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
존 윌리엄스 지음, 조영학 옮김 / 구픽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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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이 책은 로마사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제목만 봐도 어떤 소설인지 알 수 있을 거야. 아우구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로써 로마의 첫 번째 황제가 된 사람. 아우구스투스. 그래서 로마의 평화시대를 열었던 사람. 아우구스투스. 아빠도 십여 년 전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어. 최근에 시오노 나나미가 이번에는 <그리스인 이야기>가 써서 우리나라에도 출간된 것을 보았는데, 얼마 전에 위안부 망언을 해서 정이 뚝 떨어진 시오노 나나미의 책은 더 이상 읽지 않기로 했단다. 사실 <로마인 이야기>가 한창 인기가 있을 때도 <로마인 이야기>를 쓴 내막에 일본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설이 있었는데, 그냥 설이려니 하고 읽었었는데 말이야. 아무튼 이야기가 잠시 다른 곳으로 샜구나.

율리우스 카이사르. 갈리아 지역을 비롯하여 로마 주변을 정복하여 영토를 엄청나게 확장시켜 그야말로 로마대국 시대를 열었던 장본인. 그렇게 로마의 최고의 권력자가 되어 공화정을 없애고 종신권력자, 즉 황제가 되려고 했다가 위기를 느낀 원로원들의 음모에 의해 암살당한 인물,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의 죽음은 그 암살에 참여했던 이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예상을 못했을 거야. 율리우스 카이사르, 본인 자신도 말이야. 이 책의 이야기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죽는 그 시점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단다.

이 소설의 지은이는 존 윌리엄스라는 사람이고, 이 책이 처음 출간된 것은 1972년이라고 하는구나. 그런데 뒤늦게 우리나라에서는 2016년이 되어서야 출간되었어. 그의 또다른 대표작 <스토너>라는 작품이 원래 미국에서 1965년에 발표했는데, 2013년이 되어서야 유럽에 소개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2014년에 <스토너>가 출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대. 그러면서 그의 다른 작품인 <아우구스투스>가 이어서 출간된 것이라고 하는구나. 아빠도 이런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어. 그의 대표작 <스토너>도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1.

이 책은 시작 전에 지은이가 소설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단다. 역사를 바탕으로 한 소설, 팩션이라고 보면 되겠구나. 이 소설은 조금 독특해. 이 소설은 편지, 일기, 보고서 등 문서들로만 이루어져 있어. 마치 아우구스투스 시대를 살던 사람들이 남겨 놓은 기록처럼 말이야. 혹시 읽는 이들이 이 책에 나오는 기록들이 실재하는 것이라 오해할까 봐 시작하기 전에 소설이라고 이야기했나 싶더구나. 아우구스투스는 나중에 원로원 내려준존엄한 자라는 칭호이고, 원래 이름은 옥타비우스란다.

옥타비우스는 아폴로니아 유학시절에 종조부의 사망을 소식을 듣게 된단다. 그의 종조부가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카딸 아티아의 아들이 바로 옥타비우스인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들이 없어서 유서에 자신의 상속자는 옥타비우스라고 했고, 양자로 받아들이기도 했어. 아빠의 기억에 따르면, 옥타비우스가 그리스로 유학간 것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황제교육을 시키려고 보냈던 것으로 알고 있어. 옥타비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망소식을 듣고 같이 유학을 온 친구들과 함께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을 했어. 그 친구들은 마에케나스, 아그리파, 살비디에누스가 그들이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망 소식만 왔지, 누구의 짓인지도 몰랐어. 분명 복수는 해야 하지만, 일단 자신의 목숨은 지켜야 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어. 옥타비우스의 엄마 아티아와 계부도 유서를 포기하라고 했어. 왜냐하면 로마는 앞으로 혼란의 시기가 올 것이고, 그 혼란 속에서 암살당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상속자도 신변이 안전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야.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죽고 난 로마는 피아 구분이 없는 혼란의 시절이었어. 누군가는 당시 로마를 가치보다 특권을 존중하고 원칙이 이기심에 굴복하는 곳이라고 했단다. 옥타비우스는 친구들과 함께 배를 타고 몰래 로마로 향했단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상속자라는 것을 알리는 뜻에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우스라고 했어. 옥타비우스가 로마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퇴역 군인들, 즉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전장을 누볐던 이들이 옥타비우스를 찾아왔단다.

 

2.

그럼, 누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죽였는가? 아빠가 앞서 이야기할 때는 원로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빼앗겨서 위기를 느끼고 죽였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 원로원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친분이 있는 이들도 많았어. 그러다 보니 반역을 한 자들은 그 수가 상당히 많았던 거야. 철학자이자 변호사로 유명한 키케로도 반역자들에 포함되어 있었어. 로마에 원로원 세력 말고 또다른 세력이 있으니 안토니우스의 세력이란다. 안토니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군대 지휘관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죽고 난 다음 군대 통솔에 있어서는 그가 일인자로 볼 수도 있었어. 이런 시기에 열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다른 나라 땅에서 공부를 하던 옥타비우스가 무얼 할 수 있겠니. 세력 기반이 약한 옥타비우스는 카이사르를 죽인 원로원의 인사들에게도 일단 호의적인 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었어. 옥타비우스는 그것만이 현 상황에서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어.

한편,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친구라는 것을 빙자하면서 반역자들과 놀아나고, 옥타비우스를 인정하지 않는 자세를 취했어. 안토니우스는 신중한 자세를 취해야 했으나 그러지 않았어. 그리고 결정적인 실수 두 가지를 저질렀단다. 옥타비우스를 지지하는 군단들의 장교와 병사를 무참히 죽인 일이 있었고, 법을 어기고 로마에 40년 만에 군대를 끌고 들어와 횡포를 부렸던 거야. 이것으로 인심을 잃고 그들의 부하들이 옥타비우스로 향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어. 이런 안토니우스의 독단적인 행동과 달리 옥타비우스는 퇴역 군인들을 비롯한 옛 카이사르의 군대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어. 그리고 반대세력인 원로원들과 일단 손을 잡았어. 원로원에서도 옥타비우스가 그렇게 협력의 손길을 내밀자 안심을 했고, 로마도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어. 하지만 안토니우스의 돌출행동은 점점 자신이 권력까지 잡으려는 움직임이 보였어. 옥타비우스는 원로원 측의 데키무스 등와 연합을 해서 안토니우스와 일전을 벌여 승리를 했단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원로원은 옥타비우스의 군을 데키무스에게 인도하라고 명령을 내리는데, 그 속셈이 뻔하기 때문에 옥타비우스는 거절을 했단다. 로마 밖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거절의 뜻을 전하자, 겁먹은 원로원은 옥타비우스의 뜻대로 하기로 했어. 그의 뜻은 집정관에 오르는 것이었단다. 그렇게 스무 살에 옥타비우스는 집정관이 되었고,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복수를 시작했단다.

 

3.

옥타비우스가 어리긴 하지만 정치적인 감각을 뛰어났던 것 같아. 아직 세력이 약하다고 판단하고 이번에는 다시 안토니우스와 손을 잡기로 한단다. 레피투스를 포함하여 안토니우스, 옥타비우스의 삼두정치를 제안했어. 그렇게 안토니우스와 손을 잡고 이번에는 원로원 처단에 박차를 가했단다. 원로원 중 퇴출리스트를 작성해서 처형시키고, 추방했단다. 키케로도 원로원에서 떠나야 했고, 고향에서 알게 모르게 죽음을 당했단다. 그것은 키케로만이 아니었어. 카이사르의 암살에 참여했던 여러 원로원들이 목숨을 잃었단다.

안토니우스의 아내가 죽자 동생 옥타비아를 정략결혼 시켰어.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라는 이집트 여왕과 사랑에 빠졌어. 그러면서 동로마 지역과 이집트 지역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와 같이 통치하게 되었단다. 사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가 죽을 당시 로마에 머무르고 있었어. 왜냐하면 카이사르와 연인 관계였거든. 카이사르가 죽고 나서 이집트로 돌아가서 아이를 낳았는데,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있다고 하는구나. 그런 클레오파트라가 이번에는 안토니우스와 사랑에 빠졌고, 그로 인해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를 내쫓았단다. 이런 일로 옥타비우스와 안토니우스는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 악티움 해전이라고 하는 유명한 해전을 벌이게 되었단다. 이 전투에 옥타비우스는 직접 참가하여 승리를 거두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같이 자살을 했단다. 그렇게 로마를 평정하고 그는 로마 최고 일인자로 우뚝 섰단다. 그때 그의 나이 33살이었어. 18살 때 카이사르가 죽고 그의 유언을 이제서야 받들게 되는 것이었어. 그의 인내와 꾸준함이 안전하게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 같구나. 이후 로마는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단다.

 

4.

옥타비우스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어. 율리아. 이 소설에서는 율리아에 대한 비중도 크게 다루고 있단다. 실제로도 율리아가 그런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설 속의 율리아는 황제의 딸로서 불운한 삶을 살았더구나. 율리아는 태어나면서부터 불운했단다. 친엄마는 이혼당하고, 계모 리비아가 친엄마인줄 알았거든. 아버지인 옥타비우스는 전쟁터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 자주 볼 수 없었어. 하지만, 옥타비우스는 딸 율리아에 대한 사랑은 컸다고 하더구나. 율리아는 독립심이 강한 여자였지만, 당시 시대는 황제의 딸이라고 자유가 보장된 것은 아니었단다. 평생 세 번 결혼했지만, 세 번 모두 자신의 사랑에 의한 결혼이 아닌 아버지의 명령에 의한 정략결혼이었단다.

첫 번째 결혼은 열네 살 때 했는데, 열일곱 살 때 남편이 그만 죽고 말았어. 그렇게 되자, 옥타비우스의 아내이자 율리아의 계모인 리비아는 자신의 아들 티베리우스와 율리아를 결혼시키려고 했지만, 옥타비우스는 리비아가 순수혈통이 아니기 때문에 티베리우스를 좋아하지 않았단다. 리비아가 옥타비우스와 결혼했을 때는 이미 전 남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상태였고, 낳은 아들이 티베리우스였던 거야. 그러니까 티베리우스는 옥타비우스의 친아들이 아니야. 당시 결혼관은 지금과 많이 다르니 그것은 감안하고 이 책을 읽어야 한단다. 옥타비우스는 열일곱 살 과부가 된 딸 율리아를 자신의 친구인 아그리파와 결혼시켰단다. 나이 차이가 엄청난 남편을 둔 율리아. 사랑은 없었지만, 그래도 아내로서 역할을 잘 수행했다고 하는구나. 아그리파가 죽을 때까지 9 년을 같이 살았고, 5명의 아이를 낳았대.

옥타비우스는 아내 리비아가 있었지만, 그보다 친구 마에케나스의 아내 테렌티아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대. 율리아의 남편 아그리파가 외국에서 목숨을 잃은 이후, 옥타비우스는 다시 율리아의 남편감을 골라야 했어. 마땅한 사람이 없었고, 리비아는 다시 자신의 아들 티베리우스와 엮으려고 노력했어. 그래야 아들이 없는 옥타비우스의 후계자로 자신의 아들이 될 확률이 높았으니까. 결국 옥타비우스는 율리아와 티베리우스 결혼을 선포하였단다. 그런데 율리아 뿐만 아니라 티베리우스도 상대를 싫어했어. 이 결혼은 결혼일 뿐 각자 생활하는 듯 했지. 티베리우스는 외국 생활을 주로 했고, 율리아는 더 이상 억제된 생활을 하지 않았어. 율리아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참을 만큼 참았다고 볼 수 있어. 율리아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했어. 문란한 생활도 하고 쾌락 생활도 했어. 그러다가 안토니우스의 아들 율리우스 안토니우스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단다. 이런 사실들이 티베리우스의 귀에 들어갔어.

 

5.

옥타비우스가 로마의 평화를 찾아주었지만, 그를 싫어하는 이들도 여전히 많았어. 권력에 눈 먼 이들. 반역을 도모하는 이들이 있었지. 그런데 그들 중에 율리우스 안토니우스도 가담하고 있었어. 그들의 목표는 옥타비우스와 그의 후계자인 티베리우스를 없애는 것이었어.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율리우스 안토니우스와 율리아가 사귄다고 했잖아. 이 음모가 드러나면 율리아 또한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거냐. 이 음모는 오래 가지 못하고 옥타비우스가 알게 되었어. 그리고 율리아도 엮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래서 율리아를 먼저 그 음모에서 빼내겠다고 생각을 했어. 그것이 바로 율리아를 간통죄로 재판을 받게 하는 것이었지. 그래서 율리아는 원로원 재판을 받고 간통죄로 판타페리아 섬에 유배를 가게 되었단다. 율리아를 유배 보내고 나서, 그 이후 음모의 정체는 본격적으로 파헤쳐서 가담했던 이들을 모두 처단했어. 율리우스 안토니우스는 음모가 발각된 후에 자살했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음모도 사라지고, 황제는 자신의 후계자로 티베리우스를 정식 지명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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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편지, 일기, 각종 보고서로 이루어졌다고 했잖아. 그런 문건 중에 정작 이 소설의 주인공인 옥타비우스의 글은 없었어. 그러다가 뒤쪽에 장문의 옥타비우스가 쓴 편지가 실려 있었단다. 자신이 삶을 돌아보면서 쓴 회고록이라고 할 수 있어.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죽고 난 다음 자신의 선택부터, 로마를 평화의 시대로 이끌었고, 로마 시민들에게 자유를 주었던 업적을 뒤로 하고 자신의 삶을 마감하면서 쓴 회고록 같은 편지. 그 편지의 주제는 그가 한 한마디 말로 대신할 수 있는 것 같구나. “로마에 자유를 주었지만 정작 나는 즐길 수도 없구나.” 그의 삶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았어. 그래, 로마를 바꾸고 로마를 통치하는 것은 그의 운명이었던 것 같아. 나라의 지도자는 어쩌면 자신의 의도와 달리 운명처럼 다가오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더구나. 오월에 우리나라도 새로운 지도자를 뽑는 선거가 있단다. 시대가 요구하는 운명을 지닌 사람이 대통령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리고 새로 뽑힌 대통령으로 하여금 우리나라 정상궤도로 다시 돌아와서 상식적인 세상, 정의로운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아빠의 기억으로는 옥타비우스가 죽고 난 다음, 티베리우스부터 이어지는 로마는 폭정의 연속이었단다. 로마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지. 원래 사람들이 평화와 자유를 얻고 나면 그것에 대한 고마움 또한 잊는 것 같더구나. 산소의 고마움을 잊고 사는 것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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