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사랑,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사랑의 불길과 불꽃은 1년이면 꺼져 버리고 이후 30년은 그 재로 살아간다.
(108-109)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저녁에 인사를 나누었던
구름들은 어딘지 모를 곳으로, 죄가 크지 않아 진노한 신이 가혹하게 벌하지 않은 곳으로 떠나 버렸다. 별들은 흐릿했고 별빛은 더운 공기를 뚫고 나오려 애를 썼다. 돈
파브리초의 영혼은 별들을 향해, 손으로 만질 수도 닿을 수도 없는 별들을 향해 달려갔다.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기쁨을 주며 거래 따윈 하지 않는 별들을 향해. 그는
수없이 그랬듯이 공상에 빠졌다. 순수한 지성인이 자신이 계산용 수첩을 들고 곧 차디차고 광활한 공간으로
가는 상상이었다. 수첩에 풀어야 할 계산은 어렵고 복잡하겠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잘 풀릴 터였다. ‘별들만이 순수하지. 유일하게 선량한 피조물들이지.’ 그는 세속적인 공식에 따라 생각했다. ‘어느 누가 플레이아데스성단의
지참금을, 시리우스의 정치 경력을, 베가의 부부 침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신경 쓰겠는가?’ 그날은 운수가 좋지 않았다.
(134)
하지만 총으로 토끼를 죽이고, 찰디니의 대포가 나폴리
왕국 병사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정오의 열기가 사람들을 잠들게 했지만 개미 떼를 막을 수는 없었다. 돈 치초가 뱉어버린 썩은 포도 알 몇 개에 이끌린 개미들이 오르간 연주자의 침이 뒤범벅된 살짝 썩은 포도 알에
달라붙으려고 희망에 들떠서 새까맣게 떼를 지어 달려왔다. 대담한 개미 떼들은 무질서하지만 단호하게 앞장을
섰다. 서너 마리로 이루어진 몇몇 무리는 잠시 멈춰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몬테모르코산 정상의 4번 코르크참나무 아래 2번 개미집에 터잡은 조상 이래 이어진 영광을 개미들은 다른 개미들과 함께 확실한 미래를 향해 다시 행진하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개미의 등들이 기쁨으로 떨렸다. 틀림없이
개미들 위로 찬가가 울려 퍼졌으리라.
(191)
돈 파브리초는 이해가 잘 안 되었다. 둘 다 빨간
새우처럼 붉고 허름한 셔츠를 입었던 걸 기억했다. “이제 자네들, 가리발디
부대원들은 붉은 셔츠를 입지 않나?” 두 사람이 독사에 물린 듯이 그를 돌아보았다. “맞아요. 가리발디 부대원이었죠.
외삼촌! 예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달라요. 카브리아기와
저는 몇 달 전부터, 지금은 사르데냐 국왕이지만 얼마 후 이탈리아 국왕이 되실 폐하의 정규군 장교로
근무하고 있어요. 가리발디군이 해산될 때 집으로 가든지 왕의 군대에 남든지 선택할 수 있었어요. 제대로 된 사람들이 다 그랬듯이 이 친구와 저도 ‘진짜’ 군대에 들어갔죠. 가리발디 부대원들과 함께해야 했다면 남지 못했을
거예요. 안 그런가, 카브리아기?” 물론이지, 대단한 패거리였어요!
기습 공격이나 하고 가끔 총격전이나 벌이는 데에 딱 맞는 자들이죠. 그게 전부입니다! 이제 우리는 정상적인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진짜
장교인 거죠.” 그가 혐오스럽다는 듯이, 사춘기 소년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짧은 콧수염을 추켜세웠다.
(206-207)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배경으로 죄 많은 인생을 살게 될 탄크레디와 안젤리카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그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로 구름과 바람으로만 이루어졌을
뿐인데, 구체적인 무엇이라고 생각했던 미래를 뒤쫓았다. 늙고
부질없이 지혜로워졌을 때 두 사람은 끊임없이 그 시절을 돌이켜 보았으며, 그리움과 후회를 떨칠 수 없었다. 그때는 욕망이 존재했으나 항상 패배하던 시기였고, 잠자리 기회가
수없이 주어지기도 하고 거부당하기도 했다. 억제된 관능적인 충동이 잠시 체념으로 변하기도 하는, 그러니까 진정한 사랑으로 승화되기도 하는 때였다. 그때는 성(性)적으로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던 결혼 준비기간이었다. 하지만 절묘하면서도 간결한, 완전체 같은 기간이었다. 잊힌 오페라, 그러니까 은근한 암시와 익살로 수치심을 가리고 공연
중에 조화롭게 연주되지 않아 실패한 아리아들이 담김 오페라의 서곡 같았다.
(224-225)
“제 말을 계속 들어 주세요. 슈발레. 이제 설명하겠습니다. 우리
시칠리아인은 우리와 종교가 다르고 우리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통치자들에게 오랜 세월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나치리만큼 신중하게 행동하는 게 습관이 되었어요. 그러지 않았다면 비잔틴의 세금 징수관, 베르베르인의 아미르, 스페인의 총독들 치하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일이 그렇게 됐고 우리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나는 ‘참여’가 아니라 ‘동의’라고 했습니다. 최근 여섯 달 동안,
당신네 편 가리발디가 마르살라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구체제의 지배 계급에 속했던 사람에게 그 일을 발전시키고 완성시켜 달라고 요청하기는 무리일 정도로 말입니다. 지금 나는 잘잘못을 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상당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지요. 하지만 우선은 당신이 우리와 1년은
살아야만 이해가 가능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시칠리아에서는 잘하거나 못하는 게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 시칠리아인이 절대 용서하지 않는 죄는 그저 ‘하는’ 것뿐입니다. 우리 시칠리아 사람들은 늙었어요, 슈발레, 너무 늙었어요. 외부에서
완벽하게 완성되어 들어온 눈부시고 이질적인 문명을 우리 어깨에 짊어지고 산 지가 2500년은 되었어요. 우리에게서 싹트지 않았고 우리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라곤 하나도 없는 문명을 말입니다. 우리는 슈발레 당신처럼, 영국 여왕처럼 백인입니다. 하지만 2500년 전부터 우리는 식민지에 살았어요. 불평하는 말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잘못은 우리에게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지쳤고 공허합니다.”
(226-227)
“슈발레, 의도는
좋아요. 하지만 너무 늦었어요. 게다가 제가 이미 말했듯이
대부분은 우리 잘못입니다. 당신은 조금 전에 경이로운 현대 세계에 새로운 모습을 보일 젊은 시칠리아를
이야기했지요. 내가 보기에는 휘체어에 앉아 런던 만국박람회에 끌려 나온 백 살 먹은 노파처럼 보여요. 노파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것에도, 셰필드의 철강 공장에도
맨체스터의 방적 공장에도 관심이 없어요. 그저 침으로 얼룩진 베개와 요강을 밑에 둔 침대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지요.”
(235-236)
슈발레는 생각했다. ‘이런 상황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새롭고 민첩한 현대적인 행정부가 모든 것을 바꿀 것이다.’ 영주는
우울했고 이렇게 생각했다. ‘이 모든 일을 이렇게 지속되게 놔두어선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늘 지속되겠지. 물론 인간사라는 시각으로 볼 때의 ‘늘’이다. 100년, 200년….. 그후에는 달라지겠지.
하지만 더 나빠질 게 분명해. 우리는 표범, 사자였다. 우리를 대신할 사람들은 자칼, 하이에나가 될 것이다. 이들 모두, 그러니까 표범, 자칼, 양은 계속해서 자신들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감사를 표하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슈발레는 토사물 색깔의 바퀴 네 개가 지탱하는 우편 마차에
올라탔다. 굶주리고 상처투성이인 말이 긴 여정을 시작했다.
(303-304)
다른 순간에는, 모래알이 사르륵 미끄러져 내려가는
소리를 듣고 시간의 입자들이 그의 삶에서 벗어나 영원히 떠나는 걸 느끼려면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이면 되었다. 게다가
그런 감각은 처음부터 어떤 불쾌감과 관련해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 지각할 수 없는 생명력의 손실은, 말하자면 살아 있다는 느낌을 뒷받침하는 증거이자 조건이었다. 그리고
무한한 바깥 공간을 면밀히 조사하고 광활한 내면의 심연을 살펴보는 데 익숙한 그에게는 전혀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특성이 지속적으로 미세하게 붕괴한다는 느낌을 주면서도, 어딘가 다른
곳에 덜 의식적이면서 더 큰 개성(하느님 감사합니다)을 다시
만들어 내리리라는 막연한 예감과 결합되었다. 그 모래 알갱이들은 잃어버린 게 아니다. 사라지기는 하지만 우리가 모를 어딘가에 축적되어 더 오래 지속되는 덩어리로 굳어진다. 하지만 그가 생각한 덩어리는 실제 무게에 걸맞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었다. 모래
알갱이도 마찬가지인데, 좀 더 비슷한 것은 좁은 연못에서 증발하는 수증기 입자다. 그것은 하늘로 올라가 가볍고 자유로운 큰 구름이 된다. 때때로 그는
생명이라는 저수지가 수십 년간 내용물을 유출했음에도 여전히 무언가를 남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