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결은 뉴스가 되고 화해는 뉴스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대결의 문화를 갖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 우리 자신의 소중한 능력을 앗아갈 것이다. 그 능력이란 우리와 문화와 믿음, 가치관, 이해관계 등이 충돌하는 사람들, 따라서 우리가 반드시 이야기를 걸고 귀를 기울여야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또 그런 사람들에게 이해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이다. -18쪽
세계화는 복잡다단한 방식으로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우리의 삶을 엮어 짜면서 우리를 과거 어느 때보다 가깝게 이어주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집단에 대한 옹졸한 헌신만을 요구하는 낡고 퇴행적인 부족주의(tribalism)가 새로 등장하여 우리를 분열시키고 있다. -24쪽
갈등과 투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를 끌어들일 때 모름지기 종교인이라면 반대 목소리를 더욱 분명히 해야 한다. 폭력과 살육의 핑계(망토,cloak)로 쓰기 위해 종교를 찾는 오늘날, 우리는 거룩함의 예복(robe)인 종교를 결코 그런 식으로 쓰게 놔두어서는 안 된다. 신앙을 전쟁의 대의로 사용한다면, 그에 못지않게 평화의 이름으로 호소하는 목소리도 나와야 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종교는 그것이 해답의 일부가 되지 않으면 문제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 -28쪽
20세기는 이데올로기의 정치가 압도했던 시대였지만, 오늘날 우리는 정체성 정치의 시대로 돌입하고 있다. (중략) 정체성은 쪼개고 분리하는 것이다. '우리'를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도 '그들', 즉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종교는 확고한 경계 안에서 공동체를 만들면서 그 경계에 걸쳐 많은 갈등을 야기할 수가 있는 것이다. -29~30쪽
우리는 공통의 신학, 인류 보편의 신학뿐만 아니라, 차이의 신학도 필요하다. ..... 차이의 존엄은 종교적 이념 이상이다. -49쪽
<덕의 상실 After Virtue>에서 알래스테어 매킨타이어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실 우리는 도덕의 시뮬라르크(환영)을 가지고 있고 도덕의 핵심용어들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도덕성을 이해하는 능력을-완전히는 아니지만 거의- 상실하고 말았다." 윤리라는 개념 자체는 점점 더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효율성(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과 치료법(원하는 것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 방법)에 대해 말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양쪽 모두 도덕성의 멘탈리티(무엇을 욕망'해야' 하는가)보다는 마케팅의 멘탈리티(욕망의 자극과 만족)와 관련이 있다. (중략) 의무와 책임, 절제 등에 관해 말할 능력을 상실하고 만족만을 바라는 욕망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때 공공선에 관해서 말하기란 더욱 어려운 법이다. -65~66쪽
경제가 정치를 대체할 수 있고 사적 선택이 공공선을 대신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상상력의 가장 원대한 희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경제 자체는 '누구'와 '왜'라는 커다란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79쪽
즉, 보편주의는 부족주의에 대한 부적절한 반응이며 부족주의 못지않게 위험한다. 보편주의는 겉으로는 매력적이지만 결국 그릇된 믿음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간 조건의 본질에 고나한 진리는 오직 하나이며 그 진리가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에 대해 참이라는 믿음이다. 이에 따르면 내가 옳다면 너는 그른 것이고, 내가 믿는 게 참이면 네가 믿는 것은 거짓이며, 너는 그 거짓 믿음에서 빠져나와 구제받아야 한다. 역사의 참극은 이런 생각에서 생겨났다. -93쪽
성경의 유일신 신앙은 하느님이 한 분이기에 하느님늬 면전에 이르는 문도 하나밖에 없다는 사상이 아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유일성(unity)은 창조의 다양성(diversity)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이는 자연에도 적용된다. 정말로 존재하고 있고 우리가 진심으로 경이를 느껴야 할 대상은 잎사귀의-플라톤적 의미에서의-형상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25만개의 서로 다른 종류의 잎사귀이며, 본질적인 새가 아니라 지금 이 땅에 존재하는 9천종의 새이고, 다른 모든 언어를 포괄하는 초(超)언어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실제로 통용되는 6천 개의 언어이다. -98쪽
도덕적 배려의 보편성은 우리가 보편적인 존재가 되어야 배우는 게 아니라 특수한 존재가 되어야 배우는 것이다. 이는 부모가 되어 내 아이를 사랑할 줄 알게 된 다음에야 제 자식을 사랑하는 다른 부모의 마음도 헤아릴 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도덕적 특수성에서 시작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연대성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찾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각자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고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어서 그게 무슨 뜻인지 안 다음에야 인간의 연대성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특정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인류 전체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지름길은 없다. -106쪽
부족주의는 이방인의 권리는 부인하고 보편주의는 이방인이 개종하고 순응하고 동화되어서 이방인이기를 그칠 때에만 권리를 인정한다. 보편주의는 단일한 문화의 진리를 전 인류의 척도로 삼는다. 그 결과는 종종 비극적이었고 언제나 인간의 존엄함에 대한 모욕이었다. -111쪽
벤저민 바버가 지적했듯이 세상에는 구심력과 원심력이 있다. 맥월드, 즉 다국적 기업, 유명 브랜드, 미디어 스타, 위성 및 유선 텔레비전, 인터넷 등으로 전달되는 미국식 문화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서양의 '퇴폐'를 거부하고-때로는 종교적이고 때로는 인종적이며 주로는 양자의 혼합인-시원적인 정체성을 재천명하는 되살아난 부족주의가 있다. 9.11테러처럼 두 문화가 만나 충돌하면 세계는 무참히 흔들린다. 양자의 균형을 유지하고 우리의 공통성과 차이, 보편과 특수에 정당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모든 문화적 정신적 과제 가운데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지만, 그것만이 문명의 충돌을 피하는 길이다. -112쪽
가장 현명한 자는 남들보다 현명한 자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지혜의 몫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그들에게서 기꺼이 배우려는 자이다. 진리를 모두 아는 사람은 없고 우리들은 저마다 진리의 일부만을 알기 때문이다. -117쪽
고도의 소비문화를 지탱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부추기고 일시적으로 만족되는 욕망의 급속한 변천이다. 시장이 교환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인생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되면, 의미 자체가 허물어진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인상적인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순례자'에서 '여행자'로 변한 것이다. 사회는 점차 가정이 아니라 호텔을 닮아간다. 우리는 우리가 아무 뎃도 속하지 않은 상태, 아무에게도 진정한 애정을 갖지 않고 어느 누구의 진실한 애정도 받지 않는 상태, 아무와도 운명을 공유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영속적인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는 상태에 접근하고 있다. 삶은 자아 너머의 보다 견고하고 영속적인 것과 점차 멀어지면서 점점 더 가벼워진다. -135쪽
도덕성은-언제나 그런것은 아니지만 때로는-희망의 이름으로 절망과 맞서 싸우고 우리를 객체가 아닌 주체, 다시 말해 행동과 삶의 주인으로 복귀시킴으로써 인간의 존엄함을 회복하려는 시도였다는 간단한 사실을 나는 어디에서도 분명히 언급된 경우를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당연히 '탈도덕화demoralization'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도덕적 의미의 상실이기도 하고 희망의 상실이기도 하다. -139쪽
우리한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우리의 통제력 바깥에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 우리가 겪는 많은 일들이 우리가 절대 만날 리가 없고 누군지 알 수도 없는 사람들이 내리는 경제적 선택이나 정치적 결정의 결과라는 사실은 우리 문화권에 속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자아의 좁아터진 영역 너머에 하나의 세상이 있고, 그 세상에서 우리는 행위의 주역maker이 아니라 대상made이다. 여기서 절망이 생긴다. -140쪽
상대에 대한 존경과 열성이 담긴 대화, 한없는 공감과 이해가 필요한 대화야말로 차이의 존엄함이 다스리는 세상의 도덕적 형식이다. -148쪽
도덕이 점점 더 불확실해지는 이 세상에서 새삼 회복해야 할 가치는 책임responsibility이다. 즉,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우리가 하는 일은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고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는 책임감이다. -149쪽
따라서 부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이른바 리세즈 오블리주Richess oblige다..... 중략..... 부는 하느님이 주신 축복이므로 거기에는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의무가 수반되었다. 그러므로 유대교의 관점에서 새로운 경제의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면은, 자유 시장 자체가 아니라 시장이 사회적유대를 붕괴시키고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를 격리하며 성공한 자의 책임감을 약화시키는 경향이다. -172쪽
빈곤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그가 필요한 것을 넉넉히')는 최저 생활수준을 가리킨다. 이는 유대 율법에서 음식과 주거와 기본 가구나 결혼식 비용 등을 의미했다. 두 번째('그에게 없는 것')는 상대적 빈곤을 뜻한다. 여기서 상대적이라 함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예전 생활수준에 대해 상대적이라는 뜻이다. (중략) 사람에게는 단순한 물리적 욕구 이상의 심리적인 욕구가 있다는 인식이다. 가난한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좋은 사회는 그런 수치를 겪지 않게 하는 사회다. -203쪽
최고의 평등은 수입이나 부의 평등이 아니고 기회의 평등도 아니다. ..(중략).. 사회는 모든 성원에게 동등한 존엄함(히브리어로는 카보드 하브리요트kavod Habriyot 즉 '인간다운 품위')을 보장해야 한다. -205쪽
가난한 개인뿐만 아니라 가난한 국가의 존엄과 독립성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은 시급한 요청이다. 통신과 무역, 문화의 세계화는 인간의 책임도 세계화한다. 다수를 가난과 무지와 질병의 노예로 만드는 대가로 소수의 자유를 사는 일은 없어야 한다. -210쪽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에 할 수 있는 최고의 투자는 모든 어린이가 최대한의 교육 기회를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229쪽
교육(읽고 쓰는 능력뿐 아니라 정보를 이해하고 적용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은 인간의 존엄함에 본질적인 요소이다. 나는 교육이 자유로운 사회의 토대라고 생각한다. 지식은 곧 힘이기 때문에, 누구나 지식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권력(힘)에 대한 동등한 접근권을 보장한는 선결 요건이다. 그것은 또한 창조성을 여는 열쇠이며, 창조성은 모든 사회경제 집단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창조성은 21세기 번영을 이룰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중략) 정보 시대에는 지식 자본에 접근하고 그것을 이용할 능력이 있는 자, 즉 정보를 이해하여 혁신적인 목적으로 사용할 능력(조지아 나이가 '부드러운soft' 권력이라고 부른)이 있는 자에게 있다. (중략) 교육에 대한 투자는 사회가 어린이들에게 미래를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이다. -230쪽
오직 협동으로 경쟁의 균형을 바로잡을 때에만 자비로운 결과가 생긴다. 이것이 바로 경쟁의 역설이다. 경쟁만이 난무하는 세상은 창조적으로 출발하지만 결국 자기파괴로 끝이 난다. -255쪽
경쟁 없는 협동이 절름발이라면 협동 없는 경쟁은 장님이다. 만들고 사고 일하고 소비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을 존중하는 환경을 조성하고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관계를 만드는 것은 새뮤얼 브리턴이 말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264쪽
누군가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할 존재가 있다고 믿을 때, 우리는 지구의 주인이 아니며 후손들과 언약으로 맺어진 사이라고 믿을 때, 우리는 행동에 가해지는 도덕적 제약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281쪽
생태 환경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인상적인 이미지는, 지구를 존재의 근원에 속하는 무엇으로 보고 우리를 그런 지구를 보존하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우리의 후손을 위해 그 지구를 더욱 아름답게 가꿔야 할 신탁 관리인으로 보는 이미지다. -282쪽
도덕적 이상이 없다면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공유해야 할 도덕적 이상은 오직 대화를 통해서만, 계급과 수입과 인종과 신앙의 경계를 넘어 서로 이야기하고 귀를 기울이는 과정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다. -288쪽
용서야말로 인간의 자유로움을 입증하는 증거라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수동적인 반응reaction이 아닌 능동적인 행동action이며, 상황에 규정되는 것에 대한 거절이다. 그것은 행로行路를 바꾸고 과거의 이야기를 고쳐 쓰고 미래를 위한 뜻밖의 가능성을 창조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나타낸다. -295쪽
정의는 비개인적인 도덕 질서의 회복이며 용서는 개인적인 도덕 질서의 회복이다. 정의는 잘못을 바로잡고, 용서는 깨진 관계를 회복한다. -307쪽
사랑은 소유 이상의 무엇이다. 사랑은 놓아줄 줄 아는 힘이다. 용서 역시 놓아줄 수 있는 힘이며, 용서가 없다면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이를 죽이고 만다. 모든 용서는 파편화된 세상에서 깨진 것들을 한데 붙여준다. -312쪽
과거의 증오 위에 그들의 미래를 세울 수는 없으며, 그들에게 사람들을 덜 사랑하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더 사랑하라고 가르칠 수는 없다. ..(중략).. 나는 과거를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에서 배우기 위해 과거를 존중한다. 고통에 고통을 추가하거나 슬픔에 슬픔을 덧붙이지 않음으로써 과거에 경의를 표한다. 우리가 증오에는 사랑으로, 폭력에는 평화로, 원한에는 관대한 마음으로, 갈등에는 화래로 응답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13쪽
내가 보기에 종교는 경제학과 정치학이 제공하지 못하는 진리를 구현하며, 다른 모든 것이 변하는 시대에 홀로 청정하다. 종교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잊지 않게 해준다. 즉, 문명이 살아남는 것은 힘과 부와 세력이 강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약자를 외면하지 않은 덕이고 빈자를 배려한 덕이며 힘없는 자를 보살핀 덕이라는 사실 말이다. 약자the vulnerable들에 대한 연민을 보여준 문화가 강했다invulnerable는 사실은 역사가 남긴 아이러니하면서도 매우 인간적인 교훈이다. 우리가 극대화해야 하는 궁극의 가치는 인간의 존엄함, 모두가 창조주 하느님의 평등한 자식인 인간의 존엄함이다. -321쪽
참다운 신앙의 시금석은 내가 차이를 용인할 수 있는지 여부에 있다. 과연 나는 나와 모습이 다른 사람들, 나와 언어와 신앙과 이상이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신의 형상을 볼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면 나는 하느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나를 만들게 하는 대신 내 형상에 따라 하느님을 만든 것이다. ..(중략).. 차이는 우리르 작게 하는 게 아니라 크게 하는 것임을 인정할 수 있을까? 이것은 아무 데도 속하지 않는 자의 사해동포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애착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다른 사람의 애착도 존중할 줄 아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이다. -330쪽
다원주의는 희망이다. 우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공통의 목적에 각자 고유하게 기여할 수 있다고 할 때, 바로 이런 사실에 대한 앎의 바탕을 둔 가치이기 때문이다. 단기적으로는 서로의 욕망과 욕구가 충돌할지 모른다. 그러나 차이가 은총의 원천임을 안다면 우리는 결국 중재와 갈등 해소와 화해와 평화를 구할 것이니, 평화의 토대는 통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이기 때문이다. -333쪽
내가 유대 역사에 관해 숙고하면서 배운 가장 중요한 사항은 낙관과 희망을 구분하는 법이다. 낙관은 상황이 나아지리라는 믿음이다. 희망은 우리가 힘을 합쳐 더 나은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이다. 낙관이 수동적인 덕목이라면 희망은 능동적인 덕목이다. 낙관론자가 되기 위해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희망을 갖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중략) 희망은 텅 빈 개념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문화에서 생기지도 않는다. 그것은 행동의 원천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믿음에서 태어난다. -338쪽
희망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과거의 실수에서 배워 다음에는 달리 행동할 수 있음을 아는 것이며, 역사란 때로 길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꺾어들기도 하지만 조지프 헬러가 말한 '바람에 날리는 우연의 쓰레기봉투'가 아니라 구원을 향해 가는 오래고 느린 여정임을 아는 것이다. (중략).. 희망의 궁극에 있는 것은 하느님이 역사를 쓰는 저자라는 믿음이 아니며 하느님이 개입하여 우리를 잘못된 길에서 구원하거나 악이 배태하는 최악의 결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리라는 믿음도 아니다. 희망의 궁극에는 하는님이 서투른 노력을 하는 우리 곁에서 우리의 열망을 보살핀다는 믿음, 우리가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수단을 주셨다는 믿음,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꿈꾸고 희망하고 노력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다. -3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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