍 찾아온 빈궁하고 쓸쓸한 의기 꺾인 중년의 모습이 펼쳐진다.  당시의 경직된 관습과 세태가 연암의 시퍼렇게 빛나고 생생하게 펄떡이는 지적사유를 제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사실이 안타까웠다.

열하일기가 기행문이지만 이 책은 연암의 여정을 쫓아가지는 않는다.  열하일기 중에서 코끼리, 까마귀, 그리고 호곡장을 비롯한 주요 텍스트를 해석한 글이 스물 다섯 편이 실려 있고 저자가 그 글에 대해 설명하는 형식으로 짜여져 있다.  저자는 설명글에서 다른 인물들의 시와 그림, 글들(심지어 현대시인 신동집의 ‘오렌지’, 김윤성의 ‘추억에서’, 박상천의 ‘방생’이라는 시까지도!!)을 끌어오기도 하고 때에 따라 한 페이지에 반이 넘는 각주를 달아놓기도 했다.  연암의 글이라 하면 시퍼런 칼날이나 고막을 찢는 듯한 대성일갈의 목소리를 연상했었는데, 지기들에게 보내는 편지글 중에는 그 애틋함과 애절함에 가슴이 저려오는 것도 있었다.

“이별의 말이 간절해도, 이른바 천리 길에 그댈 보내매 마침내는 한 번 이별일 뿐이라는 것이니 어찌 하겠소.  다만 한 가닥 가녀린 정서가 이리저리 감겨 면면이 끊어지지 않으니, 마치 허공 속의 허깨비 꽃과도 같구려.  와도 어디서 좇아오는지 모르겠고, 떠나가도 다시금 애틋할 뿐이라오.”(p.219)라든가 “저물녘 용수산에 올라 그댈 기다렸지만 오시질 않더군요.  강물만 동편에서 흘러와서는 어디로 가는지 보이지 않더이다.  밤이 이슥하여 달이 떠오길래 정자 아래로 돌아왔지요.  늙은 나무가 희뿌연데 사람이 서 있길래, 나는 또 그대가 나보다 먼저 그 사이에 와 있는가 생각했었다오.”(p.221)같은 글은 연암의 인간적인 감수성을 엿보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책의 맨 뒤편, 책에 실린 연암의 글들이 원문으로 묶여있다. 그 글들을 보고 식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자 문맹의 나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니 내가 정민 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저자의 주선 없이는 연암의 숨결을 느낄 수 없었을 터이니.. 

저자는 나에게 따끔한 질문을 던졌다.
“서구의 담론만이 진짜인 양 행세하는 동안, 정작 우리 것은 기름 때에 절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버린 물건이 되고 말았다.  이제 서여오가 그랬듯이 뭇 사람이 버린 가운데서 그 그릇의 값어치를 알아보고 묵은 때를 벗겨낼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p.315)

질문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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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9-07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좋은아침이에요.^^
연암의 산문미학, 정민선생 책이군요. 담아가렵니다.
언제나 성실하고 알찬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섬사이 2007-09-09 08:50   좋아요 0 | URL
일요일이 밝았네요. 가족분들과 즐거운 시간 가지시길 바래요.
잊지 않고 찾아오셔서 마음에 힘을 주는 글 한 마디 남겨주셔서 고마워요.
요즘 저는 공연히 마음만 바빠서는 제 서재 하나 꾸리는 것만으로도 허덕거리네요. 다른 님들 서재에도 부지런히 들러봐야 할텐데.. ㅠ.ㅠ

2007-09-07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09 0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leeza 2007-09-10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암의 글들을 읽으며 맘껏 사유하고 있는 요즘이예요. 비슷한 것을 넘어서서 제 3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가고 있죠. 님의 리뷰를 보니 참 기분 좋아지네요~

섬사이 2007-09-11 18:53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이자님. 연암 박지원의 글을 좋아하시나봐요. 저야 이제 겨우 발끝을 살짝 적신 정도밖에 되지 않아요. 발끝만 살짝 적시고도 짜릿했답니다. ^^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나 자전거가 되리
한평생 왼쪽과 오른쪽 어느 한쪽으로 기우뚱거리지 않고
말랑말랑한 맨발로 땅을 만져보리

구부러진 길은 반듯하게 펴고, 반듯한 길은 구부리기도 하면서
이 세상의 모든 모퉁이, 움푹 파인 구덩이, 모난 돌멩이들
내 두 바퀴에 감아 기억하리
가위가 광목천 가르듯이 바람을 가르겠지만
바람을 찢어발기진 않으리
나 어느날은 구름이 머문 곳의 주소를 물으러 가고
또 어느날은 잃어버린 달의 반지를 찾으러 가기도 하리
페달을 밟는 발바닥은 촉촉해지고 발목은 굵어지고
종아리는 딴딴해지리
게을러지고 싶으면 체인을 몰래 스르르 풀고
페달을 헛돌게도 하리
굴러가는 시간보다 담벼락에 어깨를 기대고
바퀴살로 햇살이나 하릴없이 돌리는 날이 많을수록 좋으리
그러다가 천천히 언덕 위 옛 애인의 집도 찾아가리
언덕이 가팔라 삼십년이 더 걸렸다고 농을 쳐도 그녀는 웃으리
돌아가는 내리막길에서는 뒷짐 지고 휘파람을 휘휘 불리
죽어도 사랑했었다는 말은 하지 않으리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안도현 시집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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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존중 -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
조너선 색스 지음, 임재서 옮김 / 말글빛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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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유대교에 대한 나의 생각은 패쇄적이고 배타적인 종교, 선민사상을 부여잡고 유난스런 우월감에 사로잡힌 종교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의 홀로코스트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은 갖고 있지만 그럴수록 팔레스타인과의 갈등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차이의 존중’이라는 이 책이 유대교의 유명한 랍비에 의해 쓰여졌다는 사실은 그래서 의외였다.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독단의 종교라 생각한 유대교의 지도자이자 , 지금은 팔레스타인과 날카로운 분쟁 중에 있는 이스라엘인인 저자가 ‘차이'를 존중하자는 주장을 펴는 것은 뭔가 어불성설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현대 민주적인 자본주의의 경쟁적인 시장경제체제, ’세계화‘에 따른 폐단들을 정확히 읽고 진단하는데,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세계화’가 한 나라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 간에 있어서도 혜택의 분배에 있어 제외되어 열악한 처지로 내몰리는 많은 집단이 양산될 것이고 현대 시장의 너무나 빠른 변화는 우리를 불안감에 사로잡히도록 할 것이며, 세계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부족주의’가 생겨나면서 국지적인 분쟁과 익명성이 보장된 테러에 노출될 것이고, 환경은 파괴되고, 가족을 비롯한 공동체가 무너지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는 일은 점점 더 힘겨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가장 많이 기대고 있는 두 가지, 정치와 경제는 각각 절차적인 의미의 관리와 소비욕구의 충족, 이윤의 극대화라는 기능만을 제공할 뿐,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충족시키지 못하므로 평화와 행복의 경지로 우리를 이끌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민주적 자본주의의 맹점, 세계화의 폐단이 드러나는 현실을 고발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세계를 파편화하는 ‘부족주의’를 경계함과 동시에 모든 것을 일원화 하려는 ‘보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고, 또 경제나 정치발전의 과정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방향성을 통해 통제하고 바람직하게 실현해 나가는 것이며, 갈수록 벌어지는 빈부의 격차(개인과 개인 뿐 아니라 국가간에 있어서도)를 해결해 나가기 위해 사회정의로서의 자선을 베풀고, 모든 이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여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줌으로써 권력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며,  경쟁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신뢰를 토대로 협동의 미덕을 발휘하고, 분쟁과 복수로 얼룩진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용서를 통한 화해를 이루는 것이다.

특히 빈곤과 관련된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저자의 글에 따르면 빈곤에는 최저생활수준을 의미하는 빈곤과 상대적 빈곤이 있는데 유대교의 랍비들은 가난한 이들의 인간의 존엄함을 보호하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소박한 장례식을 치러주어야 한다는 규칙’(p.203)이 있고 또 ‘축제일에도 부잣집 소녀들은 좋은 옷이 “없는 소녀들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도록” 빌린 옷을 입어야’(p.203) 한다는 것이다.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부’와 ‘소비능력’을 과시함으로써 다른 이들보다 우월해지려고 애쓰는 듯한 우리 현실의 세태와 비교할 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우리나라의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도 가난한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줄 만큼의 깊은 아량과 배려의 마음도 함께 갖춰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시’와 ‘사치’의 이미지를 벗어나서 ‘자발적 가난’과 ‘부의 사회 환원’의 덕을 갖춘 존경받는 부자가 많아진다면 세상은 좀더 믿을만한 것이 되지 않을까.

저자가 유대교 랍비인 까닭에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어쩌면 이런 부분들 때문에 읽기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다.  그러나 종교에 대한 이야기 역시 생각해 볼만한 것이 많다.  저자가 인용한 구약의 여러 내용들이 사회정의 실현과 빈곤하고 차별받는 계층에 대한 의무와 나와 다른 이방인에 대한 따뜻한 배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종교가 이런 역할들을 올바르게 실행에 옮기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오직 “너희는 세상 끝까지 가서 내 복음을 전하라”는 성서 구절이 강조되어 교세확장이라는 목표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건 아닌지,  급변하는 시대의 물살 속에서 영적인 충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현대인들에게 현실에 맞는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는지, 소외계층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 오직 내 종교만이 옳다는 아집에 사로잡혀 다른 종교를 모두 이단 취급하고 배척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교회 자체가 시장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저자는 이 시대 종교가 풀어가야 할 과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낯선 자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임재하심을 보고 유례없이 강력한 힘이 난무하는 시대에서 무력한 자들과 배고프고 가난하고 무지하고 배움이 짧은 자들, 인간적 잠재력의 표현 기회마저 빼앗긴 자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것이 위대한 종교인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가 영적이고 실제적인 조상으로 경배하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신앙이다.”(p.343)라고.  그리고 “갈등과 투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를 끌어들일 때 모름지기 종교인이라면 반대 목소리를 더욱 분명히 해야 한다”(p.28)면서 우리가 “인간 가능성의 영역을 감소하는 게 아니라 확장하”는(p.342) “차이의 존엄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다양성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도 배울 것(p.343)"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말은 조목조목 너무나 올바른 나머지 너무 이상적이란 느낌을 받는다.  저자의 말대로 된다면 좋은 일이지만 그게 가능할까?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그려놓은 것만 같아서 오히려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실현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이상’이 없는 것보다는 존재해야 하는 것이 낫다.  적어도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알려주니까 말이다.  세계가 함께 같은 이상을 꿈꾸며 비틀거리면서라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는 있을 것이다.

책 끝의 ‘옮긴이의 말’에서 저자가 이 책을 쓰고는 보수적인 유대 집단의 ‘공분’을 사는 바람에 꽤 떠들썩한 물의를 빚었고 그 때문에 2판에서는 몇 구절 수정을 해야 했다고 한다.  옮긴이의 말마따나 <차이의 존중>이라는 책은 출판되면서부터 ‘차이의 존엄’을 인정받지 못하는 가련한 처지였다는 것이 무척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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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31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제목이 몹시 땡기는 책
보관함에 담습니다~ :)

섬사이 2007-09-02 09:48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읽으며 체셔님 생각이 났었더랬죠. 이유는,,, 모르겠어요. ^^

씩씩하니 2007-08-31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리뷰만으로도 너무나,,가슴에...깊은 느낌이 남는 그런 책이에요....
아~......읽어줘야하는데..이렇게 좋은 책을..
그런데..왜 이리.요즘 책이 손에 안잡히고 이렇게 마음이..공중에 뜬 듯이 안정이 안되는지...원~~
님의 일목요연..확,,머리에 와닿는..리뷰..너무나 감사하여요~~

섬사이 2007-09-02 09:49   좋아요 0 | URL
저도 요즘 좀 멍한 상태라서.. 환절기 증후군인지..^^ 그런데도 좋게 읽어주시니 고맙습니다.

순오기 2007-09-26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려고 올라온 서평 주욱~ 보다가 꾹 누릅니다.
님 서재 들어와 가끔 읽어보는데 댓글은 처음 남기려나~~~ 잘 모르겠네요.
어쨋든 좋은 서평에 끌려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섬사이 2007-09-26 23:2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님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모퉁이


모퉁이가 없다면
그리운 게 뭐가 있겠어
비행기 활주로, 고속도로, 그리고 모든 막대기들과
모퉁이 없는 남자들만 있다면
뭐가 그립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계집애들의 고무줄 끊고 숨을 일도 없었겠지
빨간 사과처럼 팔딱이는 심장을 쓸어내릴 일도 없었을테고
하굣길에 그 계집애네 집을 힐끔거리며 바라볼 일도 없었겠지

인생이 운동장처럼 막막했을 거야

모퉁이가 없다면
자전거 핸들을 어떻게 멋지게 꺾었겠어
너하고 어떻게 담벼락에서 키스할 수 있었겠어
예비군 훈련 가서 어떻게 맘대로 오줌을 내갈겼겠어
먼 훗날, 내가 너를 배반해볼 꿈을 꾸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말이야

골목이 아냐 그리움이 모퉁이를 만든 거야
남자가 아냐 여자들이 모퉁이를 만든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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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도 모퉁이를 만들 줄 알던데..
모퉁이를 돌고 돌고 또 돌아도 보이지 않는 사람.
모퉁이를 돌고 돌고 또 돌아서 결국은 제자리에 오게 된 내 모습이 서러워
주저앉게 만들 줄도 알던데...
모퉁이 없었다면,
그 사람과 내가 어떻게 부딪쳐 만날 수 있었겠냐마는..
누군가를 숨기기도 하고
누군가를 드러내기도 하는
길 모퉁이에서

마냥 기다리고 서 있을 수도 없는 나는 어쩌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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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존중 -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
조너선 색스 지음, 임재서 옮김 / 말글빛냄 / 2007년 8월
품절


대결은 뉴스가 되고 화해는 뉴스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대결의 문화를 갖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 우리 자신의 소중한 능력을 앗아갈 것이다. 그 능력이란 우리와 문화와 믿음, 가치관, 이해관계 등이 충돌하는 사람들, 따라서 우리가 반드시 이야기를 걸고 귀를 기울여야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또 그런 사람들에게 이해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이다. -18쪽

세계화는 복잡다단한 방식으로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우리의 삶을 엮어 짜면서 우리를 과거 어느 때보다 가깝게 이어주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집단에 대한 옹졸한 헌신만을 요구하는 낡고 퇴행적인 부족주의(tribalism)가 새로 등장하여 우리를 분열시키고 있다. -24쪽

갈등과 투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를 끌어들일 때 모름지기 종교인이라면 반대 목소리를 더욱 분명히 해야 한다. 폭력과 살육의 핑계(망토,cloak)로 쓰기 위해 종교를 찾는 오늘날, 우리는 거룩함의 예복(robe)인 종교를 결코 그런 식으로 쓰게 놔두어서는 안 된다. 신앙을 전쟁의 대의로 사용한다면, 그에 못지않게 평화의 이름으로 호소하는 목소리도 나와야 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종교는 그것이 해답의 일부가 되지 않으면 문제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 -28쪽

20세기는 이데올로기의 정치가 압도했던 시대였지만, 오늘날 우리는 정체성 정치의 시대로 돌입하고 있다. (중략) 정체성은 쪼개고 분리하는 것이다. '우리'를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도 '그들', 즉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종교는 확고한 경계 안에서 공동체를 만들면서 그 경계에 걸쳐 많은 갈등을 야기할 수가 있는 것이다. -29~30쪽

우리는 공통의 신학, 인류 보편의 신학뿐만 아니라, 차이의 신학도 필요하다. ..... 차이의 존엄은 종교적 이념 이상이다. -49쪽

<덕의 상실 After Virtue>에서 알래스테어 매킨타이어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실 우리는 도덕의 시뮬라르크(환영)을 가지고 있고 도덕의 핵심용어들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도덕성을 이해하는 능력을-완전히는 아니지만 거의- 상실하고 말았다." 윤리라는 개념 자체는 점점 더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효율성(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과 치료법(원하는 것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 방법)에 대해 말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양쪽 모두 도덕성의 멘탈리티(무엇을 욕망'해야' 하는가)보다는 마케팅의 멘탈리티(욕망의 자극과 만족)와 관련이 있다.
(중략)
의무와 책임, 절제 등에 관해 말할 능력을 상실하고 만족만을 바라는 욕망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때 공공선에 관해서 말하기란 더욱 어려운 법이다. -65~66쪽

경제가 정치를 대체할 수 있고 사적 선택이 공공선을 대신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상상력의 가장 원대한 희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경제 자체는 '누구'와 '왜'라는 커다란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79쪽

즉, 보편주의는 부족주의에 대한 부적절한 반응이며 부족주의 못지않게 위험한다. 보편주의는 겉으로는 매력적이지만 결국 그릇된 믿음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간 조건의 본질에 고나한 진리는 오직 하나이며 그 진리가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에 대해 참이라는 믿음이다. 이에 따르면 내가 옳다면 너는 그른 것이고, 내가 믿는 게 참이면 네가 믿는 것은 거짓이며, 너는 그 거짓 믿음에서 빠져나와 구제받아야 한다. 역사의 참극은 이런 생각에서 생겨났다. -93쪽

성경의 유일신 신앙은 하느님이 한 분이기에 하느님늬 면전에 이르는 문도 하나밖에 없다는 사상이 아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유일성(unity)은 창조의 다양성(diversity)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이는 자연에도 적용된다. 정말로 존재하고 있고 우리가 진심으로 경이를 느껴야 할 대상은 잎사귀의-플라톤적 의미에서의-형상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25만개의 서로 다른 종류의 잎사귀이며, 본질적인 새가 아니라 지금 이 땅에 존재하는 9천종의 새이고, 다른 모든 언어를 포괄하는 초(超)언어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실제로 통용되는 6천 개의 언어이다. -98쪽

도덕적 배려의 보편성은 우리가 보편적인 존재가 되어야 배우는 게 아니라 특수한 존재가 되어야 배우는 것이다. 이는 부모가 되어 내 아이를 사랑할 줄 알게 된 다음에야 제 자식을 사랑하는 다른 부모의 마음도 헤아릴 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도덕적 특수성에서 시작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연대성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찾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각자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고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어서 그게 무슨 뜻인지 안 다음에야 인간의 연대성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특정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인류 전체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지름길은 없다. -106쪽

부족주의는 이방인의 권리는 부인하고 보편주의는 이방인이 개종하고 순응하고 동화되어서 이방인이기를 그칠 때에만 권리를 인정한다. 보편주의는 단일한 문화의 진리를 전 인류의 척도로 삼는다. 그 결과는 종종 비극적이었고 언제나 인간의 존엄함에 대한 모욕이었다. -111쪽

벤저민 바버가 지적했듯이 세상에는 구심력과 원심력이 있다. 맥월드, 즉 다국적 기업, 유명 브랜드, 미디어 스타, 위성 및 유선 텔레비전, 인터넷 등으로 전달되는 미국식 문화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서양의 '퇴폐'를 거부하고-때로는 종교적이고 때로는 인종적이며 주로는 양자의 혼합인-시원적인 정체성을 재천명하는 되살아난 부족주의가 있다. 9.11테러처럼 두 문화가 만나 충돌하면 세계는 무참히 흔들린다. 양자의 균형을 유지하고 우리의 공통성과 차이, 보편과 특수에 정당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모든 문화적 정신적 과제 가운데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지만, 그것만이 문명의 충돌을 피하는 길이다. -112쪽

가장 현명한 자는 남들보다 현명한 자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지혜의 몫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그들에게서 기꺼이 배우려는 자이다. 진리를 모두 아는 사람은 없고 우리들은 저마다 진리의 일부만을 알기 때문이다. -117쪽

고도의 소비문화를 지탱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부추기고 일시적으로 만족되는 욕망의 급속한 변천이다. 시장이 교환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인생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되면, 의미 자체가 허물어진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인상적인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순례자'에서 '여행자'로 변한 것이다. 사회는 점차 가정이 아니라 호텔을 닮아간다. 우리는 우리가 아무 뎃도 속하지 않은 상태, 아무에게도 진정한 애정을 갖지 않고 어느 누구의 진실한 애정도 받지 않는 상태, 아무와도 운명을 공유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영속적인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는 상태에 접근하고 있다. 삶은 자아 너머의 보다 견고하고 영속적인 것과 점차 멀어지면서 점점 더 가벼워진다. -135쪽

도덕성은-언제나 그런것은 아니지만 때로는-희망의 이름으로 절망과 맞서 싸우고 우리를 객체가 아닌 주체, 다시 말해 행동과 삶의 주인으로 복귀시킴으로써 인간의 존엄함을 회복하려는 시도였다는 간단한 사실을 나는 어디에서도 분명히 언급된 경우를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당연히 '탈도덕화demoralization'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도덕적 의미의 상실이기도 하고 희망의 상실이기도 하다. -139쪽

우리한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우리의 통제력 바깥에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 우리가 겪는 많은 일들이 우리가 절대 만날 리가 없고 누군지 알 수도 없는 사람들이 내리는 경제적 선택이나 정치적 결정의 결과라는 사실은 우리 문화권에 속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자아의 좁아터진 영역 너머에 하나의 세상이 있고, 그 세상에서 우리는 행위의 주역maker이 아니라 대상made이다. 여기서 절망이 생긴다. -140쪽

상대에 대한 존경과 열성이 담긴 대화, 한없는 공감과 이해가 필요한 대화야말로 차이의 존엄함이 다스리는 세상의 도덕적 형식이다. -148쪽

도덕이 점점 더 불확실해지는 이 세상에서 새삼 회복해야 할 가치는 책임responsibility이다. 즉,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우리가 하는 일은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고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는 책임감이다. -149쪽

따라서 부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이른바 리세즈 오블리주Richess oblige다..... 중략..... 부는 하느님이 주신 축복이므로 거기에는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의무가 수반되었다.
그러므로 유대교의 관점에서 새로운 경제의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면은, 자유 시장 자체가 아니라 시장이 사회적유대를 붕괴시키고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를 격리하며 성공한 자의 책임감을 약화시키는 경향이다. -172쪽

빈곤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그가 필요한 것을 넉넉히')는 최저 생활수준을 가리킨다. 이는 유대 율법에서 음식과 주거와 기본 가구나 결혼식 비용 등을 의미했다. 두 번째('그에게 없는 것')는 상대적 빈곤을 뜻한다. 여기서 상대적이라 함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예전 생활수준에 대해 상대적이라는 뜻이다. (중략) 사람에게는 단순한 물리적 욕구 이상의 심리적인 욕구가 있다는 인식이다. 가난한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좋은 사회는 그런 수치를 겪지 않게 하는 사회다. -203쪽

최고의 평등은 수입이나 부의 평등이 아니고 기회의 평등도 아니다. ..(중략).. 사회는 모든 성원에게 동등한 존엄함(히브리어로는 카보드 하브리요트kavod Habriyot 즉 '인간다운 품위')을 보장해야 한다. -205쪽

가난한 개인뿐만 아니라 가난한 국가의 존엄과 독립성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은 시급한 요청이다. 통신과 무역, 문화의 세계화는 인간의 책임도 세계화한다. 다수를 가난과 무지와 질병의 노예로 만드는 대가로 소수의 자유를 사는 일은 없어야 한다. -210쪽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에 할 수 있는 최고의 투자는 모든 어린이가 최대한의 교육 기회를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229쪽

교육(읽고 쓰는 능력뿐 아니라 정보를 이해하고 적용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은 인간의 존엄함에 본질적인 요소이다. 나는 교육이 자유로운 사회의 토대라고 생각한다. 지식은 곧 힘이기 때문에, 누구나 지식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권력(힘)에 대한 동등한 접근권을 보장한는 선결 요건이다. 그것은 또한 창조성을 여는 열쇠이며, 창조성은 모든 사회경제 집단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창조성은 21세기 번영을 이룰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중략)
정보 시대에는 지식 자본에 접근하고 그것을 이용할 능력이 있는 자, 즉 정보를 이해하여 혁신적인 목적으로 사용할 능력(조지아 나이가 '부드러운soft' 권력이라고 부른)이 있는 자에게 있다.
(중략)
교육에 대한 투자는 사회가 어린이들에게 미래를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이다. -230쪽

오직 협동으로 경쟁의 균형을 바로잡을 때에만 자비로운 결과가 생긴다. 이것이 바로 경쟁의 역설이다. 경쟁만이 난무하는 세상은 창조적으로 출발하지만 결국 자기파괴로 끝이 난다. -255쪽

경쟁 없는 협동이 절름발이라면 협동 없는 경쟁은 장님이다. 만들고 사고 일하고 소비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을 존중하는 환경을 조성하고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관계를 만드는 것은 새뮤얼 브리턴이 말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264쪽

누군가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할 존재가 있다고 믿을 때, 우리는 지구의 주인이 아니며 후손들과 언약으로 맺어진 사이라고 믿을 때, 우리는 행동에 가해지는 도덕적 제약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281쪽

생태 환경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인상적인 이미지는, 지구를 존재의 근원에 속하는 무엇으로 보고 우리를 그런 지구를 보존하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우리의 후손을 위해 그 지구를 더욱 아름답게 가꿔야 할 신탁 관리인으로 보는 이미지다. -282쪽

도덕적 이상이 없다면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공유해야 할 도덕적 이상은 오직 대화를 통해서만, 계급과 수입과 인종과 신앙의 경계를 넘어 서로 이야기하고 귀를 기울이는 과정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다. -288쪽

용서야말로 인간의 자유로움을 입증하는 증거라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수동적인 반응reaction이 아닌 능동적인 행동action이며, 상황에 규정되는 것에 대한 거절이다. 그것은 행로行路를 바꾸고 과거의 이야기를 고쳐 쓰고 미래를 위한 뜻밖의 가능성을 창조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나타낸다. -295쪽

정의는 비개인적인 도덕 질서의 회복이며 용서는 개인적인 도덕 질서의 회복이다. 정의는 잘못을 바로잡고, 용서는 깨진 관계를 회복한다. -307쪽

사랑은 소유 이상의 무엇이다. 사랑은 놓아줄 줄 아는 힘이다. 용서 역시 놓아줄 수 있는 힘이며, 용서가 없다면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이를 죽이고 만다. 모든 용서는 파편화된 세상에서 깨진 것들을 한데 붙여준다. -312쪽

과거의 증오 위에 그들의 미래를 세울 수는 없으며, 그들에게 사람들을 덜 사랑하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더 사랑하라고 가르칠 수는 없다. ..(중략).. 나는 과거를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에서 배우기 위해 과거를 존중한다. 고통에 고통을 추가하거나 슬픔에 슬픔을 덧붙이지 않음으로써 과거에 경의를 표한다. 우리가 증오에는 사랑으로, 폭력에는 평화로, 원한에는 관대한 마음으로, 갈등에는 화래로 응답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13쪽

내가 보기에 종교는 경제학과 정치학이 제공하지 못하는 진리를 구현하며, 다른 모든 것이 변하는 시대에 홀로 청정하다. 종교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잊지 않게 해준다. 즉, 문명이 살아남는 것은 힘과 부와 세력이 강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약자를 외면하지 않은 덕이고 빈자를 배려한 덕이며 힘없는 자를 보살핀 덕이라는 사실 말이다. 약자the vulnerable들에 대한 연민을 보여준 문화가 강했다invulnerable는 사실은 역사가 남긴 아이러니하면서도 매우 인간적인 교훈이다. 우리가 극대화해야 하는 궁극의 가치는 인간의 존엄함, 모두가 창조주 하느님의 평등한 자식인 인간의 존엄함이다. -321쪽

참다운 신앙의 시금석은 내가 차이를 용인할 수 있는지 여부에 있다. 과연 나는 나와 모습이 다른 사람들, 나와 언어와 신앙과 이상이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신의 형상을 볼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면 나는 하느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나를 만들게 하는 대신 내 형상에 따라 하느님을 만든 것이다. ..(중략).. 차이는 우리르 작게 하는 게 아니라 크게 하는 것임을 인정할 수 있을까? 이것은 아무 데도 속하지 않는 자의 사해동포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애착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다른 사람의 애착도 존중할 줄 아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이다. -330쪽

다원주의는 희망이다. 우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공통의 목적에 각자 고유하게 기여할 수 있다고 할 때, 바로 이런 사실에 대한 앎의 바탕을 둔 가치이기 때문이다. 단기적으로는 서로의 욕망과 욕구가 충돌할지 모른다. 그러나 차이가 은총의 원천임을 안다면 우리는 결국 중재와 갈등 해소와 화해와 평화를 구할 것이니, 평화의 토대는 통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이기 때문이다. -333쪽

내가 유대 역사에 관해 숙고하면서 배운 가장 중요한 사항은 낙관과 희망을 구분하는 법이다. 낙관은 상황이 나아지리라는 믿음이다. 희망은 우리가 힘을 합쳐 더 나은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이다. 낙관이 수동적인 덕목이라면 희망은 능동적인 덕목이다. 낙관론자가 되기 위해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희망을 갖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중략)
희망은 텅 빈 개념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문화에서 생기지도 않는다. 그것은 행동의 원천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믿음에서 태어난다. -338쪽

희망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과거의 실수에서 배워 다음에는 달리 행동할 수 있음을 아는 것이며, 역사란 때로 길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꺾어들기도 하지만 조지프 헬러가 말한 '바람에 날리는 우연의 쓰레기봉투'가 아니라 구원을 향해 가는 오래고 느린 여정임을 아는 것이다.
(중략).. 희망의 궁극에 있는 것은 하느님이 역사를 쓰는 저자라는 믿음이 아니며 하느님이 개입하여 우리를 잘못된 길에서 구원하거나 악이 배태하는 최악의 결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리라는 믿음도 아니다. 희망의 궁극에는 하는님이 서투른 노력을 하는 우리 곁에서 우리의 열망을 보살핀다는 믿음, 우리가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수단을 주셨다는 믿음,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꿈꾸고 희망하고 노력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다. -3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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