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정조 이후의 왕들은 하나같이 허수아비였습니다.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들이 어린 왕들을 앉혀놓고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 하면 그냥 도장이나 찍어주는 존재였어요. 외척 가문의 서슬 퍼런 권력 앞에서 왕권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아들 명복만큼은 그런 왕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아들의 파워를 키우고, 추락할 대로 추락한 왕권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었습니다. 자연스레
개혁의 핵심을 왕권 강화에 둡니다. 그리고 세도정치 아래 문란해질 대로 문란해진 민심을 바로잡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일련의 경제 개혁을 단행하지요.
(28-29)
흥선대원군은 끄떡하지 않습니다. 잔뜩 독기를 품고
있었으니까요. 그는 이렇게 말해요. “공자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 뜻이 민의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나는 공자의 뜻을 받들지 않을 것이다.” 엄청난 선언입니다. 성리학의 나라에서 공자의 뜻을 받들지 않겠다니요.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건 것이나 마찬가지죠. 그 정도로 흥선대원군은 서원 정리에 엄청난 힘을 쏟습니다. 물론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아요. 만동묘도 폐지합니다. 만동묘는 명의 신종을 모시는 사당입니다. 그런데 당시 명은 망하고
없는 나라입니다. 임진왜란 때 명이 조선을 도와준 은혜를 기리기 위해 당시 황제의 제사를 계속해서 지내고
있었던 것이죠. 만동묘는 철저한 사대주의의 상징입니다. 흥선대원군은
기어이 만동묘를 폐지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흥선대원군은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납니다. 아직까지는 흥선대원군의 힘이 그 시대의 성리학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누를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69)
이 얼마나 굴욕적입니까? 명성황후 정권 하나 살리자고
나라의 국격, 나라의 자존심을 완전히 망가뜨리다니요. 외교에
공짜는 없는 법입니다. 우호관계요? 혈맹이요? 그저 웃고 말지요.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단어들이 얼마나
겉바른 수사(修辭)들인지 꿰뚫어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인류의 외교사를 보세요. 절대 우방도 절대 혈맹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국의 이익만 존재할 뿐입니다. 당시도 마찬가지였어요. 조선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통해 너무도 많은 것을 잃습니다.
(86)
1885년, 조선의
전략적 요충지인 거문도를 영국이 점령해버려요. 그런데 조선 정부는 거문도가 영국에서 불법으로 점령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릅니다. 기가 막힌 일이지요. 도리어 청에서
연락이 와요.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했다는데 그게 사실인지 확인해봐라”하고요. 조선은 청에 보고서를 올립니다. “그런 일 없는데요?” 또 다시 청이 연락해옵니다. “아냐, 분명 거문도가 점령되어 있을 거야. 가서 잘 알아봐.”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거문도에 영국 깃발이 떡하니 꽂혀 있는
거예요. 외세가 자국 땅에 들어와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정부라니요!
이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 정권 유지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112)
개항 이후 집권세력의 목표는 오직 하나, 정권 유지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외세의 힘을 빌립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도시 빈민과 구식 구인들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SOS, 갑신정변이 벌어지자 급진개화파를 제압하기
위해 청에 SOS,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또 청에 SOS를
보낸 그들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기세가 등등해지자 이번에는 러시아의 품으로 뛰어들어요. 심지어 러시아 공사관으로 왕이 몸을 피합니다. 정말 일관성 하나는
끝내줍니다. 이렇게 고종 정부가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외세는 힘을 빌려줍니다. 하지만 절대 공짜로 도와주지는 않죠.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합니다. 아관파천의 비용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160)
나는 솔직히 한국에 오기 전에는 한국보다는 일본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 한국을 돌아본 결과 내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다. 일본군은
양민을 무차별 학살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비인도적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반면 한국인은 비겁하지도 않고
자기 운명에 대해 무심하지도 않았다. 한국인들은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 메킨지 <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 중에서
(193)
전등은 1887년에 최초로 불을 밝힙니다. 여기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전등불이 맨 처음
밝혀진 곳은 경복궁입니다. 향원정 연못가에서 불을 밝혔는데 불이 확 들어오는 순간 사람들은 어마어마하게
놀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맨 처음 들어온 전등불은 시원찮았던가 봐요.
동력이 부족해서인지 깜박깜박했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등불을 건달불이라 불렀습니다. 한편 이때 전등을 밝히는 동력은 증기기관이었는데요. 증기기관을 식히기
위해 향원정 물을 썼는데, 그 바람에 연못이 뜨거워졌나 봅니다. 그곳에서
놀고 있던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한 거예요. 이걸 본 사람들이 또 난리를 피우죠. “물고기들이 저렇게 죽다니 이게 웬 괴변이냐!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면서요.
(274)
의열단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은 김원봉입니다. 항일무쟁투쟁에서는
쓰리 봉, 세 명의 ‘봉’
자가 들어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요. 첫 번째 봉이 김원봉, 두 번째 봉은 김두봉, 세 번째 봉은 양세봉입니다.
(305-306)
비슷한 이름도 많이 나오고, 중복되는 이름도 곧잘
등장하는 바람에 골치가 아픕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계속 쫓겨 다닐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름도 잘
바꾸고 조직 구성도 잘 바꿉니다. 이 시기에 가끔 이청천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가 실은 지청천이에요. 그런데 조직명의 경우는 바꾸는 데 제약이
따릅니다. 쓸 단어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지요. 앞의 고유명사로는
‘조선’이나 ‘한국’이나 ‘대한’, 그 뒤에
따라붙는 말로는 ‘혁명’이나 ‘독립’ 같은 단어밖에 쓸 게 없습니다. 그래서 자꾸 중복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름을 골라 쓰는 데 사회주의
진영과 민족주의 진영 사이에 약간의 차이는 있습니다. 조선이라는 단어를 쓰는 쪽은 주로 사회주의 쪽이고, 한국과 대한이라는 말은 민족주의나 자본주의 진영에서 많이 썼습니다.
(345)
그런데 모스크바 3상회의의 내용이 우리나라에 전해질
때 황당한 일이 벌어집니다. 당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를
보도한 어떤 신문이 헤드라인으로 이런 문장을 뽑았어요.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이 신문은 임시정부의 수립이 모스크바 3상회의의
첫 번째 내용이었다는 것은 전하지도 않았어요. 이걸 받아본 사람들의 마음은 어떻겠어요? 일제 강점기라는 길고 긴 터널을 뚫고 이제 막 광복을 맞이했어요. 그런데
다시 외국이 신탁통치를 하겠다니요. 거기에 미국은 신탁통치를 반대했는데 소련이 그렇게 하자고 제안했다니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당연히 소련은 나쁜 놈들이고, 미국은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소련은 사회주의니까
그들을 추종하는 좌익 세력도 덩달아 나쁜 놈들이 되는 거고요. 결국 그 신문의 보도 하나 때문에 여론이
확 뒤집혀버립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오보였어요. 대한민국 언론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오보였습니다. 이 오보로
인해 우익진영의 반탁반소운동이 거세어져 찬탁 입장을 밝혔다고 오해를 받은 송진우가 암살당하고 다른 인사들 역시 큰 위협을 받습니다.
(406-407)
“어머님을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을 이미 바치려고 결심했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이만 그치겠습니다.”
한성여중 2학년 진영숙 학생의 편지입니다. 열다섯 살 소녀가 목숨을 바칠 생각으로 거리에 나가다니, 얼마나
절절한 마음입니까? 소녀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해요. 경찰이
쏜 총에 가녀린 몸이 풀썩 꺾였지요. 민주주의를 위해 어린 목숨을 버린 겁니다. 그러자 이젠 초등학생들까지 나옵니다. “우리 언니, 우리 오빠, 우리 형들을 잡아가지 마세요!”하고 당당하게 외치면서요.
(481-484)
한편 저곡가의 구조는 농촌 사회를 어렵게 만듭니다. 당연히
이촌향도 현상이 나타났지요.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이러한 이촌향도 현상이 아주 심각했습니다. 우리나라 경제는 수출 중심입니다. 수출을 하려면 가격 경쟁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임금이 싸야
해요. 임금을 낮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쌀값이 싸야 하고요. 쌀값이
비싸면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려줄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저곡가 정책을 유지한 거예요. 당연히 농촌에서는 농사를 지어봐야 남는 게 없으니 자꾸 도시로 떠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도시로 사람이 몰리다 보니 인력이 남아도는 겁니다. 임금을 낮춰도 일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렇듯 이촌향도 현상으로 인해 저임금과 저곡가의 악순환이 벌어지고, 삶의
질은 아주 열악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