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가 나는 날 내 친구는 그림책
미로코 마치코 글.그림, 유문조 옮김 / 한림출판사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늑대가 나는 날>.

이 책의 제목을 듣는 순간, '늑대가 난다구?'하는 호기심부터 툭 솟아났다. 갈필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는 제목의 글씨를 보면서, 표지의 거친 터치로 그려진 동물들의 그림을 보면서, 어렴풋이 바람과 관계되는 내용일 거라고 예상을 했던 것 같다.

 

 

 

표지를 들추자 노란 바탕에 날아가는 하얀 새떼들이 면지를 가득 채우고 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늑대도 날고 새들도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버라이어티한 일이 벌어질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 책은 늑대가 나는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오늘은 바람이 세다.

휘잉 휘잉 세차게 분다.

 

이고, 펼친 양면에 가득히 사선으로 거칠게 그어진 붓자국들이 내 머리 속에 윙윙 바람을 일으킨다. 오른쪽 아래 머리카락을 온통 흩날리며 걷는 아이가 작게 그려져 있다. 이 책 속에서 내가 따라가야 할 아이다.

 

제목이 왜 <늑대가 나는 날>인지는 다음 면에서 알 수 있다. 아이는 바람이 세차게 부는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늘에서 늑대가 뛰어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느낌을 알 수 있었다.  올 여름 어느 밤에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바람이 세차게 분다고 해서 겁을 내지 않을 만큼 충분히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난 좀처럼 듣기 어려운 커다란 바람 소리를 즐겼다.  밖에서는 바람이 미친 듯이 불고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집안으로는 바람이 들어오지 않았다. 바람의 결이 베란다 샷시 창을 요란하게 쓸고 지나갈 뿐 집안의 공기는 얌전했다. 그 때 나도, 어디선가 맹수들이 몰려와 날뛰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던 것이다. 이 아이는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아이는 내내 혼자다. 엄마나 다른 가족들은 어디에 있을까. 이렇게 바람이 심하게 불고 천둥이 우는 저녁에. 난 오래된 엄마의 습성으로 책 속 아이를 걱정하지만 아이는 걱정도 불안도 두려움도 내색하지 않는다. 아이는 상상으로 그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메우고 견디는 것 같다.

 

아마도 아이는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려고 책을 찾고, 노래를 부르고, 피아노를 쳤을 것이다. 찾는 책은 박쥐가 가져가고, 노래를 부르자 새들이 한꺼번에 날고, 피아노를 치는 동안 다람쥐들이 시계바늘을 몰래 돌려놓았다. 빗방울과 함께  검은 방울무늬의 치타들이 모여들고, 거대한 고래가 커다란 밤을 끌고 왔다. 아이는 이불 속에 누워 거북이들이 시간을 되돌려 놓아 천천히 지나가는 고요한 시간을 느낀다.  그리고 드디어,

 

비가 그쳤다.

바람이 약해졌다.

천둥도 멈췄다.

 

비가 그치고, 바람이 약해지고, 천둥이 멈춘 건, 비가 다 쏟아지고, 바람이 잠들고, 비구름이 흩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눈을 감고 이불을 덮은 아이의 그림 위에 비가 그치고, 바람이 약해지고, 천둥이 멈춘 진짜 이유가 적혀 있었다.

 

내가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날, 맹수들이 날뛰는 것처럼 바람이 불던 밤에도 우리집 막내는 그 요란함 속에서도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바람은 나에게만 불었던 것이다. 아이에게 그 밤은 여느 밤과 똑같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비도 바람도 천둥도 거센 소란스러운 밤의 정경을 담았으면서도, 절대로 시끄럽지 않다. 마치 밖에서는 맹수처럼 울어대는 바람이 몰아치는데도 집안의 공기는 얌전했던 그날 밤처럼, 밖이 요란해서 오히려 안의 고요와 평화가 더 잘 느껴지던 그 시간처럼, 이 책은 나를 비바람과 천둥이 치는 밖으로 내몰지 않고, 혼자 있는 아이의 마음 속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비바람 요란한 밤의 정경을 혼자 있는 아이의 상상과 은유로 묘사해가는 작가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그 소란한 밤을 소란하게 보여주지 않고, 오히려 그 소란함의 반대편에서 혼자 있는 아이의 움추러진 감정과 정적인 분위기를 살린 점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보고 있으면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 같은 작가의 자유로운 화풍의 그림도 마음에 든다. 작년에 없는 재주를 짜내어 그림을 그려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아이의 그림 같은 이런 대담한 선의 그림을 그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았다.

작가의 홈페이지  http://www.mirocomachiko.com 에 가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데, 이 작가의 다른 그림들도 무척 마음에 든다. (일본어를 잘 모르지만 두 마리 고양이와 함께 살면서 동물 그림을 많이 그리는 것 같다) 살짝 다시마 세이조나 초 신타의 그림이 떠오르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작가의 그림이 더 시원시원하고 자유로우면서 뭔가 신비감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결론은, 난 이 작가가 참 마음에 들고, 앞으로 이 작가의 책을 더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 부러우면 지는 거라지만, 한편으로는 일본 그림책에 대해 쬐끔 질투를 느낀다는 것? (정말 쬐끔일까...?)

 

아파트 가로등이 너무 밝은 탓일까. 한밤중에 매미가 운다. 매미소리만 아니면 늑대도 치타도 없는 고요한 밤이었을 거다. 잠든 아이에게는 자기 꿈 속이 가장 소란할 시간이다. 아이를 깨워 이 책을 읽어주고 매미 울음소리에 귀기울이게 하고 싶어지지만 음. 난 이성적인 엄마니까, 그 충동을 가만히 덮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