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의 여행 페이지터너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빛소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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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또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이란다. 아빠가 슈테판 츠바이크를 늦게 알게 되어 아직 읽을 그의 책들이 많다는 것이 행복하구나.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들을 출판사에서 꾸준히 출판해주는 것도 고맙고. 아빠가 슈테판 츠바이크를 좋아하다 보니 책 소개를 제대로 보지 않고 구매 버튼을 누르는 경우가 있거든. 그래도 아빠는 같은 책을 사지 않는 정도의 기억력은 가지고 있거든. 그런데 같은 책인데 우리나라에서 출간하면서 다른 출판사에서 다른 제목을 달고 나오는 경우가 있단다. 책 소개를 제대로 보지 않고 구매 버튼을 누르다 보니 이런 경우 같은 작품의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 출판한 두 권의 책을 구입하는 경우가 있구나. 특히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은 그런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번에 아빠가 읽은 <과거로의 여행>이란 책도 그런 책이란다.

이 책에는 <과거로의 여행> <어느 여인의 삶에서 24시간>이란 두 작품이 실려 있단다. <과거로의 여행>을 한참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두 사람이 이별을 하기 위한 여행을 가는 것이 아빠가 사 둔 슈테판 츠바이크의 <이별 여행>과 혹시 같은 작품 아닌가? 하는 생각이 선뜻 들더구나. 그래서 그 책을 찾아 확인해 보니, 역시나 같은 작품인데 우리나라에서 다른 제목을 달고 나온 것이더구나. 동일 작품이라면 우리나라에서는 출판사가 다르더라도 하나의 제목으로 출간하는 법을 마련하면 좋겠구나. 한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좀 아니지 않니? 그래서 아빠가 이 소설의 원제목을 찾아봤어. 그런데 왜 원제도 다르게 나와 있지? <과거로의 여행>이라는 책의 원제는 “Widerstand der Wirklichkeit”로 적혀 있었고, 구글 번역기를 돌려보니 현실에 대한 저항으로 번역되었어. <이별여행>이라는 책의 원제는 “Die Reise in die Vergangenheit”로 적혀 있었고, 구글 번역기를 돌려보니 과거로의 여정이라고 번역되었단다. 둘 중 하나의 출판사의 실수인가? 책 내용이 똑같은데, 두 출판사가 원제가 다르게 적혀 있다니어찌된 일인가.

<과거로의 여행>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책제목과 같은 <과거로의 여행> <어느 여인의 삶에서 24시간>이 실려 있고, <이별이행>이라는 책에는 책제목과 같은 <이별여행> <당연한 의심>이 실려 있단다. 다행히 같이 실려 있는 작품은 서로 다르더구나. 가만, 그냥 제목이 다르니까 다르겠거니 생각했는데 혹시 이 경우도 제목만 다른 거 아냐? 다시 책 소개를 자세히 읽어보니 다행히 다른 소설인 것 같구나. 서두가 길긴 했는데, 그러면 이번에 읽은 책 <과거로의 여행>을 이야기할게.

 

1.

그럼 먼저 <과거로의 여행>을 이야기해줄게. 집안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화학박사가 된 루트비히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란다. 그는 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사장의 신임을 얻어서 사장이 병에 걸려 출근을 하지 못할 때 사장의 집에서 개인 비서 겸 연구를 했단다. 그리고 그곳에서 운명의 여자를 만났으니 사장의 부인이었어. 하지만 사모님이니 속으로만 짝사랑을 했어. 그런데 사모님도 루트비히에게 남몰래 호감을 가지고 있었단다. 2년이 흐르고, 사장은 루트비히를 더욱 믿게 되었고 높은 연봉을 주면서 멕시코에서 2년간 출장을 다녀오라고 했어. 루트비히에게는 정말 좋은 기회였으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사장님의 부인이었지. 멕시코로 떠나고 나면 자신의 마음을 전달할 기회가 없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루트비히는 용기를 내어 부인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부인도 그 마음을 받아주었단다. 10일 후면 멕시코로 떠나는데, 10일 동안 그들은 비밀 연애를 했단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면서 아주 위험하게….

멕시코에 가서는 편지를 주고 받긴 했지만 머릿속에는 늘 부인 생각뿐이었어. 부인을 잊기 위해 열심히 일에 몰두를 하였단다. 그리고 2년이 흘러 기쁜 마음으로 귀환 준비를 하고 있을 즈음 유럽에서는 전쟁이 발발했단다. 이 책이 1929년에 쓰여진 것이므로 이 전쟁은 1차세계대전일 듯 싶구나. 그렇게 전쟁이 일어나자 루트비히의 귀환은 무기한 미뤄지고, 멕시코에 남아 더 일하라는 사장님의 지시가 내려졌어. 전쟁 때문인지 부인의 소식도 끊기고, 루트비히도 부인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희미해져 갔어 그리고 멕시코에서 어떤 사업가의 딸과 결혼을 하였고 또 4~5년이 지났어.

그리고 종전 소식이 전해졌단다. 그러자 다시 부인 생각이 나서 오랜만에 편지를 보냈어. 두 달 뒤 답장이 왔는데, 남편은 전쟁이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죽고 자신은 아들과 잘 지내고 있다고 하면서 결혼도 축하한다고 했어. 그 이후 다시 편지로 서로 안부를 주고 받았단다.

….

사업차 출장으로 베를린에 가게 되었을 때 부인에게 전화를 했단다. 그래서 그들은 프랑크푸르트에서 9년만에 다시 만난 것이란다. 9년이라는 세월 동안 세상도 변하고 그들의 몸도 많이 변했겠지만, 9년 전 서로에게 느꼈던 그 마음은 그대로였단다. 하지만 루트비히는 결혼을 한 몸이니 둘은 서로 본심을 숨기고 서로 예의를 지키면서 만났단다. 루트비히는 자신의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부인에게 접근했지만, 부인은 루트비히의 마음을 알지만 그를 밀어냈단다. 집에는 하인들의 시선들도 있고 말이야. 그래서 둘은 하이텔베르크로 여행을 가기로 했단다. 어쩌면 그들 생에 있어 둘이 가는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었어. 과거를 떠오르게 하는 여행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은 <과거로의 여행>인가 보구나. 그리고 다른 출판사에서 제목으로 뽑은 <이별여행>도 이해가 가는구나. 이 여행을 끝으로 둘은 각자의 삶을 살아갈 테니 말이야.

그들은 하이델베르크 행 기차를 탔는데, 하필 군인들이 잔뜩 탄 기차여서 둘 만의 은밀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단다.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한 그들은 조심스럽게 호텔에 들어갔는데 다행히 빈방이 하나 있어서 들어갔는데 방은 지저분하고 사용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그런 방이었어. 그들이 원했던 여행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기차에서는 둘 만의 오붓한 대화를 나누고, 깨끗한 호텔에서 행복한 시간을 기대했을 텐데그런 방에 있기 보다 산책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산책을 했단다. 둘은 과거 속을 거닐 듯 산책을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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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저 그림자는 길 위에 늘어뜨린 그들의 그림자였다. 그것은 그들만의 고유한 말을 다루면서 그 이상의 뭔가를 일깨워 주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몸을 떨면서 그 인식의 두렵고 참된 뜻을 깨달았다. 시는 예언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두 그림자는 과거를 찾아 헤매던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더는 현실이 아닌 과거를 향해 애매모호한 질문을 던지던 그림자, 살아남으려고 하지만 더는 그럴 수 없는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그녀와 그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지만, 끊임없이 과거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썼던 것은 아니었을까? 발아래 드리워진 저 검은 유령처럼 그들은 헛된 노력에 힘을 탕진하며, 달아나고 멈추는 유희를 계속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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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그렇게 끝이 났단다. 그 이후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으로 막으려고 해서 길을 찾아 오는 것인데, 나약한 사람의 의지로 사랑을 잊고 각자의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2.

두 번째 작품은 <어느 여인의 삶에서 24시간>이라는 소설이란다. 이 소설은 참고로 1925년에 출간한 소설이란다. 주인공 가 지중해 연안 휴양지 리비에라 펜션에서 머물 때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기란다. 그 펜션에는 일곱 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프랑스 청년 한 명이 이 펜션으로 오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단다. 그 프랑스 청년은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용모도 잘 생긴 청년이었어.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어. 프랑스 청년은 해박한 지식에 말솜씨가 좋았어. 그날 밤 11시 해변에 갔던 한 부인이 돌아오지 않은 일이 일어났어. 나중에 그 부인의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남편만 두고 그곳을 떠난 거야. 그 부인은 앙리에트 부인이었는데 그날 온 프랑스 청년과 함께 펜션을 두고 떠난 거야.

사람들은 식탁에 모여서 이 일을 두고 백분토론이 벌어졌어. 대부분이 부인을 흉보았지만, ‘는 앙리에트 부인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어. 그러자 사람들은 에게 큰소리로 반박을 했고 식탁은 큰 소리가 오가며 시끄러워졌단다. 이때 백발의 C부인이 중재를 하면서 식탁은 조용해졌단다. 이후에는 다른 손님들은 에게 앙금이 있는 것 같았는데, C부인만 에게 관심을 가졌단다.

가 펜션을 떠나기 이틀 전 C부인이 에게 20여년 전 있었던 사건(?)에 대한 편지를 써서 보냈단다. 그 사건에 대한 의 의견이 어떤지 궁금하다면서 말이야. ‘는 정성을 들여 답장을 썼단다. 부인은 에게 만나자고 했고 부인은 20년 전 자신의 24시간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어.

C부인의 현재 나이는 67살이고, 그 사건이 있었던 것은 42살 때라고 했어. C부인은 그보다 2년 전인 40살 때 남편이 죽어 홀로 되었다고 했어. C부인은 18살에 결혼을 해서 아들들은 이미 성인이 되어 외지에서 지내고 있어서 C부인은 홀로 지내야 했어. 그래서 여행을 가기로 했어. 몬테카를로에 갔다가 카지노에 가게 되었어. 남편이 생전 카지노의 전술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생각나서 C부인은 남편의 조언대로 사람들의 손만 유심히 봤어.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나는 거야. 손 꺾는 소리가 나는데 마치 손이 말을 하는 것처럼 카드 게임의 향방을 알 수 있는 듯한 손의 놀림과 우드득 소리어쩔 수 없이 그 손 주인의 얼굴을 봤는데, 얼굴은 24살 정도의 젊은이인데 얼굴에도 자신의 패가 다 드러나는 그런 얼굴이었어. 그야말로 포커페이스가 안되는 카지노에서는 최악의 얼굴이었지. 결국 그 젊은이는 돈을 다 잃고 자리를 뜨는데 얼굴 표정은 더 안 좋았어.

혹시 바쁜 짓은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었지. 그래서 C부인은 그를 따라 나섰고, 삶을 좌절한 듯한 그를 보게 되어 그를 도와주려고 말을 걸었어. 그러자 그 젊은이는 C부인을 창녀로 오해했어. 그리도 C부인은 그 젊은이를 호텔로 데려다주고 돈도 주었단다. 시간이 늦어 C부인도 그 호텔방에서 묵었어.

다음날 그 젊은이가 일어나기 전에 호텔을 빠져 나오려고 했지. 문득 젊은이의 얼굴을 봤는데, 어제의 좌절과 탐욕이 드리워진 얼굴이 아닌 명랑하고 평화로운 얼굴이었어. C부인은 자신이 한 젊은이를 구해주었다는 생각에 흐뭇하고 자랑스러워했단다. 잠에서 깬 젊은이는 C부인에게 카지노에서 정오에 만나기로 약속했단다.

다시 만난 젊은이는 C부인에게 고마워했어. 그러면서 젊은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단다.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 그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데, 학창 시절 이런 소설을 액자식 구성이라고 했던 기억이 나는구나.^^ 아무튼 이번에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해줄게. 젊은이는 외교관 1차 시험에 합격을 했다고 했어. 그래서 아버지가 축하금을 주었는데 그 돈으로 도박을 하게 되었고, 순식간에 도박에 빠지게 된 것이란다. 그 이후에는 빚도 많아지고 도박을 끊을 수 없는 도박 중독이 되었어. 숙모의 귀고리까지 훔쳐서 도박을 했다고 했어. C부인은 이야기를 듣고는 젊은이에게 몬테카를로를 떠나야 한다고 권유했어. C부인이 도와주겠다고 하면서 저당잡힌 귀고리까지 찾아주겠다고 했어. 그러면서 그 젊은이와 함께 해변도 거닐고, 일종의 데이트를 했단다. 어느덧 C부인은 그 젊은이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것 같았어. 펜션에서 프랑스 청년과 도망간 앙리에트 부인처럼 말이야. 앙리에트 부인을 옹호하던 에게 C부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지 알겠지?

C부인은 그 젊은이를 성당에 데리고 가서 도박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라고 했어. 그 젊은이는 진심으로 참회하고 기도를 올렸어. C부인은 다시 한번 그를 구원했다고 생각하여 기뻐했단다. C부인도 그 젊은이게 여행 비용과 전당포에서 찾은 귀고리를 찾아 돌려주었어. 그 젊은이는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했지. C부인은 그러면 영수증을 써주고 나중에 갚는 것으로 하자면서 돈을 건네주었단다. 젊은이는 가고 홀로 남은 C부인은 왠지 모를 고통을 느끼게 되었단다. 그 고통의 원인을 생각해 보니 젊은이가 한 번에 가버린 것에 대한 실망감 때문인 것 같았어.

그 젊은이가 그렇게 가버리지 않고 C부인 곁에 남았다면 타락의 길로 빠질 수도 있었지만, 그 젊은이에게 실망한 것은 실망한 것이었어. 그 젊은이가 떠나는 기차역에 가려고 했는데, 하필 남편의 사촌누이가 나타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기차 시간을 놓치고 그 젊은이를 보지 못했단다. 아쉬운 마음에 그 젊은이와 함께 했던 장소들을 따라가보았어. 그런데 카지노에서 그 젊은이를 다시 보았단다. 자신이 완벽하게 구원한 줄 알았던 그 젊은이는 그곳을 떠나지 않고 자신이 준 돈으로 다시 도박을 하고 있었어. 그의 얼굴에는 예의 탐욕과 광기의 표정이 다시 드러났어. 이번에는 돈도 많이 벌었는데 여전이 손은 벌벌 떨고 있었지.

C부인은 이런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그 젊은이는 C부인을 알아보지 못했어. 그의 어깨를 잡아서 아는 척을 했더니 그 젊은이는 엄청 당황했단다. 그는 한 번만 하겠다고 했지만, 그것이 지켜질 리가 있는가. 그는 심지어 화를 내면서 C부인가 준 돈을 돌려주면서 내쫓으려고 했어. 그런 소란으로 다른 카지노 손님들이 그들을 보게 되었고, 그들 중에는 시누이도 있었단다. C부인은 화가 나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어. 이것이 24년 전 그녀의 한 평생 중 24시간 이었던 일이었어. 자신이 살아온 시간들 중에 24시간을 그리 많은 시간이 아니지만 그 24시간은 여전히 고통스럽다고 했단다. 당시 그 일을 겪고 몬테카를로를 떠난 것은 그 젊은이가 아니고 C부인이었어. C부인은 무작정 몬케카를로를 떠나 아들이 머물고 있는 런던으로 갔단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그 젊은이의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10년 전 권총 자살을 했다고 했단다. 그렇게 C부인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던 이야기를 끝냈단다. 고작 24시간이 나머지 시간을 지배하여 고통스럽게 했던 C부인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그 고통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구나. 소설은 그렇게 끝이 났단다. 이 소설은 그리 길지 않은 소설인데, 아빠가 좀 길게 이야기한 것 같구나. 그만큼 재미있어서 그런 것 아니겠니.

이 책에 실린 두 작품 모두 재미있었지만, 그래도 한 작품을 고르라고 하면 아빠는 두 번째 <어느 여인의 삶에서 24시간>을 작은 차이로 고르겠다. 누구나 과거의 어떤 안 좋은 기억이 머릿속에 자리를 차지하여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 먹는 일들이 있을 거야. 그것을 이해해주는 사람에게 그 고통을 이야기하면서 풀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소설인 것 같구나. 혹시 너희들과 과거의 어떤 일이 현재를 집어 삼키는 일이 생긴다면 아빠나 엄마에게 이야기해주면 좋겠구나. 그 고통들이 입을 통해 몸 밖으로 나와 하늘로 날아가 버릴 수 있게 도와줄게.

오늘은 그럼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오셨군요.”

책의 끝 문장: 그녀의 손은 가을철의 낙엽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문득 어떤 물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그 바람은 말로 꺼내기도 전에 이루어졌다. 그것도 아주 세심하고 눈에 띄지 않게 이루어져서 고마움을 표현할 기회조차 없었다. 가령 어느 날 그는 귀중한 판화 작품집을 훑어보며 램브란트 판화에 경탄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 이미 그 판화 복사본이 그의 책상 위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또한 친구에게 어떤 책을 추천받았다고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하기만 해도, 며칠 뒤 그 책이 책장이 꽂혀 있었다. 무의식중에 그는 방이 마음에 들며 편안해졌다. - P21

그는 스스로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지내다 보니 그의 내부에 있는 치밀한 열정의 그물이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인간은 추억만으로 살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색이 바래지 않고 꽃이 시들지 않으려면 땅의 영양분은 물론, 하늘의 새로운 빛이 늘 필요하다. 식물이나 모든 구성물이 그렇듯, 우리가 꾸는 꿈도 마찬가지이다. 얼핏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꿈조차도 모종의 감각적 양분의 필요하다. 섬세하고 구체적인 감각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본연의 특징과 광채도 흐릿해지기 마련이다. - P42

그러나 그날 밤, 낯선 호텔 방에 홀로 있게 된 그는 가슴속 심장이 옆에서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보다 더 격렬하게 뛰는 바람에 전혀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불을 켰다. 그러고는 다시 끄고 자리에 누웠다.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녀의 입술만 떠올랐다. 그 입술은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친밀함과는 다르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자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왔다. 둘 사이에 이렇게 느긋하게 담소만 나누는 것은 거짓이라는 걸. 그들 사이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풀리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결국 그는 예민함과 산만함, 불안과 열정으로 혼란스러운 얼굴 위에 우정이라는 가면이 가식적으로 씌워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 P50

둘은 말없이 언덕길을 올라갔다. 벌써 그들 아래 보이는 집들이 희미한 빛 속에 잠겨버렸고, 황혼의 빛을 받아 가물거리는 계곡의 출렁이는 강물은 둥글게 휘어져 흐르며 점점 더 밝아졌다. 그러는 사이 언덕 위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윙윙 소리를 냈다. 두 사람 머리 어둠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들과 마주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림자만이 말없이 그들을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가로등이 그들을 비스듬히 비출 때면 언제나 앞서가던 그림자는 마치 서로 포옹이라도 하듯이 합쳐졌다. 길어진 그림자는 서로를 바라보고, 하나로 합쳐졌다가 떨어지고는 또다시 포옹하려 했다. 한편 그 옆에 선 그녀는 힘없이 긴 숨을 내쉬며 터벅터벅 걸어갔다. - P71

나는 그녀의 명료하고 쾌활한 말투에 매우 호감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그녀의 사무적인 어조를 따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답했다. "국가의 사법기관은 이 사태를 저보다는 당연히 더 엄격하게 결정하지요. 사법기관은 동정심에 흔들리지 않고 보편적인 윤리와 관습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으며, 따라서 용서하는 대신에 판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으로서 검사의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고는 개인적으로 인간을 판단하기보다 이해하는 것이 제 마음에 더 들기 때문입니다." - P90

우리는 사람들에게서 고마워하는 마음을 잘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은 법입니다. 고마운 마음을 가슴에 담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니까요. 그들은 당황해하며 침묵하거나 부끄러워하고, 때로는 이런 감정을 숨기려 무뚝뚝한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비로운 조작가와도 같은 신은 감정의 모든 동작을 감각적이면서도 아름답고 조형적으로 빚어냈나 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사람의 감사함의 표현은 마치 열정적인 몸짓처럼 육체의 깊은 곳에서부터 환한 빛을 냈습니다. 그는 제 손등 위로 고개를 속였습니다. 그러더니 소년처럼 갸름한 머리를 겸손하게 낮춘 후, 거의 1분 동안이나 그렇게 있다가 제 손가락에 정중히 가벼운 입맞춤을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다시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제 안부를 묻고는, 감동 어린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 P140

폭풍우가 요란하게 퍼붓는 사나운 밤이 지난 후 이런 감동적인 날이 밝아왔습니다. 깨끗하게 씻긴 거리와 파란 하늘이 눈부시게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사방에서 수액을 머금은 눈부시게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사방에서 수액을 머금은 초록 덤불이 횃불처럼 붉은 꽃송이를 빨갛게 피워내고, 햇살에 습기가 날아가 가벼워진 대기 속에서 먼 곳의 산들이 갑자기 우리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산들이 깨끗이 씻겨 반짝이는 도시를 향해 사방에서 모여들었습니다. 둘러보는 곳곳마다 자연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북돋우며 다가와서는, 슬며시 그들의 마음을 빼앗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이때 저는 그에게 "마차를 타고 코르니시 해변을 달려볼까요?"라고 말했습니다. - P147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어느 모임에서 저는 오스트리아 공사관의 주재원인 폴란드 청년을 만나게 되어 그의 가족에 대해 물은 적이 있습니다. 청년은 자기 친척의 아들인 한 남자가 10년 전 몬테카를로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듣고 별로 놀라지 않았습니다. 거의 고통스럽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면 저의 이기주의가 작용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그를 만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간직한 기억 외에 제게 불리한 증인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 저는 더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습니다. 늙어간다는 과거에 대해 더는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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