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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4권 - 개화기편, 러일전쟁에서 한국군 해산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11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강준만 님의
<한국 근대사 산책> 4권의 이야기를 해줄게.
어느덧 이라고 해야 할까, 이제야 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4권이고, 여섯 권 남았단다. 4권의
부제는 <러일전쟁에서 한국군 해산까지>. 러일전쟁은 1904년에서 1905년까지 일어났고, 우리나라 군대 해산이 1907년이니까 2~3년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루고 있겠구나 하고 책을 폈는데 러일전쟁 이전인
1902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단다. 이 시기에는 너희들도 알고 있는 을사늑약 등 참 많은
일들이 벌어졌단다. 참 많은 일들이 벌어지긴 했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가슴 아픈 일들이 대부분이라서 읽다 보면 답답함과 억울함과 분노가 심장을 때리더구나. 그럼, 4권에서 다룬 이야기를 짧게 전달해 볼게.
…
1.
1900년대 초반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를 식민지를 만들려고 하는 외국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단다. 나라의 재정은 점점 안 좋아지는 상황이었지.
그럼에도 1902년 고종이 즉위한 지 40년이자
태어난 지 50년은 기념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조정은 아주 성대하게 기념 잔치를 했단다. 이런 형식적인 것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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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나라는 외채 때문에 빚더미에
올라 오늘내일 하는 지경인데, 엄청난 예산을 들여 잔치를 벌이고 외국 사신을 초청하고, 그 때문에 새로 영빈관을 짓고, 광화문 네거리에 비각을 세웠다. 광화문 비각에는 이런 글이 새겨 있다. 신민의 간절한 소망에 부응하여
원구(圓丘)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제위에 오른 뒤 천하를
소유할 칭호를 대한이라고 하고 연호를 광무라 하였다 이 얼마나 좋은 글귀인가. 대한이 천하를 소유하고
무(武)에 빛났다 하여 연호를 광무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글귀와는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1897년에 조선왕조가
허울 좋은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겉으로는 면모를 일신한 것처럼 보였으나 6년 만에 1902년(광무 6년) 마침내 외채 위기를 맞게 되고 2년 뒤 러일전쟁 발발, 그리고 을사조약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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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19세기 후반부터 조선인들이 간도로 많이 이전하게 되는데, 황무지 같은
곳을 개간하여 거주하게 되었단다. 국경이 불분명한지라 청과 간도 문제로 갈등을 빚기도 해서 1902년 이범윤이 간도관찰사로 파견되기도 했어.
…
나라 밖 사정도 좋지 않게 흘러갔어. 1902년 영국과 일본은 영일동맹을 맺고 영국은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우위를 인정해 주고, 일본은 중국에서의 영국의 우위를 인정해 주었단다. 영일 동맹의 소식이
전해지자 고종이 충격을 받고, 대한제국을 어느 나라에도 얽매이지 않게 하려는 중립화 노력을 했대. 하지만 중립국 선언을 하기에는 당시 대한제국은 힘이 너무 약했어.
…
1904년 2월 일본이
뤼순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이 시작되었어. 당시 러시아의 국방력이 일본보다
월등했기 때문에 일본의 무모한 짓을 벌인 것으로 보였지만, 러시아 함대가 이곳까지 오기에는 너무 멀었어. 제물포 해전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을 기점으로 뤼순을 점령하는 등 러시아 자신들이 밀리는 형세로 인해 충격을
받았어.
사실 미국이 뒤에서 몰래 일본을 도와주고 있었단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는 내부 사정도 좋지 않았어. 1905년 1월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피의 일요일이라는 유혈사태가 벌어지면서 러시아 군의 사기가 떨어졌단다. 발트해에 있던 러시아 함대가 우리나라 근해까지 왔지만, 군비로 부족하고
사기도 떨어지고 만반의 준비를 했던 일본을 이길 수 없었단다. 이 이야기는 몇 달 전에 <썬킴의 세계사 완전 정복>을 읽고 이야기해주었는데 기억
나지?
하지만 일본도 피해가 컸다고 하더구나. 25만여 명이 죽었다고 하니… 이 때 질병으로도 고생을 했는데, 새로 개발한 배탈설사약이 잘 들어서 러시아를 이기는데 도움이 되었다고들 하는데, 러시아를 정복시킨 약이라는 뜻의 정로환(征露丸)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 조약을 맺게 되는데, 대한제국을 일본에 넘긴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가쓰라와 태프트가 만나 밀약을 맺었는데 일본은 대한제국을, 미국은
필리핀을 통치하기로 한 밀약이란다. 나쁜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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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2007년 8월 한승동은 “우리는 아직도 걸핏하면 ‘동아시아 안정’을 들먹이는 가쓰라,
태프트들이 주도권을 쥔 세계에 살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당시의 망언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가쓰라는 대한제국 정부의 잘못된
행태가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폈다. 그는 한국 정부를 방치해둘 경우 또 다시
타국과 조약을 맺어 일본을 전쟁에 말려들게 할 것이니, 일본은 한국 정부가 다시는 다른 외국과의 전쟁을
일본에 강요하는 조약을 맺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궤변을 늘어놨다. 태프트는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것이 동아시아 안정에 직접 공헌하는 것이라며 맞장구쳤다. 사실 태프트는 가쓰라가 그런 주장을 읊조리기
전에 먼저 필리핀에서 일본의 유일한 이익은 자신의 견해로는 미국과 같은 강력하고도 우호적인 국가에 의해 필리핀이 통치되는 데 있으며, 이 군도가 자치에 부적합한 원주민의 잘못된 정치 아래 놓이거나 비우호적인 몇몇 열강의 수중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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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러일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러일전쟁의 물자를 대기 위해서 일본은 1904년 2월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한반도 내에서 병참기지를 사용하고 자원을 징발해 갔단다. 1904년 8월에는 한일협정서를 강제로 맺었는데, 대한제국이 외교 업무를 진행할 때 사전에 일본에 이야기하고 협의를 해야 한다는 굴욕적인 내용이었단다. 을사늑약 이전에 이미 국운은 다 저물었던 것 같구나. 이런 소식들은
의병과 애국지사들의 피를 들끓게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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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영국인 베텔 사장과 양기탁 총무가 함께 <대한매일신보>라는 신문을 창간했어. 영자 신문으로 기획해서 일본의 부당한 침략 행위를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노력했단다. 그랬다가 나중에는 국영문 혼용으로 바뀌었어. 박은식, 신채호 등이 이 신문을 통해서 활동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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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고종은 정치범을 석방했는데 이때 이승만도 석방되었대. 이승만은 석방된 뒤에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는구나.
1902년 하와이로 이민을 가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그 이후로도 하와이 이민은 계속 늘어나서 1902년부터 1905년까지
7226명이 갔대. 그리고 1905년 4월에는 1031명이 멕시코로도 이민을 갔대. 돈을 잘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서 갔는데 가는 동안에 400여
명이 사망하고, 멕시코에 가서는 반노예 생활을 했다는구나. 정말
안타까운 역사가 아닐 수 없구나.
3.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조선 침략에 거칠 것이 없었단다. 앞서 이야기했던 포츠머스 조약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했으니 말이야.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늑약을 주도했는데, 고종을 협박하여 도장을 찍으라고 했으나, 고종은 마지막 자존심인지 책임을 떠 넘긴 것인지, 대신들에게 위임을
하겠다고 자리를 떴어. 그리고 을사5적으로 유명한 대신들이
도장을 찍음으로써 을사늑약이 강제로 맺어졌단다.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이들이 을사
5적이란다. 잊지 말아야지. 이 중에 이근택의
집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해주었단다. 이근택의 하인들의 온 백성들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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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160)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퇴궐한 이근택은 집안 사람들을
불러모아놓고 조약체결 광경을 설명하면서 ‘내가 오늘 을사5조약에
찬성을 했으니 이제 권위와 봉록이 종신(終身)토록 혁혁(赫赫)할거요’라고 자랑하였다. 순간 부엌에서 식칼로 도마를 후려치는 소리가 나더니 한 계집종이 마당으로 뛰쳐나오며 ‘이 집 주인놈이 저렇게 흉악한 역적인 줄도 모르고 몇 년간 이 집 밥을 먹었으니 이 치욕을 어떻게 씻으리오’라고 호통을 치고 나서 그 길로 집을 나가버렸다. 계집종에 이어 오랫동안
같이 지내오던 침모(針母)도 집을 나가버렸다. 조약체결 이듬해 2월 이근택은 취침 중 자객들의 습격을 받고 13군데나 찔리는 중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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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나서, 열강들은 하나 둘 우리나라와 외교를 단절했단다. 일본을 인정해준다는
거지… 열 받는구나.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했단다. 헐버트라는 사람은 고종의 밀명을 받고 워싱턴에 가서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했었고, 민영환이 추가로 미국에 파견하여 우리나라 조정의 입장을 이야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단다. 프랑스의 프랑시스 레이라는 법학자도 한국 정부의 측의 동의 표시에 결함이 있고, 일본 측이 한국에 대해 확약하였던 보장 의무의 위반이라는 이유로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했다고 하는구나.
국내에서도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글을 황성신문에 실어 부당함을 주장했고, 민영환은 자살로써
부당함을 주장하였단다. 민영환 이후 연쇄적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대. 이 일로 민영환은 전국적인 영웅이 되었는데, 민영환이 나라에 충성한
것이 아니라 고종에 충성한 것 한뿐이라고 축소 해석하는 의견도 있다는구나. 당시 <대한매일신보>에서 민영환을 영웅화한 것이라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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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이후 일본은 한성부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초대 총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을 했어. 우리나라에서는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서 1906년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민 평화 회의에 고종의 밀서를 보내기도 했지만, 노력에
그치고 성과는 얻지 못했단다. 외교권을 빼앗겼으니 나라 전체를 빼앗기는 것도 시간 문제.. 지식인들 사이에서 교육을 통해서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생각들을 가졌어. 그래서
사립 학교들이 많이 생기기 시작했고, 대한자강회, 서우학회, 한북흥학회 등 학회들도 많이 생겨났다고 하는구나.
한편 을사늑약 이후 의병의 활동들도 더 활발해졌는데,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이 유명하단다. 최익현은
체포되어 쓰시마 섬으로 끌려갔는데 그곳에 단식을 하다가 돌아가셨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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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에는 빼앗긴 나라를 돈으로 다시 얻어오자는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에서 시작되었단다. 대구에 살고 계시던 갑부 서상돈이라는 사람이 시작했는데,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대. 을사늑약 이후 고종이 일본에 협조하지 않고,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려고 하자 일본은 고종에게 퇴위 압력을 계속해서 넣게 되고, 1907년 9월 결국 고종은 왕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단다. 그리고 순종이 즉위하게 되는데, 조선의 마지막 왕이란다. 일본은 나라 빼앗기 절차를 하나씩 진행을 했는데 그 중에 군대로 해산시켜 버렸단다. 이제는 우리나라는 군대가 없는 나라가 되어버렸단다. 군대가 없는
나라를 나라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4.
이 책에서는 서양인들이 바라본 조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실어주었는데, 한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알려 줄게. 서양인의 눈에 비친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징 중에 호기심이란 것이 있었다는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많이 궁금해하고 호기심을
갖고 있다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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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95)
런던은 1904년 3월 12일자
일기에서는 한국인의 왕성한 호기심을 지적했다.
“한국인의 특성 가운데 비능률적인
점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두드러진 특성은 호기심이다. 그들은 ‘기웃거리는
것’을 좋아한다. 한국말로는 ‘구경’이라고 한다. 한국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는 우리 서양 사람들에겐 일종의 연극관람이며
회의참석이며 강론경청이며 경마구경이며 동물원 나들이며 일종의 산책과도 같은, 그러니까 그 외에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의 아주 큰 이점은 값이 싸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는 최고의 즐거움이다. 아주 사소한 어떤 사건이라 할지라도 구경거리에 해당되므로 몇 시간이 걸려도 ‘기웃거리느라고’ 서 있거나 구부리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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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학창시절에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이 <혈의 누>라고 배웠단다.
요즘도 그렇게 가르치는지 모르겠지만, 이인직의 <혈의
누>는 논란이 많은 소설이라고 하더구나. 일본 군인을
미화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말이야. 아빠도 그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지 몰랐는데, 알고 나니 참 부끄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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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254)
“저는 왜 자꾸 그런 소설이 시험에
나는지 모르겠어요. 참 부끄럽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혈의 누>를 보면 평양성 안에 살던 김옥련이라는 처녀의
어머니 최 씨 부인이 청일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시내를 헤매다가 어떤 남자한테 겁탈당하려는 찰나에 일본 헌병이 이 부인을 구해주는 내용이 나옵니다. 소설을 그냥 읽으면 아, 참 재미있다,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여자가 구해졌구나 하고 박수를 치겠지요. 그런데
그것은 다 의도된 내용이에요. 왜 다른 사람도 많은데 하필 일본 헌병이 구해주느냐 말입니다. 이것은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무장해제시키는 거예요. 그 다음에 그
딸 김옥련이 어머니, 아버지, 가족을 다 잃고 헤맬 때 이를
구출해주는 사람도 역시 일본 군의관입니다. 일본 군의관이 데려다 친딸처럼 잘 대해줍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일본 군의관이 데려갔으면 첩으로 두었겠지 친딸처럼 대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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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박에스더라는 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마치려고
한다. 이름은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어떤 일을 했는지
말 모르는 분이었어. 본명은 김점동이고, 선교들의 도움으로
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노동자 박씨와 결혼을 해서 미국식으로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되었대. 남편은 막노동을 하면서 외조를 했지만, 그만 일찍 돌아가시고 박에스더는
의사가 되어 국내로 돌아오셨어.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셨지. 박
에스더는 귀국해서 가난한 이들을 치료했는데 10달 동안 3000명의
환자를 진료하셨대. 그렇게 과로를 하셔서 그만 병에 생겨서 34살의
젊은 나이에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대…
정말 가슴 아픈 일들이 많았던 시절이구나.
….
자, 여기까지가 <한국 근대사 산책> 4권의 이야기란다. 아빠가 중간중간 많이 빼먹고 이야기를 해서 역사의 흐름이 잘 이어지지 않은 것 같은데 이해해 주길 바라고… 5권을 읽게 되면 또 이야기해줄게.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점점 더 가중되는 외세의 지배하에서 대한제국의 외부대신은
있으나마나 한 자리였다.
책의 끝 문장: 먼 훗날 세계에서 가장 살벌한 경쟁체제를 갖게 되는
한국의 대학입시 전쟁은 바로 그런 교육구국론을 외쳐야 했던 세월이 너무도 길었단 탓에 한(恨)으로 유전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그(김옥균)는 우선 조선의 불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일찍 들으니,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에 왔다 가면 반드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조선은 산천이 비록 아름다우나 사람이 적어서 부강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도 사람과 짐승의 똥오줌이 길에 가득하니 이것이 더 두려운 일이다’라고 한다. 이것이 어찌 차마 들을 말인가? 우리나라는 관청에서부터 민가의 마당에 이르기까지 물이 번지고 도랑이 막혀서, 냄새가 사람을 핍박하여 코를 막아도 견디기 어려움의 탄식이 있으니, 실로 외국의 조소를 받을 일이다." - P81
을사늑약의 부당성은 조약 체결 즉시 제기됐다. ‘을사늑약이 완전히 무효’라는 첫 번째 주장은 1906년 프랑스 파리대학교 법과대학 교수이며 국제법학자인 프랑시스 레이(Francis Rey)의 <대한제국의 국제법적 지위>라는 논문이었다. 레이는 두 가지 문제를 지적했는데, 하나는 한국 정부 측의 동의 표시의 결함, 다른 하나는 일본 측이 한국에 대해서 확약하였던 보장 의무의 위반이었다. 레이의 주장은 1927년 미국 국제법학회가 하버드대학교에 국제법 법전화작업을 의뢰하여 1935년에 조약법을 정리, 공포하게 되었을 때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 P165
1907년 1월 29일, 대구지역의 갑부 서상돈(1851~1913)이 지역 유지들 모임인 ‘문회’에서 "나랏빚을 갚아 국권회복을 도모하자"며 즉석에서 800원을 내놨다. 이에 인쇄소인 광문사 김광제 사장도 석달치 담백값 60전과 의연금 10원(당시 80kg들이 쌀 한 가마 6원)을 선뜻 내놨으며 모임에 참석했던 다른 회원들도 동참해 이날 하루 만에 2000원이 모였다. 그해 2월 21일, 대구 시내 북후정(현 시민회관)에서 수천 명이 모인 군민대회가 열렸다. - P283
이와 관련해 노주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제 정세에 어두워 러일 비밀협상이 진행 중인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고종은 니콜라이 2세와 러시아의 변함없는 우정만 믿고 3인의 밀사를 파견했던 것이다. 결국 밀사들은 황제접견은커녕 외무장관도 만나보지 못했다. …… 지금까지 러시아가 적극 후원한 헤이그 밀사 파견이 일본의 집요한 방해공작에 의해 무산됐다는 학설과는 달리 헤이그 밀사 사건은 대한제국과 만주, 몽골을 맞바꿔친 러시아의 냉혹한 국제외교의 부산물이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 P303
이승원은 "’피’를 통해야만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시대였다. 피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피를 흘리느냐 마느냐가 중요했고, 그 흘린 피를 머금고 세상은 격변하기 시작한 것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은 피바람의 회오리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선생들이 학생들 앞에서 솔선하여 단지를 하고, 그 피로 혈서를 썼다. 학생들은 선생의 뒤를 따라 단지의 대열에 합류했다. 일본 헌병들은 학교를 예의 주시하며 감시했고, 단지를 한 학생을 의병 관련과 내란선동죄로 잡아들였다. 그러나 한 번 흩뿌려진 피는 그칠 줄 몰랐다. 학생들은 계속해서 단지동맹을 결성했고, 그들이 흘린 피가 전국을 붉게 물들였다."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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