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베개 - 장준하의 항일대장정
장준하 지음 / 돌베개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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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얼마 전에 아빠가 김삼웅의 <장준하 평전>을 읽었잖아. 그리고 장준하가 쓴 <돌베개>라는 책을 연이어서 읽고 싶었어. <돌베개>는 장준하의 항일투쟁기라고도 해. 김삼웅의 <장준하 평전>에도 <돌베개>의 글을 많이 인용했고 말이야.

이 책에는 장준하가 일본군에 들어간 1944년부터 해방 후 다시 귀국하여 김구 선생의 일을 보좌하던 1945년 말까지 약 2년에 걸친 이야기가 담겨있단다. 돌베개. 이 책의 제목을 처음 봤을 때, 왜 제목을 돌베개라고 지었을까? 하는 굼긍증도 생겼지만, 그보다 돌베개 출판사가 더 먼저 떠올랐단다. 돌베개에서 출판한 책들은 진보성향의 책들과 사회문제를 다른 책 등 아빠가 좋아하는 책들을 많이 출간하는 출판사였거든. 그 돌베개 출판사가 바로 장준하의 책 <돌베개>에서 이름을 따왔나? 이렇게 생각했어. 그래서 확인해보니, 그것이 맞더구나. 출판사 돌베개는 장준하의 책 <돌베개>에서 출판사명을 따온 것이래. 그러면 장준하는 항일투쟁수기를 엮은 책의 이름을 왜 <돌베개>로 지었을까? 그것은 아내와 암호였다고 하는구나. 김삼웅의 <장준하 평전>에도 나와 있지만, 일본 유학 중이던 장준하는 예전의 제자였던 김희숙과 애틋한 정을 나누다가 결혼을 했고, 결혼한지 일주일 만에 학도병에 자원하여 입대하면서, 나눈 암호. 일군을 탈출할 경우 편지에 창세기에 나오는 구절을 편지로 적어 보내겠다는 암호. 그 구절 속에 한 단어 돌베개. 그리고 그가 황량한 중국 땅에서 들판에서, 산에서 잠을 청했을 때, 그가 벤 돌을 돌베개라고 생각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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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8 10~15절에 나오는 야곱의돌베개이야기는 내가 결혼 일주일 만에 남기고 떠난 내 아내에게 일군(日軍)탈출의 경우 그 암호로 약속하였던 말이다. 마침내 나는 그 암호를 사용하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대륙에 발을 옮기며 내가 벨돌베개를 찾는다고 하였다. “어느 지점에 내가 베어야 할 그돌베개가 나를 기다리겠는가?”라고 썼다. 그 후 나는돌베개를 베고 중원 6천 리를 걸으며 잠을 잤고 지새웠고 꿈을 꾸기도 하였다. 나의 중원 땅 2년은 바로 나의돌베개였다. 아니, 그것이 나의 축복받는돌베개여야 한다고 생각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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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준하가 일군에 들어갔다가 일군을 탈출하고, 중국군 부대에서 생활하다가 다시 6000리 길을 행군하여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에 다다른다는 내용은 이미 김삼웅의 <장준하 평전>을 통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단다. 이 책은 그런 그의 행보를 장준하의 글을 통해 직접 볼 수 있어 더욱 실감이 나고, 그때그때 순간마다 그의 생각이 어떠하였는지 알 수 있어 좋았단다. 어쩌면 장준하를 비롯한 그의 일행이 일군을 탈출한다는 것은 무모한 짓일 수도 있었어. 철조망 밖의 상황이 어떤 상황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탈출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고 벌인 일이야.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목숨을 내놓고 행동하게 했는가? 그들이 일군을 탈출하고 밤을 이용하여 도망 중에 불로하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게 되었단다. 그리고 그들을 말할 수 없는 감격을 맞게 되고, 그 감격을 조국에 바치고자 했어. 그래서 그들은 조국을 향해 절을 했단다. 아빠는 그 장면을 상상해봤어. 일군에 쫓겨 밤새 도망가다가 불로하의 큰 강 물결에 떠오르는 태양이 비치고... 그 광경을 보는 젊은이 4명이 조국을 향해 큰절을 하는 그 장면... 그들의 뜨거운 가슴이 느껴지는 듯했단다. 그 뜨거운 가슴이 목숨을 내놓는 탈출을 감행한 것이 아닌가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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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불로하, 말 없는 강, 안으로 안으로 모든 것을 가라앉혀 비록 그 바닥에서는 물결이 거세어도 수면은 언제나 잔잔히 흐르기만 하는 강, …… 너 마르지 않고 너 나타나지 않는 그 강심을 나는 여기서 배우리라.”

어느새 이국의 태양은 머리 위에 올랐고 강물 위엔 쏟아진 햇볕이 물결을 덮으며 웅장한 음악이 강 밑으로 흐르는 것이었다. 우리의 소망과 새로운 각오를 위해 강은 흘렀다.

우리는 목욕을 마치고 군복을 입었다. 서로서로를 돌아보며 새 결의를 다짐했다. 모두 새사람이 되었다. 진정 우리는 새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조국 광복, 이 깊고 긴 강처럼, 크고 깊은 긴 일을 마침내 나는 찾아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떳떳한 조국의 아들이 다시 되었다. 기쁨과 감격은 이 아침을 신비롭게 하였다.

우리는 동북쪽의 조국을 향하여 경건하게 머리를 숙였다. 이글대는 태양을 마주하고 가로로 한 줄을 만들어 서서 이 가슴의 감격을 조국에 고하고자 했다. 김준엽 동지, 윤경빈 동지, 김영록 동지, 홍석훈 동지 그리고 나, 이렇게 차례로 서서 조국을 향한 배례를 한 것이다.(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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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준하 일행은 중국 중앙군 유격대에서 생활을 하다가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 나서기로 했단다. 그러다가 그들은 린촨(임천)에 있는 한국광복군 훈련반에서 합류하게 되는데, 그곳에는 이미 한국 젊은이들이 팔십여 명이 머무르고 있었어. 낯선 타지에서 같은 한국인들을 만나는 것은 또다른 감회였을 거야. 그런데 말이 한국광복군 훈련반이었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무기도 없으니, 그들이 하는 것은 제식훈련이 전부였어. 장준하는 취사병으로도 일을 했는데, 전우들을 위해 고구마를 몰래 훔쳐오던 일화도 이야기해주었단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대원들의 글을 받아서 잡지를 냈단다. 동료들은 그 잡지를 <등불>로 제목을 뽑았고, 속옷을 깨끗이 빨아서 표지를 만들기도 했어. 그곳에서 훈련을 하긴 하지만 제식훈련이 전부였고, 장준하는 최종 목적지는 충칭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어. 그는 김학규 중위의 만류를 뒤로하고 다시 길을 떠났단다. 그때 임촨에 남는 이들도 있었고, 장준하와 같이 떠난 이도 있었어. 민간인들 포함하여 53명이 임촨을 떠났는데, 그때가 1944 11 30일이었어. 11 30. 이제 한파가 몰아닥치는 겨울이 찾아올 거야. 거기에 먹거리도 거의 없고, 언제 어디서 마적단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길. 그들은 뜨거운 피 하나로 길을 떠났단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중칭으로 향한 길은 고난의 길이었어.

그리고 해가 바뀐 1945 1월말 장준하 일행은 중칭의 임시정부에 도착을 했단다. 김구 주석, 이청천 장군 등 고위직의 환대를 받았어. 장준하를 포함한 50여 명들도 감격을 받았지. 그리고 그는 앞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할 일에 대한 기대를 했어. 그러기 위해서 길고 긴, 그 힘든 여정을 떠났던 거니까. 그런데, 며칠 지내고 보니 장준하는 임시정부에 실망을 느끼게 되었단다. 김삼웅의 <장준하 평전>을 읽고 쓴 편지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장준하는 임시정부 요원들 앞에서 그들의 당파싸움에 신랄히 비판했어. 그리고 혼날 것을 각오하고 자신의 생각을 거듭 이야기했어. 그러면서, 임시정부 요원들이 변하여 자신의 당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대한 독립을 위해 하나로 뭉치길 바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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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지 아니한 단 10여 일 동안, 그동안 우리의 눈에 비친 임정은 결코 우리가 사모하던 그 임정과 다른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잘못 본 것이라면 용서하십시오. 진정으로 여러 선배 선생님께서 이곳 이 땅에서 임정을 사랑하고 있다고 저희에게 생각되지 아니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랑한다는 것과 탐욕을 내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탈출해서 기나긴 행군으로 오면서 그리던 임정은 모두 일치단결되어 있는 완전한 애국투쟁의 근본이라고 여겼습니다. 이곳에 오기만 하면 그 단결된 힘으로 오직 잃은 나라 찾는 데만 목숨 바쳐 일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 그 기대는 지나친 하나의 환상이 아니었나 하는 회의를 품게 되었습니다. 이 회의는 누가 준 것입니까?

조국을 잃고 망명한 입장에서 임정을 세웠기에 임정이 하는 일에는 파쟁이 개재되어 있으리라고 생각도 못 했습니다. 이것은 저희가 잘못 본 것입니까? 아니면 사실입니까?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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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에 대해 실망을 한 장준하는 기대와 달리 그곳에서도 딱히 할 일이 없었어. 그러다가 이범석 장군과 만나게 되었고, 이범석 장군의 소개로 30여명의 동료들과 함께 임시정부를 떠나 미국첩보대인 OSS에 들어가게 되어 특수훈련을 받게 된단다. 그들은 조국에 잠입할 목적으로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면서, 그들의 국내 잠입이 의미 없게 되었단다. 일본의 포츠담 선언은 곧 전쟁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었으나, 자신의 손으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반가운 소식만은 아니었던 거야.

 

3.

1945 8 14, 장준하는 다른 일행들과 미국사령부 사절단 소속으로 비행기를 타고 국내로 향했단다. 그리고 여의도에 도착했는데,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일본군의 총부리였단다. 일측촉발의 상황. 아직 국내 사정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이었어. 결국 그들은 다시 회항하기로 결정되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어. 그리고 다시 조국을 찾은 것은 그 해 11월 김구 주석과 함께였단다. 임시정부의 최고 수장이었던 김구 주석의 귀국이었는데, 공항에는 아무도 없었어. 조짐이 이상했던 것이지. 광복이 되고 난 3개월 동안 국내 정세는 대혼란의 시간을 겪고 있었어. 거기에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개인 자격으로 입국을 제한했던 거야. 뒤늦게 경교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김구 주석의 비서 역할을 하고 있던 장준하는 가족에게 가 볼 틈도 없이 바쁜 생활을 하게 되었단다. 이제 그에게 조국 독립의 일이 아닌, 조국 재건에 대한 막중한 일이 떨어진 거야. 김구 주석을 보좌하면서, 열심히 일을 하지만, 강대국들이 양분해버린 조국을 하나로 만든다는 것은 험난한 길이라고 생각했어.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났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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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구어내려고 했던 조국의 독립. 아직도 우리나라는 홀로 서지 못하고, 둘로 나뉘어져 있단다. 비록 그렇더라도 반쪽인 나라에서라도 독립운동가들이 내세웠던 국가의 가치들.. 그런 것들이 잘 만들어져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야 하지만, 요즘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정말 답답하구나. 뒤늦게 진실들이 밝혀지면서, 다시 제대로 된 나라로 갈 기틀을 마련했지만, 아직도 잘못을 저지른 이들은 자신의 죄를 사과는커녕 인정도 하지 않고 있단다. 과거 친일파들이 이러했을려나. 올해는 우리나라가 다시 정상궤도를 되찾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너무 멀리 와버린 기분이 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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