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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것은 가짜다 - 연암 박지원의 예술론과 산문미학
정민 지음 / 태학사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다보면 누군가 앞서 저만큼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때가 있다. 여러 영역에서 깊이를 더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무척 다행스러울 때가 있다. 게다가 그런 분들이 평범한 가정주부에 지나지 않는 내가 읽고 이해하고 감동할 정도의 쉬운 글로 자신의 전문 영역을 설명해줄 때에는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
연암 박지원은 그런 분들이 없었다면 만날 수 없었던 사람이다. 내가 무슨 재주로 한문투성이의 원문을 읽을 수 있을 것이며, 설사 자전을 찾아 펼쳐가며 읽는다 해도 글 속에 인용된 중국 고사들과 인물들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랬더라면 연암의 글은 자전이 너덜거리도록 뒤져내며 한문을 찾아낸 나의 애쓴 보람도 없이 300년의 시간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낙엽처럼 떨어져 구르며 썩어갔을 것이다.
처음엔 <책만 읽는 바보>라는 책 속에서 연암의 향기가 코끝을 스쳐갔다. 어쩐지 그 향기가 잊혀지지 않아서 고미숙 님이 쓴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란 책을 찾아 읽었다. ‘열하일기’라는 말이 주는 느낌이 너무 무거워서 일부러 중고생 대상으로 나온 책을 골라 들었던 것이다. 그 책을 읽고는 뭔가 완전히 채워지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같은 저자의 <열하일기, 유쾌한 웃음과 역설의 시공간>이란 책을 더했다. 연암의 열하일기 여정을 따라가면서 연암이라는 인물에 대해 탐구한 책이었는데 이를 통해 비로소 연암이 내게 의미를 주기 시작했다. 그 다음 책으로 골라 든 책이 바로 이 <비슷한 것은 가짜다>였다.
연암의 철학적 사유가 빛나는 코끼리 이야기와 까마귀 이야기로 시작되는 글은 심사心似와 형사刑似, 법고이지변法古而知變 창신이능전創新而能典 등을 논하는 연암의 작문론으로 치닫고 그러다가 연암이 지기들과 나눈 정, 누나를 떠나보내는 마음, 너무 일찍 찾아온 빈궁하고 쓸쓸한 의기 꺾인 중년의 모습이 펼쳐진다. 당시의 경직된 관습과 세태가 연암의 시퍼렇게 빛나고 생생하게 펄떡이는 지적사유를 제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사실이 안타까웠다.
열하일기가 기행문이지만 이 책은 연암의 여정을 쫓아가지는 않는다. 열하일기 중에서 코끼리, 까마귀, 그리고 호곡장을 비롯한 주요 텍스트를 해석한 글이 스물 다섯 편이 실려 있고 저자가 그 글에 대해 설명하는 형식으로 짜여져 있다. 저자는 설명글에서 다른 인물들의 시와 그림, 글들(심지어 현대시인 신동집의 ‘오렌지’, 김윤성의 ‘추억에서’, 박상천의 ‘방생’이라는 시까지도!!)을 끌어오기도 하고 때에 따라 한 페이지에 반이 넘는 각주를 달아놓기도 했다. 연암의 글이라 하면 시퍼런 칼날이나 고막을 찢는 듯한 대성일갈의 목소리를 연상했었는데, 지기들에게 보내는 편지글 중에는 그 애틋함과 애절함에 가슴이 저려오는 것도 있었다.
“이별의 말이 간절해도, 이른바 천리 길에 그댈 보내매 마침내는 한 번 이별일 뿐이라는 것이니 어찌 하겠소. 다만 한 가닥 가녀린 정서가 이리저리 감겨 면면이 끊어지지 않으니, 마치 허공 속의 허깨비 꽃과도 같구려. 와도 어디서 좇아오는지 모르겠고, 떠나가도 다시금 애틋할 뿐이라오.”(p.219)라든가 “저물녘 용수산에 올라 그댈 기다렸지만 오시질 않더군요. 강물만 동편에서 흘러와서는 어디로 가는지 보이지 않더이다. 밤이 이슥하여 달이 떠오길래 정자 아래로 돌아왔지요. 늙은 나무가 희뿌연데 사람이 서 있길래, 나는 또 그대가 나보다 먼저 그 사이에 와 있는가 생각했었다오.”(p.221)같은 글은 연암의 인간적인 감수성을 엿보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책의 맨 뒤편, 책에 실린 연암의 글들이 원문으로 묶여있다. 그 글들을 보고 식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자 문맹의 나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니 내가 정민 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저자의 주선 없이는 연암의 숨결을 느낄 수 없었을 터이니..
저자는 나에게 따끔한 질문을 던졌다.
“서구의 담론만이 진짜인 양 행세하는 동안, 정작 우리 것은 기름 때에 절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버린 물건이 되고 말았다. 이제 서여오가 그랬듯이 뭇 사람이 버린 가운데서 그 그릇의 값어치를 알아보고 묵은 때를 벗겨낼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p.315)
질문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