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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듀 - 경성 제일 끽다점
박서련 지음 / 안온북스 / 2024년 3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박서련 님의 역사 소설을 한
권 읽었단다. 오늘 이전까지 박서련 님의 소설을 세 권 읽었는데, 가장
재미있고 인상 깊은 소설은 가장 처음 읽었던 <체공녀 강주룡>이라는
작품이었단다. 박서련 님의 <체공녀 강주룡>을 다행히 처음에 읽어서 박서련 님의 다른 책들도 찾아 읽었던 것 같아.
그런데 박서련 님의 최애 작품이 오늘로 좀 바뀔 것 같구나. 이번에 읽는 <카카듀>라는 소설이
<체공녀 강주룡>보다 더 좋았단다.
<카카듀>는
일제 시대 실제 있었던 끽다점 카카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단다. 끽다점이라고 하면 오늘날
카페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단다. 끽(喫)은 마신다는 뜻을 가진 한자어로 만끽(滿喫)하라고 할 때 그 ‘끽’자란다. 끽다점의 ‘다’는 예상했겠지만
차 다(茶)란다. 아빠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책 소개를 읽지 않아서 카카듀라는 끽다점만 실제 있었던 것이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박서련 님께서 허구로 만든 인물들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재미있게 책을 다 읽고 나서 책 뒤편에 실린 작가 후기를 보고 나서야 소설 속 매력적인
주인공들이 실존했던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소설 속 까메오로 등장하는 라운규, 박헌영, 김구 등의 실존인물은 재미를 위해서 출연시킨 것이고, 주인공인 이경손과 현앨리스는 허구 인물이라고 생각했었단다. 그런데
주인공들도 모두 실존 인물이라는 거야. 특히 현앨리스의 경우는 약간 비현실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책을 덮고 검색을 해 보았더니 아주 낯익은 사진 한 장이 검색되었단다.
아빠의 좋지 못한 기억력이지만 이 사진은 분명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본 것 같았어. 일제시대
낭만 가득한 젊은이들이 많이 등장하는 민태기 님의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에서 본 것 것은 생각이 들어 그 책을 찾아 책장을 휘리릭 뒤져보았단다.
역시나… 그 책에 현앨리스 사진이 있었단다. 민태기
님의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에 현앨리스와 카카듀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었어.
아빠의 기억력에 또 한번 좌절이구나. 아빠가 재미있게 본 책에서 나왔던 내용인데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그나마 사진을 검색했을 때 기억이 난 것에 대해 조금은 위안을 삼아야겠구나. 이번에는 꼭
잊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현앨리스에 대한 또 다른 책 정병준 님의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라는 책도 주문했단다. 이 책도 읽어서 이번에는 꼭 기억하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와 함께… 자, 그럼 소설 <카카듀>에 대해 이야기를 해줄게.
1.
주인공 이경손. 때는 1920년 경성. 만세
운동이 일어난 이후 엄마 나이 뻘 되는 사촌누나는 목사였던 매형이 만세 운동에 연루되어서 심한 옥살이를 하고 나왔단다. 감옥에서 나온 사촌누나는 매형을 찾아 나선다고 아이들 여덟 명을 데리고 상해로 가기로 했단다. 이때 어린 아이들을 경성역까지 데려다 주는 일에 경손도 도와주었단다. 사촌
누나의 첫째 딸 미옥은 촌수로는 경손보다 항렬이 하나 낮아 조카이긴 한데 나이는 경손보다 한 살 많았어. 경손은
미옥과 함께 어린 조카들을 경성역까지 데리고 가서 배웅을 해주었단다. 그렇게 사촌 누나 식구들은 모두
상해로 떠났어.
…
시간은 흘러 6년이 지났어. 경손은 그 6년
동안 예술학교에 들어가서 영화를 배우고 영화 감독이 되어 영화도 한 편 찍기도 했어. 비록 성공하지는
못 했지만… 6년이 지난 시점에도 영화를 찍고 있었는데 관부연락선을 촬영하기 위해 부산까지 내려왔단다. 경손이 부산에 내려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단다. 예전에 부산에서
‘조선 키네마’라는 영화사에서 처음 영화 일을 시작했었지. 그곳에서 라운규도 만나 친하게 지냈단다.
그런 부산에 이번에는 혼자 촬영하려고
내려고 온 거야. 그런데 그곳에서 우연히 조카 미옥을 만났어. 경성역에서
헤어지고 6년 만에 처음으로 본 거야. 처음에는 못 알아봤는데, 미옥이 먼저 아는 척을 했단다. 미옥은 포와, 그러니까 하와이에 가는 길이라고 했어. 하와이는 미옥의 고향이었어. 사촌 누나와 매형은 결혼하고 하와이에 갔었는데 그곳에서 첫째 아이 미옥을 낳았다고 했어. 미옥은 하와이에서 태어난 첫 번째 한국 아이였다고 하는구나. 미옥은
하와이에서 태어나서 미국 이름도 있었대. 앨리스. 지난 6년 동안 미옥은 결혼도 했고 이혼도 했다고 했어. 지금은 임신한
상태인데, 아기를 낳으려고 하와이에 간다고 했단다. 가족들이
지금은 모두 하와이 있다면서… 그렇게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경손은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단다.
…
경손이 지금 준비하고 있는 영화는 <춘희>라는 영화였어. 남자
주인공이자 투자자인 정기탁은 여자 주인공을 맡은 김일송을 반대했단다. 김일송이 독립운동을 했던 이력이
있어서 반대를 했어. 그러면서 오디션을 다시 한번 하자고 했어. 그래서
오디션을 했는데 역시나 눈에 띠는 이는 없었단다. 딱 한 사람 노래를 잘하는 이음전이라는 사람이 있었대. 이음전은 나중에 이애리수로 이름을 바꾸고 엄청 유명한 가수가 되었다고 하는구나. 음.. 이 이야기가 왜 들어가 있나 했더니, 이애리수가 실존 인물이라서 그랬던 거구나.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아서 찾아보니 <황성옛터> 등 꽤나 유명한
노래를 부른 유명한 가수더구나.
..
아무튼 그렇게 오디션을 하고
있을 때 미옥 아니 앨리스가 찾아왔단다. 부산에서 헤어진 지 1년쯤
되었을 때야. 아이는 하와이에 있는 가족들에 맡기고 혼자 귀국했다고 했어. 그러고는 자신은 경성에서 자리를 잡겠다고 하면서 도와달라고 했어. 그러면서
끽다점을 같이 차리자고 했단다. 끽다점의 이름은 카카듀라고 했는데 이것은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단막 희곡의
제목 ‘초록 앵무새(Der grune Kakadu)에서 따온
것이야.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가들이 찾는 식당이자 연극을 하는 내용의 희곡이었어. 초록 앵무새는 그 식당 이름이기도 했대.
..
카카듀는 관훈동 이성용 의원의
건물 1층에 세를 냈단다. 카카듀를 오픈하는데 필요한 돈은
앨리스가 댔어. 그렇게 끽다점을 열었지만 손님은 거의 없었어. 2층에서
병원을 하는 이성용 의원이 가끔 찾아오고 이경손의 지인들이 가끔 오고… 이경손과 앨리는 개업 피로회를
열자고 했어. 개업 피로회는 개업식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영화
포스터를 모아서 전람회 형식으로 하자고 했어. 이경손은 신문기자인 친구에게 부탁해서 카카듀 개업 피로회
겸 전람회를 신문 광고에 내게 했단다.
개업 피로회는 대성공이었어. 피로회 이틀 동안 문전성시를 이루었어. 이경손의 문학동인들, 영화계 인사들이 많이 왔단다. 이경손이 피로회 때 번 돈으로 카카듀에서
사용할 유성기를 사려고 했으나, 앨리스가 이미 몇 달치 월세를 미리 냈다고 했어. 앨리스의 생각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 유성기를 못 산 아쉬움이
살짝 있었지만…
이경손은 영화 일도 계속 하는데
영화 쪽은 계속 흥행 실패를 거듭했단다. 카카듀는 경손의 지인들이 주고객이었고 그럭저럭 할 만했어. 이경손은 앨리스와 친척 관계인 것을 비밀로 하기로 해서, 다른 이들은
둘이 사귀는 사이로 오해하기도 했단다.
…
12월이 되었어. 2층의
이성용이 병원 일을 두만 두고 사라셨단다. 병원에는 다른 의사가 들어와서 문을 열었어. 그래도 오가며 인사도 하고 카카듀의 주인인데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지다니…
2.
성탄절이 다가오자 앨리스는 카카듀에서
성탄절 파티를 하자고 제안했단다. 지인들을 초대해서 성탄절 파티를 밤새 했어. 밤새고 아침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경손은 경찰에 체포되어 경찰서에 끌려 갔단다. 그리고 이유는 알려주지 않고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맞았어. 다시 정신을
들었을 때는 경찰서가 아닌 카카듀 안이었어. 나이는 앨리스가 한 살 많았지만 촌수도 경손이 아저씨 뻘이라서
늘 아저씨라고 깍듯이 높임말을 쓰던 앨리스가 갑자기 반말을 했단다. 당황한 경손. 앨리스는 지금까지 가면을 쓰고 있었던 거야. 앨리스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앨리스의 이야기를 해줄게. 앨리스의 아버지, 그러니까 경손의 사촌 매형은 현순이라는 목사였어. 나중에 검색해보니 현순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셨던 분이었단다. 앞서
앨리스의 아버지가 3.1운동에 연루되어 상하이에 가셨다고 했잖아. 현순은
상하이로 가서 다른 나라들에게 조선의 독립을 승인해달라는 문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어. 현순은 목사
이전에 역관으로 일해서 영어, 일본어, 중국어에 모두 능통했단다. 현순은 그런 외국어 실력으로 임시정부에서는 외무부에서 일하고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등이 현순을 잘 따르고 했대. 앨리스도 박헌영, 김단야, 임권근 등과 교류를 하다 보니 공산주의 사상, 콤뮤니즘 사상에 빠지게 되었다는구나.
앨리스는 일본 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정준이라는 유학생을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딸도 낳았단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정준은 완전 사기꾼이었어. 고향에는 어린 아이지만 정혼자도 있다고 했어. 정준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와서 일본정부의 공무원이 되기도 했어. 독립운동가의
딸이자 자신도 독립운동을 하는 앨리스는 남편이 친일파라는 것을 알고 큰 배신감을 느끼고 그 집에서 나와 버렸단다.
…
현순은 앨리스에게 찾아와 자신의
일을 도와달라고 해서 앨리스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했단다. 그 즈음 가족들 모두 하와이에 가서
해외교포들의 독립운동에 앞장섰단다. 앨리스는 하와이, 국내, 중국을 오가면서 정보원 역할을 했어. 그러던 중 남편 정준으로부터
딸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단다. 앨리스도 마음 약한 어머니였던 거야. 딸이 위독하다는 말에 정준을 찾아갔어. 하지만 이미 딸은 몇 년
전에 죽었다고 하더구나. 정준이 앨리스를 불러들이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야. 그런데 남녀 사이는 예측 불허. 어찌하다 정준의 아이를 또 임신하게
되었단다. 하지만 친일파 정준과 더 이상 함께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이혼을 하게 된 거란다. 그리고 하와이로 다시 가던 길에 부산에서 이경손을 만났던 거야.
몇 년 뒤에 다시 경성에 온
이유는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고 정보를 수집하기 위함이었어. 이런 사실을 경손에게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 카카듀를 이성용의 건물 1층에 세를 둔 것도
이유가 있었어. 이성용도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경성에 왔던 거야.
앨리스와 이성용은 이미 알고 있던 사이였지. 카카듀를 통해 정보를 주고 받고 독립운동 후원금
조달처로 이용했어. 개업 피로회 때 벌어들인 돈도 월세로 낸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 후원금으로 보낸 것이었어. 최근에 일본 경찰이 이런 사실을 포착한 것이야. 그런데 앨리스는
미국인이기 때문에 직접 신문하지 못하고 경손을 대신 체포해서 구타를 한 것이었어. 일종의 경고라고 볼
수 있지. 앨리스의 정체도 드러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앨리스는 상해로 가기로 했단다. 경손도 같이 가려고 했으나 천진까지 갔다가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단다. 경손은
다시 영화 일을 했고 여전히 흥행 실패를 했단다.
…
몇 년 후 상해에 있던 정기탁, 예전에 영화 춘희를 같이 작업했던 사람, 기억나니? 그 정기탁이 상해에 있었는데 경손을 상해에 초청했어. 그래서 경손은
영화인으로 상해에 갔단다. 상해에서도 영화를 두 편 찍기도 했는데 이번에도 흥행은 좋지 않았어. 영화를 그만 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네. 어느날 이성용이 찾아와서
경손을 누군가에게 데리고 갔어. 경손은 앨리스에게 데리고 가는 줄 알았으나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김구였어. 김구는 3.1운동 기념식에 연극을 하나 하려고 하는데 연출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어. 많은 사람들이 연극을 보러 왔단다.
경손은 두리번거리며 앨리스를
찾아보았어. 그리고 앨리스를 보았단다. 앨리스도 경손을 보았으나
도망을 갔단다. 왜 그랬을까? 어떤 마음이었을까? 경손이 뒤쫓아가면서 앨리스는 불렀지만 끝내 대답하지 않고 멀리서 바라만 보고 다시 갈 길을 갔단다. 그것이 앨리스와 마지막 만남이었어.
…
경손은 나중에 태국을 거쳐 홍콩으로
가려고 했는데 태국에서 정착하게 되었어. 영화 일은 그만두고 무역일을 했어. 태국에서 태국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들도 낳고 그랬어. 나중에 이성용이
태국에 와서 앨리스의 소식을 전해주었단다. 앨리는 미국 본토에서 대학 공부를 마치고 해방 이후 다시
우리나라에 와서 미군정에서 통역을 했대. 그런데 공산주의 이력 때문에 추방을 당했고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평양으로 갔다고 하더구나. 그 이후 소식이 끊겼다고 했어. 언젠가는
앨리스를 다시 만날 날을 기대했지만, 경손은 다시는 앨리스를 만나지 못했다는구나.
….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단다. 매력적인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어 좋았는데 그들이 실존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더 좋았단다.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현앨리스는 비현실적인 캐릭터로 생각될 만큼 매력적으로 그려졌어. 지은이 박서련 님이 각색을 했을 수도 있지만, 작가의 말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사실을 근거했다고 하는구나.
이경손은 나중에 <무성영화 시대의 자전>이라는 글을 통해 자신이 겪은 일을
적었다고 했대. 아빠가 현앨리스에 대해서 더 알기 위해서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를 샀다고 했잖아. 그 책에는 1928년부터 29년 사이 현앨리스의 행적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어. 그 시절이 바로 현앨리스가 카카듀를 운영하던 시기였던 거야. 박서련
님은 그렇게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하신 것 같구나. 아무튼 이 소설을 통해서 암울한 일제 시대에도 뜨거운
가슴으로 예술을 사랑하는 젊은이들도 있었고, 더 뜨거운 가슴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젊은이도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새삼 알게 알게 되어 좋았단다. 지은이 박서련 님은 여러 장르의 소설을 쓰시는데 틈틈이 역사소설을
통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분들을 알려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란다. 이 책은 너희들도 꼭 한번 읽어보았으면
좋겠구나. 주변 사람들에도 추천을 해야겠구나.
오늘은 그럼 이만.
PS,
책의 첫 문장: 나는 예술을 믿는다.
책의 끝 문장: 이것이 나에게 일어날 모든 일의 가장 불가해한 요약이다.
한편 나는, 특이나 당시의 나는 구식이든지 신식이든지의 형식을 떠나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에 대하여도 비관적인 인식을 품고 있었다. 작품으로는 모든 장면과 대사에서 열렬한 사랑을 웅변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사랑을 진정으로 믿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랑이란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서…… 돈을 훔친 자도 사랑 때문, 사람을 납치하여 죽인 자도 사랑 때문, 사기 치고 배신하고 강제로 간음하고 교묘히 미치게 하는 등의 온갖 악행이 모두 사랑을 근거로 할 수 있는데, 한때는 인륜을 저버리게 할 만큼 막강하였던 동기가 별안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기도 하는 조화를 과연 어떻게 보아야 옳은가. - P54
옛말에 초상난 절에 중은 많다고 하였던가. 그 말을 처음 한 사람은 후일 이 망국의 수도에 이렇게도 많은 예술가가 날 줄을 미리 내다보았을까. 수도라고 해도 기껏해야 인구 20만 안팎에다 토지 대부분이 날것으로 남아 있는 열악하고 초라한 도시. 그러한 경성에서 수많은 젊은이가 예술가연하고 있었다. 그들 전부는 아닐지라도 몇몇은 필연 거짓되이 예술가 시늉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리란 의심을 해봄 직했다. 때로 내게는 경성 전체가, 나아가 조선 전체가 거짓의 전당처럼 느껴졌다. 가엾게도 스스로가 거짓이라는 것을 모르는 젊은 예술가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예술가가 아닌 자신을 예술가라 믿으며 살아가는 어릿광대의 노릇. - P102
탈이란 즉 가면, 마스크, 얼굴 위에 얼굴. 그것의 사용은 본디부터 극의 모태가 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중세까지는 배우들이 얼굴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었다고 하지 않는가. 가면이 역할의 은유가 아니라 역할 그 자체였던 시대를 지나, 인본주의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배우들은 가면을 벗었을 것이다. 그때에는 그것이 극의 혁명이었을 것이다. 구극이 기껏 벗어던진 가면을 신극이 다시 한번 집어 들게 된 것은 그것을 언제든 벗을 수 있게 되어서다. 과거에는 가면을 벗는 것이 금기였으나 오늘날 가면을 쓰는 것은 금기가 아니며, 한때의 금기마저 연출의 한 소도구로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 오늘날의 신극. 또한, 이러한 예술적 시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조선 천지에 나 정도밖에는 없지 않나 하는 자부에 나는 심취해 있었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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