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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식 - 시대를 앞서간 민족혁명의 선각자 ㅣ 독립기념관 :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23
강영심 지음 / 역사공간 / 2010년 12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독립운동가에 관한 책
한 권을 소개할게. 신규식이라는 분에 관한 이야기란다. 아빠도
잘 모르고 있던 분인데, 몇 년 전 김종훈, 김혜주, 정교진, 최한솔 님의 <임정로그 4000Km>라는 책에서 알게 분이란다. 짧게 소개해 주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분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인터넷서점에게 신규식 님에 관한 책이 있나 검색했었단다.
많지 않은 책 중에 아빠가 고른
책이 오늘 너희들에게 이야기해 줄 강영심 님의 <신규식, 시대를
앞서간 민족혁명의 선각자>라는 책이란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찾아 읽는 것이 아빠 나름의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그런 활동이라고 생각한단다. 더
많은 분들에 관해 공부하고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읽어야 할 책들이 많아 자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책을 읽지는 못하는구나. 자, 그럼 신규식 님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
1.
신규식 님은 1880년 2월 22일
충청북도 문의군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는구나. 그곳은 산동 신씨 문중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어. 아빠가 존경하는 신채호 님도 이곳 출신이라고 하는구나. 신규식 님의
선조들도 이야기하면서, 신숙주의 후손이라고 소개를 해주었어. 신숙주가
집현전의 유능한 학자로만 소개를 했는데, 나중에 변절한 행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지은이의
실책이라고 생각한단다. 변절자의 대명사 신숙주의 후손이긴 하지만 신규식은 그의 길을 따르지 않은 위인이라고
소개를 했어야 한다고 생각해.
…
신규식 님의 아버지는 의금부
도사와 중추원에서 일을 하셨다고 하는구나. 신규식 님은 학생 때 벌써 을미의병에 참여하기도 했대. 1896년에는 조정완이라는 분과 결혼을 하였고, 개화 공부를 하기
위해 상경을 하였다고 하는구나. 한어학교라는 외국어 학교에 입학하여 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했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대외 활동을 시작했어. 먼저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였고, 만민공동회도 주도했단다.
이 일로 한어학교에서 퇴학당한
것 같다는구나. 이후 대한육군무관학교에 들어가서 보병참위에 입관하게 되었어.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나서 신규식 님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자살을 시도했단다. 다행히 가족들이 발견해 목숨을 건질 수 있지만, 오른쪽 시신경이
마비되어 한쪽으로 눈동자가 치우치게 되었대. 신규식 님의 호가 예관(睨觀)인데 눈이 한쪽으로 치우쳐서 ‘흘겨본다’라는 뜻의 예관(睨觀)으로
지은 거래.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우리나라는 점점 쓰러져가는 모래성 같은
상황이었단다. 일본의 무력 앞에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어. 1907년에는
군대가 해산되어 신규식 님도 보직을 내려놓아야 했단다. 나라가 힘을 가지려면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이때부터 계몽운동을 시작했단다. 산업발달의 중요성을 깨닫고 공업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공부하기도 하고, 산동 신씨 문중에서 만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한국혼>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민족의식을 높이는데 도움을 주었어. 그
책은 그의 사후 정식 출간되었고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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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46)
신규식이
순국한 지 1년 후에 그의 역사관이 담긴 한국통사 <한국혼>이 출간되었다. 중국학자 후린이 다음과 같은 글을 서문에 적어
신규식의 독립투쟁의 산증인이 되었다. “한국 문제는 일본 군벌이 일본 국민에게 남긴 하나의 큰 빚이다. 이 빚은 언젠가 청산되어야 한다. 폴란드가 독립하고 체코가 새롭게
부흥하였으며 인도의 이집트 역시 기필코 독립할 것이다. 한국 문제 또한 오래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신규식 선생 그는 비록 우리를 떠났지만 그의 정신은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의 혁명가도 그를 기려 ‘계속해 영웅들 일어나 마음모아 배를 저어가니 나라의
혼은 살아날 것이고 선생 또한 영원하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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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규식은 나철을 만나 대종교
활동을 시작했단다. 당시 나철의 대종교는 독립운동의 바탕 역할을 하고 있었어. 그러던 중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나고 신규식은 또다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했는데, 이번에는 나철이 발견하여 구해주었단다.
경술국치 이후 나철의 대종교는 계속 탄압을 받게 되어, 만주로 이동하여 활동을 이어나갔어. 신규식은 이때 상하이행을 선택했단다.
신규식은 재산을 처분한 후 상하이로
향했단다. 그가 상하이를 선택한 이유는 당시 상하이는 국제도시로 발돋움한 곳으로 다른 나라로부터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3.1운동
이후 상하이로 망명한 것을 생각하면 신규식의 판단력은 뛰어났다고 볼 수 있겠구나. 그렇게 일찍 상하이에
정착하여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에 나중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로 올 수 있지 않았을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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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신규식은 1911년경 한국인은 거의 없고 한국독립운동가들도 주목하지 않던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그곳에 한국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여 민족혁명의 앞길을 연 선각자였다.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독립운동가를 불러모으고 조국의 젊은이들을
불러들여 중국이나 미국의 학교에 보내고 혹은 직접 세운 학교에서 독립운동의 인재를 양성해 가면서 상하이를 한국독립운동의 전략적 기지로 구축하여
마침내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도록 디딤돌을 놓았던 독립운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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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하이에 아직 우리 동포들이
많지 않다 보니 신규식은 중국혁명지사들과 교류하였고 중국 신해혁명에도 참여하게 되었단다. 하지만 신해혁명이
중국의 위안스카이의 배신으로 중국으로 혼란에 빠지게 돼. 신규식도 위안스카이가 감시하는 명단에 포함되어
있어서 행동 범위가 조심스러웠대. 하지만 여전히 중국혁명가들과 교류하면서 계속 중국 혁명 활동을 이어나갔어. 신규식은 동재사라는 조직을 결성했어. 본부는 상하이에 두고, 베이징과 만주에 지사도 둔 비교적 큰 조직이었단다. 이 조직은 300여 명까지 커졌어. 1913년 독립운동을 하려는 청년들을 교육시키는
교육기관을 만들었단다. 박은식, 신채호도 이 일에 동참을
했어. 그렇게 모인 청년들은 중국과 미국, 프랑스 등에 유학을
보냈다고 하는구나. 중국의 군사학교에 학생들을 보내 군사교육도 받을 수 있게 했어. 이 활동으로 통해 독립운동 인재를 양성하였고, 그들은 향후 항일운동을
주도하게 된단다.
….
1914년 세계1차대전이
일어나게 되는데, 신규식을 비롯한 당시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은 이것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단다. 세계1차대전에 일본도 연합군으로 참전하면서 독일의 적군이 되었어. 적의 적은 우리편이라는 생각에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에 대항하여 싸우는 독일과 중국을 지지하면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단다. 하지만 세계1차대전은 독일이 승리하면서 일본의
입지가 더 강화되었지. 세계1차대전이 끝나고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희망을 걸어보았지만, 파리강화회의는 승전국들의 잔치였고, 그
잔치에는 일본도 포함되어 있었단다.
…
3.1운동 이후 상하이에 만들어진 임시정부에서 신규식은 법무청장을
맡게 되었어. 좋은 뜻에서 시작한 임시정부는 얼마 못 가 내부 갈등이 벌어졌고, 어떻게든 임시정부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신규식은 이승만을 지지하기도 했단다. 이승만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지지하기 힘들었을 텐데 말이야.
신규식은 임시정부에서 법무총장에
이어 외교부총장이 되어 활동하기도 했어. 광둥특사로 중국의 쑨웜과 만나 한국 독립에 대해 지지를 받아내고
원조 약속도 받아냈단다. 태평양 회의에 파견 나가서는 영국, 프랑스
영사들과 만나 우리나라의 사정에 대해 이야기도 나누었어. 그렇게 열심히 활동하던 신규식에게 심장병과
신경쇠약이라는 병마가 찾아왔어. 두 번의 자살 시도와 오랜 타지에서의 생활이 건강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닐까. 병이 걸린 후 그는 치료를 거부하고 단식을 하다가 1922년 9월 25일 “정부! 정부!”라는 말을
남기고 삶을 마감했단다.
40년 남짓한 짧은 그의 삶이었지만, 무엇보다 치열하고 뜨겁게 사신 분인 것 같구나. 그가 살았던 40여 년은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가장 힘든 시기 중에 하나였다는 점에서 그에게는 불운이었지만, 그의 조선 독립을 위한 수많은 노력들이 밑거름이 되어 해방도 되고 이후 우리나라가 발전하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단다.
…
요즘 친일파들이 다시 극성인데, 그럴수록 진행 우리 나라를 위해 싸우셨던 독립운동가의 삶을 찾아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이 책을 통해 이름만 어렴풋이 알고 있던 신규식 님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구나.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독립기념관 제6전시관
내 임시정부실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20여 명의 밀랍상이 전시되어 있다.
책의 끝 문장: 신규식의 선구적인 삶의 자취에는 우리는 정의와 인류애를
추구하며 사람답게 사는 스승의 모습을, 그리고 민족이나 국가를 이끌어가는 진정한 지도자상을 만날 수
있다.
다. 하지만 이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와 중국 지역 독립운동 조직이 봉쇄당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각지의 운동역량을 재정비하여 독립전쟁을 결행할 전략을 감행하려한 점에서 분산된 독립운동역량을 단일화한 선구적 무장투쟁으로 규정할 수 있다. 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신한혁명당의 활동은 독립운동계에서 공화주의 노선이 이념으로 정립되는 견인차가 되었던 것과 이후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국내의 민중적 기반 위에 선 정부가 조직되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해 준 점에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 - P100
"우리나라를 욕심낸 나라를 귀국이다. 지금 태평양회의를 앞두고 본국에서는 대화에 대표를 파견하려 한다. 귀국은 국제조약에 따라 대회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제출하여 주기를 바란다. 이 문제는 귀국의 자구책 가운데 상책이다. 발칸문제 때문에 유럽전쟁이 일어났듯이 지금 귀국의 지위가 바로 서방의 발칸사정과 똑같다. 때문에 동아전쟁이 일단 발동되면 귀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먼저 참여할 것이 조금도 의심되지 않는다. 본국 문제가 토의될 것을 핵망하며 귀 정부를 재촉하기를 바란다. 이것은 귀국을 위한 자구책이며 양국을 위한 일이다." - P129
1922년 8월 초순 찌는 듯이 무더운 여름 날, 신규식은 여느 때처럼 창가에 섰다. 살이 홀쭉히 빠진 그의 양볼에는 깊게 주름이 잡혔다. 그는 백지장처럼 하얗고 움푹 팬 눈으로 창밖의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다가 갑자기 "나는 아무 죄도 없고, 나는 아무 죄도 없소. 그럼 잘들 있으시오! 우리 친구들이요. 나는 가겠소. 여러분들 임시정부를 잘 간직하고 삼천만 동포를 위하여 힘쓰시오. 나는 가겠소. 나는 아무 죄 없소"라는 자책하는 듯한 독백을 남기곤 입을 다물었다. - P141
황커치앙에게 보낸 시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우선 극악무도한 자를 죽이고, 이어 약속을 어긴 이웃 일본을 죽이고, 남은 힘으로 뭇 요물들을 물리쳐. 태평양으로 내던진 뒤 피먼지를 씻노라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그의 진보적인 태도는 위안스카이에 의해 살해된 중국의 근대 민주 혁명가를 애도하기 위해 쓴 수많은 시속에 집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 P157
신규식의 삶은 인간사랑, 민족사랑으로 가득찬 가장 인간적인 민족지도자의 모습을 대표한다. 그의 시에 자신의 마음과 생각과 바람을 담아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던 풍류를 알고 인생을 노래하던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소유한 인사였다. 하지만 민족적 국가의 존립조차 위태로운 한말, 식민지시대를 살아야 하는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민족문제 해결이란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시대 인식을 실제 삶으로 구현해 냈던 믿음직한 선현 중 하나가 되었다. 자신이 그렇게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변했던 민족역사 속의 선현들처럼 닮아 민족자결, 민족독립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생을 바쳤다. 우리의 구명부는 오직 ‘민족자결’이라는 한가지 소망을 가슴에 새기며 결코 앞에 나서지 않고 통합의 울타리가 되어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감내해 낸 그럼 민족운동가였다. 그의 뒤를 이은 우리가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되는, 반드시 기억하고 기려야 하는 일제시대 민족운동가 중 한사람이다.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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