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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지음 / 위고 / 2025년 2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이야기할 책은 홍한별 님의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라는 에세이란다. 이 책은 여러 평론가들과 리뷰어들이 추천하여 관심을 갖게 된 책이란다. 지은이
홍한별 님은 작가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전문 번역가셔. 그래서 아빠가 읽은 책 중에 홍한별 님이 번역한
책이 있는지 봤더니,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이라는 책을 비롯하려 세 권을 읽었더구나.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라는 책은 지은이가 번역가로서
경험한 것과 생각한 것을 적은 글들이었어. 책 제목은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서 따온 제목이란다. <모비
딕>에서 이슈메일이 흰 고래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분량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 흰 색은 결국 다른 색을 칠하고 난 빈 여백이라고 했어. 지은이는
번역과 흰 고래와 비슷하다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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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번역을 시도한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흰 고래 같은 텍스트를 만났을 것이다. 잡히지 않는
공허. 포착할 수 없는 의미. 이쪽을 붙들면 저쪽을 놓치고, 저쪽을 잡으면 이쪽이 사라지는 단어를, 의미를 고정하는 순간 무수한
틈이 생겨버리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붓질을 더할수록 더럽혀지기만 하는 순백을?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번역은 얼마나 투명해져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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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좋은 번역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번역을 처음 시작한 아주 오래 전부터 번역은 논란이 되는 경우들이 많았대. 성경 같이 중요한 책을 번역을 할 때는 단어 선택이 중요하다고 하는구나. 성경의
잘못된 번역의 대표적인 것이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라고 하는구나. 원문에는 무화과로 되어 있는데 사과로
번역을 해서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를 다들 사과로 알고 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성경을 최초로 영어로
번역한 위클리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죽은 후 30년이 지난 후 묘지에서 그의 시신을 꺼내어 화형을
시켰다고 하는구나. 감히 성경을 일반인들도 읽을 수 있게 번역을 하다니, 그것은 교회의 권위를 도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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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이에 반발하여 속어 번역을 시도한 사람들이 있었다. 성경 번역은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므로
그 자체로 엄청나게 위험했다. 중세 말기에 존 위클리프(c.1328~1384)는
라틴어 불가타를 영어로 번역해 일반인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했다. 위클리프의 사상과 번역은 두 세기
뒤에 일어난 16세기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번역은 근세를 추동하는 동인이 되었다. 성경 번역이 종교개혁을, 그리스
로마 고전 번역이 르네상스를 일으킨 요인 중 하나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성격 번역은 종교개혁
시기에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고 권력 투쟁의 핵이었다. 성경이 번역되자 성직자를 거치지 않고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번역 성경은 민족 언어와 문화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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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읽으면서 자연스럽고 어색하지
않게 읽히는 번역본을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했어. 원문을 직역해서 읽기 어려운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는
나쁜 번역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직역과 의역 논란이 있다는구나. 의역은
독자들이 읽기 편하게 번역하는 것으로 번역자들의 개입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오히려 번역자의
개입이 많다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경우가 있대. 번역가들 중에 일부러 직역에 가깝게 하는 사람이
있대. 그렇게 해야 원문에 최대한 가깝다는 거야. 물론 그로
인해 번역투 문장에 읽기 어색한 문장들로 뭇매를 맞는 경우가 있단다. 한 때는 독자들을 위해 의역을
많이 했는데 최근에는 좀더 직역에 가깝게 번역하는 경향이 있다는구나. 이렇듯 의역과 직역의 장단점이
있다 보니 의역을 하면 의역이 심하다고 비난 받고, 직역을 하면 번역투라고 비난 받는다고 하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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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10여 년 전에는 직역이냐 의역이냐를 놓고 두 번역가가
‘번역 배틀’이라는 형식으로 맞붙은 신나는 일이 있었다(번역이라는
단어 다음에 이렇게 흥미진진한 단어가 붙은 적이 유사 이래 또 있었던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자기 마음대로 원문에 담긴 정보를 삭제하고 번역해서는 안 된다”(이덕하)는 주장과 “쉽게 읽히는 노씨의 번역에 대해서는 ‘주요 정보가 완곡한 표현으로 번역되어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술술
읽히는 것이 다가 아니다’ 등의 비판이, 우리말로 부드럽게
옮겨지지 않은 이씨의 번역에는 ‘정보만 있을 뿐 정서가 없다’, ‘읽기
불편하다’ 등의 비판이 나왔다.” 직역이냐 의역이냐의 해묵은
논쟁을 종식할 줄 알았는데, 싱겁게도 무승부로 얼버무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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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역과 직역 논란을 읽으면서, 부커상을 수상했던 한강의 <채식주의자>도 번역 논란이 있다는 생각이 났단다. 이 책에서도 당시 일었던
번역 논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주었어. 의역이 아닌 오역에 가깝다는 논란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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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2016년 데버라 스미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The Vegetarian이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뒤에 번역 논쟁이 뜨겁게 벌어졌다. 최근에 구체적인 사례를 두고 이만큼 열띤 논쟁이 벌어진 일은
없었을 듯하다. 처음 수상 소식이 들려왔을 때 (한 시인의
노벨문학상 수상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던) 한국인들은 한국문학의 위상을 높이는 쾌거라며 들떠서 축하하고
칭찬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인터넷에 The Vegetarian의 오역 의심 사례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번역
작품을 원본과 비교해본 국내 번역가들은 다들 나처럼 아연했을 듯싶다. 데버라 스미스가 우리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유로운 번역을 했던 것이다. 만약 국내 번역가가 외국의 유명한 작품을 그렇게 번역했다면
곧 오역 논쟁에 휩싸였을 것이고 영원히 출판계에 발을 붙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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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버라 스미스의 번역 논란은
외국의 번역관과 국내의 번역관 차이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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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148)
서양의 번역 관행과 우리나라의 번역 관행이 크게 다르고 기준점도 다르니 충실성의 개념도 다를 수밖에 없다. 서양에서 한국어로 쓰인 책을 번역 출간할 때는 출판사 편집부에 한국어를 아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 한국처럼 편집자가 원본과 번역본을 한 문장 한 문장 대조하고 비교하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런 반면 우리나라의 번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원문 충실성을 훨씬 중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번역 논쟁은 거의 언제나 원문을 기준으로 놓고 벌어지는 오역 논쟁이었고, 원문의 의미를 잘못 이해했거나 곡해한 번역이 어떤 이유로든 옹호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서양 번역 전통은 (여성 혐오적 표현이지만 한 번만 더
쓰자면) 충실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미녀(Les Bells
infideles)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했고 스미스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여전히 그 기조가 이어진다. 스미스의 번역이 부정한(infidele) 것은 분명하지만 본인이
충실할 생각이 없다는 번역관을 밝혔는데 윤리적 의무를 저버렸다느니 배신을 했다느니 비난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스미스의
번역에 대해서는 미녀(belle)인지 아닌지만 따지면 된다. 그런데
그걸 제대로 수행하는 번역 비평은 좀처럼 눈에 뜨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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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영미권에서 번역자의 이름을
책표지에 적지 않는 경우가 많대. 번역자의 이름을 적은 경우가 3%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는구나.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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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하다 보면 우리말에 없는
말들이 있는데, 그런 말들을 번역을 하다 보면 우리말에도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는구나. 없던 말들이 새로 생겨날 수도 있다는 거야. 그 중에 대표적인 말이
‘그녀’란다. 아빠는
예전에 당연히 오래 전부터 ‘그녀’라는 말이 있는 줄 알았는데, 이오덕 님의 책을 읽고 우리말의 3인칭은 ‘그’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그녀는 ‘she’를 번역하려고 생긴 말로 그 이후에 우리말에도 자연스럽게 쓰이게 된 것이래. 우리나라의 말에는 남녀 차별이 없었던 것이지. 아빠도 이오덕 님의
책을 읽은 이후에는 ‘그녀’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고 한단다. ‘그’라는 3인칭대명사도
필요한 경우에만 사용하고 고유명사(이름)을 주로 쓰려고 노력한단다. 서양에서도 요즘에는 남자와 여자를 구별해서 부르는 3인칭 대명사 he/she를 구분해서 쓰지 않고 they를 3인칭 복수 겸 단수 대명사로 쓰는 경향이 있다고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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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이런 부침을 겪은 ‘그녀’는 여전히 쓰이기는 하되, 굉장히 불균형하게 쓰인다. 언어학자 안소진은 신문, 잡지, 문학, 비문학, 구어 등으로 분류된 말뭉치에서 ‘그녀’의 출현 빈도를 조사해서, 텍스트의 종류에 따라 ‘그녀’가 나타나는 빈도가 크게 달라짐을 보였다. 문학 말뭉치와 순(純)구어
전사 자료에서 무려 298배의 차이가 나타난 것이다. 전체 ‘그녀’ 출현 건수 중에서 83퍼센트가
문학 말뭉치에서 나타났다. 반면 순구어에서는 사실상 ‘그녀’를 안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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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175)
우리는 ‘그/그녀’를 유럽어에서 받아들여 쓰게 되었는데, 이제는 서양에서도 남녀를 구분하는
대명사를 불편하게 여긴다. 자신이 이분법적 성별 체계에 속하지 않는 논바이너리(non-binary)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명서 ‘he/she’ 대신 ‘they’를 삼인칭 복수 겸 단수 대명사로 쓰는 경향이 눈에 뜨인다. 경칭으로도 ‘Ms’나 ‘Mr’ 대신 ‘Mx’를
붙이기도 한다. 미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친구에게 들었는데, 이렇게
논바이너리로 정체화한 학생을 임의로 ‘he/she’로 지칭하면 차별이 될 수 있어서 늘 신경 쓰고 조심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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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여러 가지 번역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외국어에 능숙하지 못한 아빠 같은 사람들에게 번역가들은 참 고마운 사람들이란다. 그들이 없었다면 그 많은 좋은 작품들을 읽어보지 못했으니 말이야.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최근에는 직역이 경향이라고 하지만 아빠는 적당히 번역가의 창작이 들어간 의역이 나은 것 같구나.
아빠는 읽기 편해야 책에 더 집중할 수 있거든. 물론 원문의 의도를 벗어나면 안되겠지. 그건 의역이 아니고 오역이 될 테니 말이야. 지은이 홍한별님의 번역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도 읽기 번하게 잘 쓰시는 것 같더구나. 같은 외국 작품의 번역본이 여러 권이
있고, 그 중에 홍한별 님의 번역한 책이 있다면 그 책을 골라야겠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고등학교에 다닐 때 미술 선생님이 하얀 석고상을 그리라고
시킨 일이 있었다.
책의 끝 문장: 나도, 번역에
관한 글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나는 계속 번역을 할 것이란 생각을 한다.
자, 나보코프는 잡힐 듯 말 듯한 흰 고래를 분석하고, 주석을 달고, 해설해서, 결국 잡았나? 탑이 높아질수록, 가능한 한 많은 의미를 더할수록, 흰 고래는 점점 시커메지고, 번역이 실패했다는 증거는 쌓여간다. 주석의 탑은 번역 불가능성의 웅대한 증거다. 번역은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 번역은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만다는 조바심이 탑을 이룬다. 이 탑은 무한의 영역으로 뻗는다. 번역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번역은 무한하다. - P33
번역가들은 왜 배신자일까? 신이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살지 못하게 언어를 흩어놓았는데도 갈라진 언어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해서, 니므롯처럼 신의 뜻에 반한 배신자가 되었나? 서로 다른 언어 사이를 오갈 때는 손실이 불가피하므로 원저자든 독자든 누군가를 배신하게 없었느냐는 것이다. - P45
나도 번역이라는 일이 탐정이 하는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탐정소설 속 탐정의 목표는 범죄가 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저질러졌는지를 설명하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일이다. 탐정이 모든 정황과 맥락을 고려해 가장 그럴듯한 한 가지 서사를 완성하듯이, 번역가도 단어들의 단서를 모아 매끈한 하나의 문장, 빈틈없는 하나의 줄거리를 만든다. 번역가는 흩어진 의미의 조각들을 이렇게 맞추어보고 저렇게 맞추어 보며 도무지 옮겨지지 않는 것을 옮기려고 애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스르륵 퍼즐이 풀린다. 비어 있는 한 자리에 딱 맞는 단서/단어를 끼워 맞추자 이야기가 완결된다. 이렇게 문장을 완성할 때의 희열. 결국 번역을 하는 이유는 번역이 이런 일이기 때문이다. 드물게 찾아오는 완성의 감각. - P65
단테가 <신곡>을 씀으로써 이탈리아어를 발명했다는 말이 있다. 중세에는 문어와 구어가 분리되어 있어서, 고등교육, 과학, 철학, 신학 등의 학문과 공공 기록 등에는 실제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라 라틴어가 쓰였다. 당시에 진지한 주제로 책을 쓸 때는 라틴어로 쓰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나, 단테는 라틴어가 아닌 속어로 <신곡>을 씀으로써 이탈리아 문화와 언어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작품으로부터 이탈리아어의 표준이 생겼고 이탈리아어 문학이 시작되었으며 이탈리아 민족문화와 국가 정체성이 형성될 수 있었다. - P90
나는 잘 읽히는 번역문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어 독자가 자연스러운 논리로 글을 읽게 하려고 이쩌면 나에게 허럭된 것보다 더 많이 개입할 때가 있다. 마치 편집자가 된 것처럼 원문에 가위를 댈 때도 있다(있는 것을 잘라내거나 없는 것을 집어넣는다는 말은 아니다. 문장을 합하거나 나누거나 문장구조를 뒤틀거나 긍정과 부정을 뒤집을 때가 있다). 그런데 번역 원고를 다듬고 고치다가 피츠제럴드처럼 진부함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철렁해진다. - P134
또 영어와 한국어는 너무나 다른 언어라서 좀 더 많이 개입할 필요가 있다(이 점에 있어서는 "영어와 한국어는 너무 거리가 멀다"고 한 데버라 스미스와 내 생각이 일치한다. 그런데 어느 정도를 ‘많이’ 개입한 것으로 보느냐의 기준은 크게 달라서 같은 말을 해도 무척 다른 이야기이긴 하다.) 영어에서 한국어로 올 때는 문장을 완전히 뒤집거나 구문을 재배치해야 할 때가 많다. 그러지 않고 영어의 특유 표현(수동태, 물주(物主) 구문, 완료, 진행, 사역 등)을 그대로 옮기면 어색한 번역 투가 되고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안 가기 십상이다. 영어와 한국어는 언어의 사고방식 자체가 달라서 좀 더 적극적으로 번역해야 한다. - P158
번역가가 하는 일은 원본을 훼손하거나 손상하는 일이 아니라 계속해서 살아 있도록 생명을 주고 되살리는 일이다. 번역가는 "상상력과 독창성과 자유로움을 요하는 연금술 같은 정교한 공정을 통해 텍스트의 의미를 복원"한다. 에코는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나르키소스가 하는 말을 따라 할 뿐이지만, 자기 자신밖에 보지 못하는 나르키소스가 하는 말을 따라 할 뿐이지만, 자기 자신밖에 보지 못하는 나르키소스가 점점 말라가다 소멸한 뒤에도 계속 나르키소스의 목소리를 따라 하고 다양하게 반향하며 울려 퍼지게 한다. 나르키소스는 침묵할지라도, 그 침묵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는 에코의 목소리를-빈 산에 울리는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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