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아들이 요리학원에서 배운 솜씨를 발휘했다. 토요일 저녁엔 돼지갈비찜을 했고 일요일 점심에는 비빔밥을 했다. 아들 혼자 주방에 세워두기가 그래서 아들과 나란히 서서 재료를 다듬어 씻고, 식탁에 마주 앉아 갈비찜에 들어갈 감자와 당근을 밤톨깎기하고, 아들이 "엄마, 마늘~"하고 찾으면 "예, 쉐프!"하며 냉동실 안에 얼려놓은 다진 마늘을 척 꺼내주는 식의 쉐프놀이도 했다. 

아들이 비뚤비뚤 깨알같은 글씨로 적어온 레서피 공책을 들여다보며 들어간 양념이 맞는지, 다음 순서는 뭔지 체크하고 물어보고, 아들은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학원에선 어떻게 했고, 하면서 열심히 설명을 했다.  

아들은 소금을 뿌려놓아야 할 청포묵에 간장을 붓는 실수를 하고 나는 두 번에 나누어 써야 한다는 갈비양념소스를 한 번에 확 끼얹는 대범한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요리하는 아들 덕분에 늘 나홀로 쓸쓸하게 머무는 공간이었던 주방이 시끌시끌했다. 

겨울 우리집 주방은 춥다. 뒷베란다로 통하는 문에서 솔솔 찬바람이 들어오고 창문 밖으로는 이파리가 다 떨어진 담쟁이 덩굴이 스산하다.  하지만 그 날 만큼은 훈훈했다. 거의 나 혼자서 일하는 공간인 주방. 거실에서 TV를 보며 즐겁게 웃는 가족들에게서 나를 소외시키던 공간이었고, 신혼 초 시댁에 살 때는 설거지를 하다가 갑자기 서러운 생각에 투둑, 눈물을 떨구던 곳이기도 했다. 아파서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아이들 밥을 먹여 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후들거리는 다리를 하고 아침을 차리던 날의 엄마의 사명이 굳은살처럼 박힌 자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날 나는 아들이 해준 갈비찜과 비빔밥보다 훈훈한 주방의 느낌이 더 좋았다. 평소에는 단답형 대답을 하던 아들과의 긴 대화, 웃음소리, 식용유를 두른 후라이팬에서 들려오는 야채 볶아지는 소리, 냄비에서 피어오르는 하얗고 따뜻한 김, 입맛을 돋구는 음식냄새, 고기를 다지고 채소를 써는 소리. 주방이 따뜻한 공간이 되려면 함께 재료를 다듬고 수다를 떨어줄 누군가가 있어야 하나보다. 영화 '카모메 식당'도 주인공 사치에 혼자라면 따뜻한 공간이 될 수 없었을 거다.   

주방엔 2인 이상 입장가능, 나홀로 입장 금지 같은 규칙이라도 세웠으면 좋겠다. 특히 주말에 주방에 여자 혼자 일하라고 내버려두고 거실에서 나머지 가족들끼리 TV보면서 재밌어하며 웃는 것도 3회이상 적발될 경우 1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는 건 어떨까? 내가 이런 궁리를 하는 걸 우리 가족이 알면 도끼눈을 하겠지. 아들이 강요남(강남에서 요리배우는 남자/요즘 아들을 이렇게 불러주곤 한다)이 되어서 가끔 지난 주말같은 호사를 누리는 것에 만족해야지, 그래야지, 그래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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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0-12-20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페이퍼가 여러가지 이유로 좋아집니다.
주부 12년차 되어 가지만 위의 사진의 음식 중 제가 해본 것 보다 안해본 것이 더 많네요. '강요남' 아드님 정말 훌륭해요.
'주방엔 2인 이상 입장 가능'도 정말 좋은 아이디어 같고요. 주방에서 혼자 일하는 모습과 둘이 함께 일하는 모습은 그 느낌이 정말 다르잖아요.
정말 정말 추천하고 싶은 페이퍼입니다.

섬사이 2010-12-21 11:21   좋아요 0 | URL
제가 요리를 싫어하는 게 주방에서의 소외감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요리가 싫은 건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더라구요.^^

무스탕 2010-12-20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푸근한 페이퍼에요. 나도 울 아들래미 부엌에 세우는 방법을 찾아야 할텐데 말이에요 ^^

섬사이 2010-12-21 11:22   좋아요 0 | URL
지성이와 정성이는 무스탕님이 부르기만 하면
서로 경쟁적으로 부엌에 서려고 할 것 같은데요..^^

다락방 2010-12-20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천이에요, 섬사이님. 정말 근사한 주방의 분위기잖아요. 아드님과 요리하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아요. 요리를 함께 하는 아들이라니, 진짜 멋져요!! ㅠㅠ

저는 부엌일을 전혀 하지 않는 타입의 사람인데(끙;;) 어쩌다가 설거지라도 한번 할라치면, 다른 식구들이 엄청 얄밉더라구요. 다들 텔레비젼 보고 있을때 말예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엄마는 매일, 매번 그랬을거에요. 엄마도 그때마다 야속했겠죠? 바보같은 딸이네요, 저.


섬사이 2010-12-21 11:24   좋아요 0 | URL
저도 결혼 전에는 몰랐어요.
주방이 그런 곳인지.
결혼해서 자기 살림 해보고 자식 낳아서 키워봐야
부모 맘 안다는 거,
진리거든요.
아직 다락방님은 모르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요? ^^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미혼을 즐기시라구요~~~^^

BRINY 2010-12-20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네요. 이제 중3인데, 장하네요. 고1 저희반 애들 중 요리학원 다니겠다는 애들이 2명 있는데, 그 애들은 공부 안하고도 쉽게 대학가기 위한 수단, 폼나게 호텔에서 일할 수단으로밖에 요리를 생각하지 않는 거 같아서 아쉽고, 아드님과 비교되네요.

섬사이 2010-12-21 11:27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BRINY님.
선생님이신가봐요.
요리사가 되고 싶다는 아이들이 꽤 많은 것 같더라구요.
저희 아들도 초등 2학년 때부터 요리사가 되겠다고 했는데
이제야 요리학원에 보냈어요.
처음에 뭔가를 배우기 시작할 때는 다 재미있잖아요.
틀림없이 나중에 힘든 고비도 오고 싫증도 나고 그럴 텐데,
그 때는 어떨지 모르겠어요.
부디 끝까지 꾸준하게 잘 해나가야 할텐데 말이에요.

조선인 2010-12-21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중3이면 우리 딸과 나이차이가 좀 나긴 하지만, 그래도 저런 사위 얻었으면 좋겠어요.

섬사이 2010-12-21 11:30   좋아요 0 | URL
뭐, 마로랑 한 여섯살 차이 나나요?
여섯 살 차이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성비불균형이 심각하다던데
우리 아들도 미리 후보에 등록해두면 안될까요? ^^

토토랑 2010-12-21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숙에 화양적에 ~ 멋지군요
맨밑에 돼지고기 말이 찜도 이쁘게 잘되었네요 ^^
한식 조리사 자격증 준비반 하시는 건지? 메뉴들이 딱 고거네요 ^^;;

섬사이 2010-12-21 11:32   좋아요 0 | URL
예, 맞아요, 토토랑님.
한식 조리사 자격증 준비하고 있어요.
요리에 서툴러서 아마 서너번 반복해서 강의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도 채써는 걸 보면 칼에 좀 익숙해진 것 같긴 해요.
한실 자격증 따고 나서 양식 자격증 따고,
그 다음엔 제과제빵에 도전해보겠다고 하는데,
"그래, 네 마음대로 하세요"하고 있어요. ^^

마녀고양이 2010-12-21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코알라도 요리에 흥미가 있어서, 이렇게 배운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너무너무 부럽고, 너무너무 따뜻해서 제 맘이 다 기쁘네요.
멋지시네요, 아드님.

섬사이 2011-01-05 10:37   좋아요 0 | URL
멋지다고 해주니 정말 고마워요.
앞으로도 주욱 잘 해나가야 할 텐데,
엄마로서는 걱정이 된답니다.

꿈꾸는섬 2010-12-21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너무 멋지네요.^^

섬사이 2011-01-05 10:3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세실 2010-12-22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꿀꺽. 이런 멋진 아들이 있는 님이 매우 부럽사옵니다. 강요남 잘 어울리는데요~~~
요리에 관심없는 저를 닮아 우리 애들도 재능이 없어요.

섬사이 2011-01-05 10:38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도 요리에 관심도 없고 심지어 싫어하기까지 해요.
그래서 아들이 더 요리에 집착한 게 아닌가 싶어요.

토토랑 2010-12-23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어머니 자격증 따시던걸 옆에서 본바에 의하면..
인강 유용하구요..(그러니까 시험 문제별 조합에 따라 두 가지 음식을 어떤 순서로 해야하는지가 잘 나오드라구요.. 재료 배분, 크로스로 준비하는 순서 등 )
강의도 강의지만 집에서 실습할때, 시간을 정해놓고 완성하는 습관을 들여야 되더라구요
시험처럼 꼭 2개 씩 제한시간내 만드는 실습!!! 합격의 지름길 ^^



섬사이 2011-01-05 10:39   좋아요 0 | URL
아, 인강도 있군요.
한 번 찾아봐야겠네요.
시험처럼 집에서 실습하는 건 한 번도 안해봤어요.
집에선 조금 대량으로 만들어서
가족들이 푸짐히 먹는 게 목표라..^^;;
시험이 정해지면 집에서도 연습할 수 있게 도와줘야겠네요.

순오기 2010-12-24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멋진 아들!!
아이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공부한다면 신나서 할 거 같아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교육정책은 또 하나의 폭력이지요.
아드님은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일찍 찾았으니 복 받았네요. 부러워요~~

섬사이 2011-01-05 10:44   좋아요 0 | URL
예, 요리할 때랑 공부할 때랑 아들의 얼굴이 달라요.
즐거워하는 아들 때문에 덩달아 저도 즐거워지기도 하구요.
제가 "그까짓, 공부!!"하면서 만용을 부르기도 해요.
엄친딸, 엄친아의 대표들과 함께 사시는 순오기님한테
"부러워요~"하는 말을 듣는 건 좀 민망해요. ^^

희망으로 2011-01-03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렇게 차려준 음식보다 확실한 자기 의지를 가진 아들이 정말 예뻐요. 요즘 울 애들 보면 복장 터져요.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의욕없이 있는 걸 지켜보자니 저까지 모든 일에 의욕 상실이라 책도 다른 일도 자꾸 에러가 나서 수정 작업해달란 전화 받을 때마다 화가 납니다. 저 자신조차 추스리지 못하는 것 같고....그래서 종교도 가졌는데 차라리 푹 빠지면 좋겠는데 그러지 못해서 또 힘드네요. 에효....괜한 푸념만 하다 갑니다.
왜 남의 아이들은 이리도 이쁜지.^^

섬사이 2011-01-05 10:53   좋아요 0 | URL
아직 어떤 계기를 만나지 못한 거겠지요. 사실 우리네 교육현실이라는 게 아이들에게 자기 꿈을 표출할 다양한 계기를 만들어주지 못하잖아요. 아이들 탓만 할 수도 없어요.
이런 저런 일이 자꾸 꼬이고 겹치는 상황인가봐요. 빨리 그 상황이 지나가야 할 텐데요.. 지나가고 나면 괜찮아지지 않을까요? 저는 그럴 때 전화기 다 꺼놓고 집안일도 다 내팽개쳐두고 아이들 없는 오전에 그냥 푹 자버려요. 스트레스를 잠으로 푸는 성향이라..
기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