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김영하라는 이름의 소설가. 소설을 너무 오랫동안 읽지 않았더니 만나는 사람마다 다 새롭다.  소설 중에서도 역사의 한 줄기를 타고가는 서사적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설은 언제 읽었는지조차도 아득하다.

구한말, 무력한 왕조가 열강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을 때, 무력한 왕조보다 더 힘없고 어수룩했던 그 백성들이 겪어내야 하는 삶의 고초와 절망들을 담아 낸 소설이었다.  책 표지 뒷면에 "유한자 인간의 기품과 슬픔 뇌쇄적으로 그려"라는 2004년 동인문학상 수상작 선정 이유가 책을 살펴보던 내 눈길을 끌었다. 뇌쇄적이라.. '애가 타도록 몹시 괴롭힌다'는 뜻의 뇌쇄적이라는 용어에 잠시 머뭇거렸다.  소설을 읽으며 그렇게까지 괴롭힘을 당하고 싶지는 않은데.. 하는 약간의 방어본능 끝에 "뭐가 그리 괴롭길래 표지부터 청승이냐."식의 발끈함이 집요하게 파고 들어, 결국 책을 열게 되었다.

구한말 비극의 역사가 멕시코에서 팍팍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작가는 굵고 건조해서 거칠게 느껴지는 문체로 슬픔도 비분강개도 드러내지 않고 그저 비극의 역사 안에다 어수룩하고 순진한데다 실리에 밝지 못해 이용만 당하는 백성의 이야기를 엮어 넣었다.  거기엔 황족, 파계신부, 박수무당, 전직 군인들, 내시, 희망을 잃은 부랑자등의 다양한 인간부류가 우울하게 뒤섞여 있다.  보호해줄 나라도, 돌아갈 나라도 없는 그들이 내쳐진 낯선 나라 멕시코는 그들이 새로운 시작을 꿈꾸기엔 너무나 황량하고 거칠었다. 반상과 내외의 모든 차별과 구분, 아니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가치가 그 황량함과 거침 앞에서 해체되고 녹아버렸다. 그 안에서는 그 어떤 대의명분, 정열적인 사랑, 신념이나 희망도 그들의 척박한 삶에 뿌리를 뻗고 자라날 수 없었다. 남들보다 얍삽하던지, 아니면 미련스러울 정도로 우직하던지, 그게 그들의 삶을 연명할 수 있는 그나마 유일한 방법이었다. 떠밀려간 황막한 땅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내던져 살아내는 것, 그것이 그들에겐 근대화였다.

떠밀린 그들의 비극적 삶은 말마따나 뇌쇄적이었다. 역사의 줄기를 타고 쓰여진 이야기건만, 그 이야기 어디에도 영웅도 찾아볼 수 없고, 미래에 대한 여리디 여린 한 줄기 희망도 철저하게 닫아버렸다. 과테말라의 마야유적지에서 누구를 위한 싸움인지도 모를 전투를 벌이며 '신대한'이라는 새 나라를 꿈꾸기도 하지만, 모두 그 허황됨을 알고도 묵인할 정도로 그들은 보잘 것 없고 하찮은 존재들일 뿐이다.

역사적 사실에서 나는 삶을 보지 못한다. 그저 굵직굵직한 무미건조한 활자들의 사실을 읽어내곤 '안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이런 소설을 읽다보면 내가 아는 역사가 얼마나 표피적인 것인지 깨닫게 된다.  역사 안에 담긴 사람들의 삶을 읽어냈다는 것, 그것도 지구 저 반대편까지 떠밀려간 약자들의 삶을 읽어냈다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07-06-28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이상하게 이 소설을 집어들지 않고 있는데요, 무슨 고집인지 모르겠습니다. 섬사이님의 리뷰를 보니 이제 김영하에게, 검은꽃에게 마음을 열어야겠어요. 좋은 리뷰, 잘 읽었어요. :)

섬사이 2007-06-29 08:15   좋아요 0 | URL
소설이 주는 '재미'를 기준으로 본다면 그리 후한 점수를 줄 수는 없을 거에요. 이야기 자체가 거칠고 건조하니까. 그래도 의미있게 읽어볼만 했어요.

토토랑 2007-06-28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음.. 저두 추천하고 갑니다.

섬사이 2007-06-29 08:16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