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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의 시대 - 찬란하고 어두웠던 물리학의 시대 1900~1945
토비아스 휘터 지음, 배명자 옮김 / 흐름출판 / 2023년 5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양자역학에 관심이 많은 아빠에게
눈이 똥그래지게 하는 책이 한 권이 나타났단다. 제목부터가 <불확실성의
시대>. 양자역학을 대표할 수 있는 단어인 ‘불확실성’이 책 제목에 들어가 있으니 양자역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책이 양자역학을 다룬 책이란 것을 알 것 같구나. 이 책의 부제가 <찬란하고 어두웠던 물리학의 시대 1900~1945>라고 되어 있구나.
물리학이란 것이 이제 더 이상
발전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1900년대 초기 지금까지 옳다고 생각했던 물리학을 뒤집어 엎을 일들이
계속 출현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을 거야. 1900년대 시작과 함께 기존의 물리학을 깨는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이 연이어 출현하면서 물리학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지. 하지만 세계는 어지러웠어.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이 벌어졌고, 물리학자들도 양쪽 진영으로 나뉘게 되었지. 그래서 이 책의 부제에
‘찬란’과 ‘어둠’이 같이 들어가 있는 것 같구나.
이 책의 지은이는 뮌헨과 버클리에서
철학과 수학을 공부한 토비아스 휘터라는 사람인데 프리랜서 기자와 작가로 일하고 있다는구나.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책은 <불확실성의 시대> 한 권인 것 같구나. 이 책은 1900년부터 1945년까지의
현대물리학을 연대기 식으로 다루다 보니 아빠가 몇 년 전에 읽은 짐 배것의 <퀀텀 스토리>가 떠오르더구나. 아빠의 기억력으로 그 책의 내용의 기억이 많이
나질 않지만, 그래도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들이 몇몇 있었단다. 그럼 <불확실성의 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게.
1.
먼저 문을 여는 사람은 1900년 막스 플랑크의 이야기란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당시에는 물리학은
이제 거의 모든 것이 다 확정되었기 때문에 더 발전할 것이 없다는 것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대. 하지만
막스 플랑크는 물리학을 전공하였단다. 이전 물리학들이 계속 실패한 흑체복사에 관한 연구를 했어. 흑체복사란 반사가 전혀 안 되는 흑체에서도 온도에 따라 빛이 나오는 현상인데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았나
봐.
플랑크는 독일 베를린 대학교
교수로 일하게 되었고 1900년 10월 19일 드디어 그동안 많은 과학자들이 실패했던 흑체복사이론을 발표했단다. 이
이론을 발표하면서 상수를 하나 소개했는데, 그것이 과학계의 상수에서 가장 작은 상수인 플랑크 상수라는
것이었어. 플랑크 상수는 0.00000000000000000000000000655 란다. 소수점 밑으로도 0이 26개나
있었어. 이 이론에 따르면 흑체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불연속을 가진 에너지가 나오는데 그것은 지금까지의
상식을 깨는 거였어. 에너지는 연속적이라고 생각들을 했거든. 이렇게
에너지가 불연속적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 현대물리학의 시작이자 양자역학의 시작이 된 것이란다.
…
1903년 파리에는 폴란드 출신의 여성 과학자 마리 퀴리가 연구를
하고 있었단다. 마리 퀴리의 언니가 파리에서 의학 전공으로 유학하고 있어서 덩달아 파리로 왔던 거래. 혼자 공부하던 마리는 피에르 퀴리를 만나 함께 연구를 하고 나중에는 결혼까지 하게 되었단다. 둘은 새로운 원소 방사성 원소를 두 개 발견하였단다. 하나는 마리의
조국인 폴란드의 이름을 딴 폴로늄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 유명한 라듐이었단다. 당시 방사성 원소가 그렇게
유해한 물질인줄 몰랐기 때문에 스스로 빛을 내는 라듐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그로 인해 나중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더구나. 안타까운 역사지.
…
1905년는 아인슈타인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지. 스위스 베른에서 특허청 직원으로 일하던 아인슈타인은 5개의 굵직한
논문을 한 해에 모두 발표했단다. 그 중에는 그 유명한 특수상대성 이론도 발표했어. 특수상대성 이론에 대해서는 아빠가 몇 번 이야기를 했으니 오늘은 생략할게.
….
1911년. 덴마크의
닐스 보어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해란다. 영국 켐브리지 대학교에서
JJ톰슨에게 물리학을 배우려고 했지만, 영어가 서툰 닐스 보어를 냉대했고, 닐스 보어는 켐브리지를 떠나 맨체스터 대학으로 옮겼다고 하는구나. 맨체스터
대학에서 러더퍼드 교수 밑에서 공부를 했대. 이 책에 나오는 과학자들은 대부분 너희들이 앞으로 공부하면서
교과서에서 자주 보게 되는 사람들일 거야.
…
1914년 닐스 보어가 뮌헨에서 원자와 전자 궤도에 대한 이론을
발표했어. 이 이론에는 전자가 도약한다는 내용을 포함되어 있는데 왜 언제 어떻게 전자가 도약하는지는
아직 모르는 상태였어. 하지만 많은 물리학자들이 이 이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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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보어는
원자물리학을 창시했다. 그의 모형은 오랫동안 열려 있던 질문에 답하는 동시에 새로운 질문도 만들어냈다. 전자는 도약할지 말지를, 그리고 어떤 궤도로 도약할지를 어떻게 결정할까? 양자 세계에서 다시 어떤 일들이 즉흥적으로 벌어지는 것 같고, 인과
원칙이 다시 힘을 잃는 것 같다. “인과성 문제는 나도 많이 괴롭습니다.” 몇 년 뒤에 아인슈타인은, 원인 없는 양자 도약의 수수께끼가 여전히
풀리지 않았을 때, 막스 보른(Max Born)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이것은 아인슈타인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었다. 물리학자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속으로 알면서도, 감탄을 아끼지 않으며 보어의 원자 모형을 열심히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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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세계1차대전이 일어나서 과학자들도 전쟁에 자유롭지 못해서 참여하게 되었다는구나. 세계1차대전을 이야기하자만 무서운 전염병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구나. 전쟁터에서 알 수 없는 전염병으로 많은 군인들이 죽었고, 전쟁이
끝나고도 이 전염병은 전 세계로 퍼져 500여만 명이 죽었다고 하는구나. 막스 베버와 에곤 쉴레 등 유명인들도 이 병으로 죽었다고 하는구나.
…
1919년 5월 29일은 전세계적으로 개기일식이 있었단다. 일반 사람들은 태양이 사라지는
신기한 현상을 구경한다고 정신이 없을 때, 영국의 에딩턴이라는 사람은 몇 년 전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일반 상대성 이론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에딩턴은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빛이 중력에
의해 휘어진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었단다.
2.
1924년 프랑스의 왕자 드 브로이는 빛과 전자 모두 파동이며 입자일
수 있다는 내용을 발표하였단다. 그 이전까지는 파동과 입자는 별개로 빛도 누군가는 파동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입자라고 했었거든. 그런데 드 브로이가 파동이면서 입자일 수 있다고 발표한 것인데 이것은 정말 혁신적인
생각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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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1923년 말에 드브로이는 “길고 외로운 숙고 끝에” 단순하고 대담한 아이디어에 이르렀다. 그는 광전 효과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주장을 거꾸로 뒤집어보았다. 빛이
입자의 흐름처럼 행동할 수 있다면, 입자 역시 어떤 면에서 파동처럼 행동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대단히 새롭게 과감하게 근거가 빈약한 결론이었다. 지금까지 입자는 파동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응집된 알갱이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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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 … 모든 물질에 이런 이중성이
있습니다! 빛만이 이런 분열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우주
창조의 기본 재료인 모든 원자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손에 들도 있는 이 논문이, 전자든 양성자든 모든 입자에는 파동이 있고, 이 파동이 공간을 이동한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많은 사람이 내 주장을 반박할 것임을 나는 압니다.
그리고 이 주장이 오로지 나의 고독한 숙고에서 나온 것임을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주장이 기이한 주장임을 나는 인정합니다. 만에 하나 그것이 틀렸을 때 내게 닥칠 형벌을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나는 여러분에게 가장 깊은 확신으로 말합니다. 모든
사물은 두 가지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고,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확정적인 없습니다. 나뭇가지에 앉은 참새를 노리는 아이의 손에 들린 돌이 물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릴 수도 있습니다.”
드브로이가
강연을 마쳤고, 교수들은 당황하여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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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브로이의 발표 이후에 많은
이들이 당황했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많은 과학자들이 연구를 시작했고, 하이젠베르크는 헬골란트 섬으로 요양을 갔다가 행렬역학으로 양자역학을 설명하는 것을 성공했단다. 이 이후의 이야기들은 아빠가 그 이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해서 짧게 요약해서 이야기할게. 하이젠베르크가 그 어려운 행렬역학으로 양자역학을 설명해서 동료 과학자들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어려운 행렬역학을
공부해야만 했대. 그런데 1925년 슈뢰딩거가 비교적 쉬운
파동방정식으로 양자역학을 설명하였단다. 과학자들은 어려운 행렬역학보다 쉬운 파동방정식의 설명을 더 좋아했단다. 슈뢰딩거는 이 공식으로 여기저기 강연을 했었나 보구나.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을 이용한 양자역학은 전자의 입자에 대한 설명이 어려워 이를 하이젠베르크와 닐스 보어 등이 반론을 냈지만, 얼마 후 슈뢰딩거는 하이젠베크르의 행렬역학을 일부 조정하면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과 동일함을 밝혀냈단다. 슈뢰딩거가 잘 나가다 보니, 하이젠베르크가 시샘을 했을 것 같기도
하구나. 어찌했든 양자역학을 처음 설명한 사람은 자신인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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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247)
하이젠베르크가
헝클어진 부스스한 금발과 소년 같은 앳된 얼굴, 그리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뒤늦게 강당에 들어섰다. 그는 이제 겨우 스물네 살이지만, 벌써 양자역학의 선두 그룹에 있다. 그는 이론을 창시했다. 그는 이 이론을 간단히 ‘그 양자역학’이라 불렀고, 슈뢰딩거보다
몇 달 먼저 개발했다. 그러므로 어쩌면 지금 강연을 해야 할 사람은 슈뢰딩거가 아니라 하이젠베르크여야
마땅했을지도 모른다.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노르웨이
여행을 중단하고 유럽 대륙을 가로질러 이곳으로 서둘러 왔다. 그는 꽃가루 알레르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트레깅을 위해, “스팀롤러(증기로
가는 삼륜자동차)를 타기 위해”, 그의 말을 빌리면, 다른 양자물리학자들에게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북유럽에 갔었다. 그는 몇 주 전에 미에사 호숫가에서 야영하며 백야 속에서 양자역학을 곰곰이 생각했고, 양자역학을 이용해 헬륨원자의 기이한 긴 스펙트럼을 계산했고, 구드브란스달렌
골짜기에서 송네피오르까지 걸었고, 자신감을 가득 안고 뮌헨에 왔다. 스칸디나비아의
긴 햇살에 하이젠베르크의 얼굴이 갈색으로 그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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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년 폴 디랙이라는 사람이 특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합쳐서
설명하는데 성공했단다. 그리고 디랙 방정식으로 전자 스핀을 설명하였고,
반물질이라는 존재를 발견했어. 반물질도 여러 번 이야기해서 패스할게. 1926년에 슈뢰딩거는 독일에서 강연도 하고 보어의 초대로 코펜하겐에도 오는 등 바쁘게 지냈나 보구나. 슈뢰딩거가 보어와 토론을 하면서 남긴 말이 하나 있는데, 과학을
잘 비유해서 이야기한 것 같아 소개해 본다. “과학은 놀이입니다. 현실이라는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노는 위험한 놀이입니다.”
…
1927년 코펜하겐에서 하이델베르크는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했단다. 이 이론을 아빠가 제대로 이해하는 못했지만, 대충 이해한 바로는
현재의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내용이란다. 그로 인해 미래의 위치와 속도도 알 수
없다는 것이야. 이것은 지금까지 물리학의 상식을 또 한번 깨는 이론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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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의 논문으로,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가 물리학의 토대라고 여겼던 인과성을 흔들었다. “’현재를 정확히 알면, 미래를 계산할 수 있다’는 인과법칙의 명확한 진술에서 틀린 것은 결론이 아니라 전제조건이다.” 우리는
현재를 알 수 없다. 우리는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전자의 미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전자의
미래 위치와 속도의 가능성 확률만을 계산할 수 있다. “양자역학을 통해 인과법칙의 무효성이 명확히 입증된다.” 논문의 마지막 문장이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통한 시공간
혁명에서 감히 그렇게 멀리까지 가지 못했었다. 한때 뉴턴이 상상했던 시계태엽 우주는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변화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는
이마누엘 칸트의 문장도 더는 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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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론은 닐스 보어 조차 반대했었어… 그러다가 닐스 보어의 상보성 이론을 발표하면서 화해를 했다는구나. 하이젠베르크르의
불확정성 원리와 보어의 상보성 이론으로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이 완성되었단다. 이 코펜하겐 해석은
얼마 후에 브뤼셀에서 열린 그 유명한 5차 솔베이 회의의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었단다. 전자 나아가 모든 입자들의 위치가 불확실하고 확률로 존재하는 것을 누가 받아들이겠는가. 닐스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공방전이 이어진 5차 솔베이 회의에 대해서는
아빠가 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했으니 이것도 오늘은 생략할게.
….
3.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일의 나치의 힘이 세지고 나치가 유대인들을
탄압하게 되자 과학자들도 영향을 받게 되었단다. 아인슈타인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초대로 1년 5개월간 머물렀는데 독일의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어 독일로 돌아가지
못하고 벨기에와 영국에 머물다가 다시 미국으로 이전하게 되었단다. 아인슈타인뿐만 아니고 많은 유대인
과학자들이 미국으로 망명을 했단다. 막스 플랑크는 이런 과학자들의 대탈출을 보고 안타까워 하면 히틀러를
만나서 설득하려고 했었다는구나. 하지만 히틀러의 답변은 유대인은 유대인이라는 답변이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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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381)
막스
플랑크는 이런 대탈출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독일 과학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히틀러를
만나려 애썼다. 1933년 5월 16일 11시에 기회가 왔다. 플랑크는
유대인에도 ‘인류에 소중한 사람’과 ‘쓸모없는 사람’ 등 여러 종류가 있으니 구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벨화학상 수상자 프리츠 하버는 부모가 유대인이지만 암모니아 추출 과정을 개발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서 유독가스를 무기로 사용할 수 있게 하여 독일에 기여했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런 구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대인은 유대인이오. 모든 유대인은 엉겅퀴처럼 서로 들러 붙어 있소,.” “그러나 가치
있는 유대인을 외국으로 내보내는 것은 완전히 자해 행위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독일에서 이룩한 그들의
과학 업적이 외국으로 빠져나가 외국을 유익하게 할” 거라고, 플랑크가
반박하고 설득했다. 히틀러는 악명 높은 특유의 흥분 상태에 빠져 무릎을 거세게 때리며 점점 더 빨라지는
말로 일흔다섯의 노교수에게 고함을 치고 강제수용소에 감금하겠다고 위협했다. 플랑크는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다가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가 플랑크의 등에 대고 외쳤다. “한심한 멍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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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년 오토 한과 리제 마이트너는 (사실은 리제 마이트너가 거의 혼자서) 어떤 원자의 핵을 분열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 그러면서 질량이 줄어들고 줄어든 질량만큼 에너지가 나온다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어. 그로 인해 독일에서도 핵폭탄 개발을 추진하였고, 미국에서도 오펜하이머를 중심으로 핵폭탄 프로젝트, 여러 번 이야기해서
너희도 알고 있는 맨하튼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란다. 그리고 맨하튼 프로젝트의 끝은 일본에 투하된 핵폭탄
두 발이었고… 그렇게 <불확실성의 시대>의 책은 끝을 맺었단다. 하지만 지은이는 책은 끝났지만 과학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했단다. 아빠가 예전에 읽은
<퀀텀 스토리>에서도 1945년 이후에도
영자역학의 연구와 입자에 대한 연구를 계속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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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
진짜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책은 언제가 끝난다. 이 책의
물리학자들은 1945년 이후에도 계속 활동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에 견줄 만한 진보를 더는 이루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세계 공식을
찾고자 했다. 하이젠베르크 역시 뭔가를 찾고 있었다. 그들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100년 전에 세운 그들의 이론은
오늘날까지 굳건히 서 있고, 우리의 컴퓨터칩과 의료장비 안에 들어 있고, 당시 이런 이론의 해석을 두고 그들이 겨뤘던 논쟁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심에 있다.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에 제기한 이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회의적인 물리학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이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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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양자역학을 이해할 때까지 아빠의
양자역학 책읽기는 계속될 거야.
PS,
책의 첫 문장: 당신이 사는 세상이 지금까지 믿었던 것과 전혀 다르게
작동한다는 사실을, 어느 날 알게 되었다고 상상해보라.
책의 끝 문장: 이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고전 전기역학의 창시자 맥스웰(James Maxwell)은 1871년에 이미 이런 자기만족을 경고했다. "(측정이 주를 이루는) 현재의 실험은, 중요한 모든 물리적 상수가 몇 년 안에 대략 추산되어 과학자들에게 남은 것은 그저 이 측정을 소수점 아래 수치까지 세밀화 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만연할 만큼 충격적이다." 그는 또 이렇게 강조했다. "꼼꼼한 측정의 노력에서 얻어야 하는 진정한 보상은 더 큰 정확성이 아니라, 새로운 연구 분야의 발견과 새로운 과학 아이디어의 발달이다." 과학의 역사는 맥스웰이 강조한 대로 될 것이다. - P19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보른의 확률, 슈뢰딩거의 파동,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모든 것을 상보성이 양립시킨다. 슈뢰딩거의 파동은 슈뢰딩거가 생각하는 그런 고전적 파동이 결코 아닌데, 측정하지 않을 때만 예측 가능하게 진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파동은 보어 자신의 양자적 사고의 기초인 대응원리에 맞아야 한다. 양자 시스템의 특징에 대한 실질적 설명은 결국 고전물리학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확률 구름을 관찰하지 않는다. 우리는 불확실한 것을 측정하지 않는다. 실험은 구체적인 측정값을 도출한다. - P293
마이트너는 과학학술지 <자연과학 검토>에 논문을 발표할 때 성만 적어서 제출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논문의 저자가 남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브로크하우스 출판사 역시 저자를 남자로 예상하여 백과사전 원고를 의뢰하는 편지에 "미스터 마이트너"라고 적었다. 마이트너가 자신이 여자임을 밝혔을 때, 출판사는 원고 의뢰를 없던 일로 되돌렸다. 프라하대학교가 그녀에게 강사직을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마이트너는 오토 한의 실험실에서 "무급 객원연구원"으로 시들어갔을 터였다. 프로이센 과학아카데미는 그제야 마이트너가 어떤 사람인지 기억해냈다. 마이트너는 1913년 서른다섯 살에 카이저 빌헬름 화학연구소에 정식으로 채용되었다. 그녀는 "과학의 경이로움"에 기뻐했고, 마침내 스스로 커피 살 돈을 벌게 되었다. - P432
보어는 이따금 고등연구소 옆 아인슈타인 집에 들렀고, 두 노신사는 옛날처럼,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양자역학에 대해 다퉜다. 옛날의 결투가 더는 아니다. 오히려 소중한 루틴에 가깝다. 외로운 시간을 보내는 아인슈타인에게 이것은 위로이다. 그는 홀로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너머에 있는 한 이론을 찾고 있다. 그의 사교 범위는 괴델과 몇몇 다른 친구들로 축소되었다. 두 번의 결혼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한 아들과는 사이가 벌어졌고 다른 한 아들은 정신적으로 아프고, 딸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아인슈타인이 1955년 4월에 생을 마감할 때, 그의 연구실 칠판에는 아무 결과도 도출하지 않는 공식들이 가득 차 적혀 있었다. - P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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