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밀양, 약산 김원봉이 태어난 도시다. 약산의 평생지기 석정 윤세주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약산의 고모부
백민 황상규를 비롯해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독립유공 애국지사만 80여 명이다. 안동과 더불어 인구대비 가장 많은 숫자다. 한마디로 독립유공자의
산실과 같은 장소다. 2018년 봄 약산의 생가터에 밀양시가 의열기념관을 세우고 나서 밀양을 찾아야
할 이유가 더 분명해졌다. 그러나 2019년 들어 밀양시가
친일파 박시춘을 중심으로 한 <가요박물관> 건립을
추진 중이다. 지사들의 얼굴에 먹칠하는 부끄러운 일이다. 약산의
생질 김태영 박사와 밀양 출신 청년들을 중심으로 가요박물관 건립을 막고 있다.
(28-30)
반 토막 난 독립운동사에 약산의 이름을 올려야겠다고 결심한 첫 번째 이유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친일파 7인 김백일, 김홍준, 신응균, 이응준, 이종찬, 백낙준. 이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만주군에 복무하면서 독립군을 때려잡던 인사들이다. 게다가 해방 후에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아래 다시 국군으로 돌아와 보란 듯이 현역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더 높은 자리로
영전했고 각각 군 사령관과 참모총장, 국방부 장관이 됐다.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제2묘역에 묻힌 일본군 장교 출신 신태영과 이응준이 대표적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요 인사 묘역과 불과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들이 묻힌 장군
제2묘역이 있다. 의도했든 아니든 이들 친일파의 묘역이 애국지사
묘역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한 탓에 친일파 무덤이 애국지사 무덤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형태다. 더 화가
나는 건 이름 없이 쓰러져간 수만의 독립군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대한독립군 무명 용사 위령탑’ 역시 친일파 묘역 입구 하단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위령탑 아래가
의열단 출신 김익상과 김상옥, 박재혁, 곽재기, 최수봉, 이종암 등이 잠든 애국지사 묘역이다. 한마디로 친일파의 무덤이 조국 독립을 위해 청춘과 목숨을 다 바친 애국지사와 순국선열보다 더 높고 양지바른
곳에 위치해 있다는 말이다.
(75-76)
1910년에 태어나, 약산보다 정확히 12살 어렸던 박차정 지사는, 집안이 모두 독립운동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대한제국 탁지부
주사를 지냈던 부친 박용한은 일제의 침략에 분노해 자결했다. 숙부 박일형과 친척들, 오빠들도 모두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 외가 쪽 역시 독립운동가
김두전과 김두봉이 친척인 집안이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신간회,
의열단 등에서 활동한 큰오빠 박문희, 둘째 오빠 박문호 등과 함께 박차정 지사 역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일찍이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일신여학교 시절부터 지역을 대표하는 독리운동가로 활약했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1월 서울 여학생 시위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했다. 그러나 ‘근우회
사건’으로 구금된 다음 일경의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병석에
누워있던 박차정 지사를 의열단에 몸담고 있던 둘째 오빠 박문호가 불렀고, 지사는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합류했다. 1930년 봄의 일이다.
(100)
<의열단 공약 10조>
1. 천하의 정의를 맹렬히 실행한다.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해 신명을 희생한다.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히 자라야
의열단원이 된다.
4. 단의(團義)를 우선하고, 단원의 의(義)도 급히 실행한다.
5. 의백 일인을 선출해 단체를 대표케 한다.
6.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매월 일차식 사정을
보고한다.
7.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초회(招會)(부름)에 반드시
응답한다.
8. 피사(被死)(죽음을 피하지) 아니하며 단의의 전력을 다한다.
9. 하나의 아홉을 위하여 아홉이 하나를 위해 헌신한다.
10. 단의(團義)를 배반한 자는 척살한다.
(103)
그러나 백민 황상규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우리 독립운동사의 큰 족적을 남겼다. 1차 의열단 의거 실패 후 감옥에서 6년여를 보냈다. 출소 후에도 밀양에서 지역 운동을 전개하며 지역 리더로서의 역할을 실천했다.
1927년 12월부터는 신간회의 밀양지회장으로 선출되고 왕성한 활동을 벌인다. 하지만 고문 등으로 이미 몸이 쇠약해진 상태, 한때 관운장이라 불릴
정도로 강인한 그였지만 과로 등이 겹치며 결핵성 복막염을 앓았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황상규는 진상조사단이 돼 몸을 돌보지 않고 사건을 알렸다. 결국 더 이상 버티질 못했다. 1930년 초 황상규는 다시 고향에
돌아와야만 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듬해 9월 황상규는 눈을 감는다. 사인은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발생한 폐결핵과
복막염 악화. 의열단의 정신적 스승이자 행동하는 지성인이었던 백민 황상규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135)
부산 출신 박재혁은 1920년 9월 초 상하이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에 도착한다. 1920년 9월 14일 고서상으로 위장한 박재혁은 부산경찰서 서장 하시모토 슈헤이와
마주한다. 그리곤 고서 상자 속에서 미리 준비한 폭탄을 꺼내들고 하시모토에게 ‘나는 상하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들을 잡아 우리 계획을
깨뜨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인다’라고 외치며 폭탄을 투척한다. 폭탄에
맞은 서장은 수일 뒤 사망했다.
박재혁 역시 현장에서 폭탄을 맞아 부상을 당하고 체포됐다.
1921년 3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과 상처로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사형 선고 전, ‘왜놈의 손에서 욕보지 말고 차라리 내 손으로 죽겠다’라고 결심한
뒤 곡기를 끊고 단식하다 옥사하였다. 의열단다운 결기였다.
(149-150)
김산은 의열단 의백 김원봉과 의열단원 김성숙과 특히 사이가 가까웠다. 베이징에서 자주 모임을 가질 만큼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이였다. 이
만남은 훗날 ‘황포군관학교’라는 공통분모까지 이어진다. 그만큼 각별한 사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단 김산과 약산 모두 책벌레였다. 특히 두 사람이 다 러시아 문학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두 사람은 만나면 할 이야기가 많았다. 물론
그만큼 머리도 비상했다. 중앙학교-덕화학교당-금릉대-신흥무관학교를 거친 약산의 비상한 머리야 익히 알려진 바고, 김산 역시 신흥무관학교-난카이대-협화의대-황포군관학교-중산대 등을 거친 수재였다.
(232-233)
그런데 이곳(금릉대학)이 우리 역사에서 더욱 중요하게 평가돼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1935년 7월, 기라성
같은 애국지사들이 금릉대학교 강당인 대례당에 모여 민족혁명당을 만든다. 면면이 화려했는데 의열단 출신은
약산을 필두로 석정 윤세주, 진이로, 박효삼이 함께 했고, 신한독립당 출신으로 지청천과 신익희, 윤기섭이, 조선혁명당 출신은 최동오와 김학교가 함께 했다. 김두봉과 조소앙, 김규식, 김상덕, 최창익, 허정숙, 안광천 등도 동참했다. 약 220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함께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김구는
위해 중앙집행위원회의 집행위원장 자리를 공석으로 두었으나 마지막까지 고사했다. 임시정부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위원장이 공석인 상황에서 서기부와 조직부와 실질적으로 권한을 행사했다. 서기부의 부장은 약산, 조직부의 부장은 김두봉이 맡았다.
(302-303)
두 사람(김구, 김원봉)은 진심으로 화합해 조국 독립을 바랐다.
“우리 두 사람은
3.1운동 이후 해외에서 일본제국주의를 향해 계속 분투했다. 그러나 과거에는 한 개의 강적에
대한 투쟁을 통일적으로 강하고 유력하게 진행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군중을 떠난 우리 두 사람의 특수환경의
영향도 없지 않았으나, 주로는 우리가 민족적 경각성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민족혁명의 전략적 임무를 정확히 파악 실천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과거 수십 년간 우리 민족운동 사상의 파쟁으로 인한 참담한 실패의 경험과 중국민족의 최후의 필승을 향하야 매진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민족적 총 단결의 교훈을 이전의 착오를 통해 통감한다. 우리 두
사람은 신성한 조선 민족 해방의 대업을 위해 동심협력할 것을 동지동포 앞에 고백하는 동시에 목전의 내외 정세와 현 단계의 우리 정치 주장을 이하에
진술하려 한다.”
(328)
다만 1942년 인도의 영국군 총사령부는 조선민족혁명당에게
인도 버마 전선에 공작원 파견을 요청한 것이 사실이다. 이 시기는 이미 약산이 임정과 광복군 참여를
결정한 상황, 약산은 최종적으로 광복군 이름으로 공작원을 인도에 파견한다. 그리고 43년 5월 인도
주둔 영국군과 조선민족혁명당은 ‘조선민족군선전연락대’ 파견에
관한 협정을 맺었다. 이에 따라 43년 8월 최성오와 주세민 등을 인도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추가 파병은
이뤄지지 못했다. 약산이 영국군과 가까워지는 상황을 임정 내부에서 용인하지 않았다. 영국군과 공동 작전을 수행했기에 훈장을 받은 것으로 파악되자 정확하게 확인된 바는 없다. 돌아보면 약산은 임정 참여 선언 후 광복군 부사령관 군무부장으로 역할했지만 내부에서 끊임없는 견제를 당하며
주요 작전에서 배제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특히 1945년
광복군과 미국 OSS측의 합작훈련 추진 과정에서 약산은 광복군 부사령임에도 불구하고 작전에서 배제됐다. 약산이 임정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