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72) 

나이의 역사에는 어떤 정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오십 세에 쓰러집니다. 우리가 동경하던 성격적 특징은 왜곡되고, 오만함은 희한으로 변하며, 유머에는 요실금 환자의 지린내가 나고, 매력은 변절되어 버립니다. 청소년기의 변화와 비교할 수 있겠으나 더 비참하죠. 목소리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이거나 사유의 융통성이 그대로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랜 친구들을 보석처럼 간직하세요. 여전히 함께 있을 때 편한 사람을요. 점점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더 지혜로워지거나 더 흥미로워지거나 더 관대해진 사람들이죠. 끔찍한 난파 사고의 생존자라도 되는 양 곁에 그들을 잡아두세요.


(73)

빅토르 위고가 <파리의 노트르담>을 출간했을 때 당시 상류사회가 전적으로 그 작품을 추앙해주었다면, 그거야말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에요. 위고가 충분히 버텨온 일이라면 당신에게도 분명 괜찮을 겁니다. 그는 사람들의 혹평을 받았지만 한탄하는 데 시간을 보내지 않았어요. 조용히 살고 싶었다면 사륜마차 속에서 지방 촌구석의 후작 부인에게 무도회가 얼마나 좋았는지 알려주는 편지 따위나 썼겠죠. 사람들이 당신 면전에 침 뱉는 걸 원치 않는다면서 지금 당신은 개판 오 분 전인 작가 행세를 하고 있네요.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고 남자답게 대처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77)

오늘날은 모두들 좋은 소리만 듣고 싶어하죠. 모두들 착실한 학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교실 구석 난방기 옆에 앉아, 헛소리를 지껄이며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얼간이는 오늘날엔 인기가 없죠. 프레베르의 시에 나오는 열등생은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기업에서 쓰는 언어밖에 모르니까요. 진지함, 책임감, 고위직의 관점, 최고 수치의 기록, 우리가 견뎌야 할 유일한 도전은 흥미롭지 않습니다. 난장판은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 손에서 시작해야 즐거운 일이 되는 겁니다.


(89)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내게 무척이나 새로운 문제가 제기된 셈입니다. 열정은 더는 원할 때 진열장에서 꺼낼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나를 끌어당기는 게 없어요. 빛나는 것도 없고 나를 뒤흔드는 것도 없습니다. 나는 백만 번이라도 홀로 하는 사랑으로 고통받거나 죽는 편을 택할 거예요. 버림받거나 배신당하거나 창피를 당하거나 학대받는 편을 택할 거예요. 권태에 빠지는 것보다 그 어떤 상처라도 받는 편을 택할 겁니다.


(131-132)

중독. 단어의 어원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봤습니다. “중세 시대에 ‘addictus(‘바친, 헌신한이라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라는 단어는 맹세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약속을 어긴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주인에게 속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주인에게 속한 존재는 여성 혹은 노예, 타인의 선한 의지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시민의 단계까지 지위가 강등되었다는 뜻으로, 자신의 이익은 고려하지 않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므로 중독된다는 것은 언제나 자신의 전적인 권력을 포기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의 우선권을 망가뜨리기, 약속을 지키거나 빚을 갚을 수 없는 상태로 스스로를 몰아가기, 아기는 요람에서부터 부모에게 빚을 물려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아기가 자란 먼 훗날 DNA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시기가 오면, 아버지가 자장가를 불러주는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어머니를 때리고 가정을 파괴하는 사람이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겁니다. 당신이 물려받은 이야기가 관건이죠. 나는 어떤 약속을 저버렸기에 중독자가 될 만했는가? 그 질문은 내가 어떤 배신을 물려받았는가에 가깝습니다. 부르주아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내가 살아온 삶을 초월합니다. 부자들은 자신들의 소박한 가족사에 열렬한 애착을 가지고 있죠. 우리가 중독에 빠져드는 과정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맥락과 늘 맞닿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빚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방식인 동시에 빚을 제거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나의 호흡을 방해해서, 엄청난 양의 마약을 스스로 주입함으로써 그 언어를 뱉어내는 겁니다. 혹은 마약을 통해 인식을 끊어버림으로써 나를 둘러싼 어른들의 수치심을 쫓아버리려는 건지도요. 상황을 잠시 떠나고, 간신히 빠져나오는 겁니다.


(221)

팬데믹이 끝나도 이성의 이대로 되돌아지 못하리라는 걸 모두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계 신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휴대전화 신, 인터넷 신, 핵폭탄 신, 비행기 신…… 이 모든 신은 우리를 무가치하다고 느끼게 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죽는 것에만 가치를 둡니다. 우리는 기계를 통해 진보한 존재가 아닙니다. 기계에 잡아먹힌 존재입니다. 우리가 만든 피조물이 권능에 경악하고 말았습니다. 기계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 속 하나님은 믿음을 입증하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의 몸을 내려치라고 요구했죠. 절대 권력을 숭배함을 입증할 때 우리가 아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권능을 위해 죽는 것, 바로 그 점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조잡한 바이러스로 죽는 걸 참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동차 사고는 멋진 죽음이 되는 겁니다!


(254-255)

사회적 명성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커다란 격차에서 발생한 산물이에요. 자기 마을이나 계층에서 이름을 얻는 그런 문제가 더는 아닙니다. 19세기 초 세공 장인의 명성이 어떤 것이었는지 잘 모르지만, 아마도 당시에는 가치가 있었을 겁니다. 어떤 영역에서 노력을 제공하고 그 분야에서 재능을 가지고 있었겠죠. 최선을 다해 윤리적 방식으로 작업하면, 주변 사람에게서 존경과 애정이 보상으로 따라왔을 테고요. 사실 그에 대해 잘 모릅니다. 내가 아는 범위는 20세기입니다. 미디어로 전파되는 명성이죠. 어떤 계층이 선택한 개인에게, 그를 바라보는 이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권리가 부여되었습니다. 대형 스크린 앞 관객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연기가 어떠하든 변화시킬 수 없고, 절대적으로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러요. 영화는 전개될 것이라고 예고한 대로 전개됩니다. 텔레비전 방송이 방영될 때도 마찬가지요. 브라운관 앞에서 무슨 짓을 하든지 상관 없어요. 그 과정에서 어떤 충격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이 도입되면서 상황이 바뀌었어요. 사람들이 개입하게 된 거죠. 개입에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 모욕임을 다들 바로 이해했습니다.


(285-286)

헛소리입니다. 감정은 오존층에 뚫린 구멍이고 기후변화이며 변함없는 화산 용암이자 바이러스의 폭격입니다. 공장이나 극장이 아니라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감정을 기쁘게 맞이할 수 없습니다. 감정은 당신을 복종시키기도 합니다. 늘 미소를 따다가도, 겁을 집어먹을 수도 있어요. 감정은 당신을 뒤죽박죽으로 휘저어 놓습니다. 감정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다듬을 수 있는 수공예품이나 개인의 창작물이 아닙니다. 감정은 도자기 그릇이 아니니까요. 우리 세대에 급격히 퍼진 감정은 절망입니다. 집단적으로 퍼져 있어요. 지구 중심에 요란하게 상륙했습니다. 우리 모두를 봉기시킨 것은 바로 그 감정입니다. 각자 사소한 메시지, 자신만의 공식을 가지고 돌진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당신이 세계의 지도자이든 대양의 중심을 떠다니는 표류물이든 상관없이 감정은 동일합니다. 우리는 감정에 구애받습니다. 그것은 다른 무엇도 대적할 수 없는 화음이며, 무슨 일이 발생하든 울려 퍼질 것입니다.


(286)

당신의 절망을 파괴하는 유일한 기술은 희망입니다. 무척 간단한 문제죠. 희망은 절망을 지우는 단 하나의 해독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압수당한 것 또한 희망입니다. 디스토피아가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지평선이 되어버린 겁니다. 미래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되리라 믿는 건 머저리라는 방증입니다. 그것은 승리한 전체주의입니다. 획일화된 신념이 우리 상상의 세계를 빼앗은 셈이죠. 대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희망은 멍청이들에게나 유익한 겁니다.


(398-399)

클레망틴과 오 일간 휴가를 다녀왔어요. 부끄러운 아버지 증후군에 시달리는 것 같아요. 아이와 함께 있을 때 불편하고 지루하거든요. 봉쇄 기간에 아이와 마음을 털어놓고 지내겠다는 계획은 흐지부지되었어요. 함께 있는 시간이 싫은 건 아니지만 같이 나눌 이야기가 없더군요. 아이는 주말 내내 휴대전화에 붙어 지냈습니다. 그 나이대의 전형적인 모습이죠. 누군가 뭘 좋아한다고 하자마자, 최신 트랜드를 알기 위해 휴대전화를 손데 쥐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쉬지 않고 셀카를 찍어대는데, 그때가 아이의 생기 있는 얼굴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에요. 한번은 세관원에게 가는 길에 아이가 한 장 찍어달라고 부탁했어요. 결국 사진을 잘 찍지 못했습니다. 예전에 제가 찍은 꼴불견 사진에 얽힌 우스꽝스러운 추억을 말해주려고 했는데, 정면 포즈를 피하라고 말하는 순간 아이가 움츠러들더군요. 늙다리 바보가 된 기분이었고, 아이와는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괜히 아이가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제가 아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겁니다. 노력하고 싶은 기분조차 들지 않아서 제가 얼마나 자책하고 있는지 상상도 못 할 겁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