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6>을 다 읽고 이제 7권도 거의 다 읽어간다. 읽을수록 점점 효원을 응원하는 마음이 커지고 있다. 청순가련형의 강실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닌데, 글쎄.. 뭐랄까... '청순'까지는 매력일지 몰라도 '가련'에 이르면 답답해지곤 하는 것이다.
강실이의 눈귀에서 시름없이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춘복이는 그 눈물에 제 뺨을 대고, 울컥울컥 눈물을 토해 냈다.
그래, 그리움을 버리자.
내가 그를 그리워할 자격을 잃어버리자.
평생에 다시 못 올 그리움, 부질없는 이 그리움을 버리고, 오라버니를 놓아드리자. 내가 이대도록 애오라지 오라버니 그리워하고 있으면 끝내는 그 사람을 원망하게 되리라. 허나 어이하면 이 그리움을 버릴 수가 있으리. 나는 정녕 아무런 방도를 모르니, 오직 자격을 잃어버리자. 자격을 잃으면 이제 다시는 기다리지 않겠지.
기다릴 수 없겠지.
강실이는 언제인가.
차라리 내가 죽어 나를 놓으리이까.
배갯머리 흥건히 젖도록 울던 날을 돌이키며, 다시금 시름없이 흐르는 눈물을 막지 못하였다.
얼어붙은 몸이 녹으니 눈물로 흐르는 것일까.
강실이는 춘복이에게 창백한 몸을 맡긴 채 하염없이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만 있었다. (6권 110~111쪽)
차라리 강모를 죽도록 원망하고, 그 원망을 힘으로 삼아 강실이가 독해지고 강해졌으면 좋겠다. 한 번 걸려 넘어진 돌부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주저앉은 채 더더욱 더 깊은 절망 속으로 자꾸만 무기력하게 빠져들어가는 강실이가, 이제 측은하다 못해 왜 이러고 사나 싶은 거다. 물론 매안 이씨 문중의 법도와 체통이 엄중하다 해도, 그래도, 그래도 저렇게까지 자기 자신을 살릴 궁리도 안 하고, 결국은 자기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당시의 시대상황과 강실이의 처지를 짐작하고 이해할 수 있지만, 저 일이 벌어질 때 강실이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게 기력이 다 빠진 상태였다고는 하지만, 정말 꼭 저렇게까지 되도록 자기 자신에게 내내 모질고 잔인해야 했을까. 강모는 강실이가 자기 전 존재를 무너뜨려도 될만큼 그렇게 대단한 인물도 아니고, 오히려 옆에 있으면 뒷통수 한 대 때려주고 똑바로 살라고 한 마디 버럭 소리쳐주고 싶은 그런 인물인데.
강실이도 자신의 처지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게 답답하고 가련하겠지만, 그건 효원도 마찬가지. 강모와 강실이의 관계를 알아버린 효원의 마음에는 노여움과 모멸감이 불같이 일어난다. 효원인들 자신의 처지가 기막히지 않겠는가. 물론 강실이는 들켰다가는 덕석말이 몰매 곤장에 가족이 모두 마을에서 쫓겨날 처지니까 효원보다 더 막막하다 할 수 있겠지만, 효원의 분노와 배신감도 감당키 힘들기는 매한가지인 것 같다. 그러니 감당키 어려운 상황을 마주하는 두 여자의 태도가 비교되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강실이가 감정적인 소모가 크고 무력하게 까무룩히 그 상황에 더욱 빠져드는 데 비해서 효원은 어린 아들 철재의 앞날을 그려보며 마음을 다잡는 것이다. 더욱 강하게, 더욱 의연하게 이 일을 넘기리라, 하고.
수모.
효원은 이 엄청나고 뜻밖인 상황에 깊은 수모를 느끼고 있었다.
이 세상에 여자로 태어나서 연기에 이르러 한 사람의 아내된 후, 그와 더불어 오손도손 크고 작은 일을 의논하며, 자식을 낳고 훈육하여, 그 또한 장성하면 새 둥지를 이루도록 합심하는 부부 일상이, 첫날밤 첫 자리 처음부터 거부당한 근원이 바로 거기 있었단 말인가.
단순히 일시 정욕이 아니라 근원적인 마음의 바탕을 그곳에 두고, 싹 틔워 둥치를 이루며 제 존재를 부비어 어우러지고 싶었던 사람이, 거기 있었단 말인가. (6권 198쪽)
누가 더 불행한 걸까. 비록 강모의 마음을 얻고 사랑을 받았지만 비극의 구덩이에 빠지고 만 강실일까, 강모의 마음을 얻지 못한 채 수모를 견디며 강모의 안사람으로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효원일까. 강모가 그만한 가치나 있는 사람일까. 꽤 괜찮고 멋진 여자 둘이 남자 하나 잘못 만나서 불행해져 버린 이야기가 이 <혼불>이라는 책의 고갱이는 아니지만 자꾸 신경쓰이고 마음이 가고 조마조마하다.
고꾸라진 자리에 꼬챙이 없으면 그저 일진 사나운 것을 탓하며 손바닥이나 쓰라리게 씻기고 말 일이지만, 독팍에 걸려 앞으로 어푸러진 그 자리에 불행히도 칼끝이 거꾸로 박혀 있어, 찔린 살이 벌어지고 붉은 피 선지로 엉기며, 멍든 가슴을 깊이 버힌다면.
내가 무슨 장사여서 비명을 참을 수 있으리.
효원은 칼끝이 살을 찌르며 파고들어 뼈에 미치는 소리를 들었다.
참혹하다.
허나, 한번 넘어졌다고 주저앉아 썩으랴.
앉은 자리에 곰이 피게 꼼짝 않고 탄식만 하고 있으랴.
누가 와서 일어켜 주기 바라며 좌우를 둘러보고, 어루만질 손길만 기다리다 앉은뱅이가 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설령 앙가슴의 붉은 살이 다 벌어져 너덜너덜 넝마처럼 펄럭이고, 뼈다귀 허옇게 드러나 시린 바람에 마른다 할지라도, 박힌 칼날 꼬챙이를 맨손으로 뽑아 내고, 나는 가야 한다.
만일 그 칼날 뽑히지 않고 죄 없는 두 손만 베인다면.
가슴에 칼 박은 이대로 일어서야지.
(중략)
허나, 위로는 필요없다.
선병자.
같은 병 겪어 본 사람 그 누구의 고언도 나는 마다하리라.
하늘 아래 나 같은 이, 단 한 사람도 없다 할지라도, 나는 다만 나 혼자서 내 하늘을 이고, 우러러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으리라.
어금니가 썩어도 나는 결코 이 일로 입을 벌리어 탄식하지 않으리.
비록 나 혼자서 홀로이 나 자신에게 이르는 말일지라도, 이 일을 두 번 다시 되뇌어 곱씹지 않으리라.
내, 아무런들 이만한 일로 굽은 다리 못 펴고, 이만한 일로 넘어져서, 갈 길 먼 가슴을 상할 것이냐.
이 앞으로 내가 세상을 살아갈 때 오직 나를 지탱하고 의지해야 할 곳은 나의 속, 나의 가슴, 나의 머리, 나의 중심뿐일 것이어늘, 지금 다 써 버리고, 지금 다 내주어 썩여 버린다면 내 어찌 살아가리.
(중략)
내 결단코 저 속으로 얼크러들지는 않으리라.
이만큼에 서서, 저 오리무중, 아득하고 짙은 안개 자욱한 남의 마을로 나는 들어가지 않겠다.
그것은 너희들의 것이겠지.
나는 다만 너희들의 그 안개 바깥으로 밀려나, 낯설게 떨어져서 무참히 고개 돌리고 있지만, 그렇지만, 나는 몸을 솟구치리라.
안개와 먹구름에 나도 같이 휘감기어 뒤얽히면, 가도 가도 길은 보이지 않을 터이지만, 논도랑인지 갈대밭인지 모르고 허방을 길로 삼아 움퍽 짐퍽 진흙투성이로 헤매겠지만, 나는 너희들의 울녘에서 떨어져 나오리라.
그리고 나를 들어올리겠으니.
검은 구름과 안개 속에 있을 때는 습하고 암담하여 젖은 몸에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지라 숨조자 막힐 터이나, 보다 높은 곳으로 솟아오르면, 홀연 구름머리 테를 벗고 솟구칠 때, 그곳에서 청천의 푸른 하늘이 궁창 그대로 끝닿은 데 없이 드리워져 있지 않겠는가.
장막 한 겹에 불과한 이 운무에 생애를 걸지 마라.
내 힘으로 찢을 수 없는 것이라면, 놓아버리라.
그 안 개의 구덩이에 나를 던져 무익하게 익몰하는 어리석음 대신에 나는 내 마음을 끌어올려,
벗어나리라.
이 안개보다 내 마음이 높아져야, 나는 벗어난다.
천하에 내가 되어 가지고 이만한 안개의 구렁텅이에, 언제까지 이 몸을 담고 있을 것인가. (6권 218~221쪽)
이 글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콧등이 시큰. 마음 속으로 조용히 '효원, 화이팅!'을 가만가만 외쳤다. 강모와 혼인한 게 효원의 죄라면 죄.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네 따위의 말을 하자는 건 아니지만, 자신의 팔자가 여물 담은 뒤웅박일지언정 스스로 자기를 깨뜨려버리면 그건 안될 일.
그래, 안다. 때로는 삶보다 죽음이 따뜻할 수도 있다는 거. 죽음보다 삶이 모질 수도 있다는 거. 그래서 남의 삶, 남의 죽음에 대해 함부로 단정지어 말해서는 안된다는 거. 하지만 그래서 더욱 우리는 보다 좋은 삶을 꿈꿔야 하는 거 아닌가.
책에는 매안 이씨 문중 일가 며느리 중 한 사람인 사리반댁이 효원을 찾아와 들려주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리반댁의 이름은 '효덕'인데, 자기가 그 '효덕'이란 이름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마도 효원과 강실, 그리고 옹구네, 매안과 거멍굴과 고리배미 사람들 모두가 바라던 삶은 사리반댁의 이야기에 나오는 순덕이의 모습일 것이다.
장날이면, 아껴 놓았던 물빛 치마에 흰 저고리 날아가게 차려 입고는 머리도 곱게 빗고, 만석이와 나란히 어깨를 맞대어 대문을 나서는 그들의 뒷모습에 햇살은 다사롭고 투명한 발을 내렸다.
장날, 장에 가는 심부름은 으레 이 두 사람이 맡아 했던 것이다.
안채의 심부름은 순덕이가, 사랑채 심부름은 만석이가 하였다.
그들이 다정한 걸음으로 장에 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 세상에 순덕이 팔자를 누가 당하리."
싶어졌다.
날이 저물어 어스름이 내릴 무렵이면 두 사람은 또 그렇게 나란히 돌아왔따.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양손에 각기 주렁주렁 보따리와 꿰미들을 든 채로 얼굴에는 아직도 장터거리에서 본 광경과 새로운 풍물에서 묻은 흥분이 홍조로 남아 내외마주 손짓 발짓 흥에 겨워서.
"그럴 때 순덕이 얼굴은 참 보기에 좋더라. 사람 사는 게 저런 것이지 싶고."
그래서 효덕의 모친은 효덕에게
"너는 순덕이 팔자만 닮아라."
하였던 것이다.
"순덕이가 이 세상에 오직 갖지 못한 것이 있다면, 양반 하나 뿐인데, 이미 순덕이한테는, 양반이고 아니고가 아무 상관이 없어 보였단다. 그까짓 허울이나 경계 같은 것은 무엇에도 쓸 일이 없는, 그냥 자연, 그냥 사람. 사람다이 사는 사람으로 나한테는 보이더라"
사리반댁은 이야기하며 웃었다. (6권 208~209쪽)
<혼불>은 뭐가 사람다운 것인지, 어떤 세상이 좋은 세상인지를 묻는 책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이자 근대화의 물꼬가 터지는 시작하는 혼란과 불안의 격변의 시기에서 허울이나 경계 없이 사람다이 살다가기를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 너무나 아프고 참혹하게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지금 읽고 있는 7권에서 뻘겋게 피를 튀기며 흐르고 있다.
<혼불>을 읽으면서 생긴 버릇 하나. 불쑥불쑥 전라도 사투리가 내 입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연이어 며칠을 친구들과 놀기에 바쁜 울 아들에게
"흐미, 아주 노는 데 맛들렸는 게비?"
밥 먹으라 부르는 데 밍기적대고 안오는 우리 막내에게
"빨리 와서 먹을겨, 안먹을겨!"
뭐, 이런 식이다. 날이 갈수록 증상이 좀 심해져서, <혼불>을 다 읽고 나면 한동안 표준말 가지런한 책들을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