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동서고금의 역사를 상고컨대, 영웅이 건설한 나라는 길이 가지 못하되 국민이 합동하여 세운 국가는 운명이 장구하도다.

진시황은 육군은 병탄하고 판도를 확장하여 전무후무한 대제국을 건설하고 천하를 호령하였으나, 진시황이 간 후에 그 후에 그 사업이 시황을 따라 여산에 장사하였고,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은 용도호략으로 일시에 혼천동지하여 구라파 전경과 아시아의 반폭을 거의 점령하여 만고에 혁혁한 대국을 세웠더니 대왕이 잠이 들매 위대한 사업도 춘몽같이 스러지고 광활한 대국은 거품같이 흩어졌나니, 그 이류를 말한진대, 진시황이 가매 그 사업을 이을 국민이 없었고, 알렉산더가 죽으매 그 목적을 계통할 사람이 없어 사업은 영웅과 같이 왔다가 영웅과 같이 갔나니, 어찌 애석하지 아니하리오

불란서는 이와 같이 아니하며 건국한 이래로 위험한 역사가 허다하니 열강 연합군에게 유린을 당하며 괴걸의 농락에 빠져 혁명의 재양을 입었으나, 천신만고를 다 지내고 만사 일생을 얻어, 오늘날 부강국 반열에 참여하나니, 이는 그 건국한 원동력이 오직 국민에게만 있던 연고니라.

 

 

(109)

이회영은 젊은 시절에 익힌 왕수인의 양명학을 행동의 준거로 삼았다.

"일을 통해 갈고 다듬되, 절대로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여 조그마한 일로 자신을 과시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160)

모든 개인이 어떠한 강권의 지배도 받지 않고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살아가는, 개인의 절대적 자유가 보장되는 아나키스트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우선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해야만 했다. 이들은 테러적 직접행동론, 경제적 직접행동론, 혁명근거지건설론, 민중봉기론, 민족전선론 등을 민족해방의 방법론으로 채택하고, 거기에 입각해서 테러 활동, 혁명기지 건설, 비밀결사 결성, 항일전쟁 등을 전개하였다.

 

 

(164)

내가 의식적으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거나, 무정부주의로 사상을 전환하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며, 다만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생각하고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나의 사고와 방책이 현대적인 사상적 견지에서 볼 때 무정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상통될 뿐 각금시이작비식으로 본래는 딴 것이었었던 내가 새로이 방향을 바꾸어 무정부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

 

 

(204)

리투아니아 출신의 무정부주의 혁명가 예마 골드만(1869~1940)은 아나키즘이 도전한 '권위 있는' 역사적 실체로 네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신과 교회 즉 유럽을 지배했던 가톨릭교회다. 아나키즘은 가톨릭교회의 신적 권위를 부인하고 거기에 도전했다. 한때는 종교개혁의 산물인 개신교도 아나키즘과 일정한 동맹을 맺기도 했다.

둘째는 국가다. 국가 중에서도 '짐이 곧 국가'라고 오만을 떤 절대왕정이 아나키즘이 주된 적이었다. 프랑스대혁명으로 대표되는 절대왕정에 대한 투쟁에서 아나키즘과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이 연합하였다.

셋째는 자본자를 중심으로 한 부르주아 세력이다. 부르주아 의회가 국가와 언론이 아나키즘의 타도 대상이 되었다. 이때는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이 힘을 합쳤다.

넷째는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국가다. 사회주의자들이 당을 만들고 권력을 잡고 새로운 사회주의 권력을 세우려고 시도하자 아나키즘은 사회주의를 경멸했다. 새로운 권위를 세운 사회주의는 아나키즘의 입장에선 또 하나의 타도 대상일 뿐이었다. 실제로 인민해방의 기치를 내걸고 권력을 잡은 사회주의 정권은 강력한 권력과 권위체제를 구축했다.


 

(205)

모든 지배와 권위를 거부하고 정부나 통치의 부재를 뜻하는 아나키즘(anarchism)은 그리스어 ‘an archor’에서 유래한다. 모든 정치조직, 규율, 권위를 거부하고 국가권력의 강제수단을 철폐하여 자주, 자유, 평등, 정의, 형제애를 실현하려는 이데올로기다. ‘아나키(anarchy)’는 미하일 바쿠닌이 처음 쓴 말로 알려졌다. “그는 ‘재산은 절도’라는 말로 유명한 프루동의 제자로, ‘아나키’는 그가 조합한 단어다. ‘계급구조’를 의미하는 하이어아키(hierarchy)의 반대개념으로 ‘무정부’를 뜻하지만, ‘혼돈’이나 ‘무질서’ 개념으로도 사용된다. 


 

(268)

우리 독립운동의 현실로 보아 (아나키즘이) 가장 실제적인 이론이며 적절한 방법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 사실상 모든 운동가들이 자기 사상이야 어떠하든지 이미 무정부주의 자유연합의 이론을 다 같이 이대로 실행하고 있다. 기미년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지금까지 수많은 단체와 조직이 생겼지만 그에 소속된 운동가가 자신의 자유의사의 결정에 의지하지 않고 강제 명령에 무조건 맹종하여 행동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런 단체가 어디 있는가?

이른바 철의 조직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며, 강제와 복종의 기율을 조직의 생명으로 하는 공산당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의 소련과 같이 자기들의 정치권력을 확립한 뒤의 얘기다. 그들도 혁명 과정에서는 모든 당원이 명령에 무조건 복종한 것이 아니라 자유합의에 토론과 타협을 하고 나서 행동하였던 것이 아닌가?

 

 

(270)

이러한 세계연합이 이루어지면 각 민족적 단위의 독립된 사회나 지역적인 공동생활권의 독립된 단위 사회가 완전 독립된 주권을 지니면서, 자체 내부의 사건과 문제는 자주적으로 해결할 것이고, 다른 사회와의 관계나 또는 공통적인 관계는 개별적으로 또는 연합적인 세계 기구에서 토의 결정하여 처리하는 것이다.

 

 

(340)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인 것이다.

이것을 남의 눈에는 불행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죽을 곳을 찾는 것을 예부터 행복으로 여겨왔다. 같은 운동선상의 동지로서 장래가 구만 리 같은 귀중한 청년자제들은 죽는 것을 제 집에 돌아가는 듯이 여겨 두려움 없이 몇 번이고 사선을 넘고 사지에 뛰어드는데, 나이 이미 60을 넘어 70이 멀지 않았다. 그런데 이대로 앉아 죽기를 기다린다면 청년동지들에게 부담을 주는 방해물이 될 뿐이니 이것은 내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바요,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는 일이다.

 

 

(379)

"생과 사는 다 같이 인생의 일면인데 사를 두려워 해가지고 무슨 일을 하겠는가. 더욱이 혁명공작을 어떻게 하겠는가."

 



(382)

전통유학에 탐닉하지 않는 개신유학 찾는 열린 사상, 

왕조체제와 공화주의 교체기의 개명사상, 

벼슬이나 감투보다 분방하게 살고자 한 자유혼, 

형식논리의 주자학보다 실천논리의 양명사상, 

현실안주와 저항인의 갈림길에서 보여준 기득권 포기, 

‘상놈’들이 모이는 상동교회에서 결혼식 올린 파격, 

청상이 된 누이 장례 치르고 재혼시킨 여성주의, 

머슴들 해방시키고 존댓말 쓴 평등사상, 

황실과 가까우면서도 신민회 창설한 탈근대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파견을 주도한 국제주의, 

고종황제 앞세워 망명정부 세우려던 통 큰 고구려인, 

일가 재산 모두 팔아 망명한 ‘인민의 전위’, 

윗자리 사양하고 위험한 곳 먼저 찾은 비범한 범인, 

굴욕과 억압보다 자존과 저항을 택한 자유주의,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세운 무장투쟁의 원조, 

목적과 수단을 일체화하는 리얼리스트, 

일의 성패를 문제 삼지 않고 동기의 순수성을 중히 여긴 양명학자, 

시작과 끝을 양심에 호소할 뿐 성패를 묻지 않는 강화학파, 

대원군 난초 쳐서 독립자금 만든 예술혼, 

지위나 물욕보다 명예와 가치를 높이 산 아나키스트, 

광복운동 과정에서 ‘자유협동체론’을 제시한 경륜, 

“독립한국은 4민 평등한 만인의 자유평등과 

공평하게 다 같이 행복을 누리며 

기회가 균등하게 부여되는 사회”를 꿈꾼 민주공화주의, 

“나의 소망은 언젠가 당신이 우리가 되고 온 세계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네.” 

존 레논을 닮은 ‘목마른 영혼의 외침’의 소프라노, 

다물단, 흑색공포단 지휘한 조선의 체 게바라, 

온갖 고문 악형에도 입을 다문 사육신의 화신, 

처자보다 동지, 동지보다 조국을 더 사랑한 순혈 조선인, 

무서운 깊이와 아름다운 표면을 함께한 선비, 

‘노블레스 오블리제’ 실천한 겨레의 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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