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중순을 넘기면서던가?  김용석씨의 <두 글자의 철학>을 읽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여러가지 삶의 조건이랄까 감정이랄까 하는 것들이 쉽고도 깊게(쉬우면서 깊이가 있다니!!!) 잘 쓰여진 책이었다.  제목 그대로 두 글자로 이루어진 스물 다섯개의 낱말들 - 생명, 자유, 유혹, 고통, 희망, 행운, 안전, 낭만, 향수, 시기, 질투, 모욕, 복수, 후회, 행복, 순수, 관계, 이해, 비판, 존경, 책임, 아부, 용기, 겸허, 체념- 에 대한 작가의 성찰이 반짝이고, 그 반짝임으로 나와 세상을 비춰보게 하는, 그런 책이라고 할까..  살아가면서 혼란스러워질 때, 펼쳐서 찬찬히 읽으면 혼란스러움을 정리해 줄 것만 같은 느낌이다.  후회와 참회, 포기와 체념, 시기와 질투에 대해 그 섬세한 차이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도 좋고, 비판에 대한 옹호와 사회의 공적인 책임에 대한 엄격한 시각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단호함도 맘에 들었다.    이 책에 반해서 김용석씨의 다른 책, <일상의 발견>을 질러버렸다.  언제 읽을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기대가 된다.

공지영씨의 <즐거운 나의 집>.  작년부터였나?  누군가 "디게 좋다"고 하는 바람에 읽어야지,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계속 미뤄지던 책이다.  도서관에서 대출받으려고 찾으면 늘 대출중이던 책.  그래서 더더욱 "니가 그렇게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있단 말이지.."하며 기대하고 있던 책이기도 했다.  얼마 전 중고샵에서 책을 구입하고는 읽었는데, 너무 기대가 컸던 걸까.  어쩐지 인간극장 -공지영편-을 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읽는 내내 엉겨붙었다.  그래서 "공지영씨는 잔소리도 참 예쁘게 하네."같은 잡념이 감정이입을 방해했던 것 같다. 
이제는 그 형태를 다양화하고 있는 '가족'이라는 집단(?)의 문제를 새롭게 환기시켰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일 수도 있겠지만, 뭐랄까, 너무 직설화법을 썼다고 해야 하나...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작품 속 '엄마'의 입을 통해 그대로 흘러나오는 걸 듣는 것은 좀 고역이었다.    
<즐거운 나의 집>과 함께 <도가니>도 구입했는데, 남편이 먼저 읽더니 그리 나쁘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가니>는 괜찮을까?  

<즐거운 나의 집> 후에, 진중권씨의 <호모 코레아니쿠스>를 읽고 있는데 담낭결석 때문에 입원준비를 하던 남편이 병실에서 읽겠다며 빼앗아 갔었다.  뭐, 어쩌겠나,,  아픈 남편이 굳이 그걸 읽어야겠다는데, 뭐라 할 수도 없고..  암튼 그래서 다 읽기까지 시간이 좀 더 걸렸고 집중의 강도도 약했었다.  그래도 참 명쾌하고 날카롭다는 생각,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것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분명한 언어로 떠오르는 확연함이 남았다.   
이 책 278쪽, '라캉이 말했던가? 자의식은 거울을 통해서 형성된다고. 하지만 현대의 대중은 렌즈를 통해 자의식을 구성한다.  자아는 이제 카메라 앞에서 형성된다'는 대목에서 잠시 주춤하긴 했었다.  카메라 앞에서 나는 여전히 당황하며 숨고, 사진 속의 내가 너무 낯설고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건 아마 내가 소위 말하는 386세대이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책에서 진중권씨도 386세대를 문자문화세대이자 산업전사로 신체가 개조된 세대라고 했으니, 카메라에 적응하지 못하고 나의 자아를 새롭게 형성하지 못하는 거야 당연한 것이겠구나, 싶었다.  슬퍼해야 하나?  하지만 나는 내가 문자문화세대라는 게 오히려 다행스럽다.   
진중권씨가 보여주는 우리 호모코레아니쿠스의 습속은 천박하고 얄팍하고 가볍고 유치하다.  하지만 그 원인은 어디까지나 전근대와 근대, 탈근대가 우리 안에 너무 강하게 압축된 지층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며 '오늘의 고통을 제거하고 미래를 준비하려면 한국인의 몸을 이루는 세 가지 역사적 층위가 최적의 배합을 이루도록 재배치해야 한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존재의 미학, 즉 요소들을 선택하는 테크네와 그것들을 배치하는 메트릭이다.'는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년쯤, 방해없이 끊어짐 없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시절이 오면, 다시 읽고 싶은 책이다.  

그러고보니 남들은 다 읽고 끝냈을 것만 같은 책들이다.  뒷북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것도 제대로 된 리뷰를 쓰지 못하고 이런 간단한 기록으로 서둘러 마무리짓고 있긴 하지만, 남편은 수술받고 병원에 누워있고, 권윤덕 선생님께 보여드릴 그림을 그리고, 추천도서들을 정리하고 글을 써야하는 와중에 책 세 권을 읽었다는 사실에 스스로에게 감격하고 있는 중이다.  
다음 책은 뭘 읽을까,,,  으흠..  <호모 코레아니쿠스>를 남편에게 빼앗겼을 때, 읽다만 서경식씨의 <소년의 눈물>을 마저 읽어야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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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10-09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부가 같은 책을 읽고 소감을 나눌 수 있다니 멋져요! 옆지기님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책 고르기 위한 고민은 예뻐요.^^

섬사이 2009-10-11 10:06   좋아요 0 | URL
입원한지 4일만에 퇴원했어요. 간단한 수술이라 퇴원하고 그 다음날로 출근하고 일상생활을 별 무리없이 하고 있어요.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

세실 2009-10-10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나의집은 그저 그랬는데, 도가니 괜찮았습니다.
호모 코레아니쿠스도 좋았어요.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느낌 딱 그거네요~~~
지금은 괜찮으신거죠?

섬사이 2009-10-11 10:0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도가니는 괜찮다니, 위로가 되네요.
진중권씨의 책이 몇권 더 집에 있는데,
차근차근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꿈꾸는섬 2009-10-10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모 코레아니쿠스> 궁금하네요. 저도 한번 봐야지 생각은 하는데 아직 주문도 안했네요.

섬사이 2009-10-11 10:10   좋아요 0 | URL
읽어보시면 후회는 안 하실 거 같아요.
 
사랑해 100번 작은 곰자리 12
무라카미 시코 지음, 우지영 옮김, 오시마 다에코 그림 / 책읽는곰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아이를 재우려다 보면 잠이 안 온다며 투정을 부릴 때가 있어요. 불을 켜라고 떼를 쓰기도 하고, 바스락거리며 부산을 떨기도 하고, 무슨 상상을 하는지 혼자서 속닥거리기도 하다가 노래를 부르기도 하지요. 그럴 때마다 저는 “잠은 수줍음을 많이 타는 부끄럼쟁이라서 불을 끄고 누워서 자는 척 눈을 감고 조용히 있어야 찾아오는 거야. 자꾸 움직이고 떠들고 불을 환하게 켜두면 ‘아이고, 부끄러워서 유빈이한테는 못 가겠네!’하고 가버리거든. 그러니까 쉿, 조용히 하고 가만히 있어봐. 그러면 잠이 유빈이한테 놀러 와서는 재미있는 꿈나라로 데려갈 거야. 엄마는 빨리 잠이 오게 가만히 있어야지!”하고 말해요. 빨리 아이를 재우려는 저의 급한 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말이지요.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네요. 아이 마음은 헤아려 주지도 않고 어떻게든 재우려고만 했으니까요.

잠 안자고 놀고 있는 하나라는 여자 아이를 재운다는 내용만 본다면 베드타임 스토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자장가’같은 분위기의 그림책은 아닙니다. 그런 그림책들과는 좀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아요. 마치 내가 그 집 지붕 위에 뜬 동그란 달이 되어서 아이와 엄마가 다정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기분이 들거든요. 그래서인지 그림도 밝고 이야기도 경쾌합니다. ‘조용, 조용’한 정적인 분위기의 베드타임 스토리와는 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동생이 먼저 잠이 들어 엄마를 혼자 독차지할 기회를 얻은 이 그림책 속 하나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빨리 들어가 자라는 잔소리를 입 밖으로 꺼내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아이의 입장을 헤아린다는 게 말처럼 쉽고 간단하지는 않잖아요. 늘 엄마의 욕심이라든가 ‘바른 생활 습관 형성’이라든가 ‘교육적 효과’라고 하는 것들의 틀에 매여서 아이가 느끼는 감정을 무시하게 되기 일쑤니까요. 그림책 속 엄마는 저랑은 다르게 사려심이 많은 엄마인가 봅니다. 하나가 내는 수수께끼 게임에 기꺼이 동참하는 쿨한 모습을 보여주네요.

하나가 낸 수수께끼, ‘하나가 자기 전에 가는 곳은 어디일까요?’의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하나도 엄마도 모두 사랑스럽기만 합니다. 어느새 ‘나도 아이에게 이렇게 사랑스런 엄마가 되어야 할 텐데..’하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예요.

하나는 정답을 맞히지 못하고 포기해버린 엄마의 품으로 뛰어들며  엄마에게 ‘사랑해’ 라고 100번 말하기 벌을 내려요. 엄마는 “뭐어, 백 번이나.”하고 놀라는 척하지만 하나를 품에 안고 ‘사랑해’라고 속삭이는 엄마의 표정은 행복합니다. 엄마의 달콤한 속삭임을 들으며 하나는 서서히 잠이 듭니다. 엄마가 백 번의 고백을 마쳤을 땐, 이미 하나는 꿈나라로 떠난 뒤였어요. 엄마는 하나가 이미 잠들었다는 걸 알고도 사랑한다는 백 번의 속삭임을 멈추지 않은 거죠.

다섯 살인 제 딸 유빈이는 제가 읽어주는 이 책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엄마, 엄마도 나 꼭 껴안고 사랑해 100번 해줘.”하며 졸랐습니다. 저도 이 책에서 보고 배운 게 있어서 “뭐어, 유빈이도 사랑해 100번 듣고 싶어? 그렇게 많이?”하며 놀라는 척했어요. 살짝 한숨도 쉬면서요. 그리고 정말로 사랑해 100번을 선물했습니다. (그런데 유빈이는 잠들지는 않더군요.)

유빈이가 좋아한 건 또 있습니다. 이 책의 가장 마지막 문장은 ‘사랑해, 백 번.’이 아니라 ‘내일도 실컷 놀자.’입니다. 유빈이는 이 마지막 문장을 듣고는 ‘실~~컷~~?’하면서 좋아서 입이 벌어지더군요. 아마 다음날 이 책 속의 엄마와 하나는 함께 신나고 즐거운 시간들을 ‘실컷’ 즐겼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엄마와 아이는 서로를 더 많이 사랑했겠지요.

저도 제 아이들과 날마다 더 많이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이 그림책이 가르쳐주는 ‘엄마와 아이가 더 다정해지는 비법’-헤아려주기, 안아주기, 사랑한다고 말해주기, 실컷 놀아주기-를 잘 기억하며 살아야겠네요. 잘 될까요? 부디 잘 되어야할 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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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9-10-06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유빈이의 말이 넘 귀여워요..꼭 껴안고 사랑해 백번...ㅋㅋ 유빈이처럼 귀여운 딸이면 하루종일이라도 해줄수 있는뎅~~!

아이에게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준다는게 어려운일도 아닌데 아이들이 커가면서 점점 하기가 쉽지 않게 되더라구요.
하는짓들은 애기면서 한번 안으면 품에 안겨 지지도 않고요..^^_

님은 이쁜 유빈이가 있어 늘 실현가능할거에요..

섬사이 2009-10-08 20:03   좋아요 0 | URL
예, 늦둥이 딸 덕분에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아요.
유빈이 덕분에 웃을 일도 많구요.
셋째 아이라서 그런지, 제가 즐기는 면이 있어요. ^^;
 




이번에 유빈이와 중앙박물관에 다녀온 것이 세 번째이다.  첫번째는 큰딸 유진이의 방학숙제 때문에 갔었다.  직업탐색에 관한 숙제였는데, 마침 박물관 큐레이터 한 분과 연결이 되어서 인터뷰를 하러 가는데 쫓아가서 놀다온 것.  물론, 인터뷰는 큰딸 혼자 하라고 두고 같이간 신이네랑 아이 셋을 끌고 신라금관이며 볼 때마다 '저 귀걸이를 하고 있으면 너무 무거워서 귀볼이 길게 늘어나지 않을까?'싶은 누런 금귀걸이들이며 깜찍하고 정감있는 토우들을 보며 박물관을 자주 찾아야겠다고 결심했었던 것이다.  방학 중이라 아이들이 많았고, 어린이 박물관은 미리 예약을 해야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몰라 구경도 못하고 밖에서 어정쩡거리긴 했지만.

두번째는  인터넷으로 중앙박물관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는 걸 알고 신청했었다.  '책 읽어주는 박물관'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이었는데 이것도 인터넷으로 미리 참가신청을 해야만 했다.  암튼, 시간에 맞춰 어린이 박물관 로비에 모여 있다가 담당 선생님의 인솔을 받고 어린이 박물관 내의 강의실로 들어갔다.  강의실 한 켠에 호랑이 병풍이 서 있고, 아이들은 앞쪽에서 활동하고 어른들은 뒤쪽 의자에 앉아 지켜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어흥 호랑이, 깍깍 까치>라는 책으로 우리 민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나서 호랑이 모양으로 자른 가면을 나눠주면 아이들이 가면을 크레파스와 접착식 펠트조각으로 칠하고 꾸며보는 것.  그런데 시간이 너무 모자르다.  유빈이의 경우 호랑이 코부분만 좀 칠했는데, 시간이 끝나버렸다.   이렇게 아쉬울데가!!! 
그래서 프로그램이 끝난 후, 어린이 박물관에서 좀 놀다가(유빈인 옛날 부엌과 현대 부엌을 비교해 놓은 곳에서 소꿉놀이에 열중) 3층 미술전시실로 올라가서는 유빈이랑 '호랑이 찾기 놀이'를 했다.  그러다 <까치와 호랑이>민화도 발견.  ^^ 












 

 

어제, 세번째로 중앙박물관에 다녀왔다.  이번엔 'HELLO, 박물관. 갈갈이 콩'이라는 프로그램.  물론 이것도 사전에 인터넷 예약이 필수다.  큰딸이 시험기간이었는데,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요즘 읽고 있는 책이 공지영씨의 <즐거운 나의 집>인데 거기에 누차 반복되는 메시지가 '어차피 니가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난 내 인생을 열심히, 재미있게 살자' 였더래서 미안함을 참고(?) 박물관을 향해 출발했다.  그것도,, 시험 끝나고 돌아오는 딸, 기다렸다가 점심밥도 안주고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가 버스정류장에서 딸과 대면.  '시험 잘 봤냐?  엄마 간다~~' 라는 말만 남기고 마침 정류장에 들어선 버스에 허겁지겁 올라탄 것. 
박물관에 도착해보니 마당에서 책에 대한 행사를 벌이고 있는 중.  행사 제목이 '책책BOOK북'.  문화체육관광부랑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주최하는 가을독서문화축제라는데, 축제치고는 너무 썰렁한데다 '억지로 짜내기'식 이벤트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도 온김에 슬슬 둘러보는데, 우리의 유빈씨가 갑자기 내 손을 끌고 달리더니 예림당 부스에 전시된 책 한 권을 집어들었다.  개인적으로 예림당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거다.   


<프린세스 코디 인형놀이>라니...  늘 엄마와 딸 사이의 싸움을 부추기는 이런 책의 출판을 이제 좀 자중해주셨으면..  <WHY>시리즈로 빌딩을 세우셨다는 전설의 출판사이시니 이젠 좀..  뭐, 아이야 행복해하지만, 난 소중한 나무를 희생시켜서 만든 아까운 종이를 왜 하필이면 저런 책을 만드는 데 쓰나, 하는 생각에 속상해지는 거다.  아니, 고상한 이야기 집어치우고, 솔직히 말하자면, 저런 책 사는데 쓴 내 돈이 아까워서 속상한거다.  얄미웠던 건, 저런 류의 책을 부스 안에 전시하지 않고 사람들 지나다니는 통로에 잘 보이도록 진열식 책꽂이에 꽂아서 놓아두었다는 사실이다.  정말 아이들을 미끼로 한 상술이 돋보이는 예림당.  마음에 안드는데 억지로 사주는 나한테 미안했는지 스티커 하나를 서비스로 주더라.. 그래도 니가 싫~다..
비교하면 그렇지만, <살아남기>나 <보물찾기>시리즈 만화로 성공한 아이세움 출판사 같은 경우는 그래도 좋은 책 출판에 신경을 쓰고 있는 듯하여 나름 이쁘게 봐주고 있건만..  하긴 그들이 내가 이쁘게 봐주고 안봐주고가 뭐가 중요하랴.  

어쨌든 그렇게 툴툴거리고 있는데, 이럴거면 큰딸 점심이나 챙겨 먹이고 올걸, 하면서 후회하고 있는데 저편에서 동화구연을 하고 있었다.  벌거벗은 임금님, 개구리 왕자 등을 공연하는데, 와~~ 하시는 분들의 열정이 참 대단하다.  겨우 아이 셋을 앞에 두고 9월이지만 아직 더운 날씨였는데 부직포로 만든 모자와 의상을 걸치고는 참 열심히도 해주셨다.  그래서 화가 좀 풀리고, 설문조사 해줬을 뿐인데 선물을 세 가지나 줘서 또 좀 풀리고...  근데 참 돈도 많지.  설문조사를 해주면 선물을 준다기에(공짜선물엔 맥없이 약해지는 아줌마라서.. ) 급하게 해줬는데, 세 개 중에 하나만 줄줄 알았는데 세 가지를 전부 다 줬다.   티셔츠, 가방, 개구리 인형.

저 로고들을 좀 작게 한 귀퉁이 구석으로 몰아서 디자인했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티셔츠는 울아들 잘 때 입고 자라고 주고, 가방은 도서관 가방을 하면 좋을 것 같다.  개구리 인형(이름이 책뽀라고 하더만..)은 유빈이 가방에 매달아 줬더니 좋아한다.  행사는 9월 27일 일요일, 그러니까 내일까지고 손택수, 정호승, 방현석, 신경숙 작가와의 만남이라든가 윤제균, 강형철 영화감독과의 시간등 프로그램이 많이 준비된 것 같으니까 관심있는 분들은 주말을 이용해 가볍게 나들이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그렇게 노닥거리다가 프로그램에 들어갈 시간이 되어 어린이 박물관 앞으로 갔더니 예약을 확인하고는 앞치마를 나눠줬다.  앞에 기념품 매장 같은 곳에 들어가 2천원을 주고 준비물을 구입하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담당선생님을 따라 강의실로 들어갔다.  지난 번 '책 읽어주는 박물관' 때와 비슷하게 생긴 다른 강의실이었다.  두 시간짜리 프로그램이라 유빈이에겐 지루한 감도 없지 않았다.  강사의 말이 너무 길어져서 앞에 놓인 멧돌이며 절구를 빨리 만져보고 싶은 유빈이는 아마 대단한 참을성을 발휘해야 했을 듯. 
농경문화가 막 시작될 시기, 그러니까 신석기 시대쯤이 되려나?  그 시대의 자료화면도 보여주고 그 때 쓰였던 갖가지 농기구들도 살펴본 뒤 강의 듣기 전 미리 구입한 재료(볶은 콩)을 가지고 다식을 만들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핵심은 콩을 가는 방법.  책상 위에 준비된 맷돌, 절구, 갈판과 갈돌을  모두 이용해서 콩을 가는데 유빈이에겐 무척 신나는 시간이 되었다.






 

 

 

콩을 다 간 후에 꿀을 섞어 다식판에 찍는데, 겨우 세 개를 만들 분량밖에 안되었다.  강의실 안엔 고소한 콩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엄마의 도움을 거부하고 혼자 다식을 만든 유빈이는, 내가 빈 그릇을 헹구러 다녀온 사이에 다식 세 개를 몽땅 자기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이그...  자식 키워봐야 아무 소용없다지만, 그래도 엄마 입에 하나 넣어주지도 않다니.  나중에 박물관을 나오면서 엄마는 하나도 안 주고 너 혼자 다 먹을 수 있냐고 따지니까 "엄마, 너무 맛있어서 나도 모르게 다 먹었어"하며 씨익 웃는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어린이박물관에서 좀 놀았는데, 지난 번엔 부엌 코너에서 소꿉장난에 열을 올리더니 이번엔 여러가지 악기들을 두들겨보기도 하고 움집에도 들어가보았다.  신라금관을 머리에 써보기도 하고.






  

  

돌아오는 버스 안.  유빈이는 버스를 타자마자 내 무릎을 베고 잠들었다.  12시부터 6시까지의 박물관 여행이 유빈이에겐 무척 고단했을 터였다. 
 

 

 

 

 

 

웃기는 건, 집에 돌아와 잠에서 깬 다음 하는 말이
"엄마, 난 박물관이 너무 좋아.  맨날맨날 갔으면 좋겠어." 한다.
다섯 살 딸 아이가 박물관이 너무 좋다는 말에 나는 내심 아이가 박물관에서 옛날 물건들과 그림을 보는 데 재미를 느꼈구나 싶어서 반가웠다.
확인 차, "왜~???" 하고 물었더니 우리 딸이 천진한 얼굴로 하는 대답이
"맛있는 거 먹잖아. 어린이 세트랑, 구슬 아이스크림이랑.. "
으이구,,, 내가 못살아.  그러니까 유빈이가 가장 좋았던 건 바로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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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9-29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꾸밈없는 천진함이 최고예요. 유빈이 예뻐요~~
손택수 시인~~ 벌써 지났군요.ㅜㅜ

섬사이 2009-10-01 03:27   좋아요 0 | URL
'꾸밈없는 천진함'에 늘 한 방 먹고 살죠. ^^
 

아직도 남아 있던 걸까. 
주책이지, 하면서도 덜컥 겁이 나기도 했어.
어쩌자고 아직도 그런 장면들에서 내 가슴이 조여오는 건지,
내 몸 어딘가에 지독한 얼룩으로 남아있나봐.   
도대체 어디에?
그 만큼의 시간을 들여 완벽한 표백의 과정을 거쳤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럴 때 갑자기 떠오르냐구.
아득하고 희미해진 그 기억이
이젠 보이지도 않아,  
그런 거에 휘둘릴만큼 난 이제 순수하지 않아,
얼마나 때묻고 찌들었는지 그런 것쯤은 끄떡없어, 
강하고 세지고 뻔뻔해졌다고, 
그렇게 자부했는데 말이야.
그런 거 참 철없이 웃긴 거였다고, 
비아냥거리며 놀려줄 수 있었다구. 
내 생애 단 한 번,
딱 그걸로 족했다고, 
다시는 그런 거 없을 거라 했거든.
단 한 번이었기 때문에  
더 오래 남아 있는 걸까.  
서늘한 바람이 불어서.
마음까지도 서늘해져서.
그래서 조금 약해진거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걸. 
다시는 되풀이 되지 못할 그 기억.
어딘가에 새겨져 징징 울어대는, 
어쩌지도 못할,
망할,
마흔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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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고1짜리 큰딸이 1학기 기말고사를 끝내고는 다니던 학원을 그만뒀다.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내공을 갖춘 나이라고 여겨지기도 했고, 그래서 오히려 학원이 우리딸을 더 힘들게 만드는 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게다가 K대 수학과를 나온 11살 연하의 이웃엄마가 큰딸의 수학공부를 봐주겠다고(그것도 꽁짜로!!!)  하는 바람에 믿는 구석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덕에 우리 큰딸은 방학동안 책 읽을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갑자기 고전에 필이 꽂혀서는 <구운몽>을 시작으로 <홍계월전>(<장국진전>이 같이 들어있는 책이다), <양반전>을 거쳐 5권짜리 <옥루몽>으로 방학을 끝냈다.  

큰딸 이 내게 적극 추천한 책은 <옥루몽>이었다.  

 '정말정말 재미있다'면서, 옥루몽에 비하면 <구운몽>은 완전 요약판처럼 시시하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책 속 주인공이 자기 애첩만 예뻐하고 이야기에도 애첩 이야기만 나온다면서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도대체 얼마나 재밌기에 저러나, 궁금해지기는 했지만 다섯권짜리라 선뜻 잡고 읽지를 못했다.  내년에 막내가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면, 기필코 읽어서 우리 큰딸과 대화가 통하리라, 마음 먹었다.  

 

그 다음은 <홍계월전> 속에 들어있는 <장국진전>이다.  

학교 국어선생님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인데, 큰딸의 말을 빌리자면 <박씨전>처럼 우리 나라의 여성영웅소설이다.  큰딸이 중학생 시절에 <박씨전>도 재밌게 읽었던 터라 <홍계월전>에 더 호기심이 생겼었나 보다. 
그런데 읽고 나더니 <장국진전>이 더 재밌다는 거다.  몇 해 전에 자살한 '장국영'을 떠올리게 하는 '장국진'은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사실 지금도 <장국영전>이라고 쓸 뻔했다. '김국진'과 착각하기도 쉬울 듯..끙.) 책은 그리 두껍지도 않은데,, 나는 읽지 못하고 도서관에 반납하고 말았다.  

옥루몽을 다 읽어갈 때쯤 방학도 끝나고 있었는데, 우리 큰딸 이번엔 내게 <사씨남정기>를 빌려오란다.  빌려다 주긴 했는데 방학숙제를 마무리 하느라고 그랬는지, 아니면 <옥루몽>의 여파가 너무 강했던 것인지, <사씨남정기>는 지지부진하더니 다 못 읽고 도서관에 반납.   

추석이 빠른 탓에 중간고사도 빠르다. 개학하자마자 중간고사 준비에 들어가서는 다시 책 한 권 손에 못 쥐고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 와중에도 드라마 '선덕여왕'은 꼭 챙겨보는데, 엄마 눈치가 보이는지 드라마에서 나오는 거칠부의 '국사'가 학교 교과서에도 나온다면서, 드라마 선덕여왕 덕에 안외우고도 아는 게 많다며 너스레다.  눈치 준 일도 없구만.  오히려 같이 앉아서 열심히 봐주고 있구만... ㅎㅎㅎ  사실 주말엔 '패떴'에 '1박2일'에 드라마'탐라는 도다'까지 잘도 챙겨본다.   

그건 시간 여유가 있다고 책을 읽을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책 읽을 짬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웬만큼 책을 좋아하지 않고서야 마음에 여유없이 책을 잡기란 어려우니까 말이다.  지금 큰딸이 딱 그렇다.
그러니 'TV 볼 시간 있으면 책을 읽으라'는 말 따위가 내 입에서 나오질 못 하고 있는 거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다간 우리 큰딸 공부하다가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때문에, 내딸의 정신건강상 책보다 선덕여왕의 비담이 더 이로울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큰딸이 책과 다시 멀어지고 있어도 크게 실망스럽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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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9-09-16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엄마신것같아요 지나고 보면 잔소리하던 엄마보다 묵묵히 있어주었던 순간이 더 기억나고 고마워요.

섬사이 2009-09-20 12:50   좋아요 0 | URL
멋진 엄마는요, 이젠 잔소리할 기운이 없는 거죠. ^^

2009-09-16 2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0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9-09-16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엄마에 멋진 딸, 찰떡 궁합이에요. 그래서 저는 방금 만화책 한 권을 읽었습니다.(응?)

섬사이 2009-09-20 12:56   좋아요 0 | URL
우리 큰딸은 요즘 웹툰에 빠져있어요.
인강 듣기 전에 웹툰 한 번 쫙 읽어주는 센스!를 겁도 없이 당당하게 드러내며 살고 있답니다.
제가 멋진 엄마라서 그냥 넘어가고 있는 게 아니구요,
이젠 제 잔소리가 먹히지도 않을 뿐더러 딸이랑 싸울 기운도, 자신도 없어서 그래요. 이궁.. ^^;;

희망으로 2009-09-22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섬사이님의 서재에 가끔씩 마실 다니게 될 것 같네요. 옥루몽 저도 리스트에 담아둬야 겠네요.

섬사이 2009-09-26 11:24   좋아요 0 | URL
희망으로 님 덕분에 제 서재가 좀 더 따뜻해지겠네요. 언제든지 대환영이에요. 옥루몽, 언젠가 저도 마음잡고 읽어보려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