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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그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평점 :
이 책을 읽고 난 느낌은, 뭐랄까.. 그래, 권투시합으로 따지자면 한 방의 강펀치로 KO당하는 통쾌한 경기같지는 않지만 충분히 견딜 수 있겠다 싶은 무른 jab을 연달아 맞고 어느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고 온몸이 욱신거려서 "내가 졌소.."하며 다운되고 마는 기분이 드는 책이다. 아니면 야구에서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들이 연달아 짧은 번트를 쳐대는 바람에 주자들을 차례차례 밀어내어 맛보게 되는 홈인의 감격이라고나 할까.. 스포츠에 대해선 무식하다 할 수 있는 내가 굳이 스포츠를 예로 드는 건, 아마도 이 소설의 이야기를 끌어가는 인물들이 모두 남성이기 때문인 것 같다.
은희경이라는 작가가 쓴 소설을 처음 읽는 거라 원래 이 작가의 문체가 이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짧게 툭툭 끊어 치는 어조에 무미건조하다 할만큼 분석적이고 보고서적인 글의 분위기가 느껴져서 소설 첫 부분에서 이걸 계속 읽어, 말어? 하며 잠깐 망설이기도 했다는 걸 고백해야겠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소설 중간에 들어설 무렵부터는 바늘 끝으로 콕콕 찔러대는 것 같은 작가의 글에 점점 빠져들다가 결국엔 공감의 웃음도 흘리고 고개도 주억거리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책에서 서정적인 묘사나 낭만적 혹은 지적 감성을 자극하는 표현은 찾아보기 어려웠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책의 제목에서 암시하듯,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세상의 거칠고 단단한 표면을 깨고 찬란하게 부상하는 메이저급 인물이 아니다. "만수산 드렁칡"이라는, 시시하고 비굴의 냄새도 좀 풍기는 이름으로 한데 묶인 마이너급 남자 네 명의 인생을 좇아 사회의 불합리한 여러 단면들과 1970년대에서 2000년대에 이르는 우리 나라의 정치적 사회적 격변기의 역사 안에 그 어떤 의도도 힘도 없었던, 어찌보면 착하고 순진해빠진 대다수 마이너들의 흔들리는 삶과 내면을 엮어내고 파헤쳐 가는 작가의 집요함과 예리함이 빛나는 소설이다.
허풍과 허세로 자신의 열등함과 무능력을 메우려하고, 매력없음으로도 모자라 철까지 없고, 세상사에 대해 대책없는 낙관 아니면 어정쩡한 비관의 인생관을 가졌고, 그래도 저마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58년 개띠 남자 넷의 삶을 작가의 문력文力을 도구 삼아 꿰뚫어 가다보면 나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엔 그들의 작태가 우스워서 소설 속 인물이 너무 과장되었다는 생각을 했건만, "무슨 소설에 제대로 된 인물 하나가 안 나와?"하며 잘난 척도 했건만, 결국엔 "삶의 여정이란 것이 사실로도 칡처럼 하잘것없는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p.17)이었다는 형준의 고백이 곧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나 또한 마이너의 한 사람이었고, 그들과 같은 만수산 드렁칡의 한 뿌리이며 줄기였고, 얄팍하지만 치명적이지 않은 위선으로 세상에 대한 예의와 융통성을 발휘하는 나름대로의 처세도 익혔으며, 짧고 굵은 위험한 삶보다 가늘고 긴 편안한 삶을 선호하는 취향을 가졌고, 그러면서도 메이저리그에 대한 황홀한 환상의 홀로그램에 매료되어 허세와 허풍으로라도 메이저 근처에라도 날아가볼까 기웃거리는 자가당착의 우스운 꼬락서니를 하고 있었던 거다.
소설을 읽어가는 동안 나는 고맙게도 은희경이라는 작가가 소설 속 "만수산 4인방"을 통해 우리 시대의 저물어가는 연배의 마이너들에 대한 통렬한 풍자성 비판과 함께 연민의 감정을 보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마이너들을 위로한다.
"그런 거 생각하면 사는 것도 정말 별거 아니야. 말하자면 내가 세월과 함께 닳아가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돼. 산에 한번 가봐. 전나무숲, 대나무숲, 소나무숲, 이름은 그렇게 붙이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전나무 대나무 소나무 입장에서만 본 거지, 사실 숲을 울창하게 만드는 것은 이끼 같은 거. 그리고 드렁칡 같은 하찮은 식물이더라구." (p.241) 하면서.
비록 누군가가 "우리의 인생을 원격조정하고 있다는 기분"(p.232)이 들고 "우리의 삶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어떤 낯모르는 힘에 의해 이끌려진다는 생각"(p.232)이 들어 인생에 대한 체념이나 무기력증을 느끼게 되더라도 "언제나 자기의 시대를 위기라고"(p.242)라고 말하는 지식인들과 "하나같이 자기의 시대를 국난이라고"(p.242)이라고 떠드는 애국자들에게 휘둘리지 말고 "우리는 우리식 대로 살면 되는 것"(p.242)이라고 속삭여준다.
작가가 병 주고 약 주는 것 같아 얄밉다고 해야하는 건지, 아니면 그만큼 이야기를 짜넣는 재주가 출중하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그 둘 다인지 나는 또 어정쩡한 마이너의 모습을 하고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한 권의 책을 덮으며 곰곰 생각에 잠겨 본다.
마이너들이 드렁칡이라면 메이져들은 뭔데? 독야청청 푸른 소나무라고? 대쪽 같은 절개를 지닌 대나무라고? 하늘을 찌를 듯 기세등등 높이 자란 전나무라고?
'치, 웃기시네~ '라는 비웃음이 새어나오는 것도 내가 마이너로서의 열등감을 가졌기 때문일까? 매일매일 신문의 많은 지면을 차지하는 대선 후보 어쩌구 저쩌구 하는 이야기는 집어치우자. 이렇게 저렇게 자꾸 뻗어가려는 생각의 가지들을 쳐내며 입에 담아본지 오래 된 옛시조를 웅얼거려본다.
이런들 엇떠하리 저런들 엇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엇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라.
(어릴 땐 충신 정몽주를 떠보는 간교한 계략의 시조라고 하찮게 여겼더니 이제 정몽주의 단심가보다 더 마음을 저미게 하는 시조가 된 듯하다.
그래도 요즘 같아선, 정말 단심가가 잘 어울리는 독야청청 푸른 소나무 한 그루가 있어 그를 바라보는 시원함을 느끼고 싶단 생각이 간절하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