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예, 이제
하는 말이지만,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의 취조와 재판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그때 많은 것을 생각했었습니다. 33인 중에서 고문을 끝까지 꿋꿋하게 이겨내고, 재판정에서도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내세운 사람은 한용운 선생 한 분뿐이었다는 게 참 충격이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꺾였다는 것에 놀랐고, 만약
내가 그 처지였다면 어찌 되었을 것인가, 나도 두려움에 떨며 꺾였을 것인가, 아니면 한용운 선생처럼 꿋꿋했을 것인가, 많이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는 한용운 선생이 될 것 같기도 했고, 또 어느
순간에는 꺾이고 말 것 같기도 했고, 영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보다는
꽤 강해진 것 같습니다만, 변절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를 살펴보곤 하게 됩니다.”
(126)
임시대통령 <리승만>의 범과 사실을 심리하고 대한민국 임시헌법 제4장 제21조 제14항에 의하여서 탄핵 면직에 해당함을 판정함.
<리승만>
범과의 사실
一. 임시대통령
<리승만>이 그 직임에 피선된 지 7년에
임시대통령의 선서를 이행하지 않았으며 정부의 행정을 집정하지 않었고 각원들과 불목하여 정책을 세워보지 못하였다.
二. 임시대통령
<리승만>이 대미 외교사업을 목적하고 설립한 구미위원부를 가지고 국무원과 충돌하였고
아무때나 자의로 법령을 발포하여서 질서를 혼란하게 하였으며 정부의 처사가 자기 의사에 맞지 않으면 동지자들을 선동하여 정부를 반항하였다.
三. 임시대통령
<리승만>은 그 직임이 국내 13도
대표가 임명한 것이라 하여 신성불가침의 태도를 갖이고 임시 의정원 결의를 무시하며 대통령 직임을 <황제>로 간주하여 <국부>라
하며 <평생 직업>을 만들려는 행동으로써 민주주의
정신을 말살하였아.
四. 임시대통령
<리승만>이 미주에 앉어서 구미위원부로 하여금 재미 동포의 인구세와 정부 후원금과
공채표 발매금들을 전부 수합하여 자의로 처단하고 정부에 재정보고를 제출하지 않어서 재정 범포가 어느 정도까지 달하였는지 아지 못하게 하였다.
五. 임시대통령
<리승만>이 민중단체의 지도자들과 충돌하여 정부의 고립상태를 주출하고 재미 한인사회의
인심을 선동하여서 파쟁을 계속 하므로 독립운동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
(132)
최고로 많이 배워 박사라는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아니,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독립운동이란 자기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하는 일 아닌가? 그 일이 어렵고 장해서 뼈빠지게 번 돈을 아낌없이 내놓지 않았던가? 우리같이 무식한 것들도 다 아는 그 일을 이승만이란 사람은 몰랐는가? 그
유식하고 유식한 사람이 몰랐을 리가 있는가? 그런데 왜 독립자금을 제멋대로 범포해 버린 것일까? 그게 도대체 어찌 된 맘보일까? 그 사람은 독립운동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입신출세를 위해서 한 것인가? 어찌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많이 배우고,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 중에 이승만 같은 사람은
또 없을까? 개는 믿어도 사람은 못 믿을 짐승이라고 하던데 그게 정말 아닌가? 사람을 어디까지 믿어야 한단 말인가?
(144)
“보시오 지 동지,
어디 독립운동을 독립군만 하는 것이오? 이 만주땅에 조선농부들이 없고서야 독립군들이 어찌
있을 수 있소. 농부들이 피땀 흘려 뒷바라지하니까 독립군들이 앞으로 나서서 싸울 수 있는 것 아니오. 그러니 내가 늘상 하는 말이지만, 농부들도 독립운동을 하는 거란
말이오. 다람 앞으로 나선 것하고 뒤에 있는 것하고 차이가 있을 뿐이오. 또 독립운동이 어디 한두 가지요? 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소학교
선생을 하겠소? 우리 대종교 활동은 또 뭐요? 친일모리배들을
빼놓고는 만주에 사는 우리 동포들은 모두가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오. 그러니 만복이도 제 능력에
맞춰 일을 고르면 될 것 아니겠소. 공부에 더 열중하게 해서 소학교 선생을 시켜도 좋고, 대종교 일을 보게 해도 좋지 않겠오?”
(149-150)
복벽주의와 공화주의가 끝내 합일체가 이룰 수 없었던 것은 너무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걸 독립운동 전선의 분열이라거나 독립운동 세력의 파쟁이라고 하는 것은 몰상식한 공론(空論)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뿐인
목숨들을 내걸고 나라를 되찾자는 것은 나라를 탈취한 자들만 원수로 삼는 것이 아니었다. 나라를 빼앗긴
자들의 잘못까지도 단죄하자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목숨 바쳐 되찾은 새 나라의 국체는 마땅히
백성들이 주인이 되는 공화주의가 아니고서는 안되었다. 그런데 복벽주의자들은 또 나라 빼앗긴 죄인들의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용납되어서는 안되는 망동이었다. 상해임시정부가
탄생한 절대적 의미는 국체를 공화주의로 세운 것이었다.
(215)
“무슨 생각 하느냐고? 아리랑을 생각하고 있었지. 아리랑,
아리랑, 그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고 있었어. 그리고
관중들의 합창을 생각하고 있었어. 아리랑에서 팔을 묶여 끌려가던 그 사나이가 누군지 아나? 그게 주인공 김영진이라고? 아니야,
아니야, 그건 바로 송중원이야. 송중원이고, 또다른 송중원이고, 또다른 송중원이고…… 그리고 그 열렬한 관중들의 합장은 수많은 송중원에게 보내는 지지고 기대고 열망이야. 나는 이번에 놀랐어. 아리랑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아리랑 노래가 선풍적으로 유행하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어. 나는
도망다니면서 사람들이 독립을 다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다 왜놈들의 종으로 살기로 독립을 포기해 버린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고 회의했었어. 허나 그건 외로움과 두려움에 몰리고 있는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었어. 아리랑을 보고 내 잘못을 깨달은 거지. 활동사진에 그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노래가 그렇게 퍼져나가는 건 뭘 말하는 것인가. 그건
바로 조선사람들이 가슴 가슴마다 독립의 염원을 뜨겁게 품고 있다는 증거 아닌가. 평소에는 다만 표를
내지 않았을 뿐이야. 그 뜨거운 염원이 있는 한 송중원은 외롭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끝없는 용기를
발휘하게 되는 거야. 어때, 내 말이.”
(277)
“우리는 조선사람이다. 그런데 왜 중국의 싸움에 나섰겠는가. 그건 전체 아시아사람들의 자유를
찾기 위해서다. 전 아시아사람들이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차별없이 잘살려면 중국에서는 군벌들을 타도해야
하고, 조선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무찔러야 한다. 지금 2천만 조선사람들은 우리가 중국군벌을 타도하고 조선으로 오기를 기다리며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 자아, 당신들은 어째야 하겠는가.
군벌들은 당신들의 재산과 곡식을 빼앗아갔고, 탄압하고 괴롭혔다. 이제 우리는 당신들의 원수인 군벌들을 없애려고 총을 들고 나섰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말고 우리를 도와야 한다. 우리는 영원히 당신들의 편이다.”
(288)
삼부회의는 만주의 동포사회를 지역적으로 삼등분해서 자치정부를 형성하고 있는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통합을 위한 회의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 삼부는 1924년과 25년
사이에 세워진 것이었다. 정의부는 남만주의 통화를 중심으로 길림 일대까지 장악하고 있었고, 참의부는 남만주의 집안현을 거점으로 압록강변 일대의 현들을 포괄하고 있었으며,
신민부는 일본세력 아래 장악된 용정이나 국자가 일대를 피해 북만주에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삼부는 지역이 서로 다르면서도 부(府)라는 명칭을 단 것이
공통점이었다. 그건 어떻게 보면 상해임시정부를 부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3.1 운동을 계기로 만주에서는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때 부라는
명칭을 가진 단체도 있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발족된 한성과 연해주의 임시정부가 상해임시정부로 그
명칭과 기능을 통합하게 되자 만주의 단체도 부라는 명칭을 취소했던 것이다. 그로써 상해임시정부는 <대한임시정부>라는 유일성의 법통을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해임정은 기호파와 관서파의 내분으로 정부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되어 그 수습을 위해 국민대표회를
연 것이 1923년 1월
3일이었다. 그 회의에서는 임정의 조직을 개편 보완하자는 개조파와 임정을 완전히 새롭게
탄생시키자는 창조파의 팽팽한 대립으로 회의는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그 회의 결과 상해임정은 그전의
삼부가 생겨나게 되었다. 국민대표회에 만주지역의 단체대표나 독립군대표들이 단연 많이 참석했고, 그들이 창조파였음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적과
멀리 떨어져서 내분이나 일삼고 있는 임정과 그 간부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292-293)
만주를 지배하는 봉건군벌 장작림은 조선총독부와 2년
전에 삼시협정을 체결하고 만주의 조선사람들을 공개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년 4월에는 혼란한 정국을 틈타 중앙권력을 장악하려고 대병력을 이끌고 북경을 치고 들어갔다. 뒤이어 국공합작으로 북벌전쟁이 시작되자 장작림은 공산당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는 자기의 세력권 안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없애라는 소탕령을 내렸다. 그
명령에 따라 만주에서는 폭력과 체포의 회오리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사람들은 그 거친 바람에
심하게 휘말렸다. 조선사람들 중에 공산주의들이 많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중국경찰들은 조선사람들을 걸핏하면 잡아가고 닥치는 대로 폭력을 휘둘렀다. 조선독립을 놓고
한동안 우호적이었던 관계가 깨져나가고 있었다. 특히 부패한 중국관헌들은 공산당 일소를 빌미로 무고한
조선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며 박해를 가했다. 그리고 돈을 받아먹고는 풀어주었다. 타락한 관헌들에게 공산주의자 소탕령은 더없이 좋은 치부의 기회였다. 그런데
중국관헌들의 그런 횡포에 대해 독립운동 단체들이나 독립군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들과 맞서 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땅에 머무는 처지에서 총질을 했다간 그나마 발붙일 곳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 신속하게 뒷손을 써서 잡혀간 사람들을 빼내는 정도였다.
(307)
그러나 정작 무식한 것은 하시모토였다. 그 금줄은
터무니없는 미신이 아니었다. 숯은 병균이나 오물의 여과기능이 강했다.
더러운 물을 여과시킬 때 모래와 숯을 여러 층으로 쌓아 통과시키는 것이 그 때문이었다. 조선사람들이
간장을 담글 때 간장독에 숯덩이들을 띄우는 것도 같은 이치였다. 금줄에 숯을 끼우는 것은 아직 병에
약한 갓난아이와 산모에게 병균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식구들이 들어올 때 미리 문간에서 소독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솔가지도 미신만이 아니었다. 조선사람들은 가시가 매서운 탱자나무 대추나무와 함께 소나무 가지도 온갖
잡귀들을 물리친다고 믿었다. 소나무의 그 사철 푸르른 바늘잎을 가시와 똑같이 생각한 것이다. 그것은 미신적 요소였다. 그러나 실제로 소나무의 향과 송진은 여러가지
해충이나 독충을 죽이고 쫓는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 소나무에 잡벌레가 슬지 못하는 것이 그 까닭이었다. 특히 송진은 인체 내의 기생충을 제거하는 약으로 쓰이고 있었고, 가벼운
외상의 지혈과 치료에 특효였다. 그리고 삼칠일 동안 금줄을 드리워 외부인들의 출입을 막는 것도 지극히
과학적이었다. 세상의 여러가지 유행병에 무방비상태인 갓난아이가 그
21일 동안에 엄마의 젖을 빨며 차츰 병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갖추는 것이었다. 산모의
몸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여러가지 면역성이 젖을 통해서 갓난아이의 몸에 고스란히 들어가 정상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기간이 바로 21일 동안이었다. 그리고 산고를 치른 산모의 몸이 정상으로 회복되는
기간도 21일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