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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 미지의 땅에서 들려오는 삶에 대한 울림
강인욱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6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읽은 책은 <강인욱 님의 고고학 여행>이라는 책이란다. 아빠가 이 책을 어떻게 알게 된 책인지 기억나지 않는구나. 몇 년
전에 알게 되어 사서 책장에 꽂혀 있는 것 같은데, 그때 어떤 경위로 알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는구나.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얼마 전에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강인욱 님이 출연한 영상을 보게 되고, 이 책이 생각나서 이번에 읽게 되었단다.
고고학자라고 하면 영화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고고학을 전공한 사람이 있었구나. 지은이 강인욱 님은 대학에서 고고미술사학과를 전공하고, 지금은 사학과
교수이시기도 하다는구나. 아빠가 고고학에 관련된 책은 처음 읽는 것 같구나. 고고학이라고 하면 아주 오래 전 인류의 발자취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대충 알고 있는데, 지은이는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고고학에 대한 정의부터 이야기해주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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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고고학은
쉽게 설명하면, 유물을 연구해서 과거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 지식, 문화 등을 밝히는 것이다. 인간은 왜 그렇게 과거 사람들의 모습에
관심이 많았을까?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그렇지 않다. 그건 바로 과거를 생각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인류의 진화하는
숙명에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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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유물을
통해서 과거 사람들의 모든 것을 밝히는 것이 고고학이라는 것이래. 그래서 이 책은 유물로 알 수 있는
옛 사람들의 이것 저것들을 하나씩 이야기해주고 있단다. 그렇다면 옛사람의 흔적이 많이 남겨져 있는 유물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바로 무덤이란다. 이 무덤이라는 것은
사후 세계를 꿈꾸고 영생을 갈구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했어. 그리고 무덤에 시신과 함께 남겨진
유물을 통해서 그 시대의 생활을 추측하게 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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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앞에서도
말했듯이 고고학 하면 일반인들이 떠올리는 보물찾기의 실상은 사실 죽은 사람을 위해서 넣어놓은 마지막 선물이다. 죽은
자를 위한 선물 그리고 영생을 갈구하는 인간의 영원한 화두를 무덤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서사시, 진시황이 얻고자 했던 불사약, 나아가서
다양한 영화들에서 다시 살아나는 사람들은 영생을 꿈꾸는 인간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모두 영생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대신 영생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무덤을 만들었고, 우리는 그를 통하여 삶에 대해 더 배우게 된다. 영원을 향한 인간의 마지막 바람과 체념이 녹아 있는 기념물이 바로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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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은 그렇게 알게 된 옛
사람들의 문화들을 이야기해주는데, 무덤 속에 남겨진 토기 속의 찌꺼기를 분석하여 그들이 맥주를 만들어
먹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들이 남긴 악기를 통해서 그들이 어떤 음악을 즐겼는지도 알게 되었단다. 먼 과거의 인간 생활에서도 음악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데, 그것은
박물관의 영어 단어인 museum이 음악의 여신에서 유래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는구나. 박물관 museum의 어원이 음악의 여신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아빠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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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96)
과거의
예술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박물관’이다. 원래 박물관을 뜻하는 ‘museum’은
음악의 여신 ‘Muse’를 모시는 신전의 의미에서 유래했다. 뮤즈는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이다. 기원전 7세기에
활동했던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9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음악뿐 아니라 문예, 미술, 철학
등을 관장했다고 한다. 이 뮤즈를 위한 신전은 음악을 비롯하여 당시의 다양한 예술과 학문이 한데 어우러진
문화의 공간이었다. 즉 뮤즈를 위한 의식에는 음악과 함께 당시에 제작된 최고의 예술품인 회화, 조각 등이 선보여지고, 역사와 철학에 관한 다양한 학문적 성과가
봉헌되었다. 이 뮤즈의 신전은 그리스 문화가 확산되면서 각지로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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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유물 중에도 음악
악기와 관련된 것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오래된 것 중에 공후라는 악기가 있대. 공후라는 악기는 익숙지 않아도 공후라는 악기를 타면서 부르는 노래가 그 유명한 고조선 가요 <공무도하가>라는구나. <공무도하가>는 너희들도 학교에서 배우지 않을까 싶구나. 그 공후라는 악기는
하프의 일종이라고 하는데, 이 악기는 실크로드를 통해서 고조선까지 전래되었대. 그 당시에도 이미 동서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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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107)
가야금
이전에도 또 다른 현악기가 있었다. 서양에서 발달해 실크로드를 통해서 중국과 한국으로 전래된 하프의
일종인 공후이다. 이 공후는 동쪽으로는 알타이까지 이어졌다. 고조선
가요인 <공무도하가>는 공후를 타면서 부르는 노래다. 이 가요를 채록한 사람은 고조선의 하급관리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
당대 또는 고조선 멸망 직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그 지은이에 대해서는 뱃사공, 곽리자고,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 등 다양한 설이 있는데, 아마 많은 노래가 그러하듯 채록되고 확산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이 <공무도하가>는
이후에도 계속 남아서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고대가요가 되었다. <공무도하가>는 1세기 때 채옹의 <금조>에, 4세기 초에 쓰여진 최표의 <고금주>에 이미 등장한다. 그리고 이후 동아시아 일대에서도 널리 사랑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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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은 옛사람들의 생활 전반적인
것을 복원하는 것으로 목표로 하고 있는데, 맛도 복원하려는 노력을 하였지만 쉽지는 않다는구나. 토기 등에 남아 있는 찌꺼기를 통해서 젓갈을 오래 전부터 먹었다던가, 소와
돼지를 먹었다는 것 등 일부를 알 수 있다는구나.
2.
이 책에서는 고고학이 하는 일뿐만
아니라 고고학 자체에 대한 이야기도 주었단다. 고고학이라는 것은 역설적인 학문이래. 과거를 밝히기 위해 발굴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과거의 유적을 파괴하게 되니 말이야. 최소한의 발굴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는 것인 고고학이 지향하는 바라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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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고고학만큼
역설적인 학문이 없다. 왜냐하면 과거를 밝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의 유적을 파괴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고고학자들이 수많은 도면과 사진을 남기며 신중하게 발굴을 진행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번
발굴한 유적은 어떠한 경우에도 되돌릴 수 없다. 간혹 유적을 발굴하지 않고 유보하는 경우도 있다. 땅속에 있는 것이 역설적으로 유적을 오래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작정 발굴을 하지 않는 것도 답이 아니다. 발굴을 하지 않으면 정작 과거의 유적과 유물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없기에 오히려 고고학의 발전은 저해된다. 그러니 최소한의 발굴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는 것이
고고학 발굴이 지향하는 바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발굴을 ‘수술
자국이 작을수록 좋은 외과수술’에 비유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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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들의 최소한의 발굴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경제논리가 유물이나 유적보다 앞서는 경우가 많은 것이 씁쓸한 현실이구나. 그런 일들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일어났었지.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인 춘천 중도에 세워진 레고랜드란다. 아빠도 이 레고랜드가 중도에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했던
이들 중에 한 명이란다. 고대 유물이 많은 것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 풍광의 중도를 레고랜드로 만들다니
말이야. 도대체 누구의 생각이란 말이야… 그렇게 유물과 자연을
훼손하면서 만들어진 레고랜드는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단다. 그들은 아빠와 같은 여론이 많다는
것을 확인도 안 했나 보구나. 아빠가 알기로는 레고랜드의 실적은 계속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는데, 아마 아빠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지 않을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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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98)
생각해보자. 왜 레고랜드를 유적지가 많아서 사적지로 등록된 중도 위에 세우려고 했을까. 그곳은
춘천 시내의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경치도 수려하고 접근성도 좋은, 아직까지도 개발이 안 된 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땅이 개발이 되지 않은 이유는 1980년대에 이미 이곳에
엄청난 유적이 존재한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유적의 규모와 그 의의로 볼 때 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조사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대대손손 보존하기 위해 사적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현대의 정치가와 사업가들은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유적이 있다면 빨리 발굴해서
그 위에 무엇인가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것을 세우고자 결의했다. 이렇듯 춘천 중도의 문제는 경제논리를
앞세운 현대 자본주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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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 열 받는 이야기 하나
해야겠구나. 두 차례 세계대전을 전후로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국가의 유물을 많이 빼앗아가는 일이
일어났단다. 우리나라도 피해를 입은 국가들 중에 하나이고… 그런
문화재 약탈은 비윤리적인 행동이야.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고 깨달았는지, 문화재를 불법으로 약탈할 수 없다는 헤이그 문화재보호조약을 체결했대. 그런데
이전에 빼앗은 문화재에는 소급 적용이 안 된다는구나. 이런 조약을 체결하려면 그 전에 약탈한 문화재를
일단 돌려주고 해야 하는 거 아니니? 열 받는구나. 더 열
받는 일은 아래 발췌록에 적힌 이집트와 영국의 사례인데, 이 헤이그 조약은 이전에 제국주의 국가가 약탈한
문화재의 소유권을 불법으로 약탈한 제국주의 국가에 있다고 인정한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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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1954년에 세계 각국은 전쟁으로부터 문화재를 보호하는 취지에서 헤이그 문화재보호조약을
체결했다. 전쟁으로 다른 나라를 침략해도 그 나라의 문화재를 불법으로 없애거나 약탈할 수 없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는 유럽의 열강들이 경쟁적으로 상대국의 문화재를 폭격하고 약탈했던 것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문화재 약탈의 한쪽 측면만 본 것이다. 서구
열강은 그때까지 전쟁과 침략을 통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나라들에게 약탈한 문화재에 대해 어떠한 보상이나 대책도 내놓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미 유물을 빼앗긴 나라들은 상대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그 유물을 반환 받을 수 없다는 뜻이 된다.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만약 이집트가 영국을 침략해서
승리했더라도 영국의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는 피라미드 유물이나 미라에는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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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는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일제의 침략으로 오랜 기간 일제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고고학의 발전이 늦었다고 하는구나. 우리나라 1호 고고학 박사 도유호라는 분이 계셨대. 1935년 오스트리아에서
고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셨대. 안타까운 것은 해방 이후 도유호 박사는 월북을 하여 북한에서 고고학
연구를 하셨다는구나. 그래서인지 그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것 같구나.
도유호 박사의 여러 업적 중에 빗살무늬토기가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라는 것을 정의하였다고 하는구나. 아빠도
학창 시절 역사 시간에 배우고, 너희들도 역사 시간에 배우는 신석기 시대의 유물 빗살무늬토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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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일본의
이 식민 패러다임을 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가 층을 달리해서 존재했음을 밝히면 된다. 하지만
층을 구분해서 발굴하는 방법이 한국에 널리 도입된 것은 1970년대 이후였다. 반면에 북한의 사정은 달랐다. 도유호(1935년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한국 최초로 고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1세대
고고학자. 1946년에 월북하여 북한 고고학의 기초를 수립했다.)가
이끄는 북한의 발굴단은 1953~1954년도에 회령 오동의 수혈주거지를 발굴하고, 그 주거지들에 중첩이 있음도 함께 발견했다. 또한 1957년에는 황해도 지탑리 유적에서 빗살무늬토기층과 청동기시대 문화층을 분리시켜서 그 지긋지긋하던 금석병용기설을
폐기하고 청동기시대의 존재를 주장하게 되었다. 우리는 국사시간 첫머리에 ‘빗살무늬토기=신석기토기’, ‘민무늬토기=청동시시대’라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배운다. 그런데 이것을 발굴로 증명한 것이 바로 도유호가 발굴한 지탑리 유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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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이 책에는 고고학에
대한 재미있는 여러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단다. 그 중에 트로이 유적을 발견했으나, 트로이 유적을 파괴한 슐리만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오늘 독서 편지를 마치련다. 이 책은 재미있는 상식들이 많이 남겨 있어서 너희들도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럼, 오늘은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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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283)
그(슐리만)가 발굴한 유물은 실제 트로이 왕국에서 사용한 것과는 다른
형식이라는 점이 지적되어 왔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지적을 무시하고 이 황금을 트로이의 마지막 왕으로
전쟁을 벌인 프라이모스의 이름을 따서 ‘프라이모스의 황금’이라고
명명해버렸다. 그러나 그가 발굴한 황금은 3200년 전에
살았던 프라이모스 왕보다 1000년이나 더 오래된, 약 4400년 전의 황금이라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물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빌미가 되었다. 아리러니하게도 슐리만은 이 ‘프라이모스의 황금’을 파기 위하여 그 위에 쌓여 있었던 트로이의 문화층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 최초로 트로이 유적을 발견한 인물이자 트로이 유적을 없애버린 인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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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언제부턴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시간여행을 하는 상황이
흔해졌다.
책의 끝 문장: 이 책은 이 세상을 사랑으로 살아오며 역사를 만들어온
그분들에게 바치는 게 마땅할 것 같습니다.
5000년 전 중국에서 새로운 술이 등장했다. 고고학자들이 좋아해 마지않는 술, 맥주다. 스탠포드대학교 고고학자 류리는 2016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최신의 분석방법으로 중국 최초의 맥주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녀는 섬서성 웨이허강 유역의 5000년 전 양사오 문화에 속하는, 실크로드가 중국으로 오는 끝자락인 미자야 유적에서 밑이 뾰족하고 주둥이도 좁은, 양조를 하기에 적당한 토기를 발견했고, 그 바닥에 남은 곡물의 찌꺼기를 분석했다. 그 결과 양조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수수, 율무, 식물의 구근 덩어리 그리고 보리가 섞여 있음을 알아냈다. 단순하게 곡물을 담는 항아리였다면 이들 재료들을 같이 넣을 리가 없다. 맥주와 같은 술을 빚지 않고는 이 곡물들이 같이 나올 수 없다. 이렇게 중국에서 가장 최종의 맥주가 발견되었다. 게다가 보리는 중국에서 자생하는 곡물이 아니었다. 이는 바로 5000년 전에 유라시아를 중심으로 동서의 교류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 P66
즐겁게 살아간다는 건 중요하다. 그것이 정신적인 즐거움이든 육체적인 즐거움이든,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즐거움이 필요하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는 알 수 없다. 각자에서는 각자의 가치관이 있기 대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 즐거움을 추구할 때에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절제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대가 없는 즐거움은 없기 때문이다. 쾌락만을 좇는 대가는 늘 생각보다 위험하고 치명적인 칼날이 되어 우리를 향한다. - P86
고고학의 원칙 중 하나가 발굴하지 않고 땅속에 두는 것이 가장 큰 보존이라는 점이다. 현재의 최신 기술로 유물을 발굴한다. 하더라도 한계는 있다. 과학과 기술이 시간이 갈수록 발전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어떤 유물이든 지금보다 먼 훗날에 발굴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고고학적 원칙에 맞지 않는 사례가 바로 고분벽화이다. - P125
요서지역에서 홍산문화로 시작되어서 비파형동검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문명의 흐름은 만주 일대에서도 아주 독특하여 세계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중국과 미국 피츠버그 대학에서 매년 이 유적을 조사하는 것도 이 지역에서 독특한 문명이 발생했던 이유를 규명하기 위해서이다. 이제까지 한국과 중국에서는 홍산문화가 어느 나라의 것이냐는 소모적인 귀속 논쟁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홍산문화의 숨겨진 또 다른 가치는 바로 그 소멸과 정에 있다. 홍산문화를 만든 사람들은 작게 쪼개진 마을들로 흩어졌고, 그 결과 홍산문화의 옥을 만드는 기술과 제사의 풍습은 이후 시대로 확산되었다. 그렇게 본다면 사실 버려진 홍산문화의 제사유적은 고대인들의 현명한 삶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 P245
그렇게 한국인이 주도한 첫 고분 발굴지에서는 놀랍게도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그릇이 나왔다. 이에 청동그릇이라는 뜻의 ‘호우’를 따서 이 이 고분을 호우총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명문에 따르면 이 그릇은 광개토대왕의 사후 2년인 을묘년(415년)에 만든 기념 그릇 중 10번째에 해당한다. 당시 신라를 밀려오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광개토대왕의 고구려 구원을 요청했다. 이 호우의 발견으로 당시 신라의 고구려의 관계가 유물로 증명된 것이다. 사실 신라 고분에서 고구려의 유물이 나온 예는 그때가 유일했으니, 이 호우총은 비록 일본인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엄청난 발견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호우총에서는 호우 말고도 흥미로운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특히 발굴단장 김재원 박사는 한 유물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 나무에 옻칠을 한 물건인데 두 눈을 부라리듯 험상궂은 도깨비의 형상을 한 유물이었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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