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녹색평론 통권 148호 - 2016년 5월~6월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16년 4월
평점 :
[참고] 기억력에
의한 내용상 오류 있을 수 있음.
[또 한번의 선거와 정치혁명]
0.76%.
지난 4월에 있었던 20대 국회의원 녹색당 정당 지지율이다. 내심 3%의 득표율로 원내 진출을 기대했으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성 정당의 높고 높은 벽이 엄청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3%까지는
어렵더라도 1%는 쉽게 넘을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은 벽이다. 여소야대라는 보기 드문 선거 결과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의당의
예상 외의 적은 득표율과 녹색당의 원내 진출 실패로 인해 그리 마음에 드는 결과는 아니다. 기성 정당들은 더욱 자신들의 밥그릇을 챙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낀 선거가 아닐까 생각했다. 대인배처럼 작은 정당의 권리를 알아주는 정치인들이 얼마나 있을까? 다른
나라처럼 정당 지지율만큼 국회의원 자리를 주는 제도가 과연 우리나라에 들어올 수 있을까? 이번 호에는
녹색당으로 종로에 출마했던 하승수 녹색당 대표가 쓴 정치혁명에 대한이 글이 있었다. 현재 다른 나라의
선거제도를 봤을 때, 그나마 대의제 민주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제도가 연동형 비례대표제라고 생각한다. 정당 지지율만큼 국회의석을 차지하는 것... 지역구 의원으로 국회의석을
일부 차지하고, 각 정당은 정당 지지율에서 부족한 만큼 비례대표제의 수를 받게 된다. 그렇게 해서 정당지지율과 국회의석 수 비율을 맞추는 그런 제도다. 만일
지역구로 당선된 인원수가 정당지지율보다 많게 되면, 그만큼은 보상해 주는 제도. 그래서 간혹 전체 국회의원수가 의원 좌석 수보다 많아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상당히 합리적인 제도이지만, 우리나라에는 그것을 도입하고 있지 않다. 그렇게 되면 손해를 보는 거대 정당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말 안타깝다. 그렇게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되면, 작은 정당들의 원내 진입하는데
더 쉬워질 텐데…
그러면 작은 정당들이 원내 진입하면 뭐가 달라질까? 그것은 뉴질랜드의 예를 들어 설명해주고 있다. 뉴질랜드는 우리나라처럼
소선거구제를 가지고 있다가 제법 최근인 1990년에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실시했다고 하고, 그 이후 두번째 선거에서 벌써 많은 좋은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
1999년 총선을 통해 노동당이 제1당이
되었지만, 단독 집권은 불가능해졌다. 노동당은 소수
정당들과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고, 소수 정당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 뉴질랜드의 정책 방향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최저임금이
인상되었고, 소득세 최고세율을 33%에서 39%로 올리는 고소득층에 대한 증세가 단행되었다. 공공주택
임대사업이 개선되었고, 민영화되었던 산재보험이 국유화되었다. 노조의
설립을 장려하고 노조의 지위를 강화하는 고용관계법이 제정되었다. 그에 따라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올라갔고, 고용 안정성도 증대되었다. 2004년에는
가족수당 제도가 도입되어, 어린 자녀가 있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
이런 변화를 보니, 부러우면서도
우리나라도 희망을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게 된다. 일부이긴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국회의원도 있고, 시민들의
여론이 형성이 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또 쉽게 희망을
품는다. 그렇기 위해서는 이런 정책을 내세우고 있는 정당에 힘을 실어주고, 표를 주어 연동형 비례대표 제도를 대세로 만들면, 결국 바꿀 수밖에
없지 않을까? 희망고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학의 붕괴]
이번 녹색평론의 부제는 '대학의
붕괴'다. 언제부터인가 대학은 취업을 위한 학원 같은 곳으로
되어버렸다. 대학의 추구하는 가치관은 무엇일까? 대학의 평가에
취업률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다 보니, 우리나라 대학은 취업을 위한 곳으로 바뀌었고, 그것에 필요 없는 학과는 없어지고, 그것에 필요 없는 강좌는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 모든 것이 자본주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무한 경쟁을 표방하는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이외의 가치는 중요시 하지 않는 세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대학들은
대학평가 순위의 높은 순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경쟁하고, 학생들은 취업을 위해 보다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 경쟁하고.... 그렇다고 대학이나 학생들이 잘못이라는 것은 아니다. 시스템이 그렇게 만들어졌으니, 그 시스템대로 따르고 있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대학의 문제가 우리나라에만 해당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다른 나라도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 녹색평론에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맹주가 된 미국과
일본의 대학 문제점을 적은 글들도 실렸다. 우리나라의 웬만한 유명 대학은 강의를 영어로 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렇게 영어로 강의를 하면 대학평가를 좋게 받기 때문이란다. 대학순위를 끌어올리기 위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로 위해 영어로 강의를 하는 것에 대한 단점은 고려되고 있지 않다. 실력은
우수하지만, 영어 실력이 부족하여 대학 교수가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영어를 능숙하게 하는 사람으로 교수 자격을 제한하게 되면, 그만큼
인력풀이 축소되는 것이다. 정말 이 한심한 제도가 계속 유지되고 있음이 답답하다.
그런데, 자존심이 세다고 하는 일본에서도
그렇게 대학 강의를 영어를 하는 곳이 있다고 한다. 약간은 예상치 못했던 사실이다. 그것에 대한 문제점을 일본의 두 지식인이 토론을 하는데, 그들도
영어로 대학 강의를 하는 것은 망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열변을 토하고 있다. 그리고 아래 발췌글처럼 영어로
강의를 하는 것에 대한 부작용을 이야기하는데, 공감이 갔다. 아래
글에서 ‘일본어’를 ‘국어’로, ‘일본’을 ‘우리나라’로 바꿔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
일본어가 학문연구라는 고도의 의론의 장에서 사용하지 않게 된다면, 일본어도 최첨단의 용어를 갖지 못하고 뒤떨어진 언어로 전락합니다. 일본어가
그렇게 열화된다면 그것이 또 일본 국민의 우민화에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 한편으로, 표면상으로 영어를 매끄럽게 말하는 엘리트들도 모어(母語)에
입각한 깊은 사고력이라 통찰력이 없기 때문에 우수한 성과를 올릴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일본 전체가 우민화를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
...
그 밖에 오늘날 대학의 문제점에 대한 글이 많이 실려 있었다. 많은 글들에 공감이 갔다. 아래 발췌글들은 곧 나의 생각이 되었다.
=======================================
(86쪽)
대학은 운영하는 대학본부는 대학의 운영 목표를 학문 탐구와 지적 성숙을 이끄는 교육에 두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돈을 버는 것이고, 돈을 벌기 위해 대학을 관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학의 관리체제는 기업의 관리체제와 같다. 기업의 경영 결과가 재무제표라는 숫자로 나타나듯이 대학의 운영 결과는 대학의 순위로 나타난다. 가령
순위평가에서 7위인 대학은 6위인 대학에 비해 좋지 않은
대학으로 자리매김되기 때문에 대학의 모든 노력은 순위를 올리기 위한 것이 되고, 순위평가에서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 부문은 대학 운영진의 관심거리가 되지 않는다. 정부 역시 대학을 숫자로 관리하며, 그 숫자에 의해 재정지원
여부와 그 규모를 결정한다. 대학정보공시라는 제도는 겉으로는 각 대학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취지이지만, 이 정보 공시에 나와 있는 정보는 그 학교에서 무슨 연구를 하며 어떤 교육을 받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대학에 대한 정보든 숫자이다. 학생의
수, 교수의 수, 논문 편수, 예산 규모, 유학생 수 등이 공시의 내용이며, 이러한 숫자를 나열하면 대학의 면모를 알리는 것으로 간주된다. 숫자가
지배하는 대학, 돈이 지배하는 대학에 대학의 본령인 학문과 교육은 없다. 대학은 이미 몰락하였다.
=======================================
(88쪽)
자본주의시대의 종말기에 처한 현재, 대학은
이에 대한 어떤 전망도 보여주지 못하고 어떤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삶과 역사, 사회와 개인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쓸모없는
학문으로 천대를 받으면서 점점 대학에서 없어지고 있다. 인류사회의 가치와 전망에는 관심이 없는
공학이나 경영학과 같은 실용 학문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심지어는 직업훈련 과정에 불과한 인문
소프트웨어, 로봇공학, 영상콘텐츠 개발과 같은 분야가 대학의 학문 분야로 자리매김되어가고 있기도 하다.
=======================================
(142쪽)
이 급진적 변화란 무엇인가? 사실상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초,중등교육은 물론 대학에서도 인문학과 예술 교육이 축소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쓸모없는
것들은 모조리 없애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붙들린 정책결정자들의 눈에는 인문학이나 예술은 쓸모없는
장식에 불과한 것으로 비쳐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고 그것들은 학교의 교과과정에서, 그리고 부모와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빠른 속도로 설 자리를 잃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과학과 사회과학이 갖고 있는 인문학적 측면-상상력과 창조성에
관계된 요소 및 엄격한 비판적 사고-도 단기적인 이익추구에 혈안이
된 국가정책 때문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
(148쪽)
세계시민이 되자면 정말 인문학이 필요한가? 세계시민이
되자면 우선 많은 사실적 지식이 필요하지만, 그러한 지식은 인문적 교육 없이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책임 있는 시민이 되자면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즉
역사적 증거를 평가하고, 경제적 논리들을 사용하고, 그것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며, 사회적 공정성 여부를 평가하고, 외국어를
말하며, 세계의 주요 분쟁지역들의 복잡한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사실적 부분들에 관한 지식만을 얻는 데는 인문학과 연관된 지적 기술이 없이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 연관관계들의 어떻게 되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사실적 지식만을 갖는 것은 거의 무지만큼 나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학생들은 정치가들이나 문화적 선도자들이 제공하는 상투적인 것과 진실한 것 사이를, 진짜와 가짜 사이를 구분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나 경제에 관한 이해가 지적으로 총명한 세계시민의 육성에 쓸모 있는 것이 되려면 인문적, 비판적 능력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고, 따라서 종교나 정의에
관한 철학적 이론에 대한 학습과 나란히 이루어져야 한다
=======================================
(149쪽)
혁신에는 유연하고 개방적이며 창조적인 정신이 요구된다. 문학과 예술은 그러한 능력을 배양시켜준다. 이런
능력이 결핍될 때 비즈니즈문화는 급격히 쇠퇴한다. 실제로 기업들이 갈수록 편협한 직업교육만
받은 학생들보다 교양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을 선호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역동적인 비즈니스 환경에서 유연성과 창조성을 발휘하여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사가 오직 국가적 경제성장에만 있다고 할지라도, 인문적 교양과 예술 교육을 더욱 보호할 필요가 있다.
=======================================
[나를 위한 글쓰기]
녹색평론 몇 호 전부터 글쓰기에 대한 글이 연재되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글쓰기에 관한 책들이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어서인지,
녹색평론에서도 그것을 기획했던 것 같다. 그 연재가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끝을 맺는다고
한다. 시인이자 경희대 교수인 이문재라는 분이 쓰신 글인데, 이번
호에서는 마지막으로 어르신 분들의 글쓰기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가면 갈수록 세대간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그런 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로 글쓰기를 제안하고 있었다. 어르신들이 노년에 글쓰기를 많이 하고, 그 글들을 젊은 세대와 공유하면
세대간 양극화가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글쓰기는 모든 세대 많은 사람들이 하면 좋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글들을 공유하고 그런 글들이 여론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되면 오늘날 정치가 유권자를 무시하는 행태도 글쓰기를 통해서 여러 사람과 공유하게 되면 그들도
무시 못하게 될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
(179쪽)
우리가 자기 삶을 돌아보고 사회를 들여다보는 글쓰기의 저자로 거듭난다면 현실정치가 지금과 같은 파행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 현실정치가
유권자를 이토록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자율적 인간, 그리고
자율적 인간이 형성하는 공동체가 가져야 할 기본 능력이 자기를 표현하는 능력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자기를 표현한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글쓰기를
통해, 미디어를 통해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 분노와
절망을 글로 써내고, 꿈과 희망을 공유해야 한다. 위에
인용한 글의 저자가 말했듯이 소망하는 자만이 이룰 수 있다. 그라민은행을 설립하고 '소셜픽션'을 창안한 무하마드 유누스가 말했다. "꿈은 함께 꿀 때 더 빨리, 더 크게 이뤄진다." 사회적 글쓰기는 함께 꾸는 꿈이다. 집단지성이고
소셜픽션이다.
=======================================
녹색평론에 실렸던 글쓰기에 대한 연재는 단행본으로도 출간된다고 한다. 나중에 기회 되면 한번 읽어봐야겠다.
※ 이 리뷰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를 수정하여 작성함.
1999년 총선을 통해 노동당이 제1당이 되었지만, 단독 집권은 불가능해졌다. 노동당은 소수 정당들과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고, 소수 정당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 뉴질랜드의 정책 방향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최저임금이 인상되었고, 소득세 최고세율을 33%에서 39%로 올리는 고소득층에 대한 증세가 단행되었다. 공공주택 임대사업이 개선되었고, 민영화되었던 산재보험이 국유화되었다. 노조의 설립을 장려하고 노조의 지위를 강화하는 고용관계법이 제정되었다. 그에 따라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올라갔고, 고용 안정성도 증대되었다. 2004년에는 가족수당 제도가 도입되어, 어린 자녀가 있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시대의 종말기에 처한 현재, 대학은 이에 대한 어떤 전망도 보여주지 못하고 어떤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삶과 역사, 사회와 개인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쓸모없는 학문으로 천대를 받으면서 점점 대학에서 없어지고 있다. 인류사회의 가치와 전망에는 관심이 없는 공학이나 경영학과 같은 실용 학문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심지어는 직업훈련 과정에 불과한 인문 소프트웨어, 로봇공학, 영상콘텐츠 개발과 같은 분야가 대학의 학문 분야로 자리매김되어가고 있기도 하다.
혁신에는 유연하고 개방적이며 창조적인 정신이 요구된다. 문학과 예술은 그러한 능력을 배양시켜준다. 이런 능력이 결핍될 때 비즈니즈문화는 급격히 쇠퇴한다. 실제로 기업들이 갈수록 편협한 직업교육만 받은 학생들보다 교양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을 선호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역동적인 비즈니스 환경에서 유연성과 창조성을 발휘하여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사가 오직 국가적 경제성장에만 있다고 할지라도, 인문적 교양과 예술 교육을 더욱 보호할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