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 산책 9권 - 연애열풍에서 입시지옥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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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어느덧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 9권이구나. 9권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이 아닌, 일제 시대, 특히 1930년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생활 문화와 풍습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단다. 그래서 부제도 <연애열풍에서 입시지옥까지>란다. ‘한국 근대사 산책이라는 제목 없이 부제만 본다면 오늘날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싶었어. 오늘날도 연애열풍, 입시지옥이라는 말이 꼭 맞으니까 말이야. 일제 강점기가 길어지면, 그것이 일상이 되어 가면서 강제로 근대화되긴 했지만 우리나라 보통 사람들도 그 사회에 적응을 해 나가는 듯 보였어. 그런 모습들은 9권에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단다. 차례도 보면 여성문화, 대중문화, 소비문화, 생활문화, 중독문화 이렇게 되어 있단다. 지금까지 달리 역사적인 사건 없이 이야기가 펼쳐져 다시 지루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괜찮았고, 보통 사람들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도 있었단다.

1930년대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라고 하는 신세대 젊은이의 모습들이 등장하였고, 사랑에 목숨 거는 것이 유행처럼 늘어났다고 하는구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자살을 하고, 도피하는 사람들도 많았어. 특이 기존 유교 중심의 사회를 깨고 신여성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등장했는데, 대표적인 이가 나혜석이 아닐까 싶구나. 나혜석은 아빠가 여러 책들을 통해서 이야기를 해서 오늘은 건너 뛸게.. 다만 아빠가 나혜석에 대해 몰랐을 때는 그냥 신여성이자 화가라고만 알았는데, 비참한 최후를 알게 된 뒤로는 나혜석의 이야기를 볼 때마다 가슴 아프고 안타깝고 그렇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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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9)

나혜석은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1021년 최초의 개인전을 가진 화가로 한국 근대 미술사에서 중요하게 자리매김되고 있다. 또 그녀는 한국 근대 문화사에서 최초의 여류소설가 역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안숙원은 그의 소설 <경희>는 한국 현대문학사상 최초의 페미니즘 텍스트라고 평가하면서 이 소설에 나타난 신여성론은 동시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맞겨룰 만한 담론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나혜석은 여성도 사람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여성 계몽적 시 <노라>를 발표, 1920년대 계몽주의 문학의 중요 작가로 재평가 받고 있다. 이상경은 나혜석은 자유연애주의자가 아니라 자기 성취를 추구하며 온몸으로 계몽주의 사상을 밀고 나갔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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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여성이라고 부르는 이들 중에 박인덕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자신이 남편에게 위자료를 던져주고 이혼을 한 뒤에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해서 박사 학위까지 받고 다시 국내로 와서 이런저런 활동까지 했다는구나. 하지만 나중에 친일 활동을 했다고 하니 이미지가 확 추락하는구나.

신여성들이 등장하면서, 현모양처에 반기를 들고 나서는 이들이 있었어. 그런데, 현모양처라는 말이 우리나라에 있던 말이 아니고,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라고 하는구나. .. 앞으로 이 말을 좀 쓰지 말아야겠구나.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들어나면서 여성 운동도 활기를 띠게 되었는데, 아내에게 월급을 주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단다. 일제는 우리나라 생활 문화에 이런 저런 간섭도 많이 했어. 예를 들어 조혼제, 그러니까 일찍 결혼하는 것을 폐지하였고, 흰 옷을 입지 못하게 했고, 장례를 간소화하여 간단히 하라고 했어. 일제의 강점기가 길어지면서, 강제로 우리 문화를 서서히 변화해갔단다.

 

1.

1930년대 대중 문화는 어땠을까? 대중 잡기가 성행하여 <삼천리>, <신동아> 등을 비롯하여 많은 잡지들이 출간되었대. 특히 <삼천리>리는 가장 오래 유지되었는데, 조선일보 기자 출신 김동환이라는 사람이 만든 잡지인데, 조선일보 기자답게 1937년 이후로는 친일의 길을 걸었다고 하는구나. 이전에는 돈 많은 집에서나 가질 수 있는 라디오가 많이 대중화되었다고 하는구나. 그로 인해 라디오 드라마가 급증하였고, 스포츠 실황도 라디오로 해주었대. 이렇게 라디오가 인기를 끌자, 일본은 라디오를 황국신민화 선전용으로 적극 활용했단다. 이때도 언론과 방송의 힘은 권력의 노예가 되었구나. 하기야, 이것보다 효과적으로 자신의 정권을 홍보하는 게 어디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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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94)

마찬가지로 일제는 조선의 라디오를 황국신민화 사업에 적극 활용하고자 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제는 본격적으로 방송을 국민동원과 전시선전의 도구로 삼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황국신민화, 내선일체, 일본어 상용 등의 명분을 내걸어 우리말 뉴스방송에서도 일본어 혼용을 강요하였고, ‘궁성요배(宮城遙拜)의 시간이니 심전개발(心田開發)’이니 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토록 하였다. 그런가 하면 나중엔 일본군이 되어 천황폐하를 위해 싸우다가 백골이 되어 호국신사에 봉안되는 것이 효도의 길이라는 노래 아들의 혈서를 당대의 인기 가수 백년설이 매일 방송하느라고 2개월간 방송국에 통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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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절 영화도 유행하여 극장도 많이 지어졌단다. 한 동안 영화의 인기를 이끌었던 변사는 유성 영화의 등장과 함께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되었단다.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영화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도 대거 유입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구나. 라디오와 함께 축음기도 갖고 있는 사람도 많이 늘어났는데, 이와 함께 가요도 같이 발전하였단다. 이때 활동했던 가수들과 유행했던 가요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몇몇 노래들은 아빠도 알고 있는 노래들이었단다. 그 중에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이 노래가 가사를 통해서 몰래 항일을 노래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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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서울 종로경찰서 고등계에서는 이 노래의 가사에 의심을 품고 레코드사 사장 이하 관련자들을 불렀다. 경찰이 문제 삼은 건 삼백연 원안풍은 노적봉 밑에라는 구절이었다. 손목인의 회고에 따르면, “사장 이하 관련자들은 원안풍은원한 품은아니라 원안풍은이라고 극구 해명하고 사정하여 간신히 무마는 되었지만, 솔직히 말해 목포의 눈물삼백연 원안풍삼백 년 원한 품은이라는 뜻으로 우리 민족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겨레의 분노를 노래한 것이다. ‘목포의 눈물’ SP는 이 사건을 겪으면서 더욱 잘 팔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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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절 커피도 많이 유행했다고 하는데, 당시에도 커피가 못에 좋다거나 나쁘다는 내용의 신문기사가 있었다고 하는구나. 오늘날도 어떤 기사에서는 커피가 몸에 좋다고 하고, 어떤 기사에서는 커피가 몸에 나쁘다고 하고그때나 지금이나커피는 몸에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니, 과하게 먹지 말라고 이해해야겠다. 커피가 유행하면 덩달아 커피를 파는 카페와 끽다라고 하는 다방이 함께 유행했단다. 카페는 에로로 문제가 되기도 해서 총독부에서 강한 규제를 하기도 했대. 그 밖에 음악 장르 측면에서는 재즈도 유행을 하고, 댄스도 유행을 했는데, 일제총독부에서는 서울에 댄스홀을 허가하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일부 춤꾼들은 댄스홀 허가해 달라고 편지도 썼으나, 총독부는 끝내 허가하지 않았대.

 

2.

백화점도 생기기 시작해서, 동아백화점과 화신백화점은 서로 경쟁을 했는데, 화신백화점의 주인 박홍식은 민족주의 마케팅을 하고, 공격전인 할인을 통해서 시장 점유율을 높였어. 그로 인해 동아백화점은 개업 반년 만에 화신백화점에 흡수 합병되었다고 하는구나. 당시 여자들의 패션을 살펴보면, 머리는 단발, 파마 등 여러 가지 헤어스타일이 유행하였대. 남자들의 헤어스타일도 개성 있는 헤어스타일을 고집하는 이들이 있었대. 하지만 장발 단속이 이때도 있었나 보구나. 일제 시대 장발에 대한 탄압이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고, 그 한 사람 때문에 불우한 현대사를 갖게 되었으니, 일제가 장발에 대한 탄압은 잘못해도 엄청 잘못한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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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1920년대 말부터 유행한 남성의 장발에 가해진 탄압은 한 사나이의 운명을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1937 3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던 박정희가 교사 일을 그만두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게 된 계기에 장발이 관련돼 있다는 게 흥미롭다. 교사 생활 3년째 되던 1939년 가을 연구수업 시찰차 나왔던 일본이 시학(오늘날 장학사)과 교장이 술자리에서 박정희의 장발을 문제 삼자 박정희는 이에 반발, 술잔을 던지는 등 소동을 벌인 후 사표를 냈다는 것이다. 당시 교사들은 머리를 박박 깎게 되어 있었으나, 박정희만은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먼 훗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뒤에 장발을 혹독하게 탄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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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 사이에서는 여우목도리도 유행을 했다고 하는구나. 최초로 패션쇼도 열렸다고 했어.

이 시대 전화 보급도 급증을 했대. 그러면서 전화 범죄도 발생했다는데, 보이스 피싱의 역사는 전화의 역사와 함께 했나 보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국제 전화도 가능해졌다는구나. 일본 문화는 계속 물밀듯이 들어와서, 대중 목욕탕도 생겼는데,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꼈다고 하는구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옷을 다 벗는다는 것이 유교 주의 사회에서 이해를 할 수가 없었을 테지. 크리스마스도 전래되어 크리스마스 이브를 즐기기 시작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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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

해마다 화려해지는 유흥가의 축하연 덕분에 크리스마스 이브는 일 년 중 가장 퇴폐적인 밤이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총독부는 유흥업소의 크리스마스 축하연을 전면 금지했다. 그러나 맘먹고 놀겠다는 데야 어디 빠져나갈 길이 없겠는가.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 유흥가는 생뚱맞게 국위선양 기념회’ ‘남경 함락 축하 만찬회’ ‘황국 전승 대연회현수막을 갈아 달고 축하연의 전통을 이어갔다. 크리스마스가 상업적으로 왜곡된 것은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 직전인 12 16일이 200~400페센트씩 지급되는 연말보너스 받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월급쟁이들은 12월 봉급까지 더해 평상시 월급의 3~5배까지 두툼한 월급봉투를 받았다. 오랜만에 두툼해진 월급쟁이의 호주머니를 털기에 크리스마스 이브 축하연만큼 그럴듯한 명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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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유행은 그 이전에도 이야기한 것 같구나. 이 시절 경성과 평양의 정기 축가 대항전이 있었대. 경평전이라고 불렀다는구나. 승부욕이 지나쳐서 경평전을 열기만 하면 난투극이 벌어졌고, 지역 갈등도 있었지만, 축구를 통해서 항일한다는 의미도 있었다는구나. 이때 평양팀의 김영근이라는 선수가 큰 인기를 끌었다는구나. 이 경평전은 매년 펼치다가 해방이 되고 남북에 삼팔선이 그어지면서, 1946년 마지막 경기를 펼쳤다고 하는구나. 축구만큼 권투의 인기도 많았대. 서정권이라는 선수가 있었는데, 세계 랭킹 6위까지 올랐다고 하는구나.

이 당시 이 책의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육열이 엄청 났어. 중학교든 고등학교든 입학정원이 적어서 상위 학교에 진학하는데 평균 경쟁률이 6:1이나 되었대. 그렇다 보니 더욱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고, 시험에서 떨어지면 자살하는 이들도 있다는구나. 예나 지금이나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엄청 심했고,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DNA에 새겨져 있는 것 같구나.

여기까지가 <한국 근대사 산책> 9권의 이야기란다. 이제 한 권 남았는데, 아빠가 지금까지는 시간 간격을 두고 한 권씩 읽었는데, 마지막 10권은 그냥 연달아 읽어서 끝내버렸단다. 10권도 읽은 지 좀  되었는데, 아빠가 게을러서 너희들한테는 아직 이야기를 못해주었구나. 곧 해줄게. 9권은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역사적인 사건은 없었지만, 당시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단다. 그 어려운 시절에도 우리랑 똑 같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기도 하고 말이야.

,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1920년대 도시 고학력층에서 등장한 모던 보이모던 걸 1930년대에 이르러 숙성되면서 그 저변을 넓혀 나갔다.

책의 끝 문장: 각개약진할 때 하더라도 이젠 다른 방식의 삶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는 슬기가 필요하다 하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박인덕을 비난했지만, 윤치호는 박인덕을 옹호했다. 그는 1931년 10월 26일자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첫째로, 나는 수많은 젊은 남자들이 자기 아내와 이혼하는 것과 똑같이 그녀 역시 남편과 이혼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런 남자들 중에는 더 매력적인 여자와 결혼하길 바라는 것 말고 어떤 이유도 없는 자들이 많다. 이들 무정한 젊은 남자들은 비난하지 않고 그저 박인덕만 욕하고 온갖 험담을 늘어놓는 것은 ‘여성은 영원히 남성의 노예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P46

1930년대 조선의 중상류층은 행여 뒤처질세라 서양 냄새를 피우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서양화가 곧 계급이요 교양의 척도이자 상징이었다. 1930년 11월 <매일신보>가 여러 차례에 걸쳐 그런 경향을 지적하고 나선 게 흥미롭다.
11월 23일자에 따르면, "서양류의 가수는 성악가라 하여 숭상하고 우리 조선의 고유한 가수는 광대라 하여 천시하고 멸시함은 무슨 까닭인고? 물론 이에는 여러 가지 원인과 동기가 있겠으나 도대체 남의 것이라면 좋으나 그르나 귀하에 여기고 우리의 것이라면 덮어 놓고 천하게 여기는 과도기에 처한 조선의 사회적 결함과 일반 가수의 인격적 저하(低下)가 그 주요한 원인이 된 것은 묻지 않아도 알 일이니 조선의 가수가 결코 본시부터 천한 것은 아니었다."
- P114

일제강점기의 대중가요에 대해 "민족의 정서를 황폐화시키고 시적 표현을 왜곡시켰다"거나 "유행 창가 전반의 의식세계는 결국 식민지배에의 봉사로 귀결"되었다는 분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나라 잃은 식민지 민중에게 ‘슬픔’을 벗어나라고 주문하는 건 오늘의 관점에서 본 무리한 요구가 아닌가 싶다. 때론 슬픔도 힘이 되는 게 아닐까? 게다가 슬픈 노래가 나라 찾고 경제발전 이룬 뒤에도 계속되는 걸 보면, 이는 좀 더 정교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는 걸 말해주는 거라고 볼 수 있다. - P160

이효석은 조선일보사가 발생한 <조선문학독본>(1938년 12월호)에 쓴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에서 가을 낙엽을 태우는 냄새에서 ‘갓 볶음 커피 냄새가 난다’라고 썼다. 이에 대해 이영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정말 커피 냄새가 낙엽 태우는 냄새와 비슷한 줄 알았다. 1970년대만 해도 원두커피를 갈아서 끓어주는 커피 전문점들이 없었고, 다방은 미성년자가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갓 볶은 커피 냄새’가 뭔지 알게 된 지금 생각하면 웬걸, 낙엽 태우는 냄새와 비슷도 하지 않다. 그러고 보면 이효석은 커피 냄새를 잘 몰랐던 것이 분명하다. 구태여 익숙하지도 않은 커피 냄새를 들먹인 것은 분명 ‘커피’라는 말이 주는 문화적 의미 때문이었을 것이다. "
- P179

위생에 대한 문화적 차이도 있었다. 일본인들의 기준에선 조선인들이 목욕을 잘 하지 않는 게 야만이었겠지만, 조선인들의 기준으로 볼 때엔 일본의 목욕문화가 야만이었다. 한국 최초의 대중목욕탕은 1905년 서울 서린동 근방에 등장했지만, 여럿이 벌가벗고 목욕을 한다는 것이 익숙지 않은 문화적 저항 때문에 사람이 오질 않아 곧 문을 닫고 말았다. 대중목욕탕에 익숙해질 때까진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왕실에서도 1919년에서야 목욕실을 두었고, 대중목욕탕은 1920년대에서야 본격적으로 생겨나게 된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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