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처한 미술 이야기 7 - 르네상스의 완성과 종교개혁 : 미술의 시대가 열리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7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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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양정무 님의 난처한 미술이야기 시리즈 7권을 읽었단다. 5권부터 이어지는 르네상스 시리즈의 마지막이라고 했어. 르네상스 이야기보다 보니 주로 이탈리아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데, 7권에서는 로마와 피렌체와 베네치아가 주로 이야기되었고, 북유럽과 종교개혁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었단다. 이 책을 읽을 즈음에 우리가 로마, 피렌체 여행 계획을 하고 있어서 그거에 맞춰 읽고 가기 전에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려고 했는데, 아빠가 게을러서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야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구나. 여행 중에 책에서 본 작품들을 많이 봤는데, 책의 내용이 잘 기억나질 않아서 너희들에게 설명을 못 해준 것이 안타깝더구나. 이 놈의 저질 기억력.

로마는 고대 로마 이후 오랫동안 세계의 수도라 불리며 이어졌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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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

그렇죠. 로마가 세계사에 끼친 영향이 대단하기 때문에 로마를 지칭하는 말도 다양합니다. 일례로 로마를 카푸트 문디라고도 부릅니다. 라틴어로 세계의 머리, 세계의 수도란 뜻이지요. 지금은 파리나 런던, 워싱턴 같이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는 도시가 많습니다만, 여전히 세계 수도의 원조는 로마일 것입니다. 오늘날 이탈리아 수도인 로마는 고대 로마제국의 수도였고, 로마제국 멸망 후에는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로 그 수도의 역사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로마라는 도시는 역사에 등장한 다음부터 지금까지 세계사의 무대에서 한 번도 내려온 적이 없습니다. 과거에도 위대했고, 지금도 위대하고, 앞으로도 위대할 도시를 손꼽으라면 그중 하나가 바로 로마일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터널 시티(eternal city), 즉 영원한 도시라는 별칭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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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로마가 14세기에는 암흑기를 겪게 돼. 쓰레기와 폐허의 도시로 불렸고, 인구도 2만도 안되었대. 당시 피렌체는 인구가 10만이라고 했으니 로마를 암흑기라고 할 만했지. 로마에 머물고 있던 교황도 이때는 로마에 안 있고, 프랑스 아비뇽에 있다고 하는구나. 15세기 초반이 되어서야 다시 로마로 왔대. 그리고 15세기 후반부터 변화의 물결이 일어났고, 16세기에는 최첨단 도시로 탈바꿈했다고 하는구나.  당시 교황이었던 율리오 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다시 지었다는데, 공사 기간이 본당은 1506년부터 1626년까지 120년이나 걸렸고, 광장을 정비하는데 50년이 더 걸렸다고 하는구나.

당시 교황 선출에 있어 영향력 있는 집안들의 알력 다툼도 있었는데, 그렇다 보니 영향력이 셌던 메디치 가문에서 많은 교황을 배출했다고 하는구나. 16세기에만 메디치 가문에서 3명의 교황을 배출했대. 교황이 바뀔 때마다 건축 붐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그로 인대 로마가 더욱 발전한 거 같구나.

16세기 유럽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다고들 한단다. 교황과 황제. 여기서 황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란다. 당시 양쪽의 권력이 엇비슷하여 교회 성직자의 인사권을 두고 갈등을 빚기도 했대. 황제 가문 중 유명한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15세기부터 300년 넘게 황제를 했다는구나. 합스부르크는 친족 결혼을 많이 해서 유전병이 발생했고, 심한 주걱턱으로 유명한 가문이었단다.  

합스부르크 출신 황제 중에 유명한 사람으로 카를 5세가 있었단다. 넓은 영지를 물려받아 막강한 힘을 갖게 되었어. 역시 땅이 힘이구나. 그렇게 막강한 힘을 갖게 되자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와 갈등을 빚다가 결국 전쟁까지 벌여졌어. 그런데 당시 동쪽에서 오스만이 진격하고 있던 때라서, 교황 바오로 3세가 화해시켜서 일단 갈등은 봉합되었단다. 로마가 발전하고 사람들도 모이다 보니 인문주의도 등장하였어. 특히 15세기 보급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많은 사람들이 책을 볼 수 있게 하는 책의 시대가 되었어. 이는 곧 지식혁명이라 할 수 있었지.


1.

당시 영향력이 많았던 메디치 가문은 신플라톤주의를 받아들였어. 신플라톤주의에서는 아름다움이란 완벽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생명력이 있냐를 기준으로 삼았대. 그래서 미술작품도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이런 작품의 대가가 다름 아닌 미켈란젤로였단다. 미켈란젤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화가란다. 그가 남긴 조각의 정의는 많은 사람들이 인용한단다. 너희들도 이미 들어봤을 지도 모르지만, 다시 한번 읽어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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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82)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돌에서 생명을 끌어냈습니다. 물론 비유적인 표현이지만요. 플로티노스의 사상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맥락에서 미켈란젤로의 회화나 조각상을 바라볼 수 있어요. 미켈란젤로가 남긴 말 중에 나는 대리석 안에 천사를 봤고 그 천사가 자유로워질 때까지 깎아 낸다.”라는 말이 유명한데요. 돌 안에 이미 형상이 깃들어 있고, 그 형상을 덮는 돌을 제거하는 작업이 조각이라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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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피렌체 출신이었는데 활동은 주로 로마에서 했단다. 그는 건축에서 큰 재능이 있었는데,

그의 건축물들로 이루어진 교황의 길이라는 곳이 있다는구나. 라테라오 대성당부터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이어지는 길이야. 중간에 콜로세움, 포로로마노, 카피톨리노 언덕도 있대. 그야말로 로마의 하이라이트로구나. 미켈란젤로는 칼피톨리노 광장과 주변 건물을 설계했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참여한 건축가 중에 한 명이라고 하는구나. 그곳에 있는 작품 중에는 <피에타>라는 유명한 작품이 있는데 이것을 미켈란젤로 24살에 만들었다고 하는구나. .. 여행 다녀온 지 얼마 안되어서 너희들도 익숙하지?^^ 미켈란젤로의 작품들을 보다 보면 이것이 사람이 만들 수 있는 작품인가, 싶어 미켈란젤로는 어쩌면 외계인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로마에서 활동하던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정부의 요청으로 잠시 피렌체에 돌아와 작품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 유명한 다비드 상이란다.  그 높이가 5.17미터나 되는데, 정말 살아 있는 것 같은 작품이란다. 시뇨리아 광장에 서 있던 다비드 상 기억나지?

다시 교황 율리오 2세의 요청으로 로마에 온 미켈란젤로. 율리오 2세 무덤 프로젝트를 시작했단다. 하지만 얼마 못가 중단되었어. 왜냐하면 더 큰 프로젝트가 있었기 때문이야. 성 베드로 대성당을 다시 짓기로 한 거야. 먼저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맡게 되었단다. 그 크기는 13.2x41.2미터라고 하니 그 크기가 엄청난데, 거기에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도대체 어떤 그림을 그려 채운단 말이야. 그런데 천장에 그려야 한다고 하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할 수 있었겠니.. 미켈란젤로는 처음에는 사양했대. 자신은 화가가 아니고 조각가라고 했거든.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그 전에도 그림을 그리긴 했었대. 1504년 피렌체 팔라초 베키오라는 곳에서 미켈로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각각 한쪽 벽면씩 맡아서 벽화를 그리는 일이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각자 다른 프로젝트가 생겨 중단되었대. , 그 프로젝트가 중단되지 않았다면, 엄청난 작품이 나왔을 텐데, 아쉽구나.

다행히 미켈란젤로는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아서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성경 이야기를 구성하여 천장화를 그렸단다. 이 천장화에 유명한 그림이 많은데,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그림이 <아담의 창조>가 아닐까 싶구나. 이것도 기억 나지?^^ 당시 벽화를 그릴 때 프레스코 기법을 사용했는데, 이것 또한 쉽지 않은 기법으로 많은 시간을 요하는 기법이래. 그건 그렇고 천장에 그림을 그렇게 오랫동안 많이 그리면 목이 남아나지 않은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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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완벽주의자는 고독한 법이지요. 미켈란젤로는 이 벽화를 프레스코 작업 기업으로 그려야 해서 더 어려워했어요. 벽에 석회 반죽을 바르고 스케치를 한 후, 밑그림이 마르기 전에 재빨리 채색해야 했거든요. 프레스코(fresco)는 이탈리아어로 신선하다라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석회 반죽이 마르기 전, 벽이 신선할 때 그려야 하는 일이라 그야말로 시간과의 싸움이지요. 미켈란젤로도 제작 초기에는 프레스코화 기법에 익숙하지 않아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쳤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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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에게도 경쟁자가 있었으니, 라파엘로였단다. 바티칸 박물관의 정문 위에는 두 사람의 조각상이 있는데, 하나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이고, 하나는 라파엘로의 조각상이란다. 안타까운 것은 라파엘로는 1483년생인데 37살에서 요절을 했단다. 그에 반해 미켈란젤로는 1475년에 태어나 거의 90세까지 살았대.(1564년 사망) 라파엘로는 우르비노라는 곳의 출신이니 피렌체 출신의 미켈란젤로보다는 출신은 좋지 않았단다. 하지만 실력 하나로 주류가 되었어. 교황집무실의 벽화를 그렸대. 교황의 신임을 얻은 건축가 중에 브라만테가 있었는데, 브라만테가 라파엘로와 동향이라서 라파엘로가 그 일을 맡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실력은 뛰어났단다. 참고로 브라만테가 만든 건축물 중에 유명한 것은 우리도 본 바티칸 시국의 코르틸레 델 벨베데레라는 벨데데레 정원이라고 하는구나.

다시 라파엘로 이야기를 하면 그는 1504년부터 1508년까지 피렌체 유학을 가게 되는데, 이때 실력이 급상승했다고 했어. 이 시기가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활약하던 시기라고 하니 그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고 그것을 자신의 실력으로 승화시킨 것일 거야. 라파엘로가 그린 교황 집무실의 벽화 중에 유명한 작품으로는 <아테네 학당>이 있었지.

당시 고대 건축의 영향도 많이 받았는데, 콜레세움의 아치도 영향을 많이 받아서, 팔라초에 아치 형태가 많이 들어갔다고 하는구나. 팔라토는 유력 가문의 저택으로 궁궐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하는구나.


2.

북유럽과 종교개혁에 관한 이야기는 미안한데 건너뛰어야겠구나.

바로 피렌체로 넘어갈게. 피렌체라고 하면 아빠는 오래 전에 읽은 <열정과 냉정 사이>라는 소설이 떠오르는구나. 많은 인기를 끌어 영화까지 제작되었지만, 아빠의 취향은 아니었어. 아무튼 그 소설의 주요 배경이 피렌체였단다. 특히 두오모 대성당. 정식 명칭은 피렌체 대성당이란다. 피렌체 대성당에 대한 이야기는 난처한 미술 이야기 시리즈 5권 이야기하면서 해 준 것 같구나.

이번 책에서는 16세기의 피렌체 이야기를 해주고 있단다. 피렌체의 강력한 가문인 메디치 가문. 그들이 백성들에게 잘 대해주지는 않았나 보구나. 그들은 백성들에게 쫓겨난 적이 있는데, 그 일을 기념하여 시민들에 의해 추진하여 만든 것이 바로 미켈란젤로의 다비스 상이라고 하는구나.(1504) 메디치 가문이 다시 피렌체를 점령하고 다비드 상에 대항마로 만든 것이 반디넬리의 헤라클라스 상이라고 하는구나. (1534) 헤라클라스는 근육도 더 크고 무섭게 만들었는데, 메디치 가문이 가문의 힘을 작품에 표현하려고 해서 그렇다는구나. 두 조각상은 모두 시뇨리아 광장에 있다고 해서 우리가 시뇨리아 광장에 도착했을 때, 아빠는 두 동상부터 먼저 찾아보았단다.

르네상스 후기에는 하이 르네상스라고 해서, 고대 로마 작품을 비판하는 기류가 있었대. 그러면서 고대 로마 작품을 리모델링하는 만행도 했대. 하이 르네상스에서 바로크 시대로 넘어가기 전인 1520년부터 1600년 정도까지를 매너리즘의 시대라고 한다고 한대. 후기 르네상스라고도 하고피렌체의 대공 중에 코지모 1세라는 유명한 사람이 있었어. 그가 아내를 위해 지은 피티 궁전이 있는데, 그 크기를 보면 아내를 엄청 사랑한 것 같구나. 그리고 코지모 1세가 출퇴근하는 길을 회랑으로 만들었는데, 그 회랑을 바사리 회랑이라고 하는데 아직 그 길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우리가 함께 갔었던 베키오 다리의 그 길이 바로 바사리 회랑의 한 구간이었단다.

….

마지막으로 베네치아의 이야기도 했는데 베네치아의 대표적인 화가인 티치아노와  베네치아의 대표적인 건축가인 팔라디오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면서 마무리를 했단다.

….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이 책을 읽고 직접 그곳에 가서 작품들을 보았더니 감회가 새롭더구나. 아는 만큼 보인다고, (비록 아빠의 저질 기억력으로 많이 안 보였지만) 작품들도 새롭게 보였단다. 여행 다녀온 지도 꽤 지났는데, 아직 그 작품들을 보았을 때의 감동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그 작품들이 괜히 명작이 아닌가 싶다. 기회가 되면 또 가고 싶지만

,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이번 강의는 로마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책의 끝 문장: 바로크 미술과 문명에 대한 이야기는 별도의 장에서 이어지게 될 겁니다.


율리오 2세는 로마를 기독교의 심장이자 동시에 강력한 정치권력의 중심지로 만들고 싶어 했죠. 건축은 교황의 막강한 권위를 보여주기에 더없이 적절한 수단이었고 성베드로 대성당을 새롭게 짓는 일은 로마를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프로젝트에 정점을 찍을 만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신축은 단기간에 끝나는 공사가 아니었습니다. 본당만 해도 1506년에 시작해 1626년까지 120년이 걸렸고 대성당 앞쪽의 광장을 정비하는 데만 또다시 50년이 걸렸습니다. - P32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가 죽은 지 한참 후에도 라파엘로를 견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일흔 살 가까운 나이에 수십 년 전 과거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쓰기도 했어요.
"교황 율리오 2세와 나 미켈란젤로 사이에 있었던 모든 불화는 라파엘로와 브라만테의 질투 때문이었다. 나를 파멸시키기 위해 이들은 교황을 속여 무덤을 세우는 계획을 중지하도록 시켰다. 라파엘로도 충분히 이런 일을 꾸몄을 것이다. 라파엘로가 미술에서 이룬 모든 것은 바로 나한테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 P143

라파엘로의 묘비명에도 "이제 그가 죽었으니 그와 함께 자연 또한 죽을까 두려워 하노라"라고 남겨져 있으니까요. 이건 교환청에서 일하던 당대의 인문주의자 피에트로 벰보가 쓴 글입니다. 자연이 라파엘로와 함께 죽었다는 말은 좀 과장처럼 들리지만 적어도 화려했던 로마 르네상스의 전성기, 하이 르네상스는 라파엘로의 죽음과 함께 서서히 눈을 감습니다. - P195

미켈란젤로는 1546년부터 그가 죽은 해인 1564년까지 18년 동안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에 매달리게 됩니다. 150년 동안 이어진 성베드로 대성당 건축 기간 중 미켈란젤로가 맡은 18년은 어떻게 보면 미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은 최초에 브라만테가 설계했고, 최종적으로는 카를로 마데르노가 완성했지만, 가장 중요한 뼤대를 만든 사람이 미켈란젤로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크게 보면 이 대성당이 미켈란젤로의 성당이라는 데 동의한다는 말입니다. - P365

이 건물은 처음부터 미술관은 아니었습니다. 우피치라는 단어가 이탈리아 말로 ‘오피스’란 뜻인데요. 코지모 1세는 사실 관공서를 지으려 했기에 이런 이름을 붙인 겁니다. 팔라초 베키오 옆에 자신이 업무를 보는 공간을 별도로 만들려고 한 것이죠. 새로운 오피스는 3층짜리 건물인데 2층에는 사무공간이, 3층에는 긴 화랑이 있습니다. 이 회랑에 메디치 가문이 소장한 미술품을 전시했어요. - P417

확실히 그런 점도 있다고 봐요. 그런데 이 매너리즘이라는 용어는 대단히 논쟁적이기도 해요. 일부 학자들은 이 시대를 특징지을 때 적극적으로 매너리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반대하는 이들도 있거든요. 소위 매너리즘 양식의 미술이 베네치아 등 다른 곳에서는 피렌체만큼 적극적으로 나타나지 않았기에 매너리즘을 한 시대를 규정짓는 양식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보는 학자고 많아요. - P422

그런데 이 시기 피렌체의 매너리즘 미술을 논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피렌체가 공화제에서 군주제로 급속히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런 작품들이 나왔다는 점입니다. 물론 메디치 가문은 15세기에도 피렌체에서 독주했다고 하지만 정치적으로 여전히 공화제 체제하에 있었습니다. 피렌체 시민과 메디치 가문 사이에서 일종의 힘의 균형이 있었던 거죠. 그러나 16세기에는 피렌체의 지배권이 메디치 가문에게 완전히 넘어가 버립니다. 피렌체는 결국 공작의 지배를 받는 공국이 되면서 1인 절대 지배 체제로 전환됐고 미술도 변화했죠. - P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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