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역사 : 근대 - 당신에게 가장 가까운
황현필 지음 / 역바연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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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역사를 가장 역사답게라는 슬로건으로 역사 유튜브를 운영하는 황현필 님의 신간 <요즘 역사:근대>를 읽었단다. 이번 책은 구독자 100만을 기념하기도 하는 책이라고 하는구나. 아빠도 가끔 황현필 한국사 유튜브를 보는데, 몰랐던 새로운 내용을 알게 좋았단다. 역사라는 것이 그것을 이야기하는 역사가의 주관적인 생각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황현필 님의 역사에 대한 주관적인 생각, 사관이 많이 공감이 되더구나. 아빠랑 아무래도 정치적 성향이 비슷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역사 사실을 합리적이고 이상적이고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그의 생각에 다들 동의하지 않을까 싶구나.

이번에 새로 출간한 책은 우리나라 근대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들 스물한 가지를 뽑아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단다. 각각의 사건들은 아빠가 다른 책들을 통해서 여러 번 이야기를 해 준 것과 겹치기도 하더구나. 특히 작년에 읽은 강준만 님의 <한국 근대사 산책( 10)>과 올해 다시 읽은 조정래 님의 <아리랑( 12)> 읽고 이야기해준 부분에서도 소개된 부분들이 많았어. 그래서 오늘은 지은이의 색다른 시각으로 이야기한 것들을 몇 개 발췌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단다.

 

1.

우리나라 근대를 여는데 중요한 인물 중에 한 명인 흥선대원군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상반된 평가들이 많이 존재한단다. 쇄국정책으로 인해 우리나라 근대화가 지연되면서 일제에게 뒤쳐지게 하는 원인이 되었고, 천주교 신자들 수천 명을 죽인 이력이 있고, 민비와 권력 다툼으로 인해 국력을 소진했다는 안 좋은 평가가 있는 것도 사실이란다. 하지만 조선의 오랜 악습을 끝내는 공들도 있었다고 하는구나. 이 책에서는 그런 흥선대원군의 공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어. 하지만, 무너져가는 조선을 바로 세우기에는 너무 늦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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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8)

물론, 국가적으로 천주교를 문란하다고 여긴 시대였다고 할지라도, 무려 8천여 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를 학살하다시피 한 대원군을 마냥 존경할 만한 인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국가를 새로 창업하거나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 오직 개인의 통치력만으로 시대적 병폐를 끊고, 이전 세상과의 긍정적인 단절을 이룬 인물로 대원군만 한 인물이 또 있던가?

첫째, 60여 년의 세도정치를 끝냈다.

둘째, 300년 만에 비변사를 해체했다.

셋째, 300년 만에 붕당정치를 끝냈다.

넷째, 300년 만에 경복궁을 재건했다.

다섯째, 400년 만에 서원을 제대로 철폐했다.

여섯째, 역사상 최초로 양반들에게 군포를 부과했다.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대원군이 300년만 일찍 태어났다면, 조선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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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서양 열강이 이런 저런 이유를 대고 우리나라를 쳐들어오던 시절이었어. 프랑스가 쳐들어 온 병인양요에서는 프랑스군이 대패하고 돌아갔단다. 이때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 의궤>를 훔쳐서 달아났는데, 이것이 100여 년 뒤에 우리나라 고속철도와 연결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을 거야. 1995년 우리나라는 고속철도를 도입하면서 어느 나라와 손잡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외규장각 의궤>를 돌려줄 테니 프랑스의 TGV 도입을 제안했고,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프랑스 TGV가 우리나라 고속철도로 들어오게 되었단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프랑스는 <외규장각 의궤>를 한참 동안 돌려주지 않다가 2011년에 되어서야 영구임대 조건으로 우리나라도 돌아왔다고 하는구나. 좀 치사하구나. 나라 간 약속인데 제때 지키지 않고, 나중에도 조건부로 지켰으니 말이야.

미국이 쳐들어온 신미양요에서는 혈전 끝에 미국이 승리를 하긴 했지만, 미국은 조선 백성들의 저항에 대해 깜짝 놀라고, 승리를 했지만 강화도에서 퇴각하기로 결정을 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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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미군 대위 틸톤(Mclane Tilton)은 부인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남겼다.

나는 많은 전쟁을 겪었지만, 조선이라는 나라의 한 섬에서 치른 전투만큼 끔찍한 기억은 찾아볼 수 없소.”

신미양요는 미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로저스 제독은 전투에서 승리한 다음 날 퇴각을 결정한다. 조선 출정을 통해 미국과 로저스 제독이 얻어 낸 것은 없었다. 조선을 개항시키기는커녕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사과조차 받아 내지 못한 출정이었다. 일본과는 너무나도 다른 조선에 큰코다친 미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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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 시대 말기 우리나라 시스템은 이미 나라의 기틀로써 많이 무너진 상태였단다. 흥선대원군 마저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면서, 일본과 서양 열강이 우리나라에 물밀 듯 들어왔단다. 군인들에게 임금을 주지 못하여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신 지식인들에 의해 갑신정변이 일어났지만 이내 실패하고, 부정부패한 지방 관리들에 불만이 쌓인 농민들 중심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는 등 조선은 대혼란의 시기였단다. 정부도 무능력하여 나라 안의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든 자국의 힘으로 해결을 해야 하는데, 일본과 청나라의 군대까지 끌어들였단다. 이웃 나라 간의 우리 정부의 위험한 줄타기는 결국 한 나라의 왕비가 우리나라 궁궐 안에서 다른 나라인 일본의 칼에 맞아 죽는 사건까지 일어났단다. 그 사건이 일어나고 왕은 겁을 먹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피하는 우스꽝스러운 촌극을 연출하였단다. , 창피하도다.

서재필이라는 사람이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들어와 우리나라 스스로 독립해야 한다면서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신문을 창간했지만, 그가 그리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다고 하는구나. 그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미국인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활동을 할 때도 조선 사람이 아닌 미국인으로 행동했다는구나. 그가 나중에 현충원에 안장되려고 할 때, 많은 역사가들이 그를 막았다고 하는데, 정부 기관은 좀더 심사를 하고, 많은 역사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결정할 것이지, 뭐 급하다고 그리 빨리 결정했는지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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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서재필의 큰 오점은 따로 있다. 부유한 나라 미국 국적의 서재필이 가난한 나라 자신의 모국 조선에서 너무 큰 돈 욕심을 낸 것이다. 독립협회의 고문 자리를 받아들여 10년을 계약한 서재필은 독립협회가 문을 닫게 될 위기에 처하자, 남은 7 10개월의 급료를 지급하지 않으면 사퇴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황국협회까지 만들어 독립협의를 해산시키려 한 고종은 그깟 돈이 대수냐며 서재필의 남은 임기만큼의 급료를 모두 지급하였으니, 지금 돈으로 30억쯤이었다고 한다.

<윤치호 일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만일 봉급을 두 배로 올려 주었다면, 서재필은 조선에 남아 있을 생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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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204)

1951년 서재필은 88세의 나이로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눈을 감았다. 이후 미국에서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된 서재필의 묘소가 한국 뉴스에 나오자, 여러 기독교단체가 그의 유해 송환을 주도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서재필의 유해가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현충원에 안장되려는 순간, 한국의 역사가들은 현충원의 정문을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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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에도 계속되는 조선의 수난 역사다시 일으킬 희망도 없이,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경술국치로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단다. 500년 긴 역사가 이어진 나라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나라를 다른 나라에 넘겨주었다는 것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란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들의 책임도 컸지만 하필 이 시절 왕이 무능한 고종이었던 이유도 컸을 거야. 그래도 고종이 일제로부터 강제로 폐위당한 이후에는 나라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하는 등 왕다운 모습을 보였다는 평도 있는데, 이 책의 지은이 황현필 님은 고종은 끝내 무능했고, 그는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황제권을 지키기 위해 행동한 것이라고 평가 절하를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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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고종은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며 나라까지 잃었음에도 그는 대단히 풍족하게 살았다. 국권피탈기 고종의 행동들은 그저 황제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고,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된 후 고종의 독립운동이란 것들은 모두 자신의 황제권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고종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최소한 잃어버린 강토의 회복과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 신음하는 만백성의 자주성 회복을 천명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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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 정도로 간단히 이야기를 마치려고 해. 앞서 이야기했지만, 아빠가 그 동안 다른 책을 통해 한 이야기들과 중복이 되어서 짧게 했어. 황현필 님의 책들이 그렇듯 한 가지 소재에 대해서 짤막하게 요점 정리해서 말씀을 해주셔서 읽기 편했단다. 너희들 같은 청소년들도 읽으면 좋을 것 같았어. 문득 학교 교과서에 근대사가 어떤 식으로 기술했는지 궁금하구나. 한번 너희 교과서를 훑어봐야겠구나. , 그럼 오늘은 이만 할게.

 

PS,

책의 첫 문장: 1800, 정조가 갑자기 사망했다.

책의 끝 문장: 옆집 아저씨가 아무리 잘났어도 내 아버지를 더 사랑하고 존중하듯이 다소 아쉬운 역사라 할지라도 소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일설에 의하면 안동 김씨도 나름 계산을 했다고 한다.
왕이 되기 전, 어린 이 이명복의 연이 끊어져 어느 안동 김씨의 집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보통 아이들 같았으면 겁도 없이 대문을 두들기며 연을 달라고 하든지 그럴 용기가 없다며 차라리 포기할 텐데, 이명복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대문 앞에 않아서 하루 종일 울고만 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안동 김씨는 이명복의 우유부단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를 왕으로 세워 설령 그의 아버지 이하응이 살아 있는 대원군이 된다고 하더라도 지금껏 이하응의 처신으로 보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 P15

한 사람만 더 언급하자면 동학을 진압한다고 핑계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을 당시의 일본군 사령관이 오시마 요시마사다. 오시마 요시마사라는 이 낯선 이름은 사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얼마 전까지 일본의 총리였던 아베 신조의 외고조부다. 그리고 전범임에도 사형을 면하고 일본의 총리까지 역임했던 기시 노부스케도 조슈번 출신이자 아베 신보의 외조부다. 당연히 아베 신조 역시 조슈번 출신이고,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정한론의 창시자 요시다 쇼인이었으니 최근 일본의 정치 권력을 잡은 주류들의 사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 P96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일본군을 기어이 막아선 이순신.
우리 강토를 짓밟은 외적에게 공포감을 심어 주고, 침략자의 후손들이 우리의 후손을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 노량해전을 설계했던 이순신.
이순신은 비록 노량에서 전사하지만, 그는 일본 에도막부 탄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후 에도막부와 조선은 250년의 평화를 유지했으니, 이순신의 노력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순신에게 짓밟히고 에도막부에 눌려 있던 자들이 에도막부를 몰아내고, 메이지유신을 단행하면서 정한론이 다시 대두됐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한반도가 다시 침략당했다.
- P97

1592년 임진왜란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
일본이 외세와 치른 전쟁들이다. 모두 일본의 선제공격이었다. 이토록 수많은 선제공격에 앞서 일본은 단 한 번도 전쟁에 대한 선전 포고를 하지 않았다.
일본인이 그리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무사도, 즉 사무라이 정신은 형식이자 겉치레에 불과했다. 사무라이는 자신들이 동경하는 이상향이었을 뿐, 그들 내면의 뿌리에는 닌자 정신이 깔려 있던 것이다.
- P151

민비는 임오군란 당시 도망 중에 만난 진령군이라는 무당을 신처럼 받들고 살았다. 성리학 국가 조선의 궁궐을 무당이 마음껏 드나들었고, 그곳에서 굿판이 벌어졌다. 진령군의 권위는 하늘을 찔렀고, 무당의 결정으로 벼슬이 주어지기도 했다. 민비가 세자의 건강을 기원하며 금강산 1만 2천 봉마다 쌀을 뿌린 것 또한 진령군의 진언 때문이었다. 임오군란 이후부터 민비가 시해되기 전까지 조선의 서열은 고종 위에 민비가 있었고, 민비 위에 무당 진령군이 있었다. - P176

회고의 애국계몽운동단체는 1907년에 조직된 신민회였다.
회장 윤치호와 부회장 안창호를 중심으로 구성된 신민회는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여 교육과 산업 진흥에 힘을 쏟았다. 안창호는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웠고, 이승훈은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다. 기호흥학회, 서북학회, 호남학회 등 각 지역에 학회가 설립된 것도 신민회의 역할이 컸다. 이 밖에 신민회의 주도로 평양에 자기회사가 설립되었고, 대국에는 태극서관이라는 출판사도 설립됐다.
신민회의 또 다른 특징은 비밀결사적 성격이 짙었다는 것이다. 누구도 신민회의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지 못했다. 비밀결사의 앞뒤 연락책 정도만 알 뿐이었다. 대신 비밀조직인 만큼 신민회는 일제의 눈을 피해 무언가를 계속 준비했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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