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집단생활의 역학은 아른험 집단에서 일어난 지도력의 변화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 변화 과정은 수개월에 걸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리더십의 변화가 단 몇 차례의 투쟁으로 결판나지 않았다. 내 연구는 결코 눈에 띄지 않게
계속되는 사회적 책략에 관한 것인데, 그것은 최종적으로 리더의 추방으로 이어진다. 집단의 안정성은 그 토대부터 천천히 무너진다. 개체들은 제각기 음모에
찬 감시망 속에서 자기가 완수해야 할 역할을 가지고 있다. 미래의 새로운 리더는 스스로 그 길을 개척해
나가지만 혼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단독으로 자기의 리더십을 집단에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지위는 부분적으로 다른 침팬지에 의해 주어진다. 리더, 즉 우두머리 수놈도 다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역시 감시망에 걸려 있다고 할 수 있다.
(39)
1년 중 침팬지들이 가장 기쁜 날은 바로 겨울 주거지에서
벗어나는 날이다. 그날 아침이 되면 사육 담당자가 야외 사육장으로 통하는 문을 통보 없이 열어젖힌다. 침팬지들도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는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볼 수는 없지만, 건물에 있는 모든 문의 움직임을 소리만으로도 쉽게 분간할 수 있다. 1초도
채 지나지 않아 집단 전체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면서 반응한다. 그리고 그들은 소집단 별로 나뉘어
야외로 나간다. 비명과 ‘후우후우’ 하는 소리는 여전히 계속된다. 광장 여기저기서 침팬지들이 서로 포옹하거나
키스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때로는 세 마리, 또는 그
이상의 침팬지들이 흥분해서 펄쩍펄쩍 뛰거나 서로의 등에 올라타기도 한다.
(49)
침팬지의 표정은 각각의 특정한 기분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즐거운 기분과 불안한 기분 사이의 차이는 이빨이 어느 정도 드러나는지로 추측할 수 있다. 침팬지는 놀라거나 괴로울 때면 즐거울 때보다 훨씬 길게 이빨을 드러낸다. 보통의
구경꾼에게 입을 크게 벌린 표정이 즐거워서 웃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적어도 침팬지의 경우는 웃을 만한
일과 전혀 관계없는 것이 확실하다. 이와 같이 이빨을 드러내는 것은 엄마가 제멋대로 방치해서 외톨박이가
된 새끼가 집단 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구성원과 싸우게 된 제법 나이든 침팬지에서 가끔 볼 수 있다. (서열이
높은 침팬지는 좀처럼 이빨을 드러내지 않는다.)
(76)
이런 견해에 따르면 기술적인 창의성은 부차적인 발전이다. 영장류
지능의 진화는 꾀로 상대방을 이기고, 속임수 전략을 감지하고, 상호
이익이 되는 타협을 이루며, 자신의 삶에 이득이 되는 사회적 연대를 증진시키기 위한 필요성에서 출발했다. 침팬지들은 이런 영역에서 분명히 뛰어나다. 그들이 가진 기술적인
재주는 인간보다 떨어지는 것이 확실하지만, 그들의 사회적인 능력도 그렇다고는 쉽게 단정하지 못하겠다.
(79)
침팬지들은 각기 나름대로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얼굴
생김새의 특징으로 우리가 주위 사람들을 알아보듯 침팬지들도 서로를 쉽게 구별할 수 있다. 게다가 목소리까지도
모두 다르기 때문에 연구를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난 후에는 목소리만 듣고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침팬지들은
각자 걷는 법, 잠자는 자세, 그리고 앉는 모양새에도 특징이
있어 머리를 돌린다거나 등을 만지는 것만 보고도 어떤 놈인지 구별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의
개성을 이야기하는 데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각각의 침팬지들이 집단 내에서 동료들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이다. 이런
차이는 사람들을 특징 짓는 데 사용하는 것과 똑 같은 형용사를 쓰지 않는다면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양하다.
(106-107)
그 사육사는 일하는 날이면 종종 곤욕을 치러야 했다. 아침에
단디를 잠자리에서 밖으로 불러내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단디는 다른 침팬지들과 같은 시간에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매몰차게 거부했다. 그에 대한 벌칙으로 사육사가 하루 종일 음식을 주지 않으려고 하자 나는
이렇게 충고했다. 그런 심한 수단은 옛날에나 통하던 것이었고, 그러자
사육사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가장 영리한 묘안을 생각해냈다. 며칠 지나서 그는 자랑스럽게 자신의 성과를
보여주었다. 다른 챔팬지들이 모두 밖으로 나왔는데도 단디는 손을 놓고 실내에 앉아 있었다. 사육사는 단디의 손에 바나나 두 개를 들려주었고, 그러자 곧 단디가
밖으로 나왔다. 사육사는 자신이 단디가 밖으로 나오도록 가르친 것으로 여겼지만, 내 생각에는 거꾸로 단디가 사육사로 하여금 바나나를 가지고 오도록 훈련시켰을 가능성이 더 큰 것 같았다. 만일 침팬지에게서 그런 뇌물 수수가 유행처럼 번지기라도 한다면 매일 아침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127-128)
큰 소란이 순식간에 시작된 것처럼 평화도 그렇게 찾아온다. 이에룬이
자리를 잡으면 다른 침팬지들이 서둘러 그의 곁으로 와 인사를 한다. 마치 왕이나 된 것처럼 집단적 경의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면서 신하 몇쯤은 쳐다볼 가치조차 없다는 듯 무시한다. 이 같은 ‘의례(formalities)’가 끝나면 모두가 다시 조용히 자리에
앉고 새끼들도 어미에게서 떨어져 멀리 돌아다니며, 이에룬은 편안한 자세로 암놈들의 털고르기에 몸을 맡기거나
요나스나 바우터 같은 새끼들과 장난을 치기도 한다. 이 새끼들은 늘 두목과 장난 싸움을 할 태세가 되어
있다. 새끼들은 이에룬에 대한 경의는 까맣게 잊어버린 양 그를 쫓아다니며 모래를 뿌리거나 나무 막대기를
집어던진다.
(142)
내 경험에 의하면 장성한 수놈 침팬지 사이에서 나타난 위협 과시의 경우, 열 번 중 네 번 정도가 이에룬이 비명을 지르고 라윗이 빰을 강하게 후려치는 것과 같은 실제적인 충돌로 이어졌다. 이 같은 사건은 대개 위협, 추적,
비명 같은 일련의 행동이 포함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수놈들 사이에서 서로 때리는 일은 흔하지
않지만 한 번 가격을 했다고 그 자체로 싸움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심각한 다툼일 때는 실제로 맞수끼리
서로 붙잡고 물어뜯는다. 백 번의 충돌 가운데 한 번 이하, 정확하게는
수놈까리의 대결 중 0.4퍼센트만이 진짜 결판을 내는 결투에 이른다.
빈도는 낮지만 결투의 위협은 늘 상존하고 있고, 바로 이런 점이 우위 다툼 과정의 긴장감을
더욱 부채질한다.
(164)
우리는 싸움의 결과를 사회적 관계를 규정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회 관계가 싸움의 결과를 결정했다. 뒤에 살펴볼
우열을 둘러싼 교섭의 과정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났다. 즉, 사회적인
배경이 경쟁자들의 자신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다른 구성원들의 태도에 의해 그들의 실력이
결정되는 것과 같았다(이것은 축구팀이 원정 경기보다는 홈 경기에서 이길 확률이 높은 것과 비슷하다). 한 달쯤 뒤 숙소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라윗은 이에룬보다 육체적으로 강력하다는 점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집단
전체에서 자신의 승리를 확인하기까지는 9주일이나 더 걸렸다. 그
무렵 이에룬은 더 이상 다른 동료들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파위스트는 이미 그의 진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라윗은 이에룬에게 노골적으로 도발하기 전에 먼저 집단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폈다. 최후의 결전에서 거둔 그의 승리는 단순히 야만적인 힘의 과시만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라윗이 이에룬에게 다른 구성원들의 태도가 이미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시켰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171)
털고르기, 눈길 맞추기, 평화 협정, 중재 등을 생각하면 화해라는 주요 테마가 우리의 큰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이런 행동이 갖는 사회적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믿는다. 그것은 분명 집단생활을 파괴할 우려가 있는 여러 세력에 대한 건설적인 균형추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까지 화해 행동에 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1960~1970년대에 걸쳐 인간이나 동물의 공격적인 행위에 대한 연구에는 막대한 연구비가 투여되었지만 그
행위가 어떤 식으로 종결되는지에 대한 연구에는 무심했다.
(185)
강자의 보안관 역할과 그 강자가 위협에 직면했을 때 약자로부터 받는 지원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을지는 뻔하다. 암놈과 그 새끼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1인자
수놈은 장차 라이벌과의 권력투쟁에서 어떠한 지원도 기대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1인자 수놈의 보안관 역할은 호의라기보다 의무에 가깝다. 1인자로서의
지위는 이 같은 의무에 달려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에룬의 몰락은 그가 라윗이나 니키의 공격으로부터
다른 구성원들을 효과적으로 지켜내지 못했다는 사실로도 설명될 수 있다. 라윗의 행동도 그와 같은 견지에서
해석될 수 있다. 라윗은 암놈들을 공격하거나 이에룬에게 지원을 요청해봤자 별 볼일이 없다는 점을 시위했던
것이다. 하지만 쿠데타에 성공하고 나자 그는 완전히 태도를 바꾸어서 스스로 보호자의 역할을 자청하고
나섰던 것이다.
(231)
동물원 관람객들 중에는 침팬지의 성행위를 보고 충격을 받아서 함께 온 아이들의 손을 잡아당기며
발걸음을 돌리는 이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인간과 비교하는 사람도 있고, 숨을 죽인 채 그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있다. 섹스는 누구라도
냉정함을 잃게 만든다. 부풀어오른 암놈들의 음순은 즉각적으로 주목을 끈다. 외부인들은 믿기 어렵겠지만, 우리는 부풀어오른 암놈들의 아랫도리에
너무 익숙해서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심지어 암버르나 호릴라 같은 암놈의 성기는 아름답고 우아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에게는 침팬지의 성기가 역겹게 느껴지거나 만성적인 종기로 오해받기도
한다. 언젠가 한 여성이 동물원의 안내창구로 찾아와서는 괴물처럼 빨간 ‘머리’를 한 침팬지가 있다고 제보를 한 적이 있었다. 그날 암놈 한 마리가 팽창된 성기를 자랑스럽게 공중에 드러내고 잠시 물구나무를 섰던 모양이다. 그것은 발정한 암놈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세였다.
(248)
왜 이토록 너그럽지 못한 것일까? 어째서 수놈들은
다른 놈들을 가만 놔두지 못하는 것일까? 질투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관건은
그런 질투의 기능이 무엇인가이다. 질투에 수반되는 긴장과 위험이 아무런 긍정적인 기능을 갖지 못했다면
질투는 이미 오래 전에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성행위를 둘러싼 수놈 간의 경쟁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암놈은 한 마리의 수놈에게서만 수정된다. 수놈은
다른 수놈들은 암놈에게서 멀리하도록 해야 그 암놈이 낳은 새끼의 아비가 될 확률이 높아진다. 결과적으로
너그러운 수놈보다는 질투심 많은 수놈이 자신의 자식을 임신시킬 확률이 높아진다. 만약 질투심이 유전되는
것이라면(이것이 이 이론이 전제하는 바이다) 이런 성질을
가진 새끼들이 점점 많이 태어날 것이며 훗날 어른이 되어 다른 수놈들을 번식 행위에서 배제하려 들 것이다.
(270)
서열을 결정짓는 원리를 성별에 따라 다르다. 수놈
사이에서는 연합이 우열을 결정한다. 수놈이 암놈에 비해 우위에 있는 것은 주로 육체적 우월성에 기인한다. 한편, 암놈끼리의 서열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보다 ‘성격’과 ‘나이’다.
(279)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서 선천적인 사회적 성향을 사용하려면 경험이 필요하다. 날개를 갖고 태어난 어린 새가 비행에 숙달하려면 몇 달 간의 연습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정치적 전략의 경우에 경험은 두 가지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다. 하나는
경험을 사회적 과정 자체에 직접 활용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오랜 경험을 사회적 과정 자체에 직접
활용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오랜 경험을 미래에 투영하는 경우다.
이 중 첫 번째 가능성은 이에룬 같은 침팬지가 니키를 지원함으로써 그가 자신에게 어떤 이득이 돌아올지를 알았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는 조건화될 수 있다. 즉, 특정한
행동이 그로 인한 긍정적인 효과에 의해 더욱 강화되는 것이다.
(283)
인간은 말하는 영장류이지만 행동은 침팬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말다툼, 도발적인 언어폭력,
항의와 간섭, 화해의 언사 등 여러 형태로 언어를 활용하지만, 침팬지는 그것들을 언어가 아닌 형태로 표현하는 것뿐이다. 인간이
말 대신 행동으로 무언가를 표현할 경우에는 침팬지와 더욱더 유사해진다. 침팬지는 비명과 큰소리를 지르고, 문을 두드리고, 물건을 던지고, 도움을
청하고, 나중에는 우호적인 접촉이나 포옹으로 무마하려 한다. 우리
인간들도 보통 의식적인 결정 없이 그러한 형태의 행동을 모두 연출한다. 이러한 행동들의 동기를 볼 때
인간과 침팬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
(298)
다른 침팬지들을 위해 가지를 붙들고 있어주는 행위는 연합 형성 행위 그 이상인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도움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계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뭇잎과
고기를 나눠먹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런 행위가 성적 특권을 양보한다거나 바람막이가 되어주는
것보다는 선뜻 이뤄질 수 있는 관용적 행위라고 여긴다. 물론 이 두 가지 형태의 협력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침팬지 수놈은 물질적인 것을 나눌 때에는 놀랄 정도로 너그럽다.
자기 손에 있는 물건을 암놈들이 낚아채는 것조차 용인할 정도다. 이러한 특성은 사회적 행동에서도
나타난다(라이벌에 대해서만큼은 예외지만). 그들은 도움을
줌으로써 동시에 통제하려 한다. 이를 보호해주는 대신에 그로부터 존경과 지지를 받아내는 것이다.
(312-313)
인간을 침팬지와 비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욕적이거나, 혹은
그 이상의 죄악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동기를 더욱 동물적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침팬지들 사이에서 권력 정치는 단지 ‘나쁘다’거나 ‘더럽다’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른험 집단에 사는 침팬지들에게 논리적 정합성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민주적 구조도 안겨주었다. 모든 파벌들은 일시적인 권력 균형에
이를 때까지 사회적 영향력을 계속해서 찾는다. 그리고 이런 균형은 서열상의 지위를 새롭게 결정한다. 다소 유동적인 지위가 ‘고정’될
때까지 관계는 계속해서 변한다. 이 같은 서열의 공식화가 어떻게 화해 가운데 일어나는지를 보게 되면, 집단 내의 서열이 경쟁과 충돌을 제한하는 ‘응집적’ 요소임을 이해할 수 있다. 육아,
놀이, 섹스, 협력 등은 그로 인해 찾아오는
안정 상태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수면 아래의 상황은 늘 유동적인 상태이다. 권력의 균형은 매일매일 시험되며, 만일 그것이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도전이 일어나고 새로운 균형이 찾아올 것이다. 결국 침팬지들의 정치도 건설적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로 분류되는 것을 명예롭게 여겨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