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가리고 소심한 성격 때문에 이사온 지 만 2년이 되도록 같이 어울릴 사람을 사귀지 못했었는데, 요즘 같은 라인 3층에 사는 비니 또래 남자 아이의 엄마와 좀 자주 어울리게 되었다. 그 분과 어울리게 된 것도 순전히 비니 덕이다. 사교성 좋은 비니가 그 집 남자애와 몇 번 어울려 놀았는데, 활발하게 같이 뛰어놀 줄 아는 비니를 그 집 남자애(이름이 지윤이다)가 자주 찾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니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편인데, 지윤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아이라서, 지윤이가 아침 일찍 일어나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유빈이랑 놀거야."하는 바람에 그 엄마가 곤란을 겪기도 하는 것 같았다.
그 엄마는 운전도 할 줄 아는데다, 그 엄마 전용 자동차가 있어서(싼타페) 도서관이나 장난감 세상(구청에서 장난감을 무료로 대여해 주는 것인데, 실내놀이터도 겸하고 있어서 요즘처럼 비가 오는 날엔 애들 데리고 가서 놀게 해주면 너무 좋다.) 에 갈 때 우리 비니랑 나를 같이 챙겨 가준다. 얼마나 고마운지..
어제, 비가 퍼붓던 날. 어둑어둑한 날씨 때문인지, 비니는 더 늦잠을 잤다. 세상이 커다란 컵이라면 누군가가 그 컵 속에 검은 잉크 몇 방울 떨어뜨려 휘휘 저어놓은 듯이, 희미한 어둠이 밀려 들어와 있었다. 큰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비니는 자고.. 고요와 적막 속에서 빗소리만 들려왔다.
쇠로 된 베란다 난간에 통통 거리며 튕겨지는 빗소리, 후두둑 나뭇잎을 때리며 떨어지는 빗소리, 다다닥 잰 발걸음으로 돌바닥을 종종대는 빗소리.. 여름같지 않은 서늘한 기운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가스 불에 주전자를 올려 커피를 끓였다. 부엌 창 밖으로 보이는 담쟁이 덩쿨로도 비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얀 김이 주전자 주둥이로 못견디겠다는 듯 뛰쳐나와 공중으로 훌훌 날아오른다. 하얀 머그 컵에 엷게 탄 따끈한 커피 한 잔을 들고 거실 창 앞에 앉아 비구경을 했다.
이런 날은 정말로 음악조차도 소음이다. 커피 속 카페인 성분을 온 몸으로 빨아들이려 했는데, 카페인 성분의 각성효과보다 강한, 커피의 따뜻한 품성이 나를 나른하게 만들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을 폈다. 처음 읽는 바나나의 책이다. 비 내리는 적막한 날에 잘 어울리는 책이었다. 참 좋구나, 밖에 비가 내리고, 따끈한 커피 한 잔에, 작고 예쁜 책이라니.. 오랜만에 누려보는 호사였다.
그렇게 행복해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3층이에요. 비니 아직 안일어났죠?"
"네.."
"우리 도서관에 가려고 하는데, 같이 못가겠구나. 그럼 이따 오후에 장난감 세상에 같이 갈래요?"
"좋죠, 고마워요."
행복한 날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것은 이 한 잔의 커피처럼 늘 따끈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어야 좋다. 요즘은 적당한 온도로 물을 끓여주고 그 온도를 유지하는 똑똑한 주전자도 나왔다는데, 그런 주전자의 능력을 사람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후, 비가 잠깐 그쳤다. 화단 산수유 나무잎 끄트머리에 빗방울이 모여 몸집을 늘리다가 순간 반짝하면서 아래로 툭 떨어지며 추락의 유희를 즐기고 있었다. 가방에 아이들에게 나눠 줄 요구르트와 3층 엄마와 나눠마실 따끈한 녹차를 보온병에 담아 챙겼다.
장난감 세상에 가는 길에 3층 엄마가 묻는다.
"언제 같이 애들 데리고 동물원에 가지 않을래요? 능동 어린이 대공원 무료잖아요.ㅎㅎ"
"너무 좋죠."
고요함 속에 들리던 빗방울의 다양한 연주와 이웃의 따뜻한 호의, 요시모토 바나나의 훈훈한 소설,실내놀이터에서 또래 친구와 신나게 뛰어 논 비니의 만족한 땀방울이 어우러진, 적정온도의 행복감을 담은 좋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