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과 반전의 순간 Vol.1 - 강헌이 주목한 음악사의 역사적 장면들 전복과 반전의 순간 1
강헌 지음 / 돌베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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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기억력에 의한 내용상 오류 있을 수 있음.

 

 

[저절로 엄지척]

이번에 읽은 책은 강헌이라는 분이 쓴 음악에 관한 책이다. 자신의 전문분야에 관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겨울에 그 분이 쓰신 <명리>라는 책은, 그 분이 관심이 많아서 쌓은 지식을 이용하여 쓰신 책이라면, 이 책은 자신이 오랫동안 했던 자신의 전문 분야에 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강헌이라는 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년 전 노무현 시민학교에서 음악의 역사에 대한 강연을 통해서였다. 어찌나 말을 구수하고 재미있게 하시던지, 필기까지 하면서 강연을 들었다. 집에 와서 그가 쓴 책들을 읽어보려고 검색을 해봤는데,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 겨울에 <명리>라는 책을 낸 것을 알고 알아봤더니, 작년에 한 권을 더 쓰셨다.

<명리>와 마찬가지로 이 책도 김어준의 벙커1에서 강연했던 것들을 나중에 정리한 책이다. 읽기 전 글씨가 작고, 더 작은 글씨로 된 주석이 엄청 많아서 부담스러웠는데, 읽기 시작하면서 바로 엄지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최고였다. 음악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읽으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첫째 아이가 이 책 제목을 보더니 "전복? 그 먹는 전복 이야기하는 거야?" 라는 질문을 던져 한바탕 웃게 하기도 한 책, 얼른 후속편이 나와야 한다.

 

 

[대중음악의 부모, 재즈]

첫번째 주제는 재즈다. 재즈는 대중음악의 부모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20세기 초 뉴올리온즈라는 조그마한 항구도시에서 시작한 재즈는 불과 30년 만에 전세계의 대중음악이 되었다. 그것은 당시 세계 상황과도 관계가 있었다. 뉴올리온즈는 조그마한 항구 도시로 세계 1차 세계 대전 이후 군악대가 쓰던 악기들이 싼 값에 많이 흘러 들어왔다고 한다. 그리고 힘들게 일하던 아프리칸 어메리칸들이 그 악기들을 이용해서 음악을 하기 시작하고.. 그것이 재즈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을 알리는 걸출한 인물이 한 명 출현했는데그가 바로 루이 암스트롱이다. 고등학교 시절 때 맥주 광고에 나와 알게 된 "What a wonderful world"로 유명한 가수. 그의 목소리는 정말 매력적인 목소리다. 그의 노래 중에 "What a wonderful world"도 좋지만, 신데렐라에 나왔던 "비비디바비디부"를 재즈로 부른 그 노래가 더 좋았다. 우리 아이들이 신데렐라를 좋아해서 루이 암스트롱이 부른 비비디바비디부를 들려주면  그 노래도 좋아한다.

루이 암스트롱은 새 시대를 여는 1900. 미국의 상징이기도 한 미국독립기념일인 7 4일에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출생은 그를 전설로 만들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암튼, 그의 목소리는 재즈를 위해 하늘이 내린 목소리라고 할 수 있었다. 재즈가 뉴올리온즈에서 시작해서 시카고, 뉴욕으로 이동하면서 점점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와중에 세계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는데전세계에 있는 미군을 위해 위문공연을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재즈는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음악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을 때 오히려 처음 재즈 음악을 만들었던 흑인들 사이에서 예술자적 자의식이 생기면서, 블루스의 본질을 연주한다면서, 재즈 음악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그리고 비밥이라는 음악이 등장하면서 재즈의 인기를 수그러들었다. 그래도 재즈는 모든 대중음악의 부모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

그리고 등장하는 음악 장르는 로큰롤이다. 에릭 홉스봄이라는 사람은 "로큰롤에게 존속살해당한 재즈"라고 말할 정도로 로큰롤의 등장과 함께 재즈는 급속하게 인기가 줄어들었다. 로큰롤은 1950년대 미국의 풍요시대와 함께 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문화라는 것은 어른들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1950년대 미국의 풍요시대에 10대 소년들은 지옥 같은 학교를 탈출하고자 했고, 출구전략으로 문화를 선택했다.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심도 있었고.... 문화의 대표격인 음악에서 10대는 열광하게 되었다. 리듬앤블루스라는 장르가 10대들의 지지를 받으면 크게 인기를 얻었다. 리듬앤블루스는 원래 흑인하급음악이었는데, 선 레코드의 사장 샘 필립스라는 사람이 리듬앤블루스에 최적의 목소리를 가진 백인을 찾아냈다.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엘비스 프레슬리. 그러면서 리듬앤블루스에서 락앤롤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이동하게 된다. 리듬앤블루스와 락액롤의 차이는... 리듬앤블루스는 색스폰이 주된 악기였고, 로큰롤은 일렉트릭 기타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리듬앤블루스의 대표곡인 "Rock around the clock"을 유튜브로 검색해서 보면 색스폰을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로큰롤은... 음악과 관련 없는 두 개의 단어 rock roll을 이용해 만들었는데, 리듬앤블루스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4개의 단어 중인 rock roll을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뜻은 '성교'라는 뜻의 은어라고 한다. 그러니, 기성세대인 부모들이 얼마나 이 로큰롤을 싫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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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앤블루스라는 말의 '리듬' '블루스'는 모두 음악과 관련된 말이었다하지만 로큰롤이라는 말은 사실 굉장히 위험한 말이다. 단순히 바위가 구른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 록(rock)은 동사로 '부딪히다, 흔들다'의 뜻이고(roll) '구르다, 휘감다'라는 뜻이다. 리듬앤블루스에 제일 많이 나오는 음탕한 네 개의 동사인 rock, roll, shake, rattle 중 두 개인 록과 롤로 만든 것이 로큰롤이다. 로큰롤은 흑인 은어로 남녀 간의 성교를 의미한다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성교를 뜻하는 은어로 전 지역에서 통용되는 말이 '빠구리". , 제주도에서는 '빠구리' '땡땡이친다'는 뜻이므로 제주도는 여기서 제외한다. 그런데 KBS의 음악 프로그램인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진행자자인 유희열이 새로 음반을 낸 YB를 소개하면서 "우리 YB의 새로운 빠구리 음악을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라고 방송 진행을 했다고 생각해보면쉽게 이해할 것이다. 그가 바로 영구 방송 출현 금지에 처해질 것이다로큰롤이라는 말 자체가 미국 기성세대의 주류 백인들에게 분노를 자아낼 수밖에 없는 개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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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거부할 수 없었다. 당시 미국은 TV의 보급과 함께 엘비스 프레슬리의 인기는 하늘을 뚫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56년에는 빌보드 차트에서 4개의 노래로 34주간 1위를 차지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학부모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로큰롤은 사탄의 음악이다"라고 하고 로큰롤을 보이콧하고, 로큰롤 가수들에 대한 범죄를 조작하여 체포하기도 했다고 한다. 비틀즈의 우상인 척 베리도 그렇게 범죄를 조작하여 체포하기도 했다. 그리고 1959년에서 1960년 사이에 세계 로큰롤 가수 순위 1위에서 4위 가수 중에 3명이 의문의 사고사로 죽는 사건도 일어났다고 한다. 이때 라밤바로 유명한 리치 발렌스로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그리고 죽지 않은 한 명은 군대 재직 중인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한다. 이 사고들이 우연일까?

...

로큰롤은 비틀즈의 등장과 함께 다시 한번 정점을 찍는다. 리버풀에서 온 그들은 1964 4월 둘째주 빌보드 차트 1위와 5위까지 모두 그들의 노래로 채우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렇게 미국, 아니 세계 대중음악은 시대를 거듭하며 다양한 음악의 장르로 발전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대중음악]

, 그럼 우리나라는? 우리나라 대중음악을 보통 가요라고 하는데지은이는 그것은 잘못된 말로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가요라는 말은 일제 시대 생긴 국민가요라는 말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고, 당시 국민가요는 황국 신민의 노래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말로 일제잔재라고 한다. 그런 이유로 가요라는 말을 쓰지 말고 대중음악이라는 말을 사용하라고 한다. 그리고 일제시대 일본 황군들의 노래인 <감격시대>가 우리나라에서 아직도 광복절 등을 기념하는 행사에 KBS 등 공영방송에서 연주하고 있다는 것에 개탄을 했다.

그런 그렇고, 미국에 재즈와 로큰롤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통기타가 있다. 1969년 사진작가였던 한 청년이 장충동에 있는 드라마센터에서 공연을 했는데, 기타 하나 들고 모든 음악을 자신의 자작곡으로 한 신선한 공연이었다. 이 때가 통기타 음악의 시작이라고 지은이는 이야기하고 있다. 그 젊은이는 아직도 가끔 TV에서 볼 수 있는 한대수란 분이다. 한대수란 분의 집안은 완전 엘리트 집안이면서 불우한 일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백낙준 박사와 연희전문대학을 설립하고 초대학장을 지내신 분이고, 아버지는 서울대 공대 출신이고,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당시로는 정말 보기 드문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더 공부하기 위해 미국에 가서 핵물리학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대수 일곱 살 때 아버지는 실종되었다고 한다. 수소폭탄 기술을 빼돌리지 못하게 CIA가 제거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가 수소폭탄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의 수제자였던 점에서 신빙성이 있는 말 같다.

...

암튼, 한대수에서 시작한 통기타는 세시봉과 트윈폴리오로 이어지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트윈폴리오는 잘생긴 의대생 출신의 윤형주와 음악에만 미친 송창식의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었지만, 그들의 인기는 엄청났다고 한다. 하지만 윤형주가 집안의 반대로 음악을 그만두고 다시 학교공부를 한다고 해서 트윈폴리오는 해체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만둔 윤형주가 일년도 안되어 솔로 앨범을 내었다고 하니, 송창식 입장에서는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할 만 하겠다. 하지만, 송창식 또한 솔로로 데뷔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니, 인생사 바로 당장만 보고는 평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활기를 띤 통기타 음악은 모던포크라는 장르로 1970년대 전성기를 이루었고, 69~74학번이 주도했다고 한다.

그렇게 1970년대는 소위 청년문화의 부흥을 일어났다. 이때 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아침이슬'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를 서강대 새내기 양희은이 청아함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목소리로 불렀는데, 그 가사가 장엄하고, 상징적이어서 이후 시위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불렀고, 오늘날에도 시위 때마다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그런데, 김민기가 그 노래를 만든 것은 술 먹고 취해서 묘지에서 잠들고,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 겨우 일어나서 지은 노래라고 한다. 그래서 가사에 묘지가 나오고, 태양이 나온다고 한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다. 어찌되었든 이 노래는 청년의 상징이 되었고긴급조치 9호 때 금지곡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수많은 곡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는데, 이 노래만이 아무런 이유 없이 금지곡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록의 대한 역사도 이야기 주었다. 1963 "해변으로 가요"의 키보이스로 시작한 록은 이후 신중현에 의해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신중현은 "The add 4"라는 그룹을 만들었지만 실패하고 이후 펄 시스터즈를 프로듀싱해서 대박을 터뜨린다. 이후 신중현은 프로듀서로 대성공을 하게 된다. 그가 프류듀싱한 이들이 크게 성공을 했다. 김추자, 장현, 임성훈, 박인수 등등... 신중현 사단이라는 말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하고 싶었던 록밴드는 계속되어 실패를 맛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밴드라고 생각하고 만든, 그 이름도 촌스러운 "신중현과 엽전들"이란 밴드가 1974 '미인'이라는 노래로 대박을 터뜨렸다. 그런데 신중현에게 암흑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것도 별 생각 없이 한 하나의 거절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요청의 주인공이 청와대에 계신 '그분'였다는 게 문제였다. '그분'은 신중현에게 국민가요를 의뢰했고, 신중현은 바빠서 거절했고, 이로 인해 비극이 시작되었다. 권력의 탄압이 들어온 것이다. 신중현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신중현과 엽전들 2집에 '군가'로 가득 채웠고, 잘못을 비는 듯한 바른 자세의 앨범 자켓도 내보였다. 그 앨범 자켓이 책에 실려있는데, 지금 보니 웃음이 절로 나고 오히려 그분의 행태를 비꼬는 듯한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분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신중현의 모든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하고앞으로 나올 곡마저 금지시키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그로 인해 신중현은 한동한 가난과 친구가 되었다. 당시 대마초는 합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마초 파동을 일으켜 신중현을 대마초 파동의 왕초로 부각시켰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대중음악이 걸어온 길이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대한 음악도 간단히 이야기해주면서 우리나라 대중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마쳤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 이번에는 클래식이다. 클래식 음악가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한 명만 뽑으라고 하면 뽑기가 어려울 지 몰라도, 두 명을 뽑으라고 하면 누구나 쉽게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뽑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클래식 역사에도 대변화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지은이는 바흐가 죽은 1750년부터 베토벤이 죽고 난 몇 년 뒤인 1829년까지가 대격변의 시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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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가 죽고 난 후 베토벤이 죽고 난 뒤까지 약 79년 동안 일어난 일들이다이 시기 동안 우리가 알 만한 사람들이 모두 태어났고 죽었다. 그리고 정치경제적으로 중요한 두 사건인 산업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이 이때 모두 일어났다하루하루 역사가 매일 새롭게 쓰여질 수밖에 없는 그런 격동의 시기에모차르트의 짧은 35년간의 삶과 베토벤의 정말 파란만장했던 57년의 삶이 얹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기반 없이 이 사람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 위대한 예술가들이 시대를 만든 것도 있지만, 결국 이 위대한 예술가를 만든 것은 바로 이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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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양음악가는 계급의 위치로 보면 중간계급이었다고 한다. 중간계급이라는 말은 잘 하면 더 윗쪽 계급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급이라서, 경쟁이 치열한 계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음악가들의 치열한 경쟁으로 좋은 음악이 많이 나왔고, 많은 작곡가를 배출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그 중에 위대한 음악가인 모차르트와 베토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모차르트는 그가 타고난 것도 있지만, 그의 아버지의 극성으로 음악을 하게 된 것은 너무 유명하다. 이 책에서는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악역으로 그린 살리에리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모차르트가 프리메이슨 소속이었다는 점을 이야기했는데, 당시 프리메이슨 가입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는 점도 곁들였다. 그의 마지막 불우한 죽음도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모차르트를 좋아해서 모차르트 관련된 책을 여러권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그의 영화 같은 삶은 늘 나에게 감동을 준다. 이 책에서 한가지 알게 된 사실. 하이든이 모차르트를 비난하는 이들에게 언성까지 높여가며 그를 지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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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든은 정말 끔찍이도 모차르트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결코 함부로 언성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를 비난하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한 번으 모차르트의 현악 4중주곡의 화음이 이상하다는 어떤 동료 궁정 음악가의 지적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차르트가 그렇게 썼다면, 거기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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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베토벤은 용모, 나이, 출생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귀족으로 속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귀족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했으나, 그렇지 못했고 궁정악장도 되지 못했다고 한다. 베토벤을 다룬 영화로 <불멸의 여인>이 가장 유명한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불멸의 여인'은 그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라고 한다. 베토벤은 성격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 공격적이고 독립심이 강했다고 하는구나. 스승 네 명이 있었는데 모두 사이 안 좋았다.

우리는 보통 베토벤을 말년에 귀먹은 음악가라고 하면서 더욱 극적인 위대함으로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그는 초기부터 귓병이 있었고, 완전히 안 들리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베토벤의 위대함이 조금이라서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교향곡 <영웅>에 대한 이야기... 나폴레옹을 칭송하기 위한 교향곡. 원래 교향곡의 제목은 나폴레옹의 이름인 '보나파라트'라고 했지만, 나폴레옹이 수세에 몰리고, 검열이 심해져 '보나파라트'로 했다가는 위험에 빠질 것 같아서 그때서야 영웅(에로이카)로 제목을 바꿨다고 한다. 베토벤도 말년에는 행복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소송에 휩싸였고, 검열이 강화된 사회로 인해 자유가 위축이 되었다고 한다. 베토벤에 대해 안좋은 면만 이야기한 것 같지만, 지은이는 시대를 바꾼 위대한 음악가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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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가 지상을 떠난 바로 이듬해, 스물두 살의 더벅머리 청년이 이 저주의 도시 빈에 등장했다. 그는 스승 하이든의 인도를 거부했으며, 한 번 밖에, 그것도 잠깐 보았을 뿐인, 모차르트의 오만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승계했다. 이 청년 베토벤은 모든 제단을 무너뜨리고 오직 자신만이 앉을 수 있는 권좌를 만들었다. 불손하기 그지없었던 베트벤은 다음과 같은 위대한 말을 남겼다.

 

"더욱 아름다운 것을 위하여 세상에 파괴시키지 못할 규범이란 없다.”

 

나는 이 짤막한 한 줄이야말로 베토벤이 서양음악사에서 영원한 챔피온으로 남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미학적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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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 찬미 윤심덕]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시작은 일제시대 윤심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현해탄에 몸을 던져 더욱 극적인 삶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드라마틱한 삶 때문에 윤심덕의 이야기는 영화, 뮤지컬 등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음모가 있었다고 지은이는 이야기하는데, 상당히 신빙성이 있었다. 윤심덕은 유부남 김우진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동반자살을 선택했고, 그 이후 나온 윤심덕의 유작앨범 <사의 찬미>는 공전의 히트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살한 이후 낸 노래의 제목이 '사의 찬미', 즉 죽음을 찬미한다고 하니 얼마나 절묘한다? 이 노래의 히트는 앨범 판매량에 그친 것이 아니라, 당시 이 노래를 듣기 위해 유성기 판매량도 엄청나게 늘었다는 거다. 당시만 해도 레코드판을 들을 수 있는 유성기는 일부 부유층만 가지고 있었는데, <사의 찬미>를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샀다고 한다.

, 이 위대한 속에 어떤 음모가 있었을까? 그들은 정말 동반자살했을까? 그들은 자살한 것이 아니고, 타살 당했거나 아니면 아예 죽지 않고 해외 어디선가 숨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먼저 그들이 사랑한 사이는 맞았나? 서부터 의문은 시작된다. 그들은 세차례 정도 만나게 되는 시기가 있었는데, 정말 사랑했는지도 확인이 어렵다고 한다. 그리고 윤심덕은 신여성으로써 포부가 많았고, 자신이 번 돈과 후원 받은 돈으로 동생들을 모두 해외 유학을 보냈다. 가족이나 측근들이 이야기하기를 윤심덕이 자살할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김우진의 동생도 이 사건의 의심을 가지고 사람을 사서 시신을 찾아보았지만 끝내 시신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여행한 어떤 일본인이 그곳에서 일본인 부부를 만났는데, 그들이 윤심덕, 김우진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한다. 나중에 이탈리아 주 일본 대사관에 그 지역에 일본인 조사를 요청했는데, 그 지역에 일본인은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타살이든 해외 잠적설이 맞다면 누가 꾸민 일일까? 그것은 <사의 찬미>를 기획했던 음반회사가 그랬다는 거다. 그 음반회사는 유성기를 만드는 회사도 같이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명해진 노래 '사의 찬미'도 원래 앨범에 없었던 노래인데마지막에 급하게 녹음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음정도 좀 맞지 않는다고 한다. 이 정도면 신빙성이 꽤 있지 않는가.

 

[트로트는 우리 것인가?]

트로트의 국적 논쟁가야금의 대가 황병기 선생은 “누가 뽕짝을 우리 것이라 우기냐?"냐고 비판을 하기도 했단다. 트로트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그 뿌리까지 왜곡하지는 말자고 한다. 트로트를 전통가요라고 하는데, 그것은 너무 과장된 말이라는 거다. 트로트의 뿌리는 누가 뭐라 해도 일본의 엔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평가는 것이 옳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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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는 일본이 만들었고, 그곳에서 전해져 온 음악이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한국의 서민정서로 자리잡았고 완성도의 측면에서 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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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로 평가해도 크게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불교 또한 외세에서 들어왔지만, 우리나라에서 꽃을 피운 것처럼 트로트도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크게 번성했다고 하면 안될까? 오히려 일본에서 들어온 것을 뻔히 아는데그것을 전통가요로 이야기하면 그것이 더 창피한 일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암튼, 이 책에 대한 총평은 최고다라고 한마디로 말할 수 있다. 얼른 속편이 출간되어야 한다. 알라딘 서점에서 조회해보면 전복과 반전의 순간” 2, 3권이 조회되는데, 미출간으로 검색되는 것으로 보아, 조만간에 나올 것 같다. 기대된다.

 

 

 

※ 이 리뷰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를 수정하여 작성함.

 

바흐가 죽고 난 후 베토벤이 죽고 난 뒤까지 약 79년 동안 일어난 일들이다. 이 시기 동안 우리가 알 만한 사람들이 모두 태어났고 죽었다. 그리고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두 사건인 산업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이 이때 모두 일어났다. 하루하루 역사가 매일 새롭게 쓰여질 수밖에 없는 그런 격동의 시기에, 모차르트의 짧은 35년간의 삶과 베토벤의 정말 파란만장했던 57년의 삶이 얹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기반 없이 이 사람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 위대한 예술가들이 시대를 만든 것도 있지만, 결국 이 위대한 예술가를 만든 것은 바로 이 시대였다.

하이든은 정말 끔찍이도 모차르트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결코 함부로 언성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를 비난하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한 번으 모차르트의 현악 4중주곡의 화음이 이상하다는 어떤 동료 궁정 음악가의 지적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차르트가 그렇게 썼다면, 거기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 거지."

그(모차르트)가 지상을 떠난 바로 이듬해, 스물두 살의 더벅머리 청년이 이 저주의 도시 빈에 등장했다. 그는 스승 하이든의 인도를 거부했으며, 한 번 밖에, 그것도 잠깐 보았을 뿐인, 모차르트의 오만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승계했다. 이 청년 베토벤은 모든 제단을 무너뜨리고 오직 자신만이 앉을 수 있는 권좌를 만들었다. 불손하기 그지없었던 베트벤은 다음과 같은 위대한 말을 남겼다.

"더욱 아름다운 것을 위하여 세상에 파괴시키지 못할 규범이란 없다."

나는 이 짤막한 한 줄이야말로 베토벤이 서양음악사에서 영원한 챔피온으로 남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미학적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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