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들어 더 추워진 것 같아 밤에만 보일러를 틀기 시작했다.

자려고 이불 속에 들어가면 시린 발의 냉기가 잠을 쫓아낸다.

베란다에 있는 화분 몇 개가 걱정돼서 오늘은 유빈이가 쓰던 낡은 플라스틱 앉은뱅이 책상에

천을 깔고 화분들을 들여놓았다.

화초 가꾸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볼품없고 초라하지만

나로서는 애네들을 죽이지 않고 몇 년간 함께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같은 일이다.

특히 백죽이가 올여름 기대이상으로 잘 자라줘서 이쁘다.

 

얼마 전에 선물받은 아라비카 커피나무, 요녀석이 요즘 나의 관심을 제일 많이 받고 있다.

언젠가 빨간 커피열매가 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

겨울동안 잘 보살펴 키우고 내년 봄에는 분갈이를 해줘야겠다.

 

 

 

화분들 사이에 자리잡은 작은 어항 속에 살고 있는 건 구피 6마리.

이웃 엄마가 잘 보이지도 않을만큼 작은 치어일 때 준 건데

어느새 저렇게 자랐다.

수질개선제도 히터도 여과기도 공기방울장치도 하나 없이 무식하게 키웠는데...

 

가끔 수컷들이 암놈들 앞에서 구애행동을 하는 걸 보는데

덜컥 겁이 났다.

알을 낳지 않고 뱃속에서 알을 부화시켜 새끼를 낳는 난태성 물고기라는데

따로 부화통에 넣어주지 않으면 낳은 새끼들을 잡아먹는단다.

그러니 암놈 중에 새끼를 낳을 것 같은 녀석이 생기면

얼른 어항을 좀 더 큰 것으로 마련하고 부화통에 격리시켜야 한다.

문제는 내가 초보라서 암놈들의 임신(?)여부를 잘 모르겠다는 거다.

 

 

 

그러고보니 유빈이가 7살 때부터 키웠던 햄스터 개념이가 제 수명을 다하고

여름에 저세상으로 갔다.

개념이보다 1년 뒤에 우리집에 온 우동이도 점점 늙어가서 몸집이 많이 작아졌다.

 

밥을 준지 만 2년이 넘은 것 같은 길냥이 까칠대마왕은

몇 차례 여자친구를 바꿔가며 같이 밥먹으러 오더니,

며칠 전에는 새로운 여자친구에다 새끼 고양이까지 보여줬다.

처자식까지 끌고와 밥 얻어먹으면서도 까칠대마왕의 성질은 여전하다.

그저 건재함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고,

보태어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까칠대마왕 가족 모두 건강하기를.

올겨울을 무사히 견뎌내기를 바랄밖에.

 

신고늄, 사랑초, 백죽, 나한솔, 커피나무, 햄스터 우동이와 구피들, 까칠대마왕과 그 가족들,

그리고 우리 모두,

성큼성큼 위풍당당하게 다가오는 겨울에 다같이 행복하고 따뜻하기를.

부디 올겨울이 아름답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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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 유빈이가 도서관에서 하고 있는 품앗이 모임은 2개다. 

그 중 하나가 5살무렵부터 해온 <색깔아이>라는 이름의 미술품앗이다.

아이가 그림 그리기와 만들기 등에 한창 관심이 높을 때였는데

미술학원에는 보내기 싫어서 엄마들이 돌아가며 아이들과 미술작업을 하는 품앗이에 들어갔었다.

당시 색깔아이 품앗이에는 공교롭게도 외동아들을 둔 젊은 엄마들이 모여있었고

아이 셋을 둔 나이 많은 엄마였던 나는 잔뜩 긴장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대여섯 살이었던 아이들이 초등 3,4학년이 되었고,

품앗이 멤버도 좀 늘어서 이제 1학년부터 5학년까지의 다양한 연령의 아이들이

졸망졸망 모여 있는 모임이 되었다.

 

그렇게 5~6년을 함께 품앗이를 꾸려오면서 아이들도 자랐지만 엄마아빠들도 성장했다.

아이를 함께 잘 키우기 위해 고민하고 기다려주고 같이 나누는 법을 배웠다.

아이들간의 갈등이 엄마들 사이의 갈등으로 번진다거나,

품앗이마다 성격들도 다르고, 부모들의 품앗이에 대한 생각과 바람도 달라서

가끔 위태로울 때도 있지만

그 모든 걸 조율하고 서로 마음을 맞춰가는 것이 또 품앗이의 묘미이기도 하다.

아이가 즐거워하고 좋아한다면, 참고 견디고 힘을 내는 게

엄마아빠들의 놀라운 능력이라서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다.

 

올해 색깔아이는 서울시 어린이문화사업 지원을 받아서

한 달에 한 번씩 충주로 정승각 선생님을 찾아뵙고

오감을 깨우는 그림놀이를 했는데

그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자료집과 달력을 제작하는 것으로 올해 활동을 마무리지었다.

 

 

 

 

 

충주에서의 활동은 무척 즐거웠는지 지금도 아이들은

"우리 언제 또 충주 가요?"하고 묻는다.

 

막내 유빈이는 색깔아이 책을 내고 무척 뿌듯했나 보다.

얼마 전 조앤롤링에 대한 책을 읽고, 해리포터 시리즈의 첫 이야기 <마법사의 돌>을 읽더니

자극을 받아서 요즘 매일 내 노트북을 빌려 집필활동에 열심이시다.

책을 내는 일이 만만하게 보인 걸까?

어제는 자기가 쓰고 있는 글의 전체 페이지수를 얼마로 할지 생각하며 글을 써야겠다며

책장에 있는 책들을 뽑아 페이지 수가 얼마나 되는지 일일이 펼쳐 보는 것이다.

흐흠.. 그건 편집의 영역이긴 하지만 어쨌든 바람직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

 

조만간 유빈이가 속해있는 또하나의 도서관 품앗이 모임 <피노키오>에서는 아이들의 시집을 만들고 있다.

엄마아빠들의 에너지는 굉장하다. 특히 아이들을 위해 모이는 에너지는 놀랍다.

해마다 너무나 근사한 것들을 계획하고 만들어낸다.

 

이제 색깔아이는 벌써 내년 준비에 들어가려고 시동을 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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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카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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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으면 슬슬 발이 시려왔다.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오면 서늘한 기운에 재채기를 하고 한기를 달래줄 가디건을 찾아 걸치기 시작했다. 뜨거운 커피 잔에서 올라오는 따뜻하고 하얀 김이 좋아졌다. 가을이 점점 깊어져서 겨울과 서둘러 만나려는 것 같았다.

큰일을 마무리 짓고 난 후, 하루이틀은 그냥 멍하니 지냈다. 잠을 자고, 만사가 귀찮아 실컷 게으름을 부렸다. 그러다 갑자기 아, 소설을 읽어야겠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 현실을 아득한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읽는 시간은 현실과, 현실하고는 다른 세계가 서로의 위치를 맞바꾸는 시간. 현실은 아득해지고 지금까지 내가 모르고 있던 다른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 소설은 그걸 가능하게 하니까.

여러모로 <나의 미카엘>은 요즘의 날씨,  나의 기분과 상황에 참 잘 맞아떨어졌다.

 

우리는 이렇게 만났다.

어느 겨울날 아침 아홉시에 나는 계단을 내려오다가 미끄러졌다. 한 낯선 청년이 내 팔꿈치를 잡아주었다. 그의 손은 강하고 엄청나게 자제력이 있었다. 나는 짧은 손가락과 납작한 손톱을 보았다. 관절 부위가 약간 거뭇한 창백한 손가락이었다. 그는 서둘러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막아주었고 나는 아픔이 사라질 때까지 그의 팔에 기대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넘어지는 것은 당황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탐색하고 묻는 듯한 눈과 심술궂은 미소들. 그가 나를 잡아 주었을 때 나는 어머니가 짜주신 푸른 울 옷소매 사이로 그 사람 손가락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예루살렘의 겨울이었다. (p.5-6)

 

한나와 미카엘은 이렇게 만났다. 한나는 감수성이 예민한 동시에 격렬하고, 충동적이며, 자주 환상과 꿈의 세계로 빠져드는 여자이고, 그 반면에 미카엘은 지적이고 섬세하며 자제력이 있고, 책임감이 강하고, 배려심 깊은 남자다. 이 책을 읽어가다 보면 이 첫 만남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을 만나게 된다. 계단에서 미끄러져 넘어진 한나를 잡아주었던 것처럼 미카엘은, 한달치 수입을 쇼핑에 써버리고 쇼파와 안락의자 세 개를 사느라고 새 아파트의 계약금을 모을 수 없게 만들고 자기의 병이 더 심해도록 만들며 희열을 느끼는 한나를 받쳐주고 보살핀다. 그렇다고 한나가 잘못한 것이라고 질책할 수는 없다. 뭐랄까, 서로 딛고 있는 세계가 다를 뿐이라고 해야할까.

한나와 미카엘의 차이는 아들 야이르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엄마는 모든 걸 아는 것 같아요. 절대로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적이 없으니까. 엄마는 늘 알지만 설명은 못하겠다라고 하는데요. 만일에 설명을 할 수 없다면 어떻게 안다고 말할 수 있나요? 이제 끝났어요."  (p.120)

 

"아빠도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지만 아빠는 모르면 모른다고 해. 아빠는 알고는 있지만 설명할 수는 없다고 그러지 않아요. 뭔가를 알면 설명할 수 있는 거야. 말 끝났어요." (p.239)

 

미카엘은 '설명이 가능해야 존재하는 세계'에 있고, 한나는 '존재하지만 설명은 불가능한 세계'에 있다면 그 두 세계는 잘 어울릴 수 있을까. 미카엘과 한나는 계속 어긋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지도 모른다. 한나는 자꾸 현실의 계단에서 미끄러지고 미카엘은 그런 한나를 붙잡고... 그건 어쩌다 한 번은 로맨틱할지 몰라도 일상이 늘 그런 식이라면 두 사람 모두 견디기 힘들어질 테니까. 어쩌면 한나는 현실의 계단에서 넘어져 굴러 상처를 입더라도 다시 자기 발로 자기 세계에서 우뚝 일어서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느 쪽 세계에 있을까.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존재하지만 설명은 불가능한 세계'가 있다는 걸 느끼고 그 속에 손끝 하나라도 담그고 있지 않을까.

 

한나가 꿈의 세계로 들어갔을 때 드레곤 호니 타이그레스 호니 하는 군함이 등장하는데 그와 함께 '노틸러스 호'가 나온다. 쥘 베른의 <해저 2만 리>에 나오는 '노틸러스 호'. 그런데 실제로 세상에는 3척의 노틸러스 호가 있었고, 그중 마지막 세 번째 노틸러스 호가,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50년 대에 미국이 만든,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이었다. 공상과학소설 속의 노틸러스 호와 실재했던 원자력 잠수함 노틸러스 호. 그 이중적 의미가 이 소설의 신비감을 더하며 다가왔다. 현실과 꿈의 경계에 위태롭게 서있는 한나가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운 건 이미 내가 그 경계에서 아주 멀리 떠나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나와 미카엘의 사랑은 점점 속부터 녹슬어간다. 어느 날 한나는 무화과나무 가지 위에 몇 년 동안 매달려 있던 녹슨 그릇이,  미풍도 불지 않고 고양이나 새가 건드린 것도 아닌 데 갑자기 나무에서 떨어지는 걸 보았다. 그것을 보고 한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순간 강한 힘들이 실현된 것이다. 녹슨 금속이 부서졌고 그릇은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렇다. 나는 여태까지 내내 하나의 물체에서 완벽한 휴지를 관찰해 왔는데 그 안에서는 여태까지 내내 숨겨진 작용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p.119)

 

설명하기 어려운, 혹은 설명이 불가능한 '숨겨진 작용'이 한나와 미카엘 사이에서도 일어나, 사랑은 무화과 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녹슬어가던 그릇처럼 서서히 녹슬고 조금씩 부서지다가, 어느날 갑자기 가지 끝에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다.

한결같고, 도덕과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자기의 의무와 책임에 충실하고, 충동적 욕구에 흔들리는 일 없이 변함없을 것 같던 미카엘도  파출부 포르투나를 보며 흔들리고, 초록색 눈에 풍성한 금발을 가진 친구 야르데나의 시험준비를 도와주기 시작하면서 우스꽝스럽게 안절부절한다. 그런 미카엘을 보고 한나는 질투하거나 분노에 휩싸이지도 않는다. 이미 사랑은 그 둘을 떠났고 녹슨 그릇처럼 부서졌다.

 

당신의 환상을 깨지는 않겠어요. 난 당신과 함께가 아니에요. 우리는 두 사람이지 한 사람이 아니랍니다. 더 이상은 내 사려 깊은 장남 노릇을 할 수는 없어요. 잘 가세요. 당신에게 달려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게 너무 늦은 건 아니겠죠. 나에게도 말이에요. (p.289)

 

미카엘에게 '잘 가세요'라고 한 뒤에도 여전히 한나는 꿈의 세계를 넘나들었을까.

 

미카엘이 떠나고 처음으로 나는 일어나서 밖에 나갔다. 그것은 변화를 일으켰다. 날카롭고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갑자기 멈춘 것처럼. 밖에서 하루종일 진동하던 모터가 저녁 때가 되어 갑자기 꺼진 것처럼. 그 소리는 하루종일 눈치채지 못하게 지나다녔다. 멈추고 나서야 느껴진 것이다. 갑작스러운 정적. 그 소리는 존재했었고 지금은 멈췄다. 멈췄고, 그러므로 존재했던 것이다. (p.234)

 

찾아보고 싶었다. '멈췄고, 그러므로 존재했던 것'들.

멈춘지 너무 오래돼서, 이미 정적에 너무 익숙해져버려서, 존재했었지만 멈춰버린 게 무엇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것들.

이 책 속 한나의 나이는 서른. 그 나이로 돌아간다면 그게 뭐였는지 찾을 수 있을까.

찾을 수 있다고 한들, 그걸 다시 붙잡을 수 있을까. 한나처럼 잊지 않을 수 있을까.

 

저녁에 비가 올거라고 한다. 예루살렘의 겨울이 여기에도 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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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10-28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저도 정말 좋았어요, 섬사이님.
그런데 섬사이님의 리뷰를 읽다보니 저는 섬사이님처럼 전체를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그저 손에 집착했던 것 같아요. 자꾸만 나오는 손. 그리고 반복된 문장. `나는 잊지 않았다` .
문득 내 소설읽기는 언제나 부분에 집착하고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옵니다. 저는 어쩌면 그간 읽었던 모든 소설들을 죄다 다시 읽어야할지도 모르겠어요.

섬사이님, 리뷰 잘 읽었어요.
좋은 리뷰에요. 이 책을 읽었던 당시가 떠올랐어요. 다읽고 서늘했던 그 느낌까지도요.

섬사이 2014-11-01 18:21   좋아요 0 | URL
아, 다락방님~! (와락 ^^)
다락방님도 이 책을 읽으셨군요.
저는 부분을 보여주는 다락방님의 글이 좋아요.
저는 전체를 뭉뚱그려서 밋밋하게 느낌을 적어가는 반면에
다락방님은 아주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생생한 글을 쓰시거든요.
다락방님의 글을 읽으며 소심하게 `공감하기`를 누르면서,
제 글을 반성한 적이 얼마나 많은데요.
나는 왜 글에다 나를 다 드러내지 못하나,
나는 왜 이 부분에서 이런 생생한 느낌을 받지 못했을까,
나는 왜 성실하게 책 읽고 성실하게 글을 쓰지 못하나.. 하고요.

다락방님의 글이 사랑받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요.
암튼 지금은, 나, 다락방님께 칭찬받은 거... 맞죠?
신난다. ^^
 

 

 

왕십리역 광장에서 가을에 펼치는 잔치.

저 리플릿에 들어간 그림들은 우리 막내가 들어가 있는 색깔아이 모임의 아이들의 그림.

앞면의 대충 그린 무지개와 곰인형 그림은 울 막내 작품.

모임의 아이들이 누가 그린 그림인지, 자기가 그린 그림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도 벌어졌다.

아이들은 저작권을 넘기는 댓가로 관장님한테 컵라면을 사달라고 요구. ^^

 

책고르미의 한 해 결실

방정환, 마해송, 현덕, 이원수, 권정생.. 우리 아동문학사의 굵직한 맥을 돌아보았던

올 한 해의 결과물이다.

 

 

이 리플릿 안에는 각 작가에 대한 소개와 책 목록이 간략하게 들어 있다.

<나랑 같이 놀자> 때 사람들에게 나눠줄 예정.

 

아직 아이들이 쓴 시를 모은 문집이 나와야 하고,

정승각 선생님과 활동한 이야기와 아이들의 글과 그림들을 모은 자료집도 준비 중이다.

이렇게 한 해가 서둘러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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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4-10-10 0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그동안의 애정과 땀방울이 작품으로 나오는군요.
책읽는 엄마와 아이들에게 큰 의미가 되고 좋은 추억이 되겠네요.
축하합니다~ 준비하느라 수고 많으시고요!^^

섬사이 2014-10-19 15:28   좋아요 0 | URL
한 일주일은 준비하느라고 정신이 쏙 빠져 있었어요.
어제 즐겁게 잘 놀고 오늘 녹초가 되어 있습니다.
목도 쉬고요. ^^

세실 2014-10-10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같은 분이 우리 도서관에 계셨음 좋겠어요^^
도서관에 애정을 듬뿍 가지신 분이 저를 도와주면 좋을텐데....
행사 잘 되실거라 믿어요~~**

섬사이 2014-10-19 15:33   좋아요 0 | URL
저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좋은 분들이 참 많이 계세요.
자신의 능력과 재능과 시간과 마음과 정성을 나누는 분들 덕분에
저런 잔치도 벌일 수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맡았던 부스에서는 300명 정도의 아이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고,
그게 넉넉하다고 생각했는데 끝에 온 몇몇 아이들은 준비한 게 모두 떨어져서
사탕만 주게 되어 얼마나 미안했는지 몰라요.

세실님 도서관에도 분명히 착하고 능력있는 분이 자기 정체를 숨긴 채
세실님이 자기를 발견하고 일을 맡겨주기를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틀림없어요. ^^
 

 

<혼불 6>을 다 읽고 이제 7권도 거의 다 읽어간다.  읽을수록 점점 효원을 응원하는 마음이 커지고 있다. 청순가련형의 강실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닌데, 글쎄.. 뭐랄까... '청순'까지는 매력일지 몰라도 '가련'에 이르면 답답해지곤 하는 것이다.

 

 

강실이의 눈귀에서 시름없이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춘복이는 그 눈물에 제 뺨을 대고, 울컥울컥 눈물을 토해 냈다.

그래, 그리움을 버리자.

내가 그를 그리워할 자격을 잃어버리자.

평생에 다시 못 올 그리움, 부질없는 이 그리움을 버리고, 오라버니를 놓아드리자. 내가 이대도록 애오라지 오라버니 그리워하고 있으면 끝내는 그 사람을 원망하게 되리라. 허나 어이하면 이 그리움을 버릴 수가 있으리. 나는 정녕 아무런 방도를 모르니, 오직 자격을 잃어버리자. 자격을 잃으면 이제 다시는 기다리지 않겠지.

기다릴 수 없겠지.

강실이는 언제인가.

차라리 내가 죽어 나를 놓으리이까.

배갯머리 흥건히 젖도록 울던 날을 돌이키며, 다시금 시름없이 흐르는 눈물을 막지 못하였다.

얼어붙은 몸이 녹으니 눈물로 흐르는 것일까.

강실이는 춘복이에게 창백한 몸을 맡긴 채 하염없이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만 있었다.    (6권 110~111쪽)

 

 

차라리 강모를 죽도록 원망하고, 그 원망을 힘으로 삼아 강실이가 독해지고 강해졌으면 좋겠다.  한 번 걸려 넘어진 돌부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주저앉은 채 더더욱 더 깊은 절망 속으로 자꾸만 무기력하게 빠져들어가는 강실이가, 이제 측은하다 못해 왜 이러고 사나 싶은 거다. 물론 매안 이씨 문중의 법도와 체통이 엄중하다 해도, 그래도, 그래도 저렇게까지 자기 자신을 살릴 궁리도 안 하고, 결국은 자기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당시의 시대상황과 강실이의 처지를 짐작하고 이해할 수 있지만, 저 일이 벌어질 때 강실이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게 기력이 다 빠진 상태였다고는 하지만,  정말 꼭 저렇게까지 되도록 자기 자신에게 내내 모질고 잔인해야 했을까. 강모는 강실이가 자기 전 존재를 무너뜨려도 될만큼 그렇게 대단한 인물도 아니고, 오히려 옆에 있으면 뒷통수 한 대 때려주고 똑바로 살라고 한 마디 버럭 소리쳐주고 싶은 그런 인물인데.

 

강실이도 자신의 처지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게 답답하고 가련하겠지만, 그건 효원도 마찬가지. 강모와 강실이의 관계를 알아버린 효원의 마음에는 노여움과 모멸감이 불같이 일어난다. 효원인들 자신의 처지가 기막히지 않겠는가. 물론 강실이는 들켰다가는 덕석말이 몰매 곤장에 가족이 모두 마을에서 쫓겨날 처지니까 효원보다 더 막막하다 할 수 있겠지만, 효원의 분노와 배신감도 감당키 힘들기는 매한가지인 것 같다. 그러니 감당키 어려운 상황을 마주하는 두 여자의 태도가 비교되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강실이가 감정적인 소모가 크고 무력하게 까무룩히 그 상황에 더욱 빠져드는 데 비해서 효원은 어린 아들 철재의 앞날을 그려보며 마음을 다잡는 것이다. 더욱 강하게, 더욱 의연하게 이 일을 넘기리라, 하고.  

 

수모.

효원은 이 엄청나고 뜻밖인 상황에 깊은 수모를 느끼고 있었다.

이 세상에 여자로 태어나서 연기에 이르러 한 사람의 아내된 후, 그와 더불어 오손도손 크고 작은 일을 의논하며, 자식을 낳고 훈육하여, 그 또한 장성하면 새 둥지를 이루도록 합심하는 부부 일상이, 첫날밤 첫 자리 처음부터 거부당한 근원이 바로 거기 있었단 말인가. 

단순히 일시 정욕이 아니라 근원적인 마음의 바탕을 그곳에 두고, 싹 틔워 둥치를 이루며 제 존재를 부비어 어우러지고 싶었던 사람이, 거기 있었단 말인가.  (6권 198쪽)

 

누가 더 불행한 걸까. 비록 강모의 마음을 얻고 사랑을 받았지만 비극의 구덩이에 빠지고 만 강실일까, 강모의 마음을 얻지 못한 채 수모를 견디며 강모의 안사람으로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효원일까.  강모가 그만한 가치나 있는 사람일까. 꽤 괜찮고 멋진 여자 둘이 남자 하나 잘못 만나서 불행해져 버린 이야기가 이 <혼불>이라는 책의 고갱이는 아니지만 자꾸 신경쓰이고 마음이 가고 조마조마하다.

 

고꾸라진 자리에 꼬챙이 없으면 그저 일진 사나운 것을 탓하며 손바닥이나 쓰라리게 씻기고 말 일이지만, 독팍에 걸려 앞으로 어푸러진 그 자리에 불행히도 칼끝이 거꾸로 박혀 있어, 찔린 살이 벌어지고 붉은 피 선지로 엉기며, 멍든 가슴을 깊이 버힌다면.

내가 무슨 장사여서 비명을 참을 수 있으리.

효원은 칼끝이 살을 찌르며 파고들어 뼈에 미치는 소리를 들었다.

참혹하다.

허나, 한번 넘어졌다고 주저앉아 썩으랴.

앉은 자리에 곰이 피게 꼼짝 않고 탄식만 하고 있으랴.

누가 와서 일어켜 주기 바라며 좌우를 둘러보고, 어루만질 손길만 기다리다 앉은뱅이가 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설령 앙가슴의 붉은 살이 다 벌어져 너덜너덜 넝마처럼 펄럭이고, 뼈다귀 허옇게 드러나 시린 바람에 마른다 할지라도, 박힌 칼날 꼬챙이를 맨손으로 뽑아 내고, 나는 가야 한다.

만일 그 칼날 뽑히지 않고 죄 없는 두 손만 베인다면.

가슴에 칼 박은 이대로 일어서야지.

(중략)

허나, 위로는 필요없다.

선병자.

같은 병 겪어 본 사람 그 누구의 고언도 나는 마다하리라.

하늘 아래 나 같은 이, 단 한 사람도 없다 할지라도, 나는 다만 나 혼자서 내 하늘을 이고, 우러러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으리라.

어금니가 썩어도 나는 결코 이 일로 입을 벌리어 탄식하지 않으리.

비록 나 혼자서 홀로이 나 자신에게 이르는 말일지라도, 이 일을 두 번 다시 되뇌어 곱씹지 않으리라.

내, 아무런들 이만한 일로 굽은 다리 못 펴고, 이만한 일로 넘어져서, 갈 길 먼 가슴을 상할 것이냐.

이 앞으로 내가 세상을 살아갈 때 오직 나를 지탱하고 의지해야 할 곳은 나의 속, 나의 가슴, 나의 머리, 나의 중심뿐일 것이어늘, 지금 다 써 버리고, 지금 다 내주어 썩여 버린다면 내 어찌 살아가리.

(중략)

내 결단코 저 속으로 얼크러들지는 않으리라.

이만큼에 서서, 저 오리무중, 아득하고 짙은 안개 자욱한 남의 마을로 나는 들어가지 않겠다.

그것은 너희들의 것이겠지.

나는 다만 너희들의 그 안개 바깥으로 밀려나, 낯설게 떨어져서 무참히 고개 돌리고 있지만, 그렇지만, 나는 몸을 솟구치리라.

안개와 먹구름에 나도 같이 휘감기어 뒤얽히면, 가도 가도 길은 보이지 않을 터이지만, 논도랑인지 갈대밭인지 모르고 허방을 길로 삼아 움퍽 짐퍽 진흙투성이로 헤매겠지만, 나는 너희들의 울녘에서 떨어져 나오리라.

그리고 나를 들어올리겠으니.

검은 구름과 안개 속에 있을 때는 습하고 암담하여 젖은 몸에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지라 숨조자 막힐 터이나, 보다 높은 곳으로 솟아오르면, 홀연 구름머리 테를 벗고 솟구칠 때, 그곳에서 청천의 푸른 하늘이 궁창 그대로 끝닿은 데 없이 드리워져 있지 않겠는가.

장막 한 겹에 불과한 이 운무에 생애를 걸지 마라.

내 힘으로 찢을 수 없는 것이라면, 놓아버리라.

그 안 개의 구덩이에 나를 던져 무익하게 익몰하는 어리석음 대신에 나는 내 마음을 끌어올려,

벗어나리라.

이 안개보다 내 마음이 높아져야, 나는 벗어난다.

천하에 내가 되어 가지고 이만한 안개의 구렁텅이에, 언제까지 이 몸을 담고 있을 것인가.  (6권 218~221쪽)

 

이 글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콧등이 시큰. 마음 속으로 조용히 '효원, 화이팅!'을 가만가만 외쳤다. 강모와 혼인한 게 효원의 죄라면 죄.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네 따위의 말을 하자는 건 아니지만, 자신의 팔자가 여물 담은 뒤웅박일지언정 스스로 자기를 깨뜨려버리면 그건 안될 일.

 

그래, 안다. 때로는 삶보다 죽음이 따뜻할 수도 있다는 거. 죽음보다 삶이 모질 수도 있다는 거. 그래서 남의 삶, 남의 죽음에 대해 함부로 단정지어 말해서는 안된다는 거. 하지만 그래서 더욱 우리는 보다 좋은 삶을 꿈꿔야 하는 거 아닌가.

 

책에는 매안 이씨 문중  일가 며느리 중 한 사람인 사리반댁이 효원을 찾아와 들려주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리반댁의 이름은 '효덕'인데, 자기가 그 '효덕'이란 이름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마도 효원과 강실, 그리고 옹구네, 매안과 거멍굴과 고리배미 사람들 모두가 바라던 삶은 사리반댁의 이야기에 나오는 순덕이의 모습일 것이다.

 

 장날이면, 아껴 놓았던 물빛 치마에 흰 저고리 날아가게 차려 입고는 머리도 곱게 빗고, 만석이와 나란히 어깨를 맞대어 대문을 나서는 그들의 뒷모습에 햇살은 다사롭고 투명한 발을 내렸다.

장날, 장에 가는 심부름은 으레 이 두 사람이 맡아 했던 것이다.

안채의 심부름은 순덕이가, 사랑채 심부름은 만석이가 하였다.

그들이 다정한 걸음으로 장에 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 세상에 순덕이 팔자를 누가 당하리."
싶어졌다.

날이 저물어 어스름이 내릴 무렵이면 두 사람은 또 그렇게 나란히 돌아왔따.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양손에 각기 주렁주렁 보따리와 꿰미들을 든 채로 얼굴에는 아직도 장터거리에서 본 광경과 새로운 풍물에서 묻은 흥분이 홍조로 남아 내외마주 손짓 발짓 흥에 겨워서.

"그럴 때 순덕이 얼굴은 참 보기에 좋더라. 사람 사는 게 저런 것이지 싶고."

그래서 효덕의 모친은 효덕에게

"너는 순덕이 팔자만 닮아라."

하였던 것이다.

"순덕이가 이 세상에 오직 갖지 못한 것이 있다면, 양반 하나 뿐인데, 이미 순덕이한테는, 양반이고 아니고가 아무 상관이 없어 보였단다. 그까짓 허울이나 경계 같은 것은 무엇에도 쓸 일이 없는, 그냥 자연, 그냥 사람. 사람다이 사는 사람으로 나한테는 보이더라"

사리반댁은 이야기하며 웃었다. (6권 208~209쪽)

 

<혼불>은 뭐가 사람다운 것인지, 어떤 세상이 좋은 세상인지를 묻는 책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이자 근대화의 물꼬가 터지는 시작하는 혼란과 불안의 격변의 시기에서 허울이나 경계 없이 사람다이 살다가기를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 너무나 아프고 참혹하게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지금 읽고 있는 7권에서 뻘겋게 피를 튀기며 흐르고 있다.

 

<혼불>을 읽으면서 생긴 버릇 하나. 불쑥불쑥 전라도 사투리가 내 입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연이어 며칠을 친구들과 놀기에 바쁜 울 아들에게

"흐미, 아주 노는 데 맛들렸는 게비?"

밥 먹으라 부르는 데 밍기적대고 안오는 우리 막내에게

"빨리 와서 먹을겨, 안먹을겨!"

뭐, 이런 식이다. 날이 갈수록 증상이 좀 심해져서, <혼불>을 다 읽고 나면 한동안 표준말 가지런한 책들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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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08-22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사투리 대화체 부분 혼자 있을 때 막 소리내서 읽어보고 그래요. 근데 되게 어색해요. ㅎㅎ 아무래도 4권,5권 주문해야겠어요. 헤헷

섬사이 2014-08-22 16:17   좋아요 0 | URL
ㅎㅎ 사투리가 저에게서 아이들에게로 번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제 재활용품 분리수거하는 날이라 아들과 같이 나갔는데 울아들이
"이건 여따 넣는 겨?"하더라는. ^^

hnine 2014-08-22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는겨?' 저는 이게 충청도 사투리인줄 알았는데 전라도 사투리였군요.
토지 읽으며 경상도 사투리 친해지고, 혼불 읽으면서는 전라도 사투리 친해지고...^^
벌써 7권 읽으시네요.

섬사이 2014-08-29 17:05   좋아요 0 | URL
앗, 그런가요?
그럼 제 입에선 그냥 되는대로 사투리가 튀어나오는 거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