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광인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23년 11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작년에 아빠가 새로 알게 된
작가들 중에 최고는 이혁진이라는 작가란다. <누운 배>를
통해 알게 된 다음, 그의 장편을 다 찾아 읽었단다. ‘다’라고 해 봤자 데뷔하신 지가 얼마 안 되어 권뿐이더구나..^^ 3권뿐이라서
아쉬웠지. 그런데 두어 달 전에 신간 소식 알림이 떴어. 그
책이 이번에 아빠가 읽은 <광인>이라는 소설이란다. 책 두께가 어마어마 하구나. 7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책인데,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책은 두께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책이었어. 한 번 잡은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재미가 있었단다. 아빠가 회사를
다니다 보니 평일에는 책을 읽는데 아무래도 제한이 있단다. 이 책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지만 다음날
출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잠이 들고 했어. 주말이 되자마자 남아 있는 페이지들을 한 자리에 앉아서
읽었단다.
전작들에서도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를 잘 했는데, 이 책에서도 여전하구나. 그리고 이혁진
님의 소설의 장점은 기억하고 싶은 좋은 문구들이 책에 많이 실려 있다는 거야. 어떻게 그런 공감 가는
글들을 쉼 없이 쏟아낼 수 있는지 모르겠구나. 이따가 몇 개 소개해줄게. 한가지 아쉬웠다면, 소설의 뒷부분에 소설의 제목처럼 ‘광인’이 되어가는 등장인물이란다. 그가
그렇게 되어갈 수밖에 없는지 조금 이해가 가질 않았단다. 아빠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장면들이 있었어. 사람마다 제각각이니까 그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겠거니 하겠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아무튼 평범치는 않았지.
아빠가 이 소설을 너무 극찬한
것 같은데, 아빠가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다는 점,
알지? 이혁진 님의 그 전에 작품들을 좋아했던 아빠의 관점에 이번 <광인>이라는 소설을 이야기한 것이니까 말이야. 아참, 아빠의 기억력을 위해서 책의 내용은 거의 끝까지 다 이야기를
하는데, 스포일러를 방지하기 위해서 어디서 이야기를 끊어야 할지 고민 좀 해야겠구나.
1.
주인공은 41살의 싱글남 정해원. 41살의 싱글남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듣는 소리 중에 하나가 ‘결혼’이 아닐까 싶구나. 해원도 엄마의 결혼하라는 잔소리에 싫증을 내고 뭔가 새로운 것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오히려 들었어. 벽보에 붙은 플루트 레슨 광고를 우연히 보고 무작정 교습소로 갔단다. 그곳에는
권준연이라는 동년배로 보이는(알고 보니 한 살 적은 40살) 권준연이라는 이가 있었어. 권준연은 가난한 작곡가이지만 생계를 위해서
레슨도 한다고 했어. 플루트 배우러 갔다가 플루트 가르치는 여자 선생님과 썸씽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나
싶었는데, 강사는 남자였구나.
준연은 상담 온 해연에게 대뜸
위스키를 하자고 해서 처음 만난 자리에 술을 같이 하고 금방 절친이 되었단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해연은 준연이 자신과 잘 맞는 친구라고 생각해서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졌어. 그 이후 본격적으로 플루트
레슨을 받으면서 둘은 더 친해졌어. 준연이 엄마가 자궁암에 걸리셨는데 돈이 없어 걱정하는 모습에 해원은
선뜻 1000만원을 빌려주기도 했어. 해원은 그동안 직장
생활이 잘 풀려서 스톡옵션 등으로 큰 돈을 벌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단다.
어느날 준연은 고향 친구가 위스키를
직접 만들어 올 거라면서 같이 마시자고 했어. 고향 친구라고 하니, 그리고
위스키를 만든다고 하니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위스키를 들고 온 조하진이라는 사람은 여자였단다. 플루트 강사는 여자일 줄 알았는데 남자이고, 고향 친구는 남자일
줄 알았는데 여자이고.. 약간의 비틀림을 줌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갖게 했단다.
해원은 첫눈에 하진에 반했단다. 하지만 하진은 준연의 친구였고, 옆에서 보니 준연도 하진을 여자로
대하는 느낌이었어 해원은 준연을 둘도 없는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하진이 처음 보는 그 자리에서 그 완벽한
친구의 금이 가는 것이 느껴지더구나. 하진인 위스키 사업 때문에 당분간 서울에 머물러서 가끔씩 셋이
술자리를 했단다. 해원은 하진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거짓말도 하고 그랬어. 함께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점점 하진의 매력에 빠지고 말았단다. 하진은
위스키 사업 설명 PPT를 만들었는데, 해원이 도와주었단다. 해원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 PPT는 많이 만들어봤거든. 하진에게 잘 보이려고 했던 해원은 퇴근하고 하고 PPT에만 매달렸지. 하진은 고맙다면서 술을 사겠다고 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해원은 하진과 단 둘이 만났단다. 하진은 정말 스스럼 없이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다 했단다.
이 만남 이후 해원의 머릿속은
온통 하진뿐이었단다. 하지만 하진은 절친 준연이 좋아하는 친구라는 것에 해원을 괴롭혔어. 몇 번을 고민하던 해원은 결국 하진에게 고백을 했단다. 그리고 하진도
해원을 좋아하고 있었다면서 그 고백을 받아주고 둘은 사랑을 하기 시작했어. 해원은 이 사실을 준연에게도
이야기했고 준연도 속마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축하해준다고 했단다. 하진에게 준연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진에게 준연은 세상에서 가장 친한, 둘도 없는 친구였단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했던 죽마고우. 그건 하진이 해원과 사랑을 시작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단다. 이것이 앞으로 이야기에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란다. 지금까지는 왜 소설 제목이 ‘애인’이
아닌 ‘광인’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단다. 하지만 앞으로는…
2.
해원은 하진이 운영하는 시골에
있는 증류소를 찾아가 일도 도와주었단다. 시간 날 때마다 하진의 증류소를 찾아가고 가지 못할 때는 매일
전화하고….
…
그러던 어느날 암에 걸렸던 준연의
어머니가 결국 돌아가셨어. 준연의 어머니는 치료가 호전되어 시골집으로 내려가시고 얼마 후 돌아가신 것이라
예상치 못한 죽음이었단다. 알고 보니 준연의 어머니는 처방해 간 약을 하나도 드시지 않았어. 준연은 충격을 받고 무척 힘들어했단다. 장례식을 마치고 해원, 하진, 준연과 술을 먹었는데 힘들어 하는 준연은 자해까지 했단다. 그런 그를 하진은 자신이 옆에서 보살펴주겠다고 했어. 해원은 자신의
여자친구가 밤새 다른 남자와 함께 하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어. 몇 번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냐고
물었고, 하진 대신 자신이 준연 옆에 있겠다고 했지만, 하진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단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하진에게 준연은 둘도 없는 친구이고,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말이야.
해원도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그 때는 하진을 믿어주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구나. 장례식을
마친 준연은 어머니의 시골집에 내려갔어. 준연이 없어지자 해원은 하진과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되어 좋아했단다. 하진은 위스키 투자자와 미팅도 가졌는데 큰돈을 대면서 사업하겠다고 하는 투자자도 있었어. 해원도 그 투자자의 제안을 들어보니 정말 좋은 계획이었어. 하지만, 하진은 그 투자자의 제안을 거절했단다. 이유는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과
맞지 않다는 거였어. 오랜 회사 생활로 인해 실적을 중요시 생각하는 해원에게 그 투자자의 제안은 둘도
없는 기회였는데 그것을 거절한 하진을 이해할 수 없어서 또 티격태격했어. 금방 화해를 하긴 했지만, 점점 부딪히는 일들이 많아졌어.
둘이 깊이 사랑할수록 둘은 서로
더 많이 알게 되어가고 그러면서 실망하는 모습도 보일 텐데,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해원은 그때마다 이해하지 못하고 하진과 말다툼을 하는구나. 하진도
자존심이 세어서 해원의 말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맞부닥치고… 둘 다 나이가 마흔 살이 넘었는데 사랑도
여러 번 해봤을 텐데, 사랑의 초짜처럼 구는 것이 안타까웠단다. 그래서
그 때까지 혼자였던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해원은 하진을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정성 들여 편지와 꽃을 준비하여 하진에게 청혼을 했지만, 그 자리에서 거절당했단다. 그럴 줄 알았어. 하진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위스키 사업이었거든. 타이밍이 좋지 않았지. 하지만 해원은 굽히지 않고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결혼하자고 ‘설득’을 하려고 했어. 하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단다. 해원이 아직 하진을 잘 모르고 있구나. 하지만 나이 사십에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놓치고 싶지 않은 해원의 마음도 이해는 가는구나.
3.
준연은 시골집에서 돌아와 교습소를
그만두고 배달일을 했어. 준연이 다소 대책 없이 일을 관두고 또 다른 일은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 또한 해원은 좀 이해가 가길 않았단다. 오토바이에 익숙하지
않던 준연이 배달을 하다니.. 얼마 못가 교통사고가 났어. 이
일이 있자 곧바로 하진이 서울로 올라왔단다. 하진의 ‘남자친구’ 해원은 속이 끓겠지. 이젠 준연이 친구로 보이지 않으려고 했어. 그런데 며칠 뒤 하진이 이야기 하기를 준연이 자신의 증류소에게 일하기로 했다는구나. 해원은 이것만은 참을 수 없었어. 하지만 하진의 뜻을 꺾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았어. 아빠 생각에는 하진이 이건 좀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애인이 있는데, 아무리 둘도 없는 친구라지만 이성인데, 단 둘이 그 시골집에서 지낸다고 하면 괜찮다고 할 남자친구가 얼마나 될까. 남자친구
생각도 좀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하진의 뜻을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한 해원은 준연의 뜻을 꺾어보려고 준연을 찾아갔어. 해원은 준연에게 자신이 돈을 대 줄 테니 교습소를
다시 차려 보라고 했어. 제발 증류소에 가지 말라고 애원하고 설득했단다. 하지만 준연도 뜻을 굽히지 않았어. 준연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같은 남자로서 해원이 왜 그러는지 이해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해원이
그렇게 애원하고 설득을 해도 준연이 하진의 증류소를 가겠다는 뜻은 증류소의 일보다 다른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랑 똑같다고 생각해. 결국 해원은 큰 소리를 치게 되었고, 해원과 준연은 크게 말다툼을
했단다.
…
준연은 하진의 증류소에 내려가서
일을 하기 시작했어. 일만 한 것이 아니라 준연과 하진은 증류소를 배경으로 악기 연주도 하고 그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려 인기를 끌게 되었단다. 위스키와 듀엣 연주… 이
동영상들이 인기를 끌면서 대중들의 위스키에 대한 관심도 늘어났단다. 하지만 해원이 속은 새까맣게 타
들어갔어.
그렇지.. 아빠가 해원이라면 이쯤에서 끝냈을 것 같구나. 하진이 아직 해원을
좋아하고 남자친구로 생각을 하고 있지만, 이런 상황은 너무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구나. 해원은 이 모든 일의 원인의 제거하려고 했단다.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고 그런 것은 아니야. 해원이 생각하기에 하진의 시골 증류소만 없어지면 될 것 같았어. 증류소야 자신이 다시 지어주면 될 거라 생각했지. 그것도 시골이
아닌 서울 근처에 말이야. 해원은 다음 완전 범죄를 하려고 눈이나 비오는 날에 몰래 가서 증류소만 불태워
없애려고 했단다. 괜히 맑은 날 일을 벌였다가는 증류소 뿐만 아니라 인근에 있는 산과 집까지 다 탈
수 있으니…
하지만 해원이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그런 일을 해봤나. 예상치 못한 일들이 계속 벌어졌지. 눈이
많이 온 날 밤에 몰래 아무도 없는 증류소에 가서 불을 냈. 예상치 못한 증류소 폭발에 해원은 당황했단다. 증류소가 알코올 등 발화물질이 엄청 많았으니 그런 폭발이 있었던 거야. 해원은
당황하여 여기저기 증거물들을 다 떨어뜨리고 간신히 몸만 빠져 나왔단다. 증류소의 폭발과 강한 바람으로
인해 눈이 왔지만, 불은 무섭게 번져나갔단다. 인근 집들과
산이 모두 화마에 휩싸였어. 증거물을 남기고 온 해원은 그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단다. 화마가 다 쓸고 갔으니… 화재로 증류소를 잃어버린 하진은 망연자실하고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어.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 해원은
하진에게 그 증류소가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사랑에 눈에 멀었는데 그 사랑을 잃을까
봐 이성을 잃어버린 모습이 해원의 모습이었어.
…
4.
아빠가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서
이야기를 중간에서 끊는다고 했는데, 이쯤 그만 해야겠구나. 해원과
준연과 하진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해원은 자신이 계획했던 대로 완전범죄가 되었을까? 과연 누가 광인인가? 초반부의 잔잔한 우정과 사랑은 끝으로 갈수록
극단적인 전개가 이어진단다.
사실 소설 제목이 ‘광인’이었기 때문에 앞 부분에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이어질 때도 계속
불안감이 있었단다. 해원과 하진과 준연이 조금씩만 상대방을 이해해 주었다면 소설의 제목을 ‘광인’이라 하지 못했을 텐데 말이야.
지은이 이혁진 님께서 사랑의 극단을 보여주려고 하신 것 같구나. 그 부분은 평범한 삶을
지향하는 아빠로서는 좀 공감이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재미 부분에서는 최고였단다. 이혁진 님의 전작 <사랑의 이해>가 이미 드라마로 만들어졌는데 이 소설 또한 영상화가 되지 않을까 싶구나.
드라마로 영화로 만들어지면 꼭 한번 봐야겠구나.
…
이 책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음악을
하다 보니 음악도 많이 소개되었단다. 아빠가 처음 들어보는 음악들이 대부분이었어. 아래 세 곡은 제목을 적어 두고, 유튜브로 들어보기도 했단다. 좋은 음악들도 알게 되어 좋았어.
‘Chega
de Saudade’
‘Skating
In Central Park’.
‘What
are you doing the rest of your life’
…
아참, 아빠가 이 책에 좋은 문구들이 많아서 소개해 준다고 했지? 아빠가
발췌기를 통해 따로 정리한 것이 있는데 거기를 봐도 되긴 하는데 특히 좋은 구절은 여기에도 세 개 정도 소개해 보련다.
===================
(178-179)
친구와
연인이 다른 것 같지만 진실한 의미일 때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연인이란 내가 이성을 발견한 타인이었다. 친구란 내가 나 자신을 발견한 타인이었다. 친구는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연인은 이성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
===================
(346)
사랑은
인정이고 긍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 죽음에 반항하는 방식이었다.
사랑하고 있을 때, 단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을 열렬히 실감할 때, 죽음은 단지 침묵에 불과해진다. 하진의 연주가 끝났을 때 들였던
그 의심도 두려움도 없고 외로움마저 없는 침묵. 사랑은 환상이나 감상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것 없이도 사랑은 이미 사랑이었고 절실히 필요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만으로, 허기를 채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까. 살아
있다는 걸 실감할 때 죽음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니까. 자식들이 커 간다는 그 실감 속에서
부모들이 다 그런 거지, 한마디로 자신들의 늙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듯. 그 긍정, 인정이 슬프면서도 기쁜 것이듯 사랑도 기쁘고 그래서 슬펐다. 모두, 모든 것이.
===================
===================
(566)
마음이라는
건 세면대 같아요. 거기엔 뭘 붓든 모두 한곳으로 흘러 들어가죠. 우리
자신이라는 그 구멍으로요. 하지만 그 구멍이 이어지는 곳은 결국 하수구, 하수도예요. 썩어 가고 악취를 풍기고 끈적거리고 질척거리는, 토악질 나는 것들밖에 없죠. 거긴 우리한테 묻은 더러운 걸 씻어
내는 데지 우릴 욱여넣어서 더러워지는 데가 아니에요.
===================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제가 왜 이별은 싫어하면서 이별 노래는 좋아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책의 끝 문장: 노래는 끝난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이 막걸리라면 그걸 그린 자화상은, 그나마 볼 만한, 증류식 소주 같은 거고 역사가 보리로 담근 발효주라면 소설은 그걸 증류한 위스키라고 할 수 있을 테죠. 히치콕이라는 영화감독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극(劇)이란 지루한 부분을 오려 낸 인생이다. 영화가 인생을 그대로 옮겨 놓기만 한 거라면 사람들이 왜 그걸 보고 있겠어요? 더럽게 지루한데다 매일 신물나게 보고 겪는 게 그건데요. 저처럼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죠. 창밖의 소리가 아무리 싱그럽고 청량해도 그걸 그대로 옮겨 놓은 건 음악이 아니라는 걸요. 반대로 아무리 비싼 악기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해도 낯설고 기이하기만 한,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감정과 무관한 소리들 역시 음악이 아니죠. 그건 그냥 악기로 만들어 낸 소음일 뿐이니까요. - P8
좋은 사람이란 그 한 사람만 있어도 살 만하다 생각이 드는 사람이죠. 싫은 사람이란 그냥 생각하기도 싫은, 결국엔 우리와 무관한 사람들일 뿐이고요. 제 생각에, 분명한 건 이거예요.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살 수는 있지만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잘, 열심히 살 수는 없어요. 그게 우리가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이유고 그런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싫은 사람에게도 자지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게 밑진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싫은 사람을 만나고 겪어 봐야 좋은 사람이 왜 좋고 어떻게 좋은지 알 수 있으니까요. 또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싫은 사람은 대가고 좋은 사람은 목표죠. 좋은 사람, 싫은 사람이란 글자 수만 같을 뿐 사실 그렇게나 다른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 P27
압도적인 풍경을 볼 때 풍경과 그 풍경을 보고 있는 아주 작은 자신을 함께 지각하게 되는 것처럼, 침묵과 그 침묵을 드는 내가 거기에 있었다. 이전에 준연이 말했던, 음악이 끝나고 달라진다는 침묵이 바로 이런 것임을 나는 실감할 수 있었다. 무음이 아닌, 음악에 빗질이 된 것처럼 정갈하고 가지런한 고요함. 거긴엔 침묵이 주기 마련인 두려움도 의심도 없었다. 오직 파고들 듯 깊숙이 간직되는 환희만이 있었다. 연주회장에서 우리를 포효하듯 환호하게 하고 열렬히 박수치게 만드는 환희. 어쩌면 우리는 이런 침묵을 듣기 위해 음악을 듣는 건지도 몰랐다. - P67
하진의 말대로 그때는 몰랐다. 어렸기 때문에 모르는 건 많고 아는 건 적었지만, 생각은 늘 반대였다. 다 안다고, 내가 아는 걸 사람들은 모른다고 생각했다. 실상은 사람들이 아는 걸 내가 모르는 것이었는데, 뭔가를 안다는 건 나만 안다고 게 아니라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조금 더 안다는 뜻에 불과한데도. - P127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실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준연이 말했다. 꿈과 이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라고요. 현실과 반대라거나 동떨어진 거라고들 생각하지만, 꿈이나 이상이 없다면 현실은 점점 더 시궁창이 될 수밖에 없고 또 현실이 온전하지 않으면 꿈이나 이상도 건강할 수가 없잖아요. 가난하고 못살았기 때문에 다들 희석식 소주밖에 마실 게 없었고 그래서 술이라고 하면 그런 소주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처럼요. 더 나은 건 늘 있어요. 현실에 아직 없기 때문에 꿈이나 이상이라는 망원경으로 볼 수밖에 없을 뿐이죠. - P195
맞아. 배부른 소리야. 하지만 배가 부르니까 해야 하는 소리지. 배가 부르다고 만족할 수 없는 게 우리니까. 인간이란 먹고 살기 위한 존재에 그쳐지지가 않으니까. 우리한텐 좋은 술이 필요해. 좋은 집, 좋은 차, 외식도 하고 드레스도 입어야 돼. 그래야 ‘살았다’가 아니라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으니까, 먹고 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 인간답게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건, 남들보다 더 많이 먹고 마시는 게 아니라 더 좋은 걸 먹고 마실 때니까. 물론 없어도 먹고사는 데아무 지장 없지. 하지만 그것뿐이면 우리가 먹고살기만 하는 존재 같아지는 거야. - P270
이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 흔히 <월광 소나타>라고 하는 곡이에요. 들어 본 적 있어요? 준연이 말하며 비장한 느낌의 셋잇단음표를 연주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유명한 곡이었다. 준연이 나를 보고 말했다. 이건 죽음의 선율이에요. 다가오는 죽음, 피할 수 없는 죽음, 억울하고 비통한 죽음이죠. 제 마음대로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베토벤이 모차르트에게서 빌려 온 선율이에요. 모차르트 오페라에 그렇게 나오거든요. <돈 조반니>에서 기사단장이 살해당할 때 거의 똑 같은 선율이 현악으로 연주되죠. 그리고 베토벤도 이 곡을 쓸 무렵 청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어요. 그런 음악가로서 죽음을 의미했죠. 역시나 다가오고 피할 수 없는, 억울하고 비통한 죽으미요. - P293
아버지가 말했다. 세상만사 다 길이 있는 법이다. 왜냐하면 다들 이렇게 길을, 누가 봐도 아무 쓸 데 없는 길을 뚫어 놓으니까. 이렇게 뚫어야 알뜰살뜰 여기저기서 기름칠해 주는 사람이 생기거든. 시키지 않아도 똥 치워 주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우습지. 크고 빳빳한 기름종이들 살랑살랑 흔들어 주면 다들 혓바닥 내밀 듯 손을 내밀지. 아버지는 나를 봤다. 인간이란 다들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죄 한두 개쯤은 지어 가면서 사는 거다. 어느 자리쯤 올라서면 짓지 않을 도리도 없고, 짓지 않을 이유도 없지. 감당할 수 있으니까. 감당이 되면 죄가 아니니까. 감칠맛이 돌지. 남들 다 하는 거 하면서, 지키라는 거 지켜 가면서 남들 안 볼 때 한번씩 혀를 낼름, 낼름해서 핥아 보는 그맛이 혀에 감겨서 잊히질 않거든. 그럴 때야 사는 거 같으니까, 사는 맛이 그거니까. 남들 못하는 걸 나만 할 때, 남들 모르게 나만 아는 걸 하는, 바로 그때. - P488
무엇을 사는지(購買)가 어떻게 사는지(生活)고 살 수 있는 능력이 살 수 있는 능력이다. 아버지는 톡톡 시가를 떨어 재떨이에 떨어진 재를 시가 끝으로 부쉈다. 그러고는 끄트머리를 세워 내게 보였다. 여기 있는, 요 타고 있는 까만 재, 이게 우리 인간이야. 그 가운데에 빨갛고 뜨거운 불이 세상이지, 불가에서 말하는 아수라. 아버지가 깊게 한 모금을 빨자 빠직거리며 담뱃잎이 타 들어갔다. 가운데가 빨갛게 환해졌다. - P500
사랑의 본연이 그런 것이기 때문에 사랑은 다른 사랑과 비교당하지도 평가당하지도 않았다. 가장 좋은 것, 값비싼 걸 해 주는 게 사랑이 아니니까, 최악을 지워 주고 최악이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 모든 수고를 다해 마지막까지 같이 있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니까, 같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게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의미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일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사람이 된다는 건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 믿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뜻이니까. 그게 늘 하진에게 해 주지 못한 것, 그래서 매번 틀리고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사랑한다면서도 이해하는 만큼만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만큼만 믿으려 했으니까. 그래서 그건 이해도 믿음도 아니었다. 알던 만큼만 아는 건 앎이 아니니까, 모르던 걸 아는 앎이니까. - P65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