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9)

이 사진을 찍은 박헌영, 주세죽, 현앨리스 등 세 청춘 남녀는 다가올 가혹한 운명의 전조를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희망으로 가득했던 상하이의 인연이 30여 년 뒤 자신을 파멸로 이끌 것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박헌영은 1933년 상하이에서 체포된 이후 다시는 주세죽과 해후할 수 없었다. 주세죽은 박헌영의 혁명동지 김단야와 재혼했지만, 그마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처형되었다. 노동교화형에 처해졌던 주세죽은 1953년 박헌영의 재판 소식을 듣고 딸의 안위를 걱정하며 유배지 크질오르다에서 모스크바로 가던 중 폐렴으로 사망했다. 박헌영과 현앨리스는 1956년 평양에서 처형되었다. 뜨거웠던 청춘들은 혁명동지들의 손에 의해 처형되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 글은 이들의 열정과 삶에 관한 이야기이자 시대와 역사의 수레바퀴에 으깨진 한 여성의 운명에 관한 보고서다.

 

(90)

현앨리스가 네 번째로 하와이에 도착했다는 기사가 정확하다면 이는 현앨리스가 1903(출생), 1924(이민), 1927(임신, 출산), 1930(재입국)에 한 차례씩 하와이에 입항한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924년 이후 한국으로 돌아간 앨리스는 결혼 문제를 정리했고, 1927년 웰링턴을 출산한 후에는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그녀가 1923년 블라디보스토크 향할 때의 비밀 임무와 같은 종류였을 것이다. 1920년대 후반 현앨리스는 여전히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및 혁명운동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112)

이들은 하와이에서 출생한 한국계 미국인으로 식민지 한국에서 성장했고, 미국에서 대학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미국 시민이 되었지만, 이들의 정체성과 정신은 그들의 시민권이 속한 미국에도, 그들의 강제된 국적 일본에도, 미국 내 객관적 위치였던 동양계 이민에도 속하지 않았다. 또한 이들은 여타 한국인 이민 2세들과도 다른 정신세계에 속해 있었다. 이들의 정체성과 정신은 상하이 시절 받은 독립운동과 혁명 활동의 세례에서 발원했다. 이들은 진정한 한국인이길 희망했다. 하와이에서 남매의 삶은 여전히 1920년대 초반 상하이의 꿈결 같은 순간들이 계승되거나 변형된 형태로 지속되었던 것이다.

 

(179)

이들의 한국 귀환과 추방 과정은 이들이 장차 미국 사회에서 깃들 곳이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자 한반도가 당면할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현앨리스와 피터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민주주의, 진정한 해방, 진정한 완전 자주독립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움직였다. 독립운동과 혁명운동의 길을 따라 옛 친구, 동지들과 함께 길을 가고자 했을 뿐이다. 반면 해방자로 등장한 미국은 이들의 행동을 공산주의 단정하고 이들을 해임한 뒤 추방했다.

 

(197)

그렇지만 이들은 재미한인 사회 내에서 주류적 존재가 되기는 어려웠다. 이미 1920년대부터 재미한인 사회는 이승만, 박용만, 안창호라는 걸출한 3명의 지도자에 의해 사회, 교민 조직이 잘 분할된 상태였다. 특히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와 반이승만 계열의 국민회, 흥사단의 대결이 치열했다. 민족혁명단 미주지부는 그 밖의 진보적 소수파였다. 태평양전쟁 전후 재미한인사회는 통일과 분열을 반복했는데, 그 핵심에는 여전히 이승만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표면적으로 분열은 재미한인들이 조직하고 임시정부가 승인한 주미외교위원부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갈등은 임시정부와 그를 오랫동안 지지해온 재민한인, 나아가 재미한인 진보진영에 재앙적 결말을 초래하게 된다.

 

(269-270)

동유럽에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확산되었고, 이들이 페코로 건너오는 시기에 중국에서는 공산혁명이 완성되고 있었다. 세계의 대세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해석되었고, 남한에서도 4.3사건과 여순사건 등 유격대의 무장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남한의 무장혁명이 승리한다면 약동하는 승리와 건설의 북한과 통일이 머지않아 실현될 것으로 보였다. 북미조선인민주전선은 북한의 조국전선 결성(1949 6)에 맞춰 체코에 있던 이경선과 현앨리스를 대표로 선정해(1949 9)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이제 이들은 재미한민 <독립> 진영의 대표이자 북미조선인민주전선의 대표로서, 또한 미국공산당 당원으로서 자신들이 꿈에도 그리던 사회주의 조국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284-285)

현앨리스의 이름은 1953 8월 이승엽, 이강국 등 남로당 핵심 간부 12명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처음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재판은 민간법정이 아닌 군사재판으로 진행되었다. 공판 과정에서 현앨리스는 현피터, 이윌리엄과 함께 언급되었다. 공판 기록에 따르면 현앨리스는 모두 네 번 언급되었는데 기소장, 검사 논고, 판결문 등에서 조금씩 혐의 사실이 다르게 표현되었다. 현앨리스와 이윌리엄의 이름은 이강국 재판 과정에서만 거론되었을 뿐, 다른 관련자의 재판에는 등장하지 않았다. 즉 현앨리스와 이윌리엄(이득환)은 이강국을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특정하는 데에만 활용되었던 것이다.

 

(298)

첫째, 박헌영이 1949년 현앨리스의 입북을 허가한 이유가 1948 6월 하지로부터 지령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점이 새로 제시되었다. 하지의 지령은 남한에 파견되었던 서득은을 통해 박헌영에게 전달되었다고 했다. 즉 박헌영이 하지의 직접 지령을 받는 미제의 고용간첩이며, 현앨리스는 그것을 실행한 미국 간첩망의 우두머리임을 입증하려 했던 것이다. 또한 박헌영과 현앨리스의 관계가 단순히

 

(311-312)

현앨리스, 이사민(이경선), 이윌리엄(이득환) 등 태평양전쟁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재미한인 진보진영의 핵심 인물이자 스스로 진실한 공산주의자라고 확신했던 재미한인들은 남한의 상황에 절망했고 북한을 희망이자 조국이며 정치적 사상적 이상향이라 생각했다. 이들은 1947~1949년 미국에서 체코와 소련을 경유하는 실낱 같은 경로를 개척해 북한을 찾아갔다. 역경을 거쳐 북한에 진입한 이들의 사례는 재미한인 공산주의자들에게 행운으로 비쳤다. 몇 년 뒤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이들의 운명은 모두 비극으로 종결되었다.

 

(322)

우리는 가능한 범위에서 현앨리스의 삶을 복기할 수 있게 되었다. 3.1운동이라는 독립과 혁명의 찬연한 빛에 매료되었던 한 청춘은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 하와이, 뉴욕, 도쿄, 서울, 로스앤젤레스, 프라하, 부다페스트, 평양으로 줄달음질치며 역사와 가기 운명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다. 비극적 역사의 경로만큼 쓰라린 개인적 불행과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의지와 열정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마침내 이상향에 도달했다고 믿던 순간 샹그릴라는 죽음의 하데스임이 드러났다. 그녀와 함께 북한에 도달했던 이경선, 이득환은 물론 1950년 중반 미국에서 추방당하자 북한을 조국으로 선택한 김강, 전경준, 곽정순 등 재미한인들도 같은 운명의 희생자가 되었다.

 

(333)

현데이비드에게는 미국공산당 당원이라는 혐의가 적용되었지만, 이 팸플릿들은 공산주의라는 단어는 전혀 사용하지 않고, 데이비드가 얼마나 미국화를 갈망하고 미국화되었는지를 묘사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팸플릿에 거론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데이비드는 일곱 살에 미국으로 이민왔고, 존경받는 현순 목사의 아들로 열심히 공부하고 일했으며, 웅변대회에서 미국 헌법의 의미라는 제목으로 연설하기도 했다. 하와이 대학 ROTC에 지원했을 때 시민권이 없어 가입할 수 없었지만, 군복과 장비를 스스로 구입했고, 마침내 ROTC 후보생 대위 계급까지 진급했다. 태평양전쟁 중에는 미군 복무를 할 수 없게 되자 하와이 방위군에 참가했다. 그의 부인은 미국 태생이며, 2명의 미국 태생 자녀를 두었고, 미국의 이상에 충성하고 헌신했다. 그는 미국인이 되고자 귀화 신청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현데이비드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백인 노동자보다 소수민족이 임금을 덜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의 집행위원에 임명되자 1946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 파업을 주도했다.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주 빅파이브(big five)’는 현데이비드의 노동운동을 전복또는 공산주의적활동으로 규정했다. 이 혐의로 1949년 현데이비드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체포되었다. 이상이 팸플릿에 기재된 현데이비드의 모습이다.

 

(390-391)

현앨리스의 존재론적 기반은 미국, 기독교, 민족주의였다. 그녀는 목사의 딸로 하와이에서 태어났고, 교회와 기독교 학교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그녀는 1920년대 초반 사회주의에 공명한 이래 진보주의자, 혁명가로 삶을 추구했다. 역설적으로 그녀를 진보주의와 사회주의로 이끈 중요한 동력은 3.1운동과 그 여파였다. 3.1운동의 거대한 에너지가 한 소녀의 뇌리에 새겨졌고, 그녀가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나머지 인생은 결정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녀는 3.1운동의 후예였고, 나머지 삶은 3.1운동의 후기였다. 상하이의 시대조류와 시대정신은 1920년대 초반 민족주의에 사회주의로 급선회했다. 민족주의자 목사의 딸은 상하이에서 사회주의와 당면했고, 3.1운동의 여진 속에 혁명적 전환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상하이 시절의 관성이 미주 시절 현앨리스의 삶을 규정했다. 그녀는 상하이의 독립운동와 사회주의 운동, 하와이에서 노동운동, 해방 후 남한 혁명운동의 민족주의적 에너지에 매료되었다. 정확히 말해 그녀가 매료된 것은 사회주의 이념이라기보다는 민족주의와 결합한 사회주의적 이상주의 혹은 이상주의자들이 뿜어내던 열정과 시대정신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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