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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프 푸셰 -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전면 새번역 ㅣ 누구나 인간 시리즈 2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상원 옮김 / 이화북스 / 2019년 9월
평점 :
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아빠는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를 좋아한단다. 그의 책들을 읽고 실망한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 같아. 그래서 가끔씩 그의 책을 찾아 읽는데, 오늘은 그가 쓴 조제프 푸셰라는
사람의 평전이란다. 조제프 푸셰. 아빠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란다. 아니, 아마 들어보거나 읽어봤을 법한 이름이란다. 왜냐하면 그가 살았던 시대가 프랑스 혁명을 관통하는 시대였기 때문이야. 아빠가
프랑스 혁명에 관심이 있어서 관련된 책들을 여럿 읽었잖니. 그래서 한번쯤은 봤을 텐데,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는 이름이구나. 그건 그가 겉으로 드러내는
것보다 뒤에서 판세나 사람들을 조정하는 그런 삶의 방식을 택해서일 수도 있어.
책 앞면에 보면 “나폴레옹도 두려워한 조제프 푸셰의 삶”이라고 적혀 있고, 책 뒷면에 보면 “프랑스 혁명을 배후 조종한 기회주의자의 삶”이라고 적혀 있단다. 조제프 푸셰라는 사람은 프랑스 혁명 한복판에
있던 사람이지만,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키요틴에 목이 잘려 나갈 때 어찌 살아날
수 있는지도 이야기해줄게. 그 힌트는 책 뒷면에 적혀 있는 그의 평가 중에 ‘기회주의의 삶’이라는 문구가 힌트가 될 수 있겠구나. 조제프 푸셰라는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을 해보면 두 권이 나오는데 모두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이란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이 책을 두 출판사에서 각각 다른 책 제목으로 출간했더구나.
자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볼게.
1.
조제프 푸셰는 1759년 5월 30일
낭트에서 태어났단다. 어렸을 때 교회에서 공부했는데 곧잘 했다는구나.
스물 살부터 서른 살까지는 수도원에서 지내면서 교사 일을 했대. 수학과 물리를 가르쳤다고
하는구나. 그의 첫 사회생활은 뜻밖에도 선생님이었구나. 그것도
거의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것도 욕구를 제한 받는 수도원에서… 그런 생활은 침묵하는데 익숙하고 자기 통제를 잘 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관리
능력에도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 하는구나. 변호사인 로베스피에르와 친하게 지내기도 했대. 프랑스 혁명의 주인공급 인물인 그 로베스피에르 맞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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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삭발한 수도원 교사는 창백하고 신경질적이며 야심에 넘치는 변호사 로베스피에르와 각별히
친해진다. 더군다나 이 둘의 관계는 처남 매부 간으로 발전해 나가려는 참이다. 막시밀리앙의 누이인 샤를로트 로베스피에르는 오라투아르 교단의 교사를 수도승 신분에서 해방시키고자 한다. 곳곳에서 둘이 약혼했다는 소문이 돈다. 왜 이 혼사가 결렬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여기에 두 남자가 서로 증오하게 된 이유가 숨겨져 있는 듯이다. 예전에 친구였던
두 남자는 후일 목숨을 걸고 세계사에 남을 싸움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그 무렵 그들에게는 자코뱅도
증오도 낯선 단어이다. 증오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가 삼부회 의원 자격으로 프랑스의 새 헌법을 장만하도록 빈털터리 변호사에게 금화를 빌려준 것도 다름 아닌 삭발승 조제프 푸셰이다. 이 일화는 그가 나중에 자주 맡게 될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다른
사람에게 세계 역사에 남을 경력을 쌓도록 발판을 받쳐 주는 역할 말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옛 친구를 배반하고 등을 밀쳐 쓰러뜨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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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에서 선생님 생활을 마치고
서른두 살인 1792년 국민공회의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를 시작하게 되었다는구나. 국민공회 의원이 된 조제프 푸셰. 루이 16세의 대한 처분 결정 회의에 참석하게 된단다. 푸셰는 다수파인
지롱파(온건파)에 앉아 있었는데 그 이유는 지롱파가 그저
다수파였기 때문이야. 강건파였던 로베스피에르는 푸셰에게 배신감을 느꼈단다. 자신과 친분이 있으니 당연히 자신의 편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
루이 16세의 대한 처분 결정 회의에서 온건파가 다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루이 16세는
사형이 결정되었단다. 왜냐하면 당시 여론이 사형이었는데, 온건파에서
여론을 거슬러 사형 반대에 표를 던지는 것이 부담스러웠거든. 특히 푸셰는 남들 시선을 의식하고 몸을
사리는 체질이라 온건파임에도 불구하고 사형에 투표를 했단다. 이 일을 계기로 푸셰는 급진파로 방향을
선회했는데, 급진파 중의 급진파로 불렀단다. 리옹에서 리옹
시의회에 의해 혁명파 샬리에가 처형당하는 일이 발생했어. 국민공회는 이것을 반란으로 규정하고 리옹을
파괴하고 관련자를 처형하기로 결정했어. 이를 집행하기 위해 어떤 사람을 보냈는데, 이 사람이 온건하게 대응을 해서, 국민공회는 다시 과격급진혁명주의자인
푸셰를 리옹에 보내기로 결정했단다. 푸셰는 리옹의 도살자라고 불리며 학살을 저질렀어. 단두대가 느리다며 사람들을 모아두고 대포나 총으로 죽였단다. 몇
주 만에 1600여 명을 죽였다고 했어. 푸셰가 그렇게 한
이유는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권력에 밉보이지 않으려는 이유였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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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69)
세계의
역사는 대개는 용감한 자들의 역사로 서술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게 다는 아니다. 세계의 역사는 비겁한
자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정치란 공동체의 의견을 선도하는 것이라고 믿으려 하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지도자는 공동체의 의견이라는 법정을 만들고 거기에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바로 이 법적 앞에서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기도 한다. 전쟁도 항상 이러다가 일어난다. 위험한
말로 불장난을 하고 민족 감정을 자극하다가 정치가는 범죄를 범하게 된다. 이 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악덕과 잔인성도 인간의 비겁함만큼 많은 피를 흘리게 한 적은 없다. 따라서 조제프 푸셰가 리옹에서 대중을
학살한 것은 공화주의자의 열정 때문이 아니다.(그는 열정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저 자신이 온건주의자로 밉보일까 봐 두려워서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어떤 생각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행동을 했느냐가 중요하다. 설마 그가 수천 번 ‘리옹의 도살자’라는 호칭을 부인한다 할지라도 그의 이름은 이 호칭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얽히게 된다. 그가 나중에 공작의 망토를 두른다 해도 손에 묻은 핏자국을 감출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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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국민공회는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를 벌이고 있었단다. 그의 앙숙이나 반대파를 모두 단두대로 보내고, 혼자 정권을 차지하고 있었어. 그런 와중에 로베스피에르는 리옹에
있던 푸셰를 호출했단다. 거의 단두대행이 확실했어. 푸셰도
머리를 굴렸어. 푸셰는 일단 로베스피에르의 반대파인 자코뱅클럽과 친분을 쌓았고 나중에는 자코뱅클럽의
총재가 되었어. 권한을 갖게 된 푸셰는 로베스피에르의 소환 명령을 무시했어. 그러자 로베스피에르는 푸셰 탄핵 연설을 했고, 국민공회는 이를 받아들여
푸셰는 탄핵당했어.
푸셰는 반격을 준비했단다. 이 반격에서 지면 죽을 수도 있었어. 푸셰는 '불안'을 이용했어. 의원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로베스피에르의 살생부에 올랐다는 소문이 있다고 했어. 그런 식으로 푸셰는 반대 진영의
세력을 확정해갔단다. 이를 눈치챈 로베스피에르는 그들을 한번에 날릴 연설을 준비했는데 너무 눈치를 늦게
챈 것 같구나. 푸셰가 설득한 반대파가 총 700명 중 600여 명이나 되었어. 오히려 로베스피에르가 체포되었고, 곧바로 다음날 단두대로 향했단다. 많은 사람을 단두대로 죽인 로베스피에르
자신도 단두대에서 처형 당한 것은 알았지만 그것을 주도했던 것이 푸셰라는 것은 처음 알았단다.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당하는 날 많은 파리 시민들이 환영을 했다고 하는구나. 프랑스 혁명을 이끌었지만, 그의 공포정치는 그렇게 공감을 얻지 못했던 거야.
…
로베스피에르가 죽고 나서도 세력간
다툼은 더 심해지고 처형은 계속 되었어. 푸셰는 프랑수아 바뵈프를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배후로 물러나
일종의 피신을 했는데 결국 그도 체포 명령을 피할 수 없었단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이후 3년간 그의 이름은 중앙무대에서 사라졌단다.
2.
그 3년간 푸셰는 빈곤에 허덕이며 살았대. 옛 동료인 바라스는 사람이
푸셰에게 일자리를 주었다고 하더구나. 그런데 바라스가 총재가 되었고,
총재가 바라스는 지저분한 불법 사업을 푸셰에게 부탁을 했어. 그런 불법 사업을 통해 푸셰는
많은 돈을 벌게 되었고 자본의 막대한 힘을 알게 되었단다. 그리고 총재정부는 그를 경찰장관으로 임명하면서
3년의 암흑기를 끝낼 수 있었단다. 반대파인 왕당파는 푸셰의
과거 이력을 알고 있어 긴장했단다. 하지만 푸셰는 예전에 그가 아니야.
경찰장관이 된 푸셰는 지코뱅클럽을 해체시켰단다. 그리고 돈 맛을 알게 된 푸셰는 경찰장관
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많은 정보를 이용하여 투자를 하고 큰 돈을 벌게 되었단다.
…
당시 프랑스는 여러 명의 총재가
이끄는 총재정부가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총재정부도 곧 무너질 것 같다는 소문이 들었어. 이집트로 쫓겨나듯 전쟁을 하고 있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언제든 파리로 진격한다는 소문이 있었어. 푸셰의 정보에 의하면 나폴레옹 파나파르트는 이미 프랑스 근처에 와 있다고 했어.
푸셰는 발 빠르게 움직였단다. 푸셰는 나폴레옹을 접견했어.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소문도
있었어. 그런데 경찰장관인 푸셰는 소문을 모르는 첫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저울추가 나폴레옹으로 넘어갔다고 판단했거든.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잡았단다.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우회적으로 도왔던 푸셰는 경찰장관 자리를 유지했단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푸셰의 과거이력을 알고 있어서 신임하지 않았고 언제든지 자르려고 마음 먹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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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며칠
수 제1통령 보나파르트는 출정했을 때보다 백배는 더 강해진 모습으로 돌아와서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한다. 그러고는 모든 장관과 친구들이 그가 패배했다는 첫 번째 소식을 듣자마자 그에게 등을 돌렸다는
사실을 즉시 누군가로부터 들은 게 분명하다. 첫 번째 희생자는 너무 많이 앞서 나갔던 카르노이다. 그는 장관직을 잃고, 푸셰를 포함한 다른 장관들은 직책을 유지한다. 푸셰는 워낙 조심스러워서 충성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물론
충성했다는 증거를 남기지도 않았다. 그는 한심한 꼴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믿을 만한 인물임을 입증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의 변함없는 모습을 또 한 차례 확인시킨 셈이다. 만사가
잘 될 때는 믿을 만한 인물이지만 만사가 꼬일 때는 믿지 못할 인물이 바로 푸셰이다. 보나파르트는 그를
해고하지 않는다. 나무라지도, 벌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날부터 그는 푸셰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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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파르트는 푸셰에게 경찰장관을
그만 두게 하고, 그 조건으로 엄청 큰 돈과 땅을 주었단다.
…
푸셰는 몇 년 뒤 다시 경찰장관이
되었단다. 나폴레옹을 푸셰를 이용하려고 했던 거지.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면서 나폴레옹과 푸셰는 황제와 신하 관계가 되었어. 나폴레옹도 푸셰가 눈엣가시처럼 느껴졌지만
이용은 해야 했으니 나폴레옹은 푸셰와 앙숙관계인 탈레랑를 등용시켜서 서로 감시하게 했단다. 그런데 탈레랑과
푸셰가 화해하는 계기가 생겼어.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에게 왕자리를 주려고 아무런 이득도 없는 스페인
전쟁을 일으켰단다. 이 전쟁을 탈레랑과 푸셰 모두 반대를 하게 되면서 둘은 화해를 했단다. 둘이 친해졌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돌아와 텔레랑을 해임하고 다시 전쟁터로 돌아갔어.
그렇게 되자 프랑스 안에서는
푸셰가 일인자가 되었어. 진정한 일인자가 프랑스 밖에서 전쟁하고 있었으니 말이야.. 그런데 영국은 나폴레옹이 프랑스에 없다는 것을 알고 프랑스를 침략했단다. 그
영국군을 푸셰가 멋지게 패퇴시켰단다. 이 승리에 자신감(?)을
얻은 푸셰는 군대를 또 소집했단다. 나폴레옹이 이 소식을 듣고 돌아왔고, 푸셰에게 백작 지위라는 당근을 주었고, 오트란트 공작이 되었단다.
겉으로는 친해 보이지만, 나폴레옹과 푸셰는 앙숙이었어. 결국 꼬투리를 잡은 나폴레옹은 푸셰를
경찰장관 자리에서 해임시켰지. 푸셰는 경찰장관 자리에서 내려오면서 자신이 모았던 자료 중에 중요한 것만
빼돌리고, 나머지는 모두 불에 태워버렸단다. 나폴레옹은 이
일로 푸셰를 파면하였고, 푸셰는 이탈리아로 도망을 갔단다. 얼마
후 사면되긴 했지만, 푸셰는 관직에 오르지 않고 3년간 유배
생활을 했는데 이제 그도 52세가 되었어.
3.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 갔다가
패배를 했고 엘바 섬으로 유배를 갔어. 그리고 루이 18세가
정권을 잡았지. 루이 18세가 되면서 푸셰를 등용했단다. 눈치 빠른 푸셰는 정세를 파악하며 아직 나폴레옹의 힘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여 루이 18세와 나폴레옹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다가 엘바섬에서 탈출하여 부활한 나폴레옹 편에 붙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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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
그는
이런 말로 왕의 동생을 진정시킨다. “너무 늦었습니다. 왕께서는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나폴레옹이 벌이는 모험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가 그동안 황제를 저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저 저를
믿어 주십시오.” 이렇게 그는 왕정의 호감을 얻는다. 만일
부르봉 가문이 승리를 거두면 자신이 그들의 조력자라고 생색을 낼 수 있다. 만일 나폴레옹이 승리하면
부르봉 가문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다. 그는 여러 차례 양다리를 걸쳐서 일신의
안전을 보장하는 수법을 성공적으로 구사해 왔으니 이번에도 똑같이 하면 된다. 그는 이제 황제와 국왕, 두 군주를 동시에 충성스럽게 섬기는 신하가 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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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은 다시 황제가 되었어. 당시 푸셰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높아서 그를 그냥 무시할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다시 경찰장관에 지명했단다. 예전보다 더욱 앙숙 관계가 된 나폴레옹과 푸셰는 서로 약점을 찾으려고 했어.
나폴레옹은 다시 전쟁을 일으켰고,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푸셰를 제거하려고 했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에 대패하면서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단다. 이 나폴레옹의 유배를 주도한 것은 바로 당시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푸셰였단다.
나폴레옹이 물러나고 다들 공화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푸셰는 루이 18세와 비밀 협약을 맺고 있었어. 루이 18세에게 푸셰는 원수였지만 황제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손을 잡았어. 루이 18세는 황제 자리에 오르자마자 내각 의장을 푸셰의 앙숙인 탈레랑을 지명했단다.
쯧쯧.. 푸셰의 눈칫밥도 나이를 먹으면서 시들했는지 루이
18세를 황제로 만들어주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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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332)
백일천하라는
나폴레옹 주연의 막간극이 끝난 후 1815년 7월 28일 국왕 루이 18세는 백마가 이끄는 호화로운 마차를 타고 다시
파리로 입성한다. 푸셰가 열심히 준비한 덕에 국왕은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환영 인파가 마차를 에워싸고 집집마다 걸린 부르봉 왕가의 흰 깃발이 바람에 나부낀다. 미처 깃발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은 급히 수건이나 식탁보를 지팡이에 달아서 창문가에 걸쳐 놓는다. 저녁에는 수많은 불빛이 도시를 환히 밝히고 기쁨에 겨운 사람들은 영국과 프로이센 점령군의 장교들과 춤추기까지
한다. 성난 고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아서 사전 예방책으로 배치된 헌병들은 할 일이 없다. 정말이지 그리스도의 뜻을 가장 잘 따르는 국왕의 새 경찰장관은 새 주군을 맞을 준비를 완벽하게 해 두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튈르리 궁에서 나폴레옹 황제를 공손히 모셨던 충실한 신하 오트란토 공작은 이제 같은 장소에서
루이 18세를 기다리고 있다. 22년 전 바로 이 장소에서
그는 루이 18세의 형인 ‘폭군’ 루이 16세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던 바 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성왕 루이의 후손에게 공손히 절을 하며 서류에는 “폐하를
진심으로 섬기는 충성스러운 신하”라고 서명한다. (친필로
쓰인 10개 이상의 보고서에는 이런 글귀가 한 자 한 자 적혀 있다.)
그가 벌인 미치광이 공예 중에서 가장 아찔한 재주를 부린 셈이었다. 하지만 이 재주를 마지막으로
줄타기와 같던 그의 정치 역정은 막을 내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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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8세와 탈레랑은 푸셰를 왕의 시해자이자 리옹의 학살자를 죄목을 씌어 파면하고 추방시켰어. 푸셰는 프라하로 유배를 갔다가 다시 오스트리아 린츠로 유배를 가서 푸대접을 받으며 지내다가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에서
병으로 세상을 떴다고 하는구나. 1820년 12월 26일이었어.
…
프랑스 대혁명 전후 시대… 서로 죽고 죽이는 정치판에서 단두대에서 죽지 않고 병사를 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구나.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그가 얼마나 야비하게 또는 얍삽하게 살아남았는지 알겠더구나. 그의 목표는 생존이었던 것 같구나. 굳이 앞에 나서지 않으면서 적당히
권력과 부를 차지하면서 생존하는 법.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사람들은 오늘날 정치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단다. 그런 사람들이 또 권력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보면 열 받곤 하지. 오늘날에도 여기저기 조제프 푸셰가 있는 것 같구나.
이번 책도 슈테판 츠바이크의
놀라운 글솜씨에 감탄하게 되었고, 프랑스 혁명의 또 다른 조연 조제프 푸셰라는 인물을 알게 되었구나. 오늘 쓴 편지를 다시 읽어 보니 문맥이 이어지지 않는 부분도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한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아 메우지 못하겠구나. 양해 바람.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조제프 푸셰, 살아생전
막강한 권력을 행상했던 그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 중 하나이다.
책의 끝 문장: 흐릿하게 사라자는 그의 자취를 포착해서 뒤얽힌 인생항로를
모조리 찾아내고 싶은 유혹, 파란만장한 운명을 알아내서 너무도 특이한 정치적 인간 푸셰가 정신적으로
어떤 장르에 속하는지를 알아내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것이다.
이처럼 조제프 푸셰는 평생 막후의 인물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 막후의 인물은 결코 눈에 보이게 권력을 행사하지는 않지만 권력을 온전히 가지고 있으며 모든 끝을 손에 쥐고서 조종하지만 결코 책임자로 거론되지는 않는다. 항상 누군가를 일인자로 만들어 방패로 내세우고 그의 뒤에 서서 그를 앞으로 몰아가다가 그가 지나치게 앞으로 나갔다 싶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거침없이 등을 돌리고 마는 것, 바로 이것이 푸셰가 가장 좋아하는 역할이다. 정치사를 통틀어 가장 노련한 모사가인 푸셰는 공화국과 왕정과 황제의 제국을 무대 삼아 펼쳐지는 숱한 에피소드에서 스무 번이나 의상을 바꿔 가며 한결 같은 명배우의 솜씨로 이 역할을 연기한다. - P32
특히 천재는 무언가를 창조하려면 한동안 고독을 견뎌 내야 한다. 멀리 추방되어 절망의 나락에 떨어져야만 참된 과업의 폭과 높이를 측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복음은 모두 유배를 거쳐서 생겨났다. 위대한 종교의 창시자 모세와 예수, 무함마드와 붓다, 모두 중대한 가르침을 전하기에 앞서 침묵의 광야로 가야 했고 사람들과 동떨어져 지내야 했다. 밀튼은 실명했고 베토벤은 청력을 잃었으며 도스토옙스키는 유형을 갔고 세르반테스는 감옥에 갇혔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에 숨어 지냈으며 단톄는 망명을 했고 니체는 살이 에이는 듯 추운 앵가딘 지역을 거주지로 택했다. 물론 이들은 맨 정신으로는 이런 삶을 원하지 않았겠지만 이들의 수호신은 이런 일이 일어나게끔 은밀이 조율했다. - P131
그러나 어떻게 해야 공화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까? 아주 간단하다. 그들 중 하나를 내각에 들여 놓으면 된다. 진짜 공화주의자 하나만 있으면 부르봉의 백합기를 빨갛게 치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인물을 어디서 찾아야 하나? 귀족들은 고심하다가 갑자기 조제프 푸셰라는 사람을 떠올린다. 이 사람은 2, 3주 전에 모든 접견실을 돌아다니며 고관들을 예방했고 왕과 장관들의 책상을 수많은 건의서로 뒤덮었다. ‘그래, 이 사람이야말로 언제 어디서나 부려 먹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빨리 이 사람을 은거 생활에서 끌어내자!’ 어떤 정부가 난관에 처하거나 유능한 중개자나 협상가, 질서를 창출할 사람을 필요로 할 때면 그 정부는 늘-총재정부든, 통령정부든, 황체치하든, 왕국이든 상관없이-깃발을 들고 행렬을 이끌 줄 아는 남자 조제프 푸셰에게 눈을 돌린다. 결코 믿은이 가지 않는 성격을 지녔지만 외교적 수완을 갖춘 믿음직한 일꾼이기 때문이다. - P271
후일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된 패배자 나폴레옹은 푸셰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내게 진실을 들려준 건 배신자들뿐이었다." 사무친 원한을 토로하는 대목에서조차도 메피스토펠레스만큼이나 비상한 능력을 갖춘 푸셰를 경탄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천재가 가장 못 견뎌 하는 것이 범속함이기 때문이리라. 푸셰가 자신을 기만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폴레옹은 어쨌든 푸셰는 자신을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목이 마른 사람은 물에 독이 들어 있음을 알면서도 그 물을 향해 손을 뻗치는 법이다. 나폴레옹은 충실하고 무능한 사람보다는 믿을 수 없지만 영리한 사람을 신하로 삼는 길을 택한다. 10년을 치열하게 대립했던 사람들이 어중간한 우정을 나눈 사람들보다 서로 더 긴밀한 사이가 되는 경우는 놀랍게도 종종 있다. - P287
세계 역사를 한번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권력자가 권력을 잃으면 전과는 전혀 다른 대접을 받게 된다. 그는 러시아 조정에 여러 차례 변죽을 울렸지만 초청장은 오지 않고 웰링턴도 아무런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 벨기에는 국내에 이미 왕년의 자코뱅파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바이에른 왕국은 조심스럽게 말을 돌리고 오랜 친구 메테르니히 공작은 이유 없이 쌀쌀하게 군다. "아, 그러십니까! 오트란토 공작께서 그러고 싶으시다면 오스트리아 영토로 들어와도 됩니다. 오스트리아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공작의 체류를 묵인하려 합니다. 하지만 빈으로 와서는 절대 안 됩니다. 당신이 빈에 머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탈리아로 가서도 절대 안 됩니다. 빈에서 멀지 않은 동북부 주를 제외한 다른 지방의 소도시를 택하신다면 조용히 처신하겠다는 조건하에 공작의 체류를 허가하겠습니다." - P346
15년 동안 운명이 위협적으로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던 순간이 몇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는 날렵하게 운명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곤 했다. 마침내 그가 꼼짝도 못하게 되자 운명은 이 패배자를 사정없이 후려갈긴다. 정치인으로서 굴욕을 겪은 것도 모자랐는지 조제프 푸셰는 프라하에 머무는 동안 사생활에서도 뼈아픈 굴욕을 겪게 된다. 1817년 프라하에서 일어났던 작은 에피소드는 마치 소설가가 지어내기라도 한 듯이 너무도 재치 있게 푸셰가 어떤 내적 굴욕을 겪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비극을 겪은 푸셰에게 이제 불행은 섬뜩한 캐리커처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그는 남들의 웃음거리가 된다. 정치인 푸셰에 이어서 이제는 남편 푸셰가 굴욕을 당할 차례이다. -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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