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두 번째는 지금까지 조명되지 않은 광주시민들을 중심에 두고 써보자는 관점이었다. 평전이 발간됐거나 신문과 방송 혹은 잡지에 집중인터뷰를 했던 분들은 널리 알려졌으므로 동어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인간의 보편적인 입장에서 참여한 신부님과 스님은 종교적 양심에 따라 행동한 분들이므로 뺄 이유는 없었다. 한편, 나중에 정치를 한 분은 순수성 측면에서 여러 해석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그분들의 역할은 가능한 한 줄였다. 따라서 <광주 아리랑>에 등장하는 인물은 식당주방장, 요리사, 시장 상인, 운전수, 페인트공, 용접공, 가구공, 선반공, 방직공장 여공, 예비군, 예비군 소대장, 대학교 교직원과 수위, 비운동권 학생, 영업사원, 재수생, 구두닦이, 농사꾼 등등이다. 이들도 805월에 계엄군과 맞서 싸웠던 엄연한 실존이자 최대 피해자였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나는 이분들을 한 분 한 분 광주 5.18 역사로서의 소설에 주인공이자 증인으로 영원히 기리고 싶었다. 화강암 같은 개결한 역사의 비석에 이름을 깊이깊이 새기듯.

 

(65-66)

김성섭이 여러 유인물 중에서 내민 것은 58일자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와 조선대학교 민주투쟁 위원회 이름으로 뿌려진 1시국 선언문이었다. 선언문 종류는 그것뿐이었으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민족적 양심과 민주적 지성의 부름으로 우리가 그간 역사앞에 외쳐왔던 목소리는, 타율과 강압에 의해 수그려들기도 여러차례 있어왔으나, 끝내 불붙은 민주에의 열정은 오늘의 역사적 전환기를 앞당겨 그 피의 도정을 계속 밟아왔고, 모골이 송연한 유산공포정치 아래서도 끝까지 투쟁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 중대한 역사적 시점에서 우리 대학인이 걸어야 할 길은, 무엇보다 구조적 수탈의 배후에 숨어있는 탐욕의 세력을 정확히 파헤치고, 이들이 어떻게 외세 매판자본과 결탁 반민족 작태를 멈추지 않고 있는가를 직시하여 조국의 민족정기를 진작시키는데 앞장서는 그 길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조국의 현실은, 독재자 한 사람의 영면이 마치 구약과 적폐의 일소인 양 오도시키려는 무리들 때문에, 민주민족 세력이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어쩌면 우리 세대의 미지막일지도 모르는 이 기회를 잃지나 않을까 하는 심한 우려를 낳고 있다....... “

 

(89)

14일 전남대생들의 시위는 처음 가두로 진출할 때는 최루탄을 쏘는 경찰과 격렬하게 맞선 양상이었는데, 오후 3시쯤에 시작한 민주성회와 이후 가두 행진 때는 뜻밖에 평화로웠다. 경찰이 수수방관하는 태도로 나왔던 것이다. 한복에 고무신을 신은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시민들에게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오후 6시까지 집회를 마치고 귀교하겠습니다라고 약속을 해서였다. 경찰은 전남대생들이 귀교할 때는 시위 행렬을 따라가며 교통정리까지 해주었다.

 

(98)

나라와 국민을 지키는 것이 군인이듯,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경찰의 본분이라고 안병하 경찰국장은 생각했다.

(중략)

시위진압 시 안전수칙 잘 지키기를 바란다. 시위 학생에게 돌멩이를 던지지 말라. 도망가는 학생은 쫓지 말라. 시민이 다치는 일 없도록 하라. 알겠는가?“

(중략)

부대 지휘관은 과격한 행동을 금하고 시위대를 추격하지 말라. 사과탄은 안면에 던지지 말고 공중에 투척하라. 최루탄도 각도를 유지해서 발사하라. 알겠는가?“

(중략)

시위 시민에게 절대로 자극적인 언행을 삼가라. 시민들의 야유와 비난이 있어도 절대 대응하지 말라. 시민과 우리 경찰의 안전을 최우선하라.“

 

(199-200)

문장우는 체격이 날렵하고 단단했지만 그의 친구는 둔하고 허약해 보였다. 허약한 친구가 문장우를 잡았지만 오히려 그가 끌려갔다. 창 너머는 바로 충장파출소였다. 학생 예닐곱 명이 진압봉을 든 공수부대원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그러나 충장로 지리에 밝은 학생들은 잽싸게 골목으로 달아나버렸다. 그러자 공수부대원들이 지나가는 행인을 아무나 붙들고 진압봉을 휘둘렀다. 청바지에 긴팔 티를 입은 여학생을 잡아당기더니 길바닥에 내팽개쳤다. 여학생의 티가 벗겨져 가슴이 보일 만큼 난폭하게 질질 끌고 갔다. 그뿐만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가던 사오십으로 보이는 남자를 붙잡은 뒤 진압봉으로 두들겨 팼다. 시민들 보란 듯이 자전거는 길바닥에 사정없이 던져 망가뜨렸다. 지켜보는 시민들은 두려움 때문에 아무도 항변을 못했다. 문장우 역시도 처음에는 말을 못하다가 꾸역꾸역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 개새끼들아. 니들이 대한민국 군인이냐? 죄읎는 사람들까지 왜 때려!“

 

(215)

선생님,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나도 답답하고 암울하기는 여러분 같아요.“

지금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합니까?“

여러분 마음을 나도 알아요.“

금남로에서 우리 형제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학생이 역시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울먹였다. 박행삼도 학생들과 같은 심정이었으므로 교사 신분을 잊어버리고 분필을 집어던지면서 눈물을 흘렸다. 박행삼이 비통하게 말했다.

여러분, 우리는 어째서 비극의 역사를 반복하는지 참담할 뿐입니다.“

 

(222)

국민들이 낸 방위세로 무장한 군인이 아닌가! 외적을 막으라고 지급한 총을 시민들에게 돌리고 있다니. 이런 군대는 필요 없다. 주인을 모르고 미쳐 날뛰는 군대는 없어져야 한다. 누가 이 군인들을 미치게 했는가? 시민을 살상하라고 명령한 원흉은 누구인가?’

 

(304-305)

전옥주의 가두방송 멘트는 전날보다 더 거칠었다.

형제 동생들이 죽어가는데 다리를 쭉 뻗고 잠이 옵니까. 공수들이 광주 시민을 다 죽이려고 하는데 도대체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갑니까. 일제 때 학생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난 광주입니다. 광주정신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광주시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팔십만 광주시민 모두가 나서 대한민국 군인이기를 포기한 공수 놈들과 싸워야 합니다.

 

(341)

그때였다. 바퀴 달린 시위 장갑차 한 대가 도청 분수대 쪽으로 달렸다. 장갑차 뚜껑을 열고 한 청년이 용감하게 상체를 드러냈다. 머리에 흰 띠를 두른 청년은 윗옷을 벗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도청 광장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원들이 그 청년을 향해 가차 없이 집중사격을 했다. 목에 총을 맞은 듯 청년의 머리가 푹 꺾였다. 공수부대원의 집중사격으로 충장로 입구 빌딩에 있는 노인과 동구청 앞의 학생과 처녀, 시민 등 여덟 명이 쓰러졌다. 도청 광장으로 돌진했던 시위 장갑차는 분수대를 돌아 노동청 쪽으로 빠져나갔다. 그제야 시민들이 쓰러진 사람들 중에 경상자는 동구청 뒤 홍안과로, 중상자는 전대병원과 적십자병원, 기독병원으로 시위 차량에 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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