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이에 <한겨레> <조선일보>를 지목해 일제가 <조선일보>를 폐간한 주된 이유는 1938년 공포된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물자절약 및 조선어 말살 차원에 있었다. 이는 폐간사에서 동아 신질서 건설의 성업을 성취하는 데 만의 일이라도 협력하고자 숙야분려(夙夜奮勵)한 것은 사회 일반이 주지하는 사실이라고 밝힌 데서도 <조선일보>가 무슨 항일을 해서 폐간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폐간 보상금으로 <매일신보>와 총독부로부터 각각 20만원과 80만원을 받았다. 당시 일본군 전투기 한대가 10만원이었음을 보면 적지 않은 돈일 알 수 있다고 반박했다.


(53)

1942년 작성된 임시정부의 내부보고서는 미주 동포들이 보내주는 월 1,050달러의 지원금만으로는 300여 명으로 불어난 인원을 감당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간 줄곧 광복군에 대한 통수권을 요구해온 중국 측은 한편으로는 재정지원 등을 내걸고 다른 쪽에서는 병사모집을 하는 광복군 지휘관에게 통행증을 내주지 않는 방식으로 압박을 가해왔다. 결국 1942 4월 임시정부는 광복군 통수권을 중국 측에 넘겨주고 말았다. 그러나 중국 측도 광복군을 제대로 유지할 형편이 못 되자, 1943 2월 임시정부는 정식으로 군 지휘권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중국 측에 하기에 이르렀다.


(62-64)

영국 BBC 2002 3월 방송한 화제작으로 이 부대원들의 생생한 증언과 생체실험을 겪은 중국 현지 피해자들의 소송준비과정 등을 담았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경악할 만한 부분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비견될 가공할 전쟁범죄를 저지른 731부대 요인들이 나치와는 달리 아직도 일본 정계 및 보건 의료계에서 버젓이 핵심세력으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고바야시 로쿠조(일본 국립 방역연구소 소장), 나카구로 히데토시(국방의학대학 총장), 나이토 료이치(녹십자 회장), 기타노 마사지(녹십자 대표이사), 가수가 추이치(트리오-켄우드 회장), 요시무라 히사토(교토 의학대학 총장), 야마나카 모토키(오사카대 의과대학 총장), 오카마토 코조(교토대 의과대학 학장), 다나카 히데오(오사카대 의과대학 학장) 등이 문제의 인물들이다. 특히 731부대의 책임자였던 이시이 시로는 일본이 미군에 항복하자 부대에 남아 있던 포로들을 학살하고 실험용 쥐를 풀어 증거를 인멸했다고 한다. 그는 부대원들에게 비밀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린 뒤 미국이 탐내던 실험 관련 데이터를 넘기는 조건을 면책을 얻어냈다.


(149)

김구와 임시정부는 1943 6월경 루스벨트 대통령이 장제스에게 미영중소 연합국 정상회담을 제의해온 것을 알고, 장제스에게 접근했다. 1943 7 26일 장제스는 김구의 요청에 응해 한국 요인 6명을 비밀리에 공관으로 초빙했다. 참석자는 김구, 조소앙, 김규식, 이청천, 김원봉, 그리고 통역으로 참석한 안원생(안중근의 조카) 등이었다. 이 자리에서 김구는 종전 후 한국의 완전 독립을 주장하고 국제공동관리의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중국 측의 지지와 지원을 요청했다. 장제스는 그러겠노라고 약속을 했고, 바로 이 약속이 카이로회담에서 이행된 것이다.


(163)

역설이다. 다인종 다민족 국가인 미국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국가를 위한 희생자에 대한 예우에 전력을 기울이지만, 단일인종 단일민족 국가인 한국은 정반대다. 그저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식이다. 이름이 높거나 세상의 관심을 끌 만한 계기가 있으면 모든 정성을 다 바치는 것처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누가 너더러 그렇게 하랬어?”라는 식이다. ‘한국인 징용자들의 비극이 과거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67-168)

전쟁 당시 일본 야무구치현 노무보국회 동원부장을 지냈던 요시다 세이지는 나는 한국인 종군 위안부를 강제연행했던 그야말로 노예 사냥꾼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6,000명 정도를 직접 연행했다. 극비의 노무명령서에 따라, 마을에 도착하면 우선 여성 전원을 길로 끌어냈다. 도망치면 목검으로 때렸고 젊고 건강한 여성을 골라 트럭에 실었다. 안고 있던 아기를 잡아떼어 놓고 억지로 끌고 간 적도 있다. 비명을 지르는 젊은 어머니를 때려 쓰러뜨리고 2~3살의 어린이가 울면서 따라오면 애들을 내팽겨쳤다. 이렇게 모은 여성들을 화물열차와 관부연락선에 짐짝처럼 실어 시모노세키에 와 서부군 사령부에 인도하면 군용선박으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각지로 보내졌다. 종군 위안부를 포함해 강제연행 관련 공식기록이나 관계문서는 패전 직후 내무차관 통첩으로 모두 소각처분했다. 황군병사라면 (이런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전후에 누구 하나 종군 위안부 얘기를 하지 않는다.”


(200)

일본에 대해 너그럽고 싶은가? 한국의 반일감정을 경멸하고 싶은가? 역사를 알려고 들지 말아야 한다. 혹 오다가다 들은 게 있더라도 곧 잊어야 한다. 역사를 제대로 알고선 일본에 대해 너그러울 수가 없다. 물론 오늘의 일본인은 가족끼리 때려죽인 오키나와 집단자결 사건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 그러나 직접적인 책임만 없는 것일 뿐, 일본 정부와 우익의 교과서 왜곡에 침묵한다면 스스로 간접적인 책임을 지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일상적 삶에선 지구상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선량한 일본인들의 적극적인 양심회복운동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전개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다.


(236-237)

그러나 그 어느 쪽이건 한국이 미소 두 강대국이 그들 마음대로 갖고 노는 장난감과도 같은 비참한 운명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정작 분단되어야 할 나라는 전범국가인 일본이었건만, 미국의 대소련 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이 분단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일부 학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38도선에서의 미소 양국군의 한반도 분단 점령은 일본 분단 점령의 대용품이 되고 말았다.”


(248)

전후 연합군의 군사법정에서 포로학대 등의 혐의로 처벌받은 B, C급 전범 5,700여 명 가운데는 조선인 148명이 포함돼 있다. 그들 대부분(129)이 반강제적으로 동원된 포로감시원이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 5월 일본 육군은 말레이, 자바 등에서 펼친 남방작전에서 붙잡은 26만 명이 넘는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기 위해 조선에서 3,000명의 포로감시원을 모집했다. 계약기간이 2년이라는 점과 징병으로 끌려가지 않는다는 점이 주요 지원 이유였다.

전쟁이 끝난 뒤 이 조선인들 중 129명이 포로학대를 이유로 전범처리됐고 23명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A급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진 일본은 겨우 7명이었는데도 말이다.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군인도 아닌 군무원 신분이었지만, 전범자로 처리된 비율은 악명높았던 일본 헌병의 처리 비율(4.3퍼센트)과 맞먹을 정도였다. 게다가 가시 노부스케 전 상공대신, 아베 겐키 전 내무대신 등 A급 전범 용의자들은 1948년께 일찌감치 석방됐고, 천황의 전쟁 책임은 불문에 붙인 점을 감안하면 전후 전쟁범죄재판은 한편의 거대한 사기극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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