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생 - 오드리 헵번
알렉산더 워커 지음, 김봉준 옮김 / 달과소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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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작년에 아빠가 신간 코너에 책 표지의 사진을 하나 봤는데, 너무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사진이었단다. 오드리 헵번이라는 영화배우가 신발을 벗고 힘껏 점프하는 사진인데, 그 사진이 왜 그렇게 기분을 좋게 만드는지 모르겠더구나. 아빠는 그래서 그 책을 덥석 샀고, 그 책의 표지를 한동안 SNS의 프로필 사진으로 했었단다. 바로 아래의 사진이야.




오드리 헵번이라는 영화배우에 대해서도 찾아보았어. 엄마가 고전 영화를 좋아해서, 아빠도 덩달아 고전 영화를 본 적이 있었어. 그 중에 오드리 헵번의 <로마의 휴일>이라는 영화를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난단다. 오드리 헵번과 아빠는 세대가 다르기 때문에 오드리 헵번이 출현한 영화를 많이 보지는 않았어. 아무튼, 인터넷을 통해 오드리 헵번에 대해 검색을 해봤는데, 예쁜 얼굴뿐만 아니라 심성 또한 예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노년에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돕는 등 좋은 일을 많이 했어.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말이야. 그런 오드리 헵번에 대한 책이 있으면 읽어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래서 선택한 책이 이 책이었단다. 아빠가 위 사진을 너희들에게 보여주면서 오드리 헵번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해주었잖아. 그런데 어느날 너희들과 함께 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학습만화로 그린 오드리 헵번 책을 들고 왔잖아. 그러면서 읽고 싶다고그래서 아빠가 그 책을 사주었고, 우리 공주님은 집에 오자마자 다 읽었잖아. 아빠는 이 책을 나놓고 읽지 않은 상태였거든. 우리 공주님이 오드리 헵번의 어린 시절이 어땠다는 둥, 어린 시절 이름은 뭐였다는 둥 이야기를 해주는데, 아빠도 이 책을 바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래서 이번에 읽게 된 것이란다. 그리고 오드리 헵번을 그린 학습 만화도 읽었는데, 오드리 헵번의 삶을 축약해서 잘 정리해 놓은 듯 했단다.


1.

그럼, 아빠가 오드리 헵번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이야기해줄게. 1929년 벨기에서 태어났는데, 아빠는 아일랜드 사람이고, 엄마는 네덜란드 사람이란다. 어린 시절 이름은 에다라는 네덜란드 말이었는데, 이것을 영어로 읽으면 오드리가 된다고 하는구나. 어린 시절 오드리의 아빠는 파시즘에 빠져 있었대. 당시 파시즘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나타난 극단적인 전체주의 이념으로 아주 위험한 사상이었단다. 나중에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오드리의 아빠는 파시스트이기 때문에 감옥에 가기도 했어.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오드리는 아빠와 헤어져야 했단다. 왜냐하면 오드리의 부모가 이혼을 해서 오드리는 엄마와 함께 네덜란드로 갔기 때문이야. 그리고 십대 소녀일 때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는데, 전쟁 전에 네덜란드와 독일이 친분관계가 있어 독일이 일으킨 전쟁에서 비교적 안정적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어. 독일이 네덜란드마저 침공했단다. 이로 인해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온몸으로 배웠어.

10살부터 발레를 배웠고 재능도 있어서 공연도 했던 오드리 헵번. 전쟁이 끝나고 어수선한 시대 국가에서 발레 지원을 하지 않게 되자, 오드리의 엄마는 오드리와 함께 영국으로 왔어. 영국에 와서도 발레를 계속 했지만, 오드리에게는 발레를 계속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단점이 있었어. 바로 큰 키. 공연을 몇 번 했지만, 발레는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자신이 또 하고 싶었던 뮤지컬 오디션에 나섰고 합격을 했단다. 큰 역할은 아니고 단역으로 뮤지컬 영화에 출현을 했단다. 그 이후 점점 비중이 있는 역할을 맡게 되다가 영화 촬영차 프랑스에 갔다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단다. 유명한 소설 <지지>의 지은이 콜레트를 만나게 되는데, 콜레트는 자신의 소설 <지지>의 연극의 주인공으로 오드리를 강력 추천하였단다. 그렇게 이번에는 뉴욕 브로드웨이에 진출하게 돼. 뉴욕에서 활동을 하다 보니 영화관련자들의 눈에 띠였어. 그 중에 몇 년 째 여주인공을 못 찾던 영화 <로마의 휴일> 제작사 파라마운트가 있었단다. 관계자들은 오드리를 면접하고 오드리 헵번을 <로마의 휴일>의 여주인공으로 낙점했단다.

<로마의 휴일> 영화 이후 오드리 헵번은 대스타가 되었단다. 이 영화가 1950년대 초반의 영화인데, 이때는 칼라 영화도 제법 있었는데 이 영화는 흑백으로 만들어졌단다. 그게 이유가 있었대. 이 영화는 해외 올 로케로 만들어진 영화라서 칼라 필름을 보관할 수 없어서 흑백으로 찍었다고 하는구나. <로마의 휴일>의 상대 남자 배우는 그레고리 펙이라는 사람이었어. 펙의 소개를 배우 멜 퍼러를 알게 되는데, 후에 <오디네>라는 연극을 통해 같이 공연하다가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단다. 멜 퍼러는 이미 3번이나 이혼을 했고, 12살이나 연상이라서 오드리의 엄마는 결혼을 반대했다고 하는구나. 오드리 헵번은 <로마의 휴일>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게 되고, 연극 <오디네>로 토니상을 받았어. 이제 대스타가 된 오드리 헵번은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고, 급기야 병이 나서 스위스로 휴양을 가게 되었단다.

 

2.

스위스에서 휴양을 하면서 건강을 되찾은 오드리 헵번. 멜과 결혼을 하게 된단다. 그때가 1954년이었대. 오드리와 멜의 결혼 소식에 기자들이 분개하고 멜을 비난했다고 하는데, 여배우의 결혼 소식은 예나 지금이나 슬픈 소식이었나 보구나.^^ 결혼 이후 오드리는 영화는 찍지 않고, 멜과 시골에서 행복한 생활에 집중했단다. 오드리는 아이를 무척 낳고 싶었어.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단다. 유산을 하기도 했어. 영화를 안 하다 보니 경제적 어려움도 같이 찾아왔어. 그래서 다시 영화를 출현하게 되었고, <전쟁과 평화>의 나타샤 역할을 하게 되었단다. 남편 멜 퍼러도 같이 출현했어. 영화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오드리는 그 역할에 만족했단다. 이 영화는 헤밍웨이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인데, 아빠도 보고 싶더구나. 알라딘 인터넷서점에서 검색을 해봤더니, 아주 싼 가격에 <전쟁과 평화>를 비롯한 아카데미 수상작 10편 모음집을 팔더구나. 그래서 바로 주문을 했단다. 조만간 한번 봐야겠구나.

오드리는 <전쟁과 평화> 이후에도 영화를 계속 찍었어. 뮤지컬 영화인 <퍼니 페이스>, 큰 돈을 벌게 해 준 <더 넌스 스토리> 등등영화를 출현하다 보니 집에서 지내지 못하고 호텔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어. 그리고 건강도 또 안 좋아지고. 영화 촬영 중 낙마 사고로 또다시 아이를 유산하기도 했단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결국 오드리가 원했던 아이를 갖게 되었어. 아들의 이름은 숀.

오드리의 또 다른 대표작이 되는 <마이 페어 레이디>에 출현하게 되는데, 이 영화는 뮤지컬 영화야. 너희들도 아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쥴리 앤드류스가 적격이라는 풍문이 있었는데, 오드리 헵번이 그 역할을 맡게 되었지. 오드리 헵번은 그런 소문을 들어서 누구보다고 노래 연습을 많이 했단다. 오드리 헵번은 그런 완벽주의자였거든. 하지만, 제작사에는 처음부터 오드리의 노래 파트는 성악가가 대신 부르기로 결정하고 있었대. 크게 실망한 오드리.. 그래도 영화는 성공적이었다고 하는구나. 멜 퍼러와 사랑이 식으면서 이혼을 하고 사교 모임에서 만난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 안드리아 도티와 두번째 결혼을 하게 돼. 오드리는 영화배우를 은퇴하고, 평범한 아내로 살아가려고 하지만, 안드리아 도티는 그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어. 오드리는 기다리던 두번째 아들을 낳았단다. 이름은 루카. 안드리아 도티는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고, 평범한 주부가 된 오드리를 싫어했어. 결국 그들은 이혼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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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오드리 헵번은 로버트 월더스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얼마 전에 아내와 사별한 사람이었어. 두 사람 모두 아픔을 겪었기 때문인지 말이 잘 통했고 서로 의지를 하게 되었단다. 오드리는 두 번의 결혼 실패 때문인지 로버트와 결혼은 하지 않고 서로 의지하며 사랑하며 살기로 했어. 그들의 우정과 사랑은 이후 평생을 이어갔단다.

 

3.

오드리는 로버트와 함께 유니세프 기금 모금 기념식에 참석했다가 유니세프 활동을 하기 시작했어. 오드리는 이후 친선 대사가 되어서 열심히 일했단다. 에티오피아를 방문해서 오드리는 지구촌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 유니세프 친선 대사로서 지극정성을 다해 일했단다.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보고 진심 어린 눈물을 흘렸고, 이제 유니세프 활동이 오드리의 그 어떤 일보다 우선시 되는 일이 되었단다. 오드리 헵번의 이런 활동은 더 큰 효과를 내어 기부금도 많이 걷히게 되었단다. 한 동안 영화를 쉬었던 오드리에게 영화 출현 그것도 주연이 아니고 까메오 출현을 제안 받았단다. 유명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혼은 그대 곁에>라는 영화야. 오드리 헵번이 맡은 역할을 천사 역할이란다. 그렇게 영화 속에서 천사 역할을 맡았지만, 사실 오드리는 실제에서 더 천사 같은 일들을 했단다. 자신의 건강도 뒷전일 정도였어. 그러다가 결국 쓰러졌지. 의사가 정밀진단을 받아보라고 했지만, 여전히 유니세프의 일이 우선이었어. 뒤늦게 받은 진단은 직장암 말기.. 예순셋의 아직 세상을 등지기에는 적은 나이자신이 죽는 것보다 더 할 일이 많은데 하지 못하는 것에 아쉬워하는 오드리. 하지만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침대 밖을 나갈 수 없었단다. 오드리는 로버트와 함께 자신이 좋아했던 곳 스위스로 가서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고 말았단다. 이승에서 삶을 마감한 오드리 헵번은 천사가 되어 불쌍한 영혼들을 보살펴주고 있지 않을까 싶구나.

..

아들 숀에게 들려주었다고 하는 시 한편이 아빠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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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적인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러운 눈을 갖고 싶으면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보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네 음식을 배고픈 사람들과 나누라.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아이의 손으로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네가 결코 혼자 걷지 않을 것임을 명심하면서 걸어라.

기억하라.

만약 네가 도와줄 수 있는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달린 손을 이용해라.

네가 더 나이를 먹는다면

너의 손이 두 개란 걸 알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위한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남을 위한 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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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한 편의 새로운 영화를 시작한다는 건 항상 두려운 일이었어요. 난 근본적으로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촬영하는 것이 언제나 힘든 일이었지요. 영화 촬영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는 다른 작업인 것 같아요. 자전거는 타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지만, 영화는 한번 촬영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지요. 아무리 아름다운 시나리오와 훌륭한 배우와 감독이 있더라도 촬영할 때면 언제나 혼자가 된답니다."

그녀는 린 바버에게 말했다.
"명성은 내가 영화에 출현하던 시절 이후 나에게 남겨진 물건, 예를 들면 이런 가방 같은 겁니다."
기자는 이렇게 썼다.
"내가 ‘그녀에게 시간을 희생한다’는 표현을 썼어요. 그러자 그녀는 곧바로 반박했어요."
"그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희생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위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내가 받은 선물입니다."

그녀는 전쟁 경험에 대해 자주 질문을 받았었다.
"전쟁은 오랫동안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어요. 나는 전쟁 중에 많은 것을 보았어요. 그러나 그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본적으로 염세주의자가 아니라 낙천주의자가 되었어요. 죽어서 과거를 비참하게 되돌아보면 기분만 상할 겁니다. 단지 나쁜 면만을 보고, 놓친 기회들을 아쉬워하고, 이랬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뭐 하나요?"
이제 오드리는 두 번 다시 무비카메라 앞에 서지 않았다. 그녀는 할리우드의 방음 스튜디오에 만들어진 ‘천국’을 떠났다. 그리고 유니세프를 위한 여행길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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