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차이의 존중 -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
조너선 색스 지음, 임재서 옮김 / 말글빛냄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유대교에 대한 나의 생각은 패쇄적이고 배타적인 종교, 선민사상을 부여잡고 유난스런 우월감에 사로잡힌 종교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의 홀로코스트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은 갖고 있지만 그럴수록 팔레스타인과의 갈등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차이의 존중’이라는 이 책이 유대교의 유명한 랍비에 의해 쓰여졌다는 사실은 그래서 의외였다.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독단의 종교라 생각한 유대교의 지도자이자 , 지금은 팔레스타인과 날카로운 분쟁 중에 있는 이스라엘인인 저자가 ‘차이'를 존중하자는 주장을 펴는 것은 뭔가 어불성설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현대 민주적인 자본주의의 경쟁적인 시장경제체제, ’세계화‘에 따른 폐단들을 정확히 읽고 진단하는데,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세계화’가 한 나라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 간에 있어서도 혜택의 분배에 있어 제외되어 열악한 처지로 내몰리는 많은 집단이 양산될 것이고 현대 시장의 너무나 빠른 변화는 우리를 불안감에 사로잡히도록 할 것이며, 세계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부족주의’가 생겨나면서 국지적인 분쟁과 익명성이 보장된 테러에 노출될 것이고, 환경은 파괴되고, 가족을 비롯한 공동체가 무너지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는 일은 점점 더 힘겨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가장 많이 기대고 있는 두 가지, 정치와 경제는 각각 절차적인 의미의 관리와 소비욕구의 충족, 이윤의 극대화라는 기능만을 제공할 뿐,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충족시키지 못하므로 평화와 행복의 경지로 우리를 이끌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민주적 자본주의의 맹점, 세계화의 폐단이 드러나는 현실을 고발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세계를 파편화하는 ‘부족주의’를 경계함과 동시에 모든 것을 일원화 하려는 ‘보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고, 또 경제나 정치발전의 과정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방향성을 통해 통제하고 바람직하게 실현해 나가는 것이며, 갈수록 벌어지는 빈부의 격차(개인과 개인 뿐 아니라 국가간에 있어서도)를 해결해 나가기 위해 사회정의로서의 자선을 베풀고, 모든 이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여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줌으로써 권력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며, 경쟁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신뢰를 토대로 협동의 미덕을 발휘하고, 분쟁과 복수로 얼룩진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용서를 통한 화해를 이루는 것이다.
특히 빈곤과 관련된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저자의 글에 따르면 빈곤에는 최저생활수준을 의미하는 빈곤과 상대적 빈곤이 있는데 유대교의 랍비들은 가난한 이들의 인간의 존엄함을 보호하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소박한 장례식을 치러주어야 한다는 규칙’(p.203)이 있고 또 ‘축제일에도 부잣집 소녀들은 좋은 옷이 “없는 소녀들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도록” 빌린 옷을 입어야’(p.203) 한다는 것이다.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부’와 ‘소비능력’을 과시함으로써 다른 이들보다 우월해지려고 애쓰는 듯한 우리 현실의 세태와 비교할 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우리나라의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도 가난한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줄 만큼의 깊은 아량과 배려의 마음도 함께 갖춰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시’와 ‘사치’의 이미지를 벗어나서 ‘자발적 가난’과 ‘부의 사회 환원’의 덕을 갖춘 존경받는 부자가 많아진다면 세상은 좀더 믿을만한 것이 되지 않을까.
저자가 유대교 랍비인 까닭에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어쩌면 이런 부분들 때문에 읽기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다. 그러나 종교에 대한 이야기 역시 생각해 볼만한 것이 많다. 저자가 인용한 구약의 여러 내용들이 사회정의 실현과 빈곤하고 차별받는 계층에 대한 의무와 나와 다른 이방인에 대한 따뜻한 배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종교가 이런 역할들을 올바르게 실행에 옮기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오직 “너희는 세상 끝까지 가서 내 복음을 전하라”는 성서 구절이 강조되어 교세확장이라는 목표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건 아닌지, 급변하는 시대의 물살 속에서 영적인 충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현대인들에게 현실에 맞는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는지, 소외계층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 오직 내 종교만이 옳다는 아집에 사로잡혀 다른 종교를 모두 이단 취급하고 배척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교회 자체가 시장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저자는 이 시대 종교가 풀어가야 할 과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낯선 자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임재하심을 보고 유례없이 강력한 힘이 난무하는 시대에서 무력한 자들과 배고프고 가난하고 무지하고 배움이 짧은 자들, 인간적 잠재력의 표현 기회마저 빼앗긴 자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것이 위대한 종교인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가 영적이고 실제적인 조상으로 경배하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신앙이다.”(p.343)라고. 그리고 “갈등과 투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를 끌어들일 때 모름지기 종교인이라면 반대 목소리를 더욱 분명히 해야 한다”(p.28)면서 우리가 “인간 가능성의 영역을 감소하는 게 아니라 확장하”는(p.342) “차이의 존엄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다양성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도 배울 것(p.343)"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말은 조목조목 너무나 올바른 나머지 너무 이상적이란 느낌을 받는다. 저자의 말대로 된다면 좋은 일이지만 그게 가능할까?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그려놓은 것만 같아서 오히려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실현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이상’이 없는 것보다는 존재해야 하는 것이 낫다. 적어도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알려주니까 말이다. 세계가 함께 같은 이상을 꿈꾸며 비틀거리면서라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는 있을 것이다.
책 끝의 ‘옮긴이의 말’에서 저자가 이 책을 쓰고는 보수적인 유대 집단의 ‘공분’을 사는 바람에 꽤 떠들썩한 물의를 빚었고 그 때문에 2판에서는 몇 구절 수정을 해야 했다고 한다. 옮긴이의 말마따나 <차이의 존중>이라는 책은 출판되면서부터 ‘차이의 존엄’을 인정받지 못하는 가련한 처지였다는 것이 무척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