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래서 힘들었다. 일이 고단해서가 아니라, 내가 진짜 보고 싶은 것과 실제로 보여줄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극 때문이었다.
결국 방송국을 나왔다. 대단한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더는 내 성격을 속이기 어려웠다. 나는 원래 한곳에 오래 머무르기보다 직접 움직이며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에 가깝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보고 싶은 장면을 끝까지 따라가고 싶었다.
(22-23)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이다. 상을 받아도, 시청률이 잘 나와도 정작 내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았다. 그렇게 점점 내 이름을 걸고, 내 시선으로
세상을 담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한편으로는 무능하고 둔한 시스템 안에 갇혀 있는 것보다 차라리 나
혼자 하는 편이 낫겠다는 오만한 자신감도 있었다. 근거 있는 확신이었고 동시에 무모한 객기였다. 하지만 때로는 그 정도 객기가 있어야 인생의 방향을 틀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안전한 울타리를 부수고 다시 길 위로 나섰다. 남의 이름 아래 잘 만든 결과물을 납품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이름으로 실패하고 내 이름으로 살아남는 기록자가 되고 싶었다.
(58)
나뭇잎으로 몸을 가린 원시의 아이들을 상상하며 33시간의
비행과 이틀간의 이동을 버텨온 우리에게, 정글 한복판의 미니마우스는 청바지를 입은 원주민만큼이나 강한
인상을 남겼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시간이 멈춘 박물관이 아니었다. 디즈니
캐릭터가 카누를 타고 들어오는 현대의 아마존이었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 뒤로 문명의 파도가 얼마나
깊고 빠르게 이 정글의 심장부까지 들이쳤는지 비로소 실감했다.
(71)
이들의 고민을 우리가 함부로 판단하거나 단정할 수는 없다. 전통을
지키는 것이 무조건 옳다고도 할 수 없고, 문명으로 나가는 것이 반드시 더 낫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이들을 보면서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아마존이나 한국이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고, 내가 겪은 고생은
덜 겪었으면 좋겠고, 그러면서도 내가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을 너무 쉽게 잃지는 않았으면 좋겠는 마음. 정글 깊숙한 곳에서 만난 그들의 고민은 낯설면서도 이상할 만큼 익숙했고, 그래서
더 오래 마음에 남았다.
(106-109)
그 장면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는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 죽은 원숭이도 안타까웠고, 크게 다친 개도 안쓰러웠다. 20년이 넘도록 다큐멘터리 PD로 현장을 다니며 이런 장면을 여러
번 보아왔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무뎌지지는 않는다. 여전히
불편하다. 그렇다고 내 기준으로 재단할 수도 없다. 하드자에게
사냥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그냥 삶의 한 방식일 뿐이다. 인간도, 개도, 원숭이도 모두 각자의 생존을 걸고 있다. 직접 사냥하느냐, 돈을 내고 도축된 고기를 사 먹느냐의 차이만 있을 따름이지. 우리
역시 다른 생명의 죽음 위에서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그 과정을 보지 않을 뿐이고, 저들은 그 과정을 피하지 않을 뿐이다.
(126)
더욱이 최근 몇 년 사이 하드자를 둘러싼 풍경은 더욱 기괴하게 변했다. 내가 처음 이들을 만났을 때만 해도 그들은 카메라를 위해 ‘준비된
연기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세계 여러 나라의
유튜버들이 하드자를 찾았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연출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똑 같은 구도로 불을 피우고, 똑 같은 자리에서 춤을 추고, 카메라가 보기 좋은 각도에서 사냥 장면을 반복한다. 우리는 이들과
함께 지내봤기 때문에 안다. 진짜 사냥은 그렇게 찍을 수가 없다. 그
거칠고 가시덤불을 뒤덮인 산을 짐승처럼 뛰어다니는 사람들이었다.
(134-135)
마네네라 불리는 이 축제는 우리 식으로 비유하면 설이나 명절에 가족들이 모여 조상을 기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토라자 사람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직접 무덤에서 시신을 꺼내 머리를 손질하고, 먼지를 털고, 새 옷으로 갈아 입히고, 함께 사진을 찍는다. 어떤 집은 고인의 입에 담배를 물려주고, 어떤 집은 선글라스를 씌워주고, 누구는 함께 산책을 하기도 한다.
(155-156)
토라자에서는 장례 전까지 고인을 완전히 죽은 사람으로 부르지 않고 ‘아픈 사람’이라는 뜻의 토 마쿨라로 여기며, 가족이 음식과 물, 담배를 바치는 관습이 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이들은 죽음을 우리처럼 어느 한순간의
단절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직 함께 있는 상태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니 아침마다 인사하고 물을 떠다
드리는 일이 가능해진다. 누군가는 그런 일을 건너뛰었다가 집안에 아픈 사람이 생기고 사고가 나고, 누구는 죽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그것이 우연인지 진짜인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이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몸은
멈췄어도 관계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우리 눈에는 낯선 믿음이지만, 이해하고 나면 이들의 일상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관은 방 안에
놓여 있지만, 그 방은 무덤이 아니라 여전히 가족이 일상을 영위하는 공간이다.
(260-261)
이 위험한 곳이 이곳 아이들에게는 일종의 놀이터였다. 굶주린
악어가 도사리고 있는 악어장 위를 아무렇지 않게 뛰어다닌다. 심심하면 호수로 풍덩 뛰어들어 수영을 한다. 이 아이들에게 최고의 장난감도 새끼 악어였다. 입을 리본처럼 생긴
끈으로 단단히 묶은 새끼 악어를 붙잡고 이리저리 들고 다니며 놀았다. 물뱀을 잡아 장난감처럼 만지기도
하고, 악어장 주변에서 이것저것 주워 와 제 나름의 놀잇감을 만들기도 했다. 떠내려온 페트병이나 캔 같은 것들은 따로 모아 두었다가 고물상에 팔았고, 바퀴
빠진 장난감이나 깨진 생활용품이 떠내려오면 그걸 주워서 소중하게 가지고 놀기도 한다. 위험과 가난이
뒤섞인 환경이었지만, 아이들은 그 안에서도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놀고 있었다.
(273)
고민 끝에 우리가 악어를 한 마리 사기로 했다. 이곳에
묵는 동안 숙식비와 촬영비를 따로 지불했지만, 그사이 받은 호의와 도움을 생각하면 이런 방식으로라도
보탬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온전히 마음 편한 결정은 아니었다. 내가 온갖 오지를 다니면서 이것저것 잘 받아먹다 보니 그런 걸 좋아한다고 오해하는 분들이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내 선택으로 한 생명이 죽는다는 건 아무래도 껄끄럽다. 이 악어도
생긴 게 무서워서 그렇지 사는 동안 편했던 생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좁은 우리에 갇혀 일주일에 한
번 겨우 먹이를 받아먹는 것도 서러운 마당에 결국 사람 손에 잡혀 죽는다고 생각하면 그 처지가 안쓰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사랑들에게는 실제 도움이 되고, 우리에게는 이곳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장면이 되는 만큼, 내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