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두 번째로 읽은 은희경님의 소설이다. 1960년대를 배경으로 열 두살 난 평범치 않은 여자 아이 진희를 통해 주변 인물과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열 두살 치고 삶에 대해 꽤 냉소적이고 적의를 담고 있다.
이야기는 마치 옛날에 하던 TV 드라마 '한 지붕 세 가족'이나 '전원일기'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은희경님의 소설 스타일이 원래 그런 건지, <마이너리그>에서도 그랬지만 도시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찾아보기 어렵다. 절대로 '발리에서 생긴 일'이나 '풀하우스'같은 드라마의 자취는 찾아볼 수가 없다. 네꼬님이 은희경님이 드라마를 쓰셔도 참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정말 이 책을 읽으면서 드라마의 느낌이 확 와닿았다.
삶에 대해 냉소적이고 적의를 담고 있다곤 하지만 이야기가 내내 무겁고 진지하진 않다. 중간 중간마다 60년대 신파스러운 코믹한 장면들이 삽입되어 있다. 마치 성우가 더빙한 옛날 영화의 부자연스러운 억양의 대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제 신파스러움은 아무리 진지함과 사건의 심각성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웃음의 한 코드가 되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진희의 이모가 빨래를 널려다가 바지랑대와 함께 고꾸라지는 장면도 코믹하거니와 중절수술을 받고 눈 쌓인 산길을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이모를 홍기웅이 번쩍 안아 트럭 앞자리에 태우는 다소 진지하고 심각한 장면에서도 씨익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보면, 작가 은희경님의 생생하고 구체적인 묘사와 표현들이 가진 힘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의 특징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의 자잘하고 궁상맞고 어찌보면 추레하고 비루한 일상 속에서 사람들의 내면 심리, 또는 삶에 대한 정확한 성찰들을 예리하게 낚아채는 능력이다. 미운 정과 고운 정에 대한 글, 그리움을 모기에게 물려 가려운 할머니의 발바닥에 비유한 것에서 그 능력은 유감없이 드러난다. 너무나 평범하고 너무나 흔하게 일어나서 주목할 필요도 없을 것 같은 일상에 들이댄 작가의 날카롭고 매서운 통찰이 급소를 찔린 듯 아프고 서늘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사랑은 자의적인 것이다. 작은 친절일 뿐인데도 자기의 환심을 사려는 조바심으로 보이고, 스쳐가는 눈빛일 뿐인데도 자기의 가슴에 운명적 각인은 남기려는 의사표시로 믿게 만드는 어리석은 맹목성이 사랑에는 있다."(p.180)와 같은 사랑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건드려질 때마다 아픔을 느끼는 상처를 갖는다는 것은 내 삶에 대한 스스로의 조절능력을 상실하는 거였다." (p.130), "삶이란 언제나 양면적이다. 사랑을 받을 때의 기쁨이 그 사랑을 잃을 대의 슬픔을 의미하는 것이듯이. 그러니 상처받지 않고 평정 속에서 살아가려면 언제나 이면을 보고자 하는 긴장을 잃어서는 안된다"(p.310) 와 같은 삶에 대한 시니컬한 정의들, 그리고 "자기의 행복과 불행의 조종간을 통째로 타인의 손에 쥐어준다면 그 타인에게 매력적인 존재가 되는 것도 잠시일 뿐이다."(p.304) "대부분 어른들은 모험심이 부족하다. 진정한 자기의 삶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찾아보려 하기보다는 그냥 지금의 삶을 벗어날 수 없는 자기의 삶이라고 믿고 견디는 쪽을 택한다. 특히 여자의 경우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배후에는 '팔자소관'이라는 체념관이 강하게 작용한다.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그 체념은 여자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우연히 닥쳐온 불행을 이겨내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만듦으로써 더 많은 불행을 번식시키기 때문이다. (p.246) 과 같은 여성의 주체적인 삶에 대한 욕망의 글들을 책 갈피 구석구석에서 만날 수 있었다.
참 매력적인 작가다. 매력적이지 않은 평범한 인물들을 가지고, 멋지고 근사한 폼나는 분위기 한 번 잡지 않고도 이만큼의 이야기를 써낼 수 있다는 것이, 주변의 자잘한 이야기들이 작가의 시선 하나로 이렇게 심도 있는 소설로 환골탈태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것도 화려한 미사여구나 기름칠 해놓은 듯 유들유들하게 흘러가는 문체를 쓰지 않고도 말이다. 그래서 은희경님의 소설은 꼭 스타카토로 연주되는 베토벤 교향곡같다. 아니면 바흐이거나. (진짜 음악의 영역에서 그게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