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고1짜리 큰딸이 1학기 기말고사를 끝내고는 다니던 학원을 그만뒀다.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내공을 갖춘 나이라고 여겨지기도 했고, 그래서 오히려 학원이 우리딸을 더 힘들게 만드는 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게다가 K대 수학과를 나온 11살 연하의 이웃엄마가 큰딸의 수학공부를 봐주겠다고(그것도 꽁짜로!!!)  하는 바람에 믿는 구석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덕에 우리 큰딸은 방학동안 책 읽을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갑자기 고전에 필이 꽂혀서는 <구운몽>을 시작으로 <홍계월전>(<장국진전>이 같이 들어있는 책이다), <양반전>을 거쳐 5권짜리 <옥루몽>으로 방학을 끝냈다.  

큰딸 이 내게 적극 추천한 책은 <옥루몽>이었다.  

 '정말정말 재미있다'면서, 옥루몽에 비하면 <구운몽>은 완전 요약판처럼 시시하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책 속 주인공이 자기 애첩만 예뻐하고 이야기에도 애첩 이야기만 나온다면서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도대체 얼마나 재밌기에 저러나, 궁금해지기는 했지만 다섯권짜리라 선뜻 잡고 읽지를 못했다.  내년에 막내가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면, 기필코 읽어서 우리 큰딸과 대화가 통하리라, 마음 먹었다.  

 

그 다음은 <홍계월전> 속에 들어있는 <장국진전>이다.  

학교 국어선생님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인데, 큰딸의 말을 빌리자면 <박씨전>처럼 우리 나라의 여성영웅소설이다.  큰딸이 중학생 시절에 <박씨전>도 재밌게 읽었던 터라 <홍계월전>에 더 호기심이 생겼었나 보다. 
그런데 읽고 나더니 <장국진전>이 더 재밌다는 거다.  몇 해 전에 자살한 '장국영'을 떠올리게 하는 '장국진'은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사실 지금도 <장국영전>이라고 쓸 뻔했다. '김국진'과 착각하기도 쉬울 듯..끙.) 책은 그리 두껍지도 않은데,, 나는 읽지 못하고 도서관에 반납하고 말았다.  

옥루몽을 다 읽어갈 때쯤 방학도 끝나고 있었는데, 우리 큰딸 이번엔 내게 <사씨남정기>를 빌려오란다.  빌려다 주긴 했는데 방학숙제를 마무리 하느라고 그랬는지, 아니면 <옥루몽>의 여파가 너무 강했던 것인지, <사씨남정기>는 지지부진하더니 다 못 읽고 도서관에 반납.   

추석이 빠른 탓에 중간고사도 빠르다. 개학하자마자 중간고사 준비에 들어가서는 다시 책 한 권 손에 못 쥐고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 와중에도 드라마 '선덕여왕'은 꼭 챙겨보는데, 엄마 눈치가 보이는지 드라마에서 나오는 거칠부의 '국사'가 학교 교과서에도 나온다면서, 드라마 선덕여왕 덕에 안외우고도 아는 게 많다며 너스레다.  눈치 준 일도 없구만.  오히려 같이 앉아서 열심히 봐주고 있구만... ㅎㅎㅎ  사실 주말엔 '패떴'에 '1박2일'에 드라마'탐라는 도다'까지 잘도 챙겨본다.   

그건 시간 여유가 있다고 책을 읽을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책 읽을 짬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웬만큼 책을 좋아하지 않고서야 마음에 여유없이 책을 잡기란 어려우니까 말이다.  지금 큰딸이 딱 그렇다.
그러니 'TV 볼 시간 있으면 책을 읽으라'는 말 따위가 내 입에서 나오질 못 하고 있는 거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다간 우리 큰딸 공부하다가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때문에, 내딸의 정신건강상 책보다 선덕여왕의 비담이 더 이로울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큰딸이 책과 다시 멀어지고 있어도 크게 실망스럽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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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9-09-16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엄마신것같아요 지나고 보면 잔소리하던 엄마보다 묵묵히 있어주었던 순간이 더 기억나고 고마워요.

섬사이 2009-09-20 12:50   좋아요 0 | URL
멋진 엄마는요, 이젠 잔소리할 기운이 없는 거죠. ^^

2009-09-16 2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0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9-09-16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엄마에 멋진 딸, 찰떡 궁합이에요. 그래서 저는 방금 만화책 한 권을 읽었습니다.(응?)

섬사이 2009-09-20 12:56   좋아요 0 | URL
우리 큰딸은 요즘 웹툰에 빠져있어요.
인강 듣기 전에 웹툰 한 번 쫙 읽어주는 센스!를 겁도 없이 당당하게 드러내며 살고 있답니다.
제가 멋진 엄마라서 그냥 넘어가고 있는 게 아니구요,
이젠 제 잔소리가 먹히지도 않을 뿐더러 딸이랑 싸울 기운도, 자신도 없어서 그래요. 이궁.. ^^;;

희망으로 2009-09-22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섬사이님의 서재에 가끔씩 마실 다니게 될 것 같네요. 옥루몽 저도 리스트에 담아둬야 겠네요.

섬사이 2009-09-26 11:24   좋아요 0 | URL
희망으로 님 덕분에 제 서재가 좀 더 따뜻해지겠네요. 언제든지 대환영이에요. 옥루몽, 언젠가 저도 마음잡고 읽어보려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