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5)
거기에 악취까지 동반되어 공포스러운 광경은 더욱 끔찍하게 와닿았다. 썩어 가는 살에서 나오는 역겨우면서 달착지근한 냄새가 사방으로 수 km까지
뒤덮었다. 다가가는 병사는 시신을 눈으로 보기 전에 냄새부터 맡을 수 있었다. 악취는 그가 먹는 상한 빵에도, 마시는 고인 물에도, 입고 있는 넝마가 된 군복에도 배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싸운 로버트 C. 호프먼 중위는 20여 년 뒤 미국이 두 번째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이렇게 경고했다. “죽은 지의 악취를 맡아본 적이 있나요? 모래알 하나를 보고서 애틀랜틱시티의
해변을 떠올린다고 상상해 보세요. 생지의 악취와 오래 전에 죽어 쌓여 있는 병사들에게서 나오는 악취의
차이가 그 정도는 될 겁니다.” 호프먼은 시신을 묻은 뒤에도 <여전히
악취가 지독해서 몇몇 장교가 심하게 알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34-35)
클레어에게는 다행히도 헤럴드 길리스라는 선견지명을 지닌 외과의사가 얼마 전부터 영국 시드컵의
퀸스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얼굴 재건만을 전담하는 세계 최초의 외과의사 중 한 명이었다.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길리스는 기존에 초보적인 성형 수술 기법들을 개선하고 상황에 맞게 변형시킨 끝에 완전히
새로운 수술법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오로지 지옥 같은 참호에서 망가진 얼굴과 정신을 복구하겠다는
사명감으로 흔들림 없이 일에 매달렸다. 이 엄청난 도전 과제를 해내기 위해서 그는 사람들을 모아 독특한
의료진을 조직했다. 그들은 찢겨 나간 부위를 복원하고 파괴된 것을 재창조하는 일을 맡았다. 외과 의사, 내과 의사, 치과
의사, 방사선 의학자, 화가, 조각가, 가면 제작자, 사진사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재건 과정을 도왔다. 길리스의 주도하에 성형 수술 분야는 진화를 거듭했고 새로 개척된 방법들을 표준화하면서 이윽고 현대 의학의 한
분야로 적법하게 자리 잡기에 이른다. 그 뒤로 이 분야는 전 세계 성형외과 의사들의 재건과 미적 혁신을
통해 우리 자신과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방식에 도전하면서 점점 번창해 왔다.
(80)
그 해 봄에 새로운 이들이 길리스와 모리슨만은 아니었다. 저명한
과학자 마리 퀴리도 병원을 방문했다. 퀴리는 라듐을 발견한 유명 인사했다. 1903년에 여성 최초로 노벨상을 받았고 1911년에 또 한 번
받았다. 전쟁이 터졌을 때 퀴리는 연구를 중단하고서 자신이 연구하던 방사성 원소를 모두 납으로 코팅된
용기에 담아 보르도의 안전 금고로 옮겨 독일군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런 뒤 자신의 재능을
전쟁 쪽으로 돌려 병상, 발전기, 엑스선 기계, 사진 현상 암실 설비를 갖춘 차량을 고안했다. <꼬마 퀴리>라는 별명이 붙은 이 차량은 전쟁터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
세계적인 물리학자이자 화학자는 전시에 엑스선 기계를 갖춘 진료소 200곳을 세우고, 여성 방사선학 전문가 150명을 훈련하여 운영을 돕도록 했다.
(193)
길리스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칼을 움직여 환자의 가슴에서 특징이 사라진 얼굴에 이식할 피부를
떼어 내기 시작했다. 그 의료진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가슴에
그려진 얼굴 전체를 떼어내어 손상된 얼굴을 덮을 거예요. 코는 갈비뼈에서 떼어낸 연골을 넣어 만들 거고요. 살아있는 진짜 피부로 덮을 겁니다. 피부 조직은 자연적으로 공급되는
피를 받아서 이식편처럼 새 자리에서 자랄 거예요. 그런 뒤 남은 흉터를 다 없앨 겁니다.”
(262-263)
온갖 교훈을 터득하고 혁신을 이루었음에도 퀸스 병원의 길리스 곁에는 환영받지 못하는 동료가
늘 함께했다. 바로 실패였다. 전쟁의 막바지에도 초창기 못지
않게 환자의 죽음은 심한 타격을 안겨주었고 그는 조종사의 죽음에 황망해했다. 길리스는 스스로를 비난했고
<완벽한 결과를 얻으려는> 욕망에 빠진 바람에
수술 시기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고 나중에 인정했다. 그는 럼리의 얼굴 전체를 한꺼번에 재건하려고
시도하는 대신 얼굴의 4분의 1씩을 단계적으로 재건했어야
한다고 회상했다. 그는 럼리에게 <아주 단호한 태도를
취해서> 수술 시기를 미루고자 설득했다면 결과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온갖 질문을
했다. 무거운 심경으로 그는 이렇게 토로했다. <이
용감한 친구가 좀 더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다면 좋았을 것을.>
(272)
길리스는 으레 그랬듯이 수술을 앞두고 자신의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는 발라디에의 편지를 옆에 두고서 벨의 얼굴을 재건할 계획을 마음속으로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가장 걱정되는 부분은 코였다. 코는 감염되었음에도 기적처럼 남아
있었다. 하지만 코가 허약해진 상태이기에 사소한 실수만 해도 아예 망가질 수도 있다는 것도 알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수술 시간이 다가오자 길리스는 자신이 적고 스케치한 내용들을 살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을 시간이 되었을 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전
프로그널 땅의 중심이었던 본관을 나섰다. 그는 새로 깎은 잔디밭을 가로질러서 새로 지어진 건물로 향했다. 환자들이 지내고 있는 병실과 그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는 수술실이 거기에 있었다.
(309)
그 소식이 알려지자 수십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한
사람은 길리스가 기사 작위를 받자 이렇게 썼다. <선생님께서 제게 보여 준 경이로운 친절과 제
삶을 살 가치로 있게 만들어 준 모든 일을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또 한 환자는 자신의 위턱
일부가 사라진 적이 있다고 말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고 편지를 보냈다. <너무나 멀쩡해 보여서 11년 전에 거의 불에 다 죽을 뻔했다고 말하면 믿으려 하지 않아요.> 길리스의
노련한 손이 닿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삶이 과연 어찌 되었겠느냐고 말하는 편지도 많았다. 이렇게 쓴 사람도
있었다. <선생님이 있는 곳으로 가기 전의 나 자신을 생각하면 정말로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길리스는 그들의 얼굴을 복원했지만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이 워낙 많았기에 그에게는
얼굴 없는 이들로 남았다. 한 병사는 이렇게 썼다. <선생님이
저를 기억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부상병 중 한 명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우리가 선생님을 기억하니까요.>
(316-317)
성형수술로 돈을 벌었든 못 벌었든 간에 딜리스는 미용 수술의 정당성을 둘러싸고 대중뿐 아니라
의료계 내부에서 나오는 의문들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오로지 허영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수술을 한다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환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만들어 줄 코가 헛수고가 된다면 내가 이런 일을 굳이 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길리스가 때때로
내면의 갈등을 느꼈다는 것은 분명하다. 얼굴의 주름을 제거하다가 문득 내가 그저 돈을 벌기 위해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들면서도 수술을 받은 이들의 얼굴에 피어나는 환한 표정을 볼 때면 과연 환자를 거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딜리스는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에게는 사소해 보일 일탈이 당사자에게는 심한 고민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당시의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미용 수술이 원하는 이에게 약간의 추가 행복을
안겨주기에 정당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결국 그는 그렇다고 결론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