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그림을 볼 줄은 모르지만, 화가나 그림 속에 깃든 이야기를 읽는 것은 좋아하는 편이란다. 그래서
인터넷 서점에 우연히 알게 된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 북촌 편>이라는 책을 구입했었단다. 언제 산 것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두어 해는 된 것 같구나. 다른
책에 우선 순위가 밀리다가 이번에 우연히 눈에 맞아 읽게 되었단다. 원래 책 제목이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에서 끝나는 줄 알았는데, 조그맣게 “북촌 편”이 붙어 있더구나. 그래서
인터넷 서점을 검색해 보니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 서촌 편>도 있더구나.
이제 북촌이라고 하면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즐겨 찾는 관광지란다. 우리나라의 옛 건물들과 멀리 보이는 초고층 건물들이 잘 어우러진
배경으로 사진들을 많이 찍곤 한단다. 원래 조선시대 북촌에는 부촌들이 살았고, 그들은 광통교 근처의 많은 서화 가게에서 그림들을 샀다고 하는구나. 그러다가
일제 시대 넘어오면서 서화 가게들의 중심이 인사동으로 바뀌게 되었대. 오늘날 인사동도 서울의 주요 관광지
중에 하나인데, 그 탄생은 일제시대 행정 통폐합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구나. 관인방의 ‘인’과 대사동의
‘사’를 따서 인사동이라고 했다는구나. 그렇게 과거 북촌에는 화가들의 후원자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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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2)
도화서
화원들은 궁궐 외에 주문을 받곤 했던 양반 고객들은 대부분 ‘북촌(北村))’에 살았다. 당시 북촌은 벌열 양반과 왕의 인척들이 사는 조선조
최고의 부촌이었다. 화원들의 후원자가 될 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북촌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화원 입장에서는 궁에서 멀지 않고, 부수 입을 올릴 수 있는 서화
가게들이 있는 광통교 근처이고, 자신들의 후원자가 사는 북촌에서도 멀지 않은 지역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었다. 이 세 곳이 모두 연결되는 중심부가 지금의 인사동 지역이었다. 이러한 입지는 후에 인사동이 서화와 전전(典籍), 고미술 거래의 중심지가 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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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북촌에서 활동하던, 특히 서울을 경성으로 부르던 시기인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화가들의 이야기들이 실려 있단다.
1.
아빠는 조선 말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전후에 우리나라에 그렇게 많은 화가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고, 조금은 놀랬단다. 그들의 작품들이 책에 실려 있었는데, 그림에 대해 잘 모르는 아빠이지만, 모두 범상치 않은 그림들이었단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문화강국의 저력은 여전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들이 시대를 잘 만났다면
더 많은 훌륭한 작품들을 남겼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들이 살았던 시절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사의 최악의
시절이었단다. 일제 강점기, 광복 후 남북으로 나뉘고, 또 처참한 전쟁에 이르기까지… 살아남는 것에 신경을 써도 모자랄
판에, 미술에 대한 그들의 열정은 식을 수 없었단다.
하지만… 어떤 화가들은 미술에 재능이 있지만 나라의 독립이 중요하다면서, 미술을
관두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들이 있었고, 어떤 화가들은 뛰어난 재능이 있었지만, 친일 활동으로 인해 그 재능을 인정 받지 못한 이들도 있었고, 또
어떤 화가들은 훌륭한 재능이 있었지만, 광복 후 자신이 믿는 사상에 따라 북으로 가서 남한에서는 잊혀진
이들도 있었단다. 이렇듯 그 시대를 사는 화가들은 시대와 싸워야 했단다. 이 책에 소개된 화가들은 대부분 처음 들어보는 이름들이었단다. 그리고
작은 꼭지로 소개해 주어 읽은 지 두어 주 되었더니 또 다 잊혀져 가는구나. 요즘은 뉴스를 좀 즐겨
찾다 보니 책 읽는 시간도 줄고, 독서 편지는 더 밀리게 되었구나.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는 재미있게 읽었는데, 막상 너희들에게 이야기해주려니 잘 생각이 안 나는구나. 이 책에서 나온 화가들의 이름이라도 남겨두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책의 목차에 나온 부분을 발췌해 보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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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동양화단의 좌장 안중식
다재다능하고 신비로운 서화가 지운영
근대 전각의 길을 개척한 전각 명인 오세창
근대 난초 그림을 정립한 서화가 김응원
근대 서화계의 어른으로 불린 김용진
서양화의 시작을 알린 고희동
조선조 마지막 내시 출신 서화가 이병직
독립운동에 앞장선 서화가 김진우
임금의 초상을 그린 인물화의 귀재 김은호
금강산을 잘 그린 산수화의 거장 배렴
기억상실증으로 불행했던 비운의 화가 백윤문
남과 북에서 공명을 누린 서화가 이석호
장애를 극복한 의지의 화가 김기창
한국 문인화의 정형을 정립한 장우성
한국적 인상파 화법을 완성한 화가 오지호
해방 후 좌익 미술계를 이끌었던 길진섭
월북한 감성적 모더니스트 최재덕
근대 나전칠기를 개척한 공예가 전성규
현대 건축의 산실 공간 사옥과 김수근
근대 미술의 요람 중앙고보와 휘문고보
사진관, 화랑까지 경영한 서화가 김규진
근대 서예의 체계를 정립한 김돈희
한국 최초로 시사만평을 그린 이도영
조선미술전람회 입선한 명월관 주인 안순환
금강산 그림 전통을 이은 산수화의 명인 변관식
늘 경계인이었던 월북 서양화가 임군홍
유럽에 이름 떨친 첫 한국화가 배운성
좌수서의 신경지를 개척한 서예가 유희강
한글 서예를 개척한 김충현과 김씨 4형제
죽음으로 예술을 완성한 비운의 조각가 권진규
국립중앙박물관 최초의 유물사진가 이건중
화가들도 흠모했던 슈퍼스타 최승희와 매란방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설계한 나카무라 요시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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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훌륭한 화가들이 시대를 잘
만났다면 어땠을까? 안타까운 마음에 자꾸 이런 생각이 드는구나. 오늘
독서편지는 짧게 마칠게. 아참, 오늘부터 정상적인 대한민국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어 정말 다행이구나.
PS,
책의 첫 문장: 조선 후기 예원을 이끌었던 추사 김정희(1786~1856) 문하에는 양반에서 중인, 평민에 이르는 다양한
계층의 제자들이 드나들었다.
책의 끝 문장: 그런 면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안중식은 솜씨 좋은 서화가였을 뿐 아니라 국민 계몽의 필요성을 느낀 개화사상가이기도 했다. 1906년에는 대표적인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대한자강회(大韓自彊會)에 회원으로 가입했으며, 이듬해 <대한자강회월보> 제8호 첫 페이지에 을사늑약에 항의하다가 자결한 충신 민영환(閔泳煥)(1861~1905)을 기리는 <민중정공혈죽도>를 그려 싣기도 했다. 또한 이듬해에는 어린이용 교과서 <유년필독>과 진보적이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잡지 <청춘(靑春)>, <아이들보이>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1913년에 창간된 <아이들보이>에는 군복을 입고 백마를 탄 우리나라의 옛 무사를 그린 삽화가 표지화로 실리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근대적인 면모를 보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보면 전통적 기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한계도 있다. - P29
고희동은 그동안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역사적 의미와 새로운 조형 방법을 후진에게 가르친 미술 교육자로서 높이 평가받았다. 화단을 형성하고 이끌어나간 미술 행정가의 성격이 강해 일부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최초’였음에도 결국 서양화를 포기하고 동영화로 돌아온 화가로서의 정체성 문제는 더욱 그에 대한 평가를 박하게 만들었다. 이런 치우친 평가가 과연 정당한지 의문이다. 실제 전하는 그의 작품들은 당대에 활동한 대표적인 화가들 못지않은 개성과 미덕을 가지고 있다. 원근이 살아 있는 생동감 넘치는 산수화나 뛰어난 색채감을 보이는 개성적인 화면은 다른 화가들에게서 보기 어려운 새로운 면이다. 이는 현대에 와서 더욱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화가로서의 고희동에 대해 더욱 정치한 연구가 필요하다. - P88
첫눈에 반한 김기창은 박래현이 도쿄로 돌아가자 계속 편지를 보내 그녀의 환심을 산다. 김기창의 4년간의 끊임없는 열정에 박래현에 처음에는 ‘바위 덩어리처럼 시커먼 물체’처럼 보였던 그에게 애정을 느끼게 되어, 결국 두 사람은 4년 뒤 결혼한다. 결혼한 두 사람은 부부 이전에 예술적 동반자였다. 미술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면서 미술세계를 넓혀갔다. 같은 공간에서 살며 작업하다 보니 두 사람의 예술세계는 서로 다른 듯 닮아갔다. 마치 피카소와 브라크의 그림이 서로 닮아 예술의 동반자임을 드러냈듯이, 김기창과 박래현의 그림은 어느 시기까지 서로 비슷한 면을 많이 보였다. - P154
사람들이 현대사옥을 정경 유착의 결과물로 이야기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이 건물 건축의 첫째 의문은 건축의 허가가 정당했는지의 문제이다. 우선 크기가 너무 크다. 지금도 너무 커 위압감을 느낄 정도인데 1983년에는 어떤 정도였을지 상상이 될 것이다. 더구나 이곳은 창덕궁이 바로 옆에 있어 건축법상 이렇게 높고 큰 규모의 건물이 들어서서는 안 된다. 실제 주변 다른 곳의 경우 고도제한을 받는다. 이런 높은 건물이 어떻게 허가를 받을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 P235
2001년 월북한 서양화가 배운성의 작품 48점이 발견되자 한국미술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때 발견된 작품이 대부분 유화 작품이어서인지 주로 그의 유화 작품에 대해서만 언급되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이나 한국에서 배운성이 미술세계가 주목을 받은 것은 유화보다는 판화 부문이었다. 배운성이 한국에 돌아왔을 1940년 당시에도 한국 화단과 언론에서의 관심은 그의 기구한 삶과 함께 뛰어난 판화 실력이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서 대서특필한 기사도 ‘세계적인 판화가’라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실제 배운성은 여러 살롱전과 공모 전람회에서 판화로 입상했으며, 개인전에서도 유화 못지않게 판화를 전시하곤 했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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