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밋빛 인생 - 2002 제26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누군가 나에게 카메라를 들이댄다. 

아니, 난 싫어.  지금 이 순간 드러나는 내 표정, 내 눈빛, 내 얼굴의 피부 상태, 확인불가능한, 그러나 분명 엉크러져 있을 머리.. 내 눈으로는 확인 할 수 없는 나의 그런 소소한 부분들이 누군가의 성능좋은 카메라 렌즈에 줌인되어 한 장의 사진으로 적나라하게 잡혀서 내 눈 앞에 낯설게 떠오르는 거, 그런 거 정말 싫어.

근데 아무리 싫다고 뻗대어도 그게 내 모습이다. 뽀샤시한 소프트필터나 하찮은 뽀샵질 한 번 손대지 않고 내 왼쪽 뺨에 점이 몇 개인지, 사춘기 시절에 만들어진 여드름 흉터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피부 톤이 어떤지, 눈썹의 모양은 반달형인지 갈매기형인지, 웃을 때 이는 몇 개가 드러나는지, 눈가의 잔주름은 어떤 모양으로 접히는지까지 확연하게 드러내는 그 사진 속 모습이 바로 나의 진짜 모습이다.  웃기게도 바로 나 자신이 나에 대해 가장 왜곡된 이미지를 창조해내는 장본인이라 나의 진짜 모습을 대면하면 타인을 마주할 때보다 더 낯설다.

이 책이 그렇다.  참 잘도 잡아냈다. 사람들의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 달래지지 않는 외로움, 치료받지 못하는 상처, 해소할 수 없는 갈증,  높고 두터운 장벽을 마주한 듯한 답답함, 그런 것들을 견디고 견디고 견뎌가며 사는 사람들의 깊은 속풍경들을 접사렌즈로 들여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예리하게 잡아서 가슴 시릴만큼 서늘하게 던져놓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정말로 "고통은 부끄러운 것이고 연약함은 악덕이 되어버리는 거리"(p.195)가 되어 버린 것일까.  "정서적인 금치산자"(p.200)이자 ""자의적인 시각 장애인"(p.158)들이 자신의 외로움을 극복해보고자 발버둥치는 게 우리들이 말하는 사랑이었을까. 

슈퍼에 가서 갈증을 달래줄 음료수를 고르듯이, 나는 더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한계점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의 음료를 선택했던 것일까.  그것이 톡 쏘는 청량감의 달콤한 콜라 같아서 액체가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에는 갈증이 풀어지는 것 같지만 결국엔 더 심한 갈증을 불러들인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한계치를 극복해야 한다는 절박함에 캔의 뚜껑을 따고 급하게 삼켰던 것일까. "광고가 추구하는 세 가지. 새로움, 파격성, 놓칠 수 없는 휴머니티."(p.39) - 사랑은 인생 속에서 꿈처럼 현란하게 지나가며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는 15초짜리 광고 같은 것.  새로움, 파격성, 놓칠 수 없는 휴머니티 - 그러고보니 사랑에게 기대하는 것들과 비슷하게 닮았다.

결국 난 너에 대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했던 거로구나..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핥아준 게 아니라 각자 자기의 상처를 핥았던 거구나. 그 순간은 참 거창했는데 이제 보니 참 보잘 것 없는 남루한 사랑이었구나, 하는 씁쓸함이 목을 넘어오게 하는 소설이다.

"영원한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란 그저 행복한 한 순간일 뿐, 소멸되지 않는 것은 기억이다.  시간 속에서 바래지 않고 간절함 속에 후광마저 얻게 되는 것은 다만 기억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것은 사랑이 아니다.  추억만이 영원할 뿐."(p.185)

책을 읽으며 뒤늦게 추억의 맥락을 짚어본다. 이제 웬만한 상처나 외로움쯤, 사는 게 다 그런거지, 하며 무덤덤하게 넘길 수 있는 나이가 되었는데도 소금기가 닿은 듯 오래된 상처가 따끔거려 놀라곤 했다. 나는 나의 상처만 느낄 수 있고, 넌 너의 상처만 느낄 수 있는 거라는 걸 깨닫는다.  누구도 타인의 상처를 알 수는 없다. 알 수 없으니 치료해 줄 수도 없을 터.

장밋빛의 순간은 있을 수 있어도, 장밋빛 인생은 없다. "인생은 30초를 지나서도 꿈틀거리고 끈적거리고 소금 냄새를 풍기며 자꾸만 감겨오는 지독한 것"(p.213)이니까. 그래서 상처든, 외로움이든, 갈증이든, 그 무엇이든 사랑이 치료해줄 거라 기대하지 않아야 했다. 그저 견딜 수 있어야 했다.  "이 세상과 맞서는 칼 하나"(p.215)를 가슴에 품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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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lin 2007-07-01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2002년에 읽은 책이네요. 반갑다^^ 실은 부끄럽게도 잘 기억은 안나요. 하지만 섬사이님이 말씀하신 그런 느낌과 이미지가 남아있네요. 그때는 책을 좀 대충 읽어서, 그리고 공감도 많이 못해던 듯..어려서 그랬던 거 같아요. 5년이란 시간 동안 훌쩍 커버려서..다시 읽으면 이젠 쓸쓸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

섬사이 2007-07-01 02:33   좋아요 0 | URL
제가 좀 소설을 뒤늦게 읽기 시작해서요. 뒷북치는 리뷰가 많죠? ^^

다락방 2007-07-01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국내작가의, 가장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추천도 했었는데, 제가 읽은것처럼 좋아하는것 같지 않으면 서운하기도 했었죠. 언제였던가, 저도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썼는데, 섬사이님과 비슷한걸 느꼈던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제 감상의 제목을 '절절한 공감'이라고 했던듯 했구요. 아주 잘, 읽고 갑니다.

섬사이 2007-07-01 23:34   좋아요 0 | URL
아주 잘,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비로그인 2007-07-01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읽으셨다니 너무 반가워요. 저도 리뷰 올렸었는데...ㅎㅎ
다락님 댓글도 더욱 반갑구요. 정미경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섬사이 2007-07-01 23:32   좋아요 0 | URL
<나의 피투성이 연인>도 책꽂이에 대기중이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