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나는 술 마시는 느낌을 사랑했고, 세상을 일그러뜨리는 그 특별한 힘을 사랑했고, 정신의 초점을 나 자신의 감정에 대한 고통스러운 자의식에서 덜 고통스러운 어떤 것들로 옮겨놓는 그 능력을 사랑했다. 나는 술이 내는 소리도 사랑했다. 와인 병에서 코르크가 뽑히는 소리, 술을 따를 때 찰랑거리는 소리, 유리잔 속에서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 술 마시는 분위기도 좋아했다. 술잔을 부딪치며 나누는 우정과 온기, 편안하게 한데 녹아드는 기분, 마음에 솟아나는 용기.

(34-35)

다른 사람이 진정한 버전의 나를 눈치채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파티장이나 술집에서 다섯 잔째 와인을 기울이는 나를 본 사람들도 그지 조심스러운 사람이 어쩌다 긴장을 풀고 조금 흐트러지는 정도로 여겼을 뿐이다. 친한 친구들은 내 눈을 보면 술에 취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했다. 내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눈빛이 흐릿해지는 것이 보이면, 내가 내 속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약간 비틀거리거나 평소마다 목소리가 조금 커져도 사람들에게 취했다는 말을 듣는 적은 거의 없었다. 나는 조용하고 얌전하게 술에 취했다. 어수선해지는 건 내 머릿속일 뿐이었다.

(85-86)

충분하다니? 알코올 중독자에게 그것은 생경한 미지의 언어다. 충분히 마시는 일이란 없다. 우리는 언제나 술이라는 보험을 찾고 또 찾는다. 첫 잔을 마시고 따뜻한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면 그다음에는 그 느낌을 지속시키는 것, 그걸 강화하고 증대하는 것, 그걸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아는 리즈라는 여자는 알코올 중독을 탐욕의 병이라고 불렀다. 알코올 중독자들이 술에 느끼는 허기, 집착, 불안, 끝없는 결핍감을 일컬은 말이었다. 알코올 중독자에게 술이란 많을수록 좋고 많아야 한다. 석 잔을 마실 수 있다면 왜 두 잔만 마시는가? 네 잔을 마실 수 있는데 왜 석 잔만 마시는가? 도대체 왜 멈추는가? 그리고 어떻게 멈추는가?

(101)

술을 마시면 내 마음 가득한 더러운 기분이 사라졌어요.”

(107)

술을 마시면 내가 원하는 성숙한 모습의 내가 되어 메를로의 섬세한 맛을 논하고, 그것이 구이 요리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를 떠들 수 있었다. 나는 자리에 잘 어울렸고, 삼촌들, 숙모들, 부모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는 것도, 술잔을 입에 댄 채 다른 사람들이 술 따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다 편안했다. 나는 술을 통해서 상태를 변화시킨 것 같았고, 그런 느낌은 내게 안도감을 주었다. 여기에서 두려움+=용기라는 또 하나의 방정식이 생겨난다.

(114)

비극은 그 보호막이 작용을 멈추면서 시작한다. 변신의 수학은 바뀐다. 이것은 불가피한 결말이다. 장기간에 걸친 과음은 우리 인생을 망가뜨린다.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신과 맺은 관계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업무에 장애가 발생한다. 재정 문제, 법적 문제에 부딪히거나 경찰과 부딪힐 수도 있다. 고통이 커지면 어느 순간 옛 수학(불편+=불편 없음)은 전처럼 들어맞지 않게 된다. 편안함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소심함이나 두려움, 분노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좀 더 깊고 근원적인 것을 찾게 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방정식은 더욱 강력하고 완전한 내용으로 바뀐다. ‘고통+=자기 망각이라는.

(138)

알코올은 우리를 그런 어처구니없는 불능의 방정식으로 몰아간다. 자신의 힘을 느끼고자 상대를 성적으로 유혹하고, 성적 매력을 발휘하려고 술을 마시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그 모든 것이 거짓임을 알고 있다. 그렇게 느끼는 힘은 작위적이고, 자기 내면의 것이 아님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차 안에서 그렇게 로저의 입김과 손길에 몸을 맡긴 채 멍청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움쭉달싹할 수 없었다. 반발의 거품이(그에 대해, 그리고 나에 대해) 끓어올랐지만, 그것은 아주 미미했다.

술은 거짓된 미혹이다. 알코올은 힘을 주지만, 준 만큼 그대로 앗아간다.

(139-140)

알코올 중독자들은 책임 회피의 귀재들이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늘 타인이나 사물 탓으로 돌리는 것, 이것은 알코올 중독자를 가려내는 징후기도 하다. 이들은 관계가 꼬이는 엉켰을 때 자신이 잘못한 부분을 좀처럼 인정하지 못한다. 그해 여름 나는 데이비드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언제나 그에게 의문에 찬 눈길을 던졌다. 그에게는 뭔가 부족했다. 뭔가 마땅치 않았다. 나한테 문제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 내가 다른 사람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도, 내가 가진 거대한 결핍감의 크기도, 또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내 소망의 부조리함도 감지하지 못했다.

(164)

술이 없으면 나는 우리에 갇힌 동물 같았다. 그러니 늘 술을 끼고 살 수밖에 없었다. 술이 없으면 나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 생각과 팔다리가 내 것이 아닌 듯했고, 그것들을 사용할 방법도 나를 멀리 비켜가 있는 것 같았다. 특히 일요일 아침이면 늘 그런 느낌을 받았다. 홀로 부스스 잠에서 깨어나면 텅 빈 하루의 시간밖에는 아무것도 나를 기다리는 것이 없었다.

(166-167)

혼술이 역설은(그러면서 정말로 위험한 것은) 우리가 정서적으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만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혼자 술 마시던 시절, 술이야말로 내 진정한 감정의 문을 열어주는 유일한 도구라고 느꼈다. 술을 마시고 녹아내린다. 술을 마시고 녹아내린다. 술을 마시고 흐느낀다. 술을 마시고 다른 사람에게 전화 걸어 고통을 호소한다.

(185-186)

몇 가지 규칙도 세운다. 혼자서는 마시지 않는다. 아침에는 마시지 않는다. 직장에서는 마시지 않는다. 주말에만 마신다. 오후 5시 이후에만 마신다. 술 마시러 가기 전에 우유나 올리브유를 한잔 마셔서 위벽을 보호하고 지나치게 취하는 일을 막는다. 술 한잔 마실 때마다 물 한 잔을 같이 마신다. 이렇게 자신에게 음주를 조절할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자 어떤 일이든, 그야말로 어떤 일이든 시도한다.

(226)

술 깬 아침의 막막한 걱정. 내가 아는 알코올 중독자들은 모두 그런 경험이 있고,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다. 파티 다음날 잠에서 깨어 전날 과연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짓을 했는지, 오전 내내 걱정에 잠겨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참다 못하면 파티 주최자에게 전화를 걸어 그 반응을 살핌으로써 우리 행동의 단서를 찾아내려 하기도 한다.

(235)

술은 망상을 낳는다. 술과 함께 하는 인생은 모험 가득한 낭만의 행로로 여겨지고, 밝은 햇살 아래 출렁이는 눈부시고 역동적인 바다처럼 느껴진다. 단 한 잔의 술로도 우리 가슴은 에너지와 열정에 부풀어 오르고, 조금 전까지 가슴을 짓누르던 문제를 몽땅 해결할 수 있을 듯 자신만만해진다. 하지만 진실은 그 반대다. 술은 우리 인생을 정체시키고, 바위처럼 그 자리에 붙박아둔다.

(260)

술을 끊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런 느낌을 말한다. 인생이 움직임을 잃고 색깔을 잃고 마침내 덜컥 멈춰서는 듯한 느낌. 우리가 도달한 곳은 전혀 원하지 않던 곳(마음에 안 드는 직장, 건강하지 않은 관계_이고, 탈출구는 짐작되지 않으며, 상황을 변화시킬 방법도 보이지 않는다.

(270-271)

알코올 중독에 오래도록 빠져 있다 보면 비디오 속에 사는 듯, 남이 써준 대본을 읽는 듯, 인생의 사건에 무력한 느낌을 받는다. 인생은 수많은 장면이 뒤엉킨 꼴사나운 연극이 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맡은 역할을 소화하는 것이다. 왼쪽으로 입장, 오른쪽으로 퇴장, 대사를 읊고, 평론가들이 이 공연에서 오지 않았기만을 기도한다. 알코올 중독자들의 인생 대본에 핵심을 이루는 요소는 바로 기만이다.

(330)

그 순간 나에 대한 오기가 솟았다. 처참한 내 인생이 한눈에 들어왔다. 술 마시고 싸우고 이 남자 저 남아에게 뛰어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민망한 인생, 지루한 인생, 게다가 극도로 피곤한 인생이었다. 결국 남는 게 무엇인가? 이 모든 소동이 도대체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우리는 고통스러운 선택을 피하고자 술을 마시지만, 다음날 아침 깨어나면 그 선택은 그대로 남아 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은 개의 목에 걸린 줄처럼 우리를 끌어 내리고 우리의 전진을 방해한다. 모멸감, 이 모든 일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아찔함. 마이클, 줄리안, 우울증, 불안, 거짓말, , , …… 내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고 또 흘러갈 것이다. 아버지의 인생이 그랬듯이.

(334-335)

내가 마지막 술을 마신 장소는 마이클의 집 거실이었고, 시간은 자정 직전이었다. 재활센터 입원 사실을 아는 몇몇 사람 중 필라델피아의 친구 샌디가 보스턴까지 와서, 입원 전 마지막 저녁을 함께 했다. 식전에 맥주와 와인을 마셨고, 식사 중에는 와인을 마셨으며, 식후에는 바에 가서 코냑을 마셨다. 샌디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그녀의 잔에 담긴 술도 훔쳐 마셨다. 마이클의 집에 돌아오자 적포도주 한 병을 땄다. 마이클의 말에 따르면, 나는 거실에 우뚝 서서 이제 자러 간다고 말하고는, 적포도주 한 잔을 쭉 들이켜고서 비틀비틀 거실을 나갔다.

(355)

개선이라는 말은 허약한 느낌이 들며, 심지어 기만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술을 끊는 것은 단선적 의미의 개선에서 한 발짝 나아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에 관련이 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파도와 두려움, 감정, 성공과 실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를 통해 성장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 삶은 개선된다(적어도 개선될 가능성은 생긴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인생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면, 깨어 있는 정신으로 우리가 만든 유대관계를 존중하며 행동한다면 삶의 개선이란 거의 저절로 이루어진다.

(362)

술을 끊고 나서의 첫날 아침 느낌을 이야기하고 싶다. 마치 나의 옛 인생에서 쑥 뽑혀 나와 맑고 깨끗하고 독립적인, 꽃과 빛이 가득한 새 들판에 내려진 느낌이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런 느낌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처음 몇 주가 지나는 동안 내게는 자신감과 안도감, 드디어 내 인생의 개선에 나섰다는 인식에서 나온 희망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366-367)

나는 알코올 중독자다. 그러니까 술을 마실 수 없다는 자시 인정은 밀물과 썰물처럼 한순간 차올랐다가 다음 순간 빠져버린다. 술 마시던 시절의 일을 돌이켜보면, 내가 올코올 중독자라는 증거는 많고도 많았다. 알코올을 들이켜면 내게는 강박 충동과 자제력 상실이라는, 다른 사람들은 겪지 않는 일련의 생리적 반응이 일어났다. 그래도 나는 아직 알코올 중독이 영구적인 진해성 질병이라는 개념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내가 술을 마시고 자제력을 잃지 않았던 적도 있지 않은가? 어쨌든 알코올에는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순기능도 있지 않은가? 그냥 꼭 한 잔만 하면 안 될까? 이런 질문은 수많은 알코올 중독자에게 같은 두려움과 걱정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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