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중국사람들은 만주의 조선사람들을 <메기>라고 불렀다. 한사코 물가를 찾아가 논을 일구기 때문에 붙인
별명이었다. 그런 별명을 붙여 놀리는 것은 중국사람들이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중국사람들은 조선사람들이 만주로 건너오는 것을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자기네들의 농토가 줄어들까봐 갖게 된 적대감이었다. 그런데 조선사람들은
밭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저 물 가까운 습지나 저지를 찾아다니며 논을 일구어냈던 것이다. 그러자 밭농사밖에
지을 줄 모르는 중국사람들은 마음이 편안해진 것이었다.
(102)
신세호는 또 신비스러운 변화에 경이감을 느끼며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밤이면 이슬이 내리면서 안개가 끼고, 아침에 해가 뜨면 안개가 걷히는
것은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을 뿐이었다. 그러나 신세호는 그 범상 속에 감추어진 자연의 오묘한 신비와 경이를 갈수록 새롭게 느끼고 있었다. 해의 그 무한한 생명력과 창조력을 새로운 깊이로 생각하게 되고, 만상의
생성과 소멸을 다시금 음미하게 되고, 삶의 소중함과 자연의 고마움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고…… 손수 농사를 짓게 되면서부터 눈과 마음이 더 깊고 넓게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138)
일본관리들이 조선말을 강습받고 조선으로 건너왔고, 그들이
조선말을 익히려고 애쓴다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삼 년 전부터는 함부로 욕을 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관리가 아닌 군인이 더듬거리지도 않고 그렇게 유창하게 조선말을 하는 것을
보고 공허는 새삼스럽게 나라 잃어버린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국경지역이라 특별히 조선말을
잘하는 자들을 골라서 배치했다 하더라도 그 충격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나라를 빼앗긴 세월은 그렇게 해마다
달라져 가며 조선사람들의 마음까지 빼앗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143)
마적떼는 장사꾼들한테만 걱정거리가 아니라 만주땅에 흩어져 사는 모든 동포들을 괴롭히고 위협하는
몹시 흉포한 도둑떼들이었다. 그 마적떼들이 갈수록 불어난다는 것은 왜놈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마적떼들이 동포들의 마을을 기습해서 생명을 살해하고 재산을 약탈하는 것은 그만큼 독립투쟁의
힘을 약화시키고, 따라서 왜놈들을 도와주는 결과가 되는 것이었다.
(183-184)
“나도 무식헌 놈이제만 용석이허고 한고향 동무고
헝께 한마디만 허겄소. 남정네덜이 날마동 땡볕 속이서 일허는 기운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겄소? 하로 세 끄니 밥 지대로 챙겨묵는 디서 나오는 것이요. 아까 밥
한 끄니가 머시가 그리 중허냐고 혔는디, 고것이야 우리겉이 몸띵이 하나 부려감서 묵고 사는 사람덜헌티넌
중허고말고라. 거그서 말허는 것 찬찬이 듣자닝게 이승만 박사가 허는 일언 중허고, 우리겉이 몸띵이 굴리는 일언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말인디, 그 말언
앞뒤가 안 맞는 것이 잘못 되야도 아주 잘못된 말이오. 이승만 박사가 핵교럴 세우고, 잡지럴 내고, 묵고 살고 허는 돈은 다 어디서 나온 것입디여? 하늘서 떨어졌소 땅에서 솟았소? 그 한푼, 한푼이 다 우리 겉은 무식쟁이 농사꾼덜이 사시장철 땡볕 속에서 살가죽이 타들고 뼉다구가 녹아내리게 일혀서 아까운지
몰르고 성금으로 낸 돈이다 그것이오. 막말로 우리가 눈 딱 감고 성금 안 내불먼 판이 어찌 되는지 알기나
허요? 그놈에 핵교고 잡지고 머시고 다 문 닫아걸어야 된다 그것이오.
근디도 이승만 박사가 허는 일만 장허고 우리 겉은 사람이 허는 일언 쥐조도 아닝게……”
방영근은 여기서 멈칫했다. 말을 하다보니 성질이 돋아서 자신도 모르게 상소리가 튀어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방영근은 에라 모르겠다 싶어 내처 말을 해나갔다.
“서방 밥얼 굶겨도 괜찮허다 그런 말인갑는디, 고것만언 어디다가 내놔도 편들 사람 하나또 없구만이라. 이승만 박사라고
편들어 주겄소?”
(186)
그즈음에 이승만은 자신이 펴내는 <태평양> 잡지에 박용만이 이끌고 있는 국민군단을 맹렬히 비난해대고 있었다. 그런
소수의 병력으로 일본 세력을 물리친다는 것은 전혀 가망이 없는 철부지한 짓이며 허황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박용만은
불필요한 일을 시작해 동포들이 피땀 흘려 번 돈으로 비축한 국민회의 경비를 탕진하고 있다. 조선의 독립을
그런 가망없는 짓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먼저 무식한 동포들을 교육시켜 독립할 준비를 해나가는 동시에 대국인 미국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국민군단은 마땅히 해산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87)
그런 이승만의 공격을 받고 박용만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박용만은
국민회의에서 발간하는 <신한국보>를 통해서 이승만의
비방에 맞서고 나섰다. 우리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이 조선백성들이 무식해서인가 아니면 나라의 무력이
약해서인가. 그런 재론의 여지도 없이 나라의 무력이 허약했기 때문이다.
나라의 힘은 왜 약해졌는가. 나라를 다스리는 벼슬아치들이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층층이 부패하고
타락하면서 국고를 탕진하고 가렴주구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동의 엄연한 사실을 두고 망국의 책임을
어찌하여 백성의 무식함으로 돌리려 하는가. 또한 나라를 되찾는 데 있어서 백성이 무식해서 안된다는 말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저 치욕의 을사보호조약 직후부터 전국토에서 불길처럼 일어난 의병들을 보라. 그들 중에 유식한 양반들이 더 많았던가. 무식한 백성들이 더 많았던가. 무식한 백성들이 열 배가 더 많았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며, 끝까지
싸우다 죽어간 사람들도 무식한 백성들이었음을 하늘이 다 아는 바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백성의
무식함을 탓할 것인가. 그리고 또 직시할 바가 있다. 무력을
휘두르는 자들은 무력이 아니고서는 물리칠 수가 없다는 천고의 진리를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왜놈의 무력
앞에 무력으로 맞서지 않고는 나라를 되찾을 그 어떠한 방도도 없다. 무식한 동포들을 교육시켜 가면서
독립을 준비하자고 하나, 교육이란 하루이틀에 되는 것이 아닐 뿐더더,
우리가 교육으로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 동안에 왜놈들은 우리 동포들의 피를 빨아 더욱 강대해질 뿐이며 우리 동포들은 핍박 속에서 갈수로
허약해질 뿐이다. 또한, 우리가 동포들을 교육시켜 모두가
유식해진 10년이고 20년 후에 그때 가서 왜놈들과 학식으로
겨루자고 할 것인가. 물론 교육은 중요하다. 그러나 교육이
조국의 독립을 위한 최선의 방책일 수는 없다. 무력을 양성하면서 동시에 교육을 실시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힘을 빌려 독립을 하겠다 함인데,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허황된 망상인가. 우리와 일본은 원수지간이지만 미국과 일본은 원수지간이 아니며, 우리에게 독립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지만 미국에게 조선의 독립은 강 건너 불일 뿐이다. 미국은 일본과 사이가 나빠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우리에게 약간은 협조를 할지 모르지만, 전적으로 미국의 힘을 빌려 독립을 하겠다 함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몽상일 뿐이다. 그리고 끝으로 밝히는 바는, 국민군단은 훈련소 낙성식을 최종으로
하여 더 이상 동포들의 혈전(血錢)을 모금하지 않게 되었다. 모든 병사들이 이미 확보된 파인애플농장에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훈련받는 노고 속에서 자립을 구축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231)
고무신바람에 들린 것은 특히 여자들이었고, 여자들
중에서도 처녀들이었다. 한 마을에서 고무신을 신은 사람은 한둘에 지나지 않았다. 그 새로 나온 희한한 물건은 값이 너무 비싸 부자가 아니고서는 가질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그 귀한 물건은 그야말로 남자 여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의 관심거리였고 구경거리였다. 그 누구나 고무신을 손에 쥐었다 하면 이리저리 매만져보고, 엎어서
밑바닥을 보고, 고개를 돌려가며 코 안을 들여다보고, 주인의
눈길을 피해 잡아늘여 보고 하는 것이었다. 그 말랑말랑하고 보들보들하고 매끈하게 생긴 고무신을 신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24-325)
늙은 거지는 깨진 바가지를 끌어다가 발 굵은 소금을 손가락끝으로 집어 입에 털어놓고는 어험
큼큼 목청을 다듬었다.
“짜아 시구시구 들어가는디이, 어얼 시구시구 들어간다아 저얼 시구시구 들어간다아, 어절시구 들어간다아
저절시구 들어간다아, 푼파바 푼파바 자리헌다아 푸부품파 자리헌다아, 어허이
작년에 왔든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어절 시구시구 들어간다아 저리절 시구시구 들어간다아, 일자나 한자나 들고나 봐아 일본놈에 시상 되어 10년 세월 다 돼가니, 이자나 한자나 들고나 보니 이 시상이 지옥살이 2천만이 통곡헌다, 삼자나 한자나 들고나 봐야 3천리라 금수강산 토지조사로 묶어놓고, 사자나 한자나 들고나 보니 4년이고 5년이고 땅뺏기에 혈안이라, 오자나 한자나 들고아 봐아, 오지겄다 왜놈덜어 그 맛이 꿀맛이겄다, 푼파바 푼파바 자리헌다아
푸부품과 자리헌다아, 어얼 시구시구 들어간다아 저얼 시구시구 들어간다아, 품바 품바 들어간다아, 육자나 한자나 들고나 봐야 육십 영감 분통터져
감나무에 먹얼 매고, 칠자나 한자나 들고나 보니 칠십 할멈 절통혀서 저수지에 뛰어드네, 팔자나 한자나 들고나 봐아 팔자에 없는 만주살이 떠나는 이 그 누군가, 구자나
한자나 들고나 보니 구만리 장천에 기러기도 슬피 우네, 십자나 한자나 들고나 보세 10년이야 넘겄느냐 왜놈덜아 두고 보자, 어허 품바 자리헌다.”
(339)
수전민족이 왜 부지런하고 끈질긴 기질을 가졌으며 대체로 영리한가? 그건 바로 논농사의 특성과 맞통하고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논농사의 특이한 점을 먼저 파악하면 조센징의 그런 기질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겁니다. 봅시다, 논농사는 밭농사와는 정반대로 물이 없으면 지을 수가 없는
농사입니다. 또한, 농사를 짓기 이전에 농토를 조성할 때부터
논과 밭은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처녀지나 미간지를 논과 밭으로 개간할 때, 밭은 수목을 뽑아내고 잡초뿌리를 캐내고 돌이나 자갈들을 골라내면 바로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논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밭과 똑 같은 과정을 거쳐
개간을 하고 나서도 일은 또 남아 있습니다. 그건 바로 물 때문입니다.
가까운 개울이나 강에서 물을 끌어들일 수 있는 수로를 또 파야 하고, 물을 논에 가두기
위해 논둑을 튼튼하게 쌓아야 하고, 수량을 조절하기 위해 도량을 빼야 합니다. 이 사실만 가지고도 밭 개간에 비해 논 개간이 훨씬 더 힘이 든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농사를 짓게 되면 논농사는 밭농사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일이 많아지게 됩니다. 그것 또한 물 때문입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비가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잠시도 등한히 할 수 없는 것이 수전농사입니다.
왜냐하면 비가 많이 오면 벼가 침수되어 상하고, 비가 안 오면 땅이 메말라 벼들이 고사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가 많이 오면 침수를 막기 위해 자다가도 일어나 논에 나가는 것이 수전농민들입니다. 또, 적기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농민들은 벼가 말라죽지 않게 하려고
들녘에서 며칠씩 밤을 새우며 물을 퍼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홍수가
지지 않고 가뭄이 들지 않은 보통 때에도 벼가 자라는 것에 따라 수량을 조절해 줘야 하기 때문에 농부들은 아침저녁으로 논을 살피며 물꼬를 트고
막고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객토니 모내기니 하는 다른 자세한 것들은 생략하고 이런 점들만 대출 살펴보더라도
논농사가 밭농사보다도 얼마나 더 신경이 쓰이고 힘이 드는 것인지는 농사 경험이 없는 여러분들도 능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