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신규식은 1911년경 한국인은 거의 없고 한국독립운동가들도
주목하지 않던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그곳에 한국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여 민족혁명의 앞길을 연 선각자였다.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독립운동가를 불러모으고 조국의 젊은이들을 불러들여 중국이나 미국의 학교에 보내고 혹은 직접 세운 학교에서 독립운동의 인재를 양성해
가면서 상하이를 한국독립운동의 전략적 기지로 구축하여 마침내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도록 디딤돌을 놓았던 독립운동자였다.
(100)
물론 신한혁명당의 주도자들이 국제정세에 대한 잘못된 분석과 보황주의 노선 등의 한계를 보였다. 하지만 이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와 중국 지역 독립운동
조직이 봉쇄당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각지의 운동역량을 재정비하여 독립전쟁을 결행할 전략을 감행하려한 점에서 분산된 독립운동역량을 단일화한 선구적
무장투쟁으로 규정할 수 있다. 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신한혁명당의 활동은 독립운동계에서 공화주의 노선이
이념으로 정립되는 견인차가 되었던 것과 이후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국내의 민중적 기반 위에 선 정부가 조직되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해 준 점에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
(129-130)
“우리나라를 욕심낸 나라를 귀국이다. 지금 태평양회의를 앞두고 본국에서는 대화에 대표를 파견하려 한다. 귀국은
국제조약에 따라 대회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제출하여 주기를 바란다. 이 문제는 귀국의 자구책 가운데
상책이다. 발칸문제 때문에 유럽전쟁이 일어났듯이 지금 귀국의 지위가 바로 서방의 발칸사정과 똑같다. 때문에 동아전쟁이 일단 발동되면 귀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먼저 참여할 것이 조금도 의심되지 않는다. 본국 문제가 토의될 것을 핵망하며 귀 정부를 재촉하기를 바란다. 이것은
귀국을 위한 자구책이며 양국을 위한 일이다.”
(141-142)
1922년 8월
초순 찌는 듯이 무더운 여름 날, 신규식은 여느 때처럼 창가에 섰다.
살이 홀쭉히 빠진 그의 양볼에는 깊게 주름이 잡혔다. 그는 백지장처럼 하얗고 움푹 팬 눈으로
창밖의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다가 갑자기 “나는 아무 죄도 없고, 나는
아무 죄도 없소. 그럼 잘들 있으시오! 우리 친구들이요. 나는 가겠소. 여러분들 임시정부를 잘 간직하고 삼천만 동포를 위하여
힘쓰시오. 나는 가겠소. 나는 아무 죄 없소”라는 자책하는 듯한 독백을 남기곤 입을 다물었다.
(145-146)
신규식이 순국한 지 1년 후에 그의 역사관이 담긴
한국통사 <한국혼>이 출간되었다. 중국학자 후린이 다음과 같은 글을 서문에 적어 신규식의 독립투쟁의 산증인이 되었다. “한국 문제는 일본 군벌이 일본 국민에게 남긴 하나의 큰 빚이다. 이
빚은 언젠가 청산되어야 한다. 폴란드가 독립하고 체코가 새롭게 부흥하였으며 인도의 이집트 역시 기필코
독립할 것이다. 한국 문제 또한 오래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신규식
선생 그는 비록 우리를 떠났지만 그의 정신은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의 혁명가도 그를
기려 ‘계속해 영웅들 일어나 마음모아 배를 저어가니 나라의 혼은 살아날 것이고 선생 또한 영원하리’라고 하였다.
(157)
황커치앙에게 보낸 시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우선 극악무도한 자를 죽이고,
이어 약속을 어긴 이웃 일본을 죽이고,
남은 힘으로 뭇 요물들을 물리쳐.
태평양으로 내던진 뒤 피먼지를 씻노라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그의 진보적인 태도는 위안스카이에 의해 살해된 중국의 근대 민주
혁명가를 애도하기 위해 쓴 수많은 시속에 집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168)
셋째, ‘국지정신(國之靜神)’인 ‘나라의 문헌’은
국사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 국사를 잊었다 함은 곧 나라의 정신을 잃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 결과, ‘슬프다! 우리나라는
지금부터 다시는 역사가 있을 수 없으며, 지금까지는 비록 있다고 하더라도 없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국사를 잊게 된 원인은 5천 년 이래 당한 대외적인 침략에 있으며, 후세 역사가들이 외국에
아첨하고 국내의 사서를 무시한 존화사관(尊華史觀) 때문이었다고
파악하였다. 그리고 구학문, 신학문을 하는 모두를 향하여
자국의 역사는 모르나 중국의 역사는 잘 알고, 서양의 문명은 말하면서 자국의 문명역사는 모르는 사대사상이라고
공격하였다. 그는 “소양(주자)에서 무릎 꿇고 감히 스스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겨우 남이 뱉은 찌꺼기의 침을 핥는 것이며, 온몽을 백조(白潮)(신문학의
유파)에 적시는 것은 그 껍데기를 입어보기 전에 먼저 나의 정신을 장사지내는 것이다”라며 무비판적인 신구학문에 대한 맹종을 정신의 죽음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므로
사대사상과 존화사관에서 벗어나 신채호가 대동사(大東史)를
기초하고, 박은식인 광문회(光文會)를 창설하고, 나철이 대종교를 개창해 단군을 숭배하는 등 국사와 한국혼을
찾으려는 시도를 이어받아 국혼(國魂)이 흩어지지 않도록 할
것을 주장하였다.
(173-174)
무력주의가 이미 타파되었으므로 세계 평화에 대한 소망은 동아시아의 영구적인 평화 유지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며, 동아시아에 영구적인 평화를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패권주의를 쓸어내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패권주의를 청산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우리 한국의 독립으로부터 시작해야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당시 이미 일본의 대륙침략 야욕을 간파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이 독립해 그들의 침략을 막아낸다면 비단 세계로 뻗치는 그들의 야심을 제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안전도 보장될 것이다.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 종식된 뒤 일본이 비록 전쟁으로 스스로 망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해군력은 여전히 확장되고 있으며, 시베리아에서의 병력 또한 여전히
증강되고 있다. 그들의 의도를 짐작해보건대 동아시아를 하나의 커다란 전쟁터로 만드는 데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진단하였다. 마치 1937년 이후 자행된 악행을 예견한 듯한 탁월한 그의 혜안을 엿볼 수 있다.
(181)
신규식의 삶은 인간사랑, 민족사랑으로 가득찬 가장
인간적인 민족지도자의 모습을 대표한다. 그의 시에 자신의 마음과 생각과 바람을 담아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던 풍류를 알고 인생을 노래하던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소유한 인사였다. 하지만 민족적 국가의 존립조차
위태로운 한말, 식민지시대를 살아야 하는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민족문제 해결이란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시대 인식을 실제 삶으로 구현해 냈던 믿음직한 선현 중 하나가 되었다. 자신이 그렇게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변했던 민족역사 속의 선현들처럼
닮아 민족자결, 민족독립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생을 바쳤다. 우리의
구명부는 오직 ‘민족자결’이라는 한가지 소망을 가슴에 새기며
결코 앞에 나서지 않고 통합의 울타리가 되어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감내해 낸 그럼 민족운동가였다. 그의
뒤를 이은 우리가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되는, 반드시 기억하고 기려야 하는 일제시대 민족운동가 중
한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